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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4)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① 삼랑진 유적지
2020년 11월 08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출행
다시 삼랑진(三浪津)
앞서 남강수계(南江水系)의 함양, 산청, 진주, 함안 등 유서 깊은 4개 고을을 탐방하고, 이제 다시 낙동강(洛東江)으로 돌아왔다. 지난 11월 3일 벗들과 함께 ‘카니발’을 타고 지나갔던 구간을 ‘다시 두 발로 걷기 위해’ 삼랑진(三浪津)으로 온 것이다. 삼랑진은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지방의 소읍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삼랑진은 내륙으로 통하는 남도 수운(水運)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남해의 해산물과 인근의 농산물이 모이고 내륙으로 운송되는 곳이었다. 특히 부산-삼랑진-사문진-왜관-상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물길을 잇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20세기 들어, 일제 강점기를 통해 경부선(京釜線) 철로가 가설되고 그 뒤에 광주-진주에서 삼랑진까지 이어지는 경전선(慶全線)이 연결되면서 수운의 중심지에서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 하루는, 삼랑진의 유적지를 탐방하기 위한 여정이다. 특히 삼랑진의 주산인 만어산(萬魚山)의 주요 유적지를 탐방한다. 거기 만어산(萬魚山)에는 천 년 고찰 만어사(萬魚寺)가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묘소가 있다. 그리고 내일은 삼랑진을 출발하여 낙동강 물길 따라 양산시 물금읍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그리고 이어서 양산—부산 구포—사상—사하—낙동강하구둑(을숙도)—다대포—몰운대까지 ‘1300리 낙동강 대장정’의 막바지 여정이 계속될 것이다.
삼랑진 만어산(萬魚山)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에는 만어산(萬魚山)이 있다. 삼랑진읍의 북쪽, 삼랑진읍 우곡리와 용전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만어산의 남쪽 산곡에서 발원하여 우곡리를 경유하여 내려오는 우곡천이 삼랑진 동쪽 검세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되고, 산의 북쪽 용전리에서 발원하여 미전리를 경유하여 삼랑진의 샛강으로 흘러드는 미전천이 있다.
만어산은 동쪽의 구천산—금오산—천태산과 함께 산줄기를 이루어, 삼랑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산줄기는 밀양강과 원동천 사이의 지역에 방대한 산군을 이룬다. 소위 영축지맥으로 일컬어지는 이 산맥은 양산 통도사 북쪽에 위치한 영축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함박등-시살등-오룡산-염수봉-능걸산을 경유하여 원동의 매봉산을 지나 금오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간 산줄기 끝에 만어산이 자리하고 있다. (금오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산줄기에는 천태산이 있다.) 그리고 만어산은 그 산줄기가 서북쭉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밀양강을 만나 그 맥을 다한다.
해발 670.4m의 만어산은 삼랑진의 주산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의 영역이 방대하고 유서 깊은 유적이 있다. 특히 만어산은 만어사(萬魚寺)라는 절이 있어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다. 만어사는 사찰 주변의 암괴류(巖塊流, Block Stream)가 발달해 있는데, 그 바위의 덩어리를 ‘물고기’로 여긴 불교적 신앙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정상부로부터 해발 500m까지는 경사가 25°를 넘는 급경사를 이루며, 해발 300m에 이르면 경사는 5°정도로 약화된다. 이러한 경사에 대부분 암괴류(巖塊流)가 드러나 있어, 그 존재에 대해 설명되는데, 암괴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섬록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암괴류(巖塊流)는 현재의 기후 환경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지난 빙하기(氷河期) 당시 강화된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한 바에 따르면 산정상부에 노출된 바위는 약 6만 5천 년 전에 그리고 사찰 주변의 암괴는 적어도 3만 8천 년 전부터 지상에 노출되어 있음이 보고되었다.
밀양의 3대 신비(神秘)
밀양(密陽)에는 3가지의 신비로운 명소(名所)가 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천황산 ‘얼음골’(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땀이 난다는 비석 ‘표충비’(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그리고 만 마리의 물고기가 돌로 변해 불도를 닦고 있다는 절 ‘만어사’(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가 바로 그것이다. 신비로운 현상과 이야기는 ‘은밀한 빛’, 즉 ‘밀양(密陽)’이라는 이름처럼 이 고장을 비밀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어사(萬魚寺)는 ‘밀양 3대 신비’ 중 하나이다.
만어사 가는 길
삼랑진의 문화유적은 만어사와 만어사 삼층석탑, 용전리 도요지, 검세리 작원관지, 안태리 부암(父庵), 숭진리에 삼층석탑과 왕이 만어사에 불공을 하러 갈 때 쉬었다는 왕당이 있다.
