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자 전 세계 언론은 초기에는 처참한 상황을 구체적이고 집중적으로 보도했지만, 장기화된 이후부터는 전황의 새로운 소식을 단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갈등, 특히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겪어야 했고 감내해야 했던 갈등은 역사가 깊다. 최초로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 소련(소비에트 연합)을 수립한 러시아와의 관계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특수성도 존재한다.
『루스터 하우스』는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역사·문화·사회 그리고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특성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 책은 외고조부모부터 저자까지 이어져 오는 4대 가족사와 볼셰비키 혁명부터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 독립한 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우크라이나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즉 100여 년에 걸친 역사가 마치 씨줄과 날줄 같은 미시사와 현대사에 절묘하게 교차하며 우크라이나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언론의 보도에서 볼 수 없는 과거와 현재가 점철된 우크라이나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빅토리아 빌렘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러시아 국적의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에는 소련의 제도권 교육체제에서 학교를 다녔다가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에는 10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해서 프리랜서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크라이나”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국적의 정체성은 모호했다.
하지만 2022년 전쟁의 전초전이 된 2014년 러시아의 크름 반도 침공을 목도하면서,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시골마을에서 보냈던 아련하게만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과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끈끈한 줄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저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렌티나 외할머니가 여전히 터를 잡고 체리 과수원을 일구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시골마을로 무작정 찾아간다. 단순히 할머니에 대한 염려, 과거 시절의 아련한 향수로 비롯된 귀향은 외증조할아버지의 일기를 펼쳐보다가 뜻밖의 증거를 발견하면서 흥미롭고 놀라운 일들로 이어진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라진 올곧은 사회주의자, 니코딤
우크라이나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어느 가족의 비밀이 펼쳐진다!
여느 가정과 다르게 저자는 아샤와 세르히 외증조부모를 “두 번째 부모”라고 부를 만큼 돈독한 애정을 품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시 부근의 시골마을 베레에 있는 외증조부모의 집에서 항상 여름을 보냈던 저자에게 아샤와 세르히는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볼셰비키 혁명 때부터 사회주의 정권을 지지하며 적위대로 활동하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다리를 잃은 세르히 증조부는 가정적이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성인이 되어 시골마을 집을 찾아온 저자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증조부가 남긴 낡은 일기장을 우연찮게 읽다가 ‘니코딤 형. 자유로운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우다가 1930년대에 실종’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를 발견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을 더듬어 증조부가 니코딤이라는 형에 대해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과 가족 얘기만 나오면 화제를 돌리거나 회피하려고만 한 모습을 떠올린다.
어머니와 이모에게 ‘니코딤’이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 물어봤지만 시원찮은 대답을 듣지 못한 저자는 발렌티나 외할머니에게 물어보지만 돌아온 건 뜻 모를 싸늘한 핀잔이다. 무엇인가 심상찮은 내막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을 한 저자는 니코딤의 감춰진 행방과 인생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자신의 외고조부모 대에서부터 얽히고설킨 가족사의 미스터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20세기 우크라이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홀로도모르(대기근. 1932~33년), 2차 세계대전의 피해,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한 정치적 탄압, 전체주의 정권의 부정부패,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불안정한 상황 등 100년 넘도록 굽이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사회주의체제의 족쇄에서 벗어났지만 오랜 시절부터 KGB(소련 시절의 국가보안위원회) 소속 건물로 사람을 감금하고 고문을 한 ‘루스터 하우스’의 외관에 두려움을 떠는 보통 시민들의 모습에서 극복해야 할 과거의 잔재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크라이나의 전통 자수 ‘루슈니크’의 기술을 여러 대에 걸쳐 이어나가 유네스코 무형 문화재에 등재시킨 장인들의 모습에서 미래를 향한 동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꾸준히 친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러시아인 큰아버지와의 관계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러시아 편에서 푸틴을 옹호하는 큰아버지의 태도를 저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코딤의 삶을 쫓아가면서 저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이해하고 우크라이나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춘다. 그리고 밝혀낸 진실 앞에서 저자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게 된다. 저자는 트라우마처럼 남은 갈등과 상처도 진실을 밝혀내면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