삼랑진역에서 만어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만어산까지는 약 8km이다. 만어사 입구의 용전마을까지는 2차선 포장된 도로,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으나 ‘두 발로 걷는 낙동강 종주’의 취지를 살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다녀오기로 했다. 오전 10시, 삼랑진역 앞에서 출발했다. 길 건너 삼랑진초등학교 앞을 지나, 차가 다니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 파인밸리아파트—무곡마을회관—율동리(삼거리)를 경유하여 우곡리 마을입구 삼거리에서 좌측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율동리 삼거리에서 좌측의 길로 접어들어가 언덕 길을 넘어가면 천주교 순교자 김범우 묘소로 들어가는 길이다. 김범우 묘소는 만어사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탐방할 예정이다.)
우곡리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부터 만어산 산속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깊은 산의 숲속으로 난 도로 맑은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만추의 산속을 조용히 걸었다. 간간이 승용차가 오가기도 한다. 만어사는 산의 정상 가까이에 있으므로 포장도로지만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결코 짧지 않는 길, 조용한 풍취에 젖어 걷고 또 걸어 올라갔다. 산굽이를 돌아가기도 하면서 오래도록 걸었다.
오전 11시 40분, 용전리 산중마을에 이르렀다. 용전리에서 우회전하는 길을 따라가니 만어사 비포장 산길이 나왔다. 삼랑진역에서 만어산 용전마을까지는 2차선 포장도로이고 거기에서 만어사까지는 비포장 임도이다. 그런데 용전마을 주차장에서 바로 질러가는 산책로가 있어 그대로 산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만어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대한 돌밭이 나온다. 이른바 만어산 암괴류(巖塊流)이다.
만어산 암괴류(巖塊流, Block Stream)
만어산 암괴류는 만어산 정상 부근 산비탈에서 바윗덩어리들이 무리지어 강물처럼 흐르다가 멈춰선 암석지대이다. ‘돌강’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만어산 미륵전 아래 너비 100m, 길이 500m 규모이다.
암괴류(巖塊流)는 땅 밑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이 땅위로 올라와 팽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틈이 생기고 이 틈으로 풍화와 침식이 진행되면서 만들어진 바윗덩어리들이다. 비탈을 따라 계곡 아래로 서서히 이동하다가 빙하기가 끝나면서 그 자리에 멈췄고, 빗물과 계곡물이 모래 등이 씻겨 내려가고 바위만 남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의 풍화작용으로 표면이 마모되기도 했다.
약 3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어산 암괴류(巖塊流)는 섬록암, 반려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형태는 둥글고 거무스름하다.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하여 경석(磬石), 혹은 종석(鐘石)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화강암의 성분 차이에 따른 현상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된 만어산 암괴류(巖塊流)는 독특한 경관을 지닌 자연유산(自然遺産)이자 한반도 지질(地質)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학술자료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암괴류로는 달성의 비슬산 암괴류(천연기념물 제435호)와 부산 금정산 암괴류 등이 있다. 한편 만어산 경석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밀양 남명리 얼음골, 땀 흘리는 표충비와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불린다.
천 년 고찰 만어사(萬魚寺)
만어산 암괴류 만어석에 얽힌 전설
비교적 높은 산록에 위치한 만어산 암괴류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의 하나, 동해 용왕(龍王)의 옛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신통한 스님의 조언대로 길을 떠나자 수많은 물고기 떼가 뒤를 따랐다. 이때 왕자가 머물러 쉰 곳이 만어산이었는데 왕자는 그 뒤 미륵불이 되었으며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 물고기들이 변해서 된 돌이라고 하여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부른다.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되었다는 미륵바위는 풍화 때 부서지지 않고 남을 돌알[核石]이다. — 미륵전(彌勒殿)에 있는 ‘미륵바위’은 용왕의 아들이 미륵(彌勒)으로 환신한 것이고 그 앞에 만어(석)은 용왕을 아들을 따라온 물고기들이 미륵불(바위)를 항하여 기도하는 형상이다.
어산불영(魚山佛影)
신비로운 전설과 만어산 운해
만어사 암괴류는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 따라 이야기가 많다. 만어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일제히 머리를 산 정상으로 향하여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나오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毒龍) 한 마리와 이곳에 사는 다섯 나찰녀(羅刹女, 惡鬼)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수로왕(首露王)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소리를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는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으로 인한 감화로 인해 수많은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만어사(萬魚寺)’.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법당 앞 널찍한 너덜지대에는 물고기 떼가 변한 돌더미를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고 한다.
만어사는 고려말 일연선사(一然禪師)도 이 절을 순례하며 ‘영험(靈驗)한 명찰’이라고 일컬을 만큼 이름난 사찰이다. 또한 새벽녘이나 봄비 내리는 날에는 만어사 주변에 피어오르는 운해(雲海)가 천지를 뒤덮어 신비로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만어사(萬魚寺)
만어사는 삼랑진 북쪽 만어산(670m) 정상 가까이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만어사(萬魚寺)는 기원 후 46년(수로왕 5)에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사찰이다.
만어사에는 대웅전(大雄殿)·미륵전(彌勒殿)·삼성각(三聖閣)·요사채·객사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만어사삼층석탑(萬魚寺三層石塔)'이 있다. 이 석탑은 1181년의 중창 때 건립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견고하게 정제된 탑이다. 또, 산 위에 있는 수곽(水廓)의 물줄기는 매우 풍부한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씻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만어사(萬魚寺) 삼층석탑
밀양 만어사 삼층석탑은 고려 중기의 석탑으로 만어사를 지을 때 함께 세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三國遺事)』‘어산불영(魚山佛影)’의 기록과 탑의 양식(樣式)으로 보아 1181년(명종 11)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어사 삼층석탑 뒤편의 넓은 터가 법당 자리였음이 확인되면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보물 4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에 흔히 나타난다. 지대석(地臺石)은 4장으로 짜고, 2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마련하여 면석(面石)을 받쳤으며, 면석도 4장이다. 갑석은 2장이며 얇고 그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屋蓋)가 모두 한 돌로 되어 있으며,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히다. 탑신에는 각 층마다 우주형이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형(寶珠形) 석재가 놓여 있으나 후에 만든 것이다.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전체적으로 안정적 균형을 보여주는 우수한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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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 묘소를 찾아서
‘만어사 탐방’을 마치고, 산사로 올라가던 산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오늘의 두 번째 여정은 ‘김범우 묘소’를 탐방하는 것이다. 김범우 묘소는 마침 만어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삼랑진역으로 내려가는 길의 중간쯤에서 우회하여 들어갈 수가 있다. 김범우는 천주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올 때 고난(苦難)을 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그를 ‘한국 천주교의 최초의 순교자’로 규정하고 있다.
내가 김범우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울 명동에 소재한 계성여고에 재직하면서였다. 1979년부터 33년간 재직했던 계성은 명동대성당 구역 안에 있었고, 그 명동대성당이 바로 당시 ‘명레방(明禮方)’ 김범우의 집터를 중심으로 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1982년 9월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 명동성당 구역 안에 살면서 그 당시에는 초기의 천주교 신자로 희생된 ‘김범우’라는 이름만 들었지 자세한 생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낙동강 종주 여정—정확히 지난 11월 3일 카니발 여정—에서 삼랑진을 지나며, 한양의 명례방 김범우가 가혹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이곳 삼랑진으로 유배를 와서 처절하게 죽었으며, 그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삼랑진에서 다시 ‘두 발로 걷기’를 시작하면서, 만어산에 있는 유서 깊은 ‘만어사 탐방’과 함께 꼭 ‘김범우 묘소 참배’를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김범우 묘소로 가는 길
만어사로 올라가던 포장도로의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멀었지만 내리막길이어서 조용한 산길, 여유 있는 발걸음이었다. 신비로운 풍경과 이야기를 간직한 만어사를 생각하며 30여 분 동안의 가뿐하게 걸어서 내려 왔다. 우곡리 마을 입구의 삼거리를 지나 들판의 한 가운데로 난 포장도로 따라 걷는다. 율동리 갈림길에서 우측의 도로를 따라 오른다.
완만한 오르막의 포장도로이다. 언덕길을 넘어가니 삼거리가 나왔다. 미전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사기장길로 올라가는 길이다. 삼거리 좌우에 ‘JK중공업’과 ‘재우유지’ 공장 건물이 있다. 그리고 길 가장자리에 ‘김범우 묘소’ 입간판과 빗돌이 있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난 사기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갈림길, 김범우 묘소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가리킨 대로 완만한 경사의 깔끔한 일차선의 포장도로를 따라 산길로 오른다. 크게 두어 번을 휘감아 돌아가는 산길이다. 오늘 따라 지나다니는 차는 없었다. 맑은 공기가 충만한 만추의 산길이다. 그윽한 정취가 흘렀다.
십자가의 길
길의 초입에서 조금 올라가니 ‘묵상의 길’[표지석]이 시작되었다. 이곳 ‘묵상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천주교에서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은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양식이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몸소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에 올라가 그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이다. 그 처절한 과정을 14처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림 또는 조각으로 구성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도처로 삼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 있다.
‘십자가의 길(라틴어, Via Crucis)’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서방 기독교의 기도 양식이며, ‘고통의 길’이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보통 사순(四旬) 시기 동안 매주 금요일과 성금요일(그리도가 십자가 목박혀 죽은 날을 기념하는 날)에 행하며 성공회에서는 보통 사순절(四旬節)의 마지막 주인 성주간에 매일 행한다. 사순절(四旬節)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기간이다.
십자가의 길은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어 있는 성당이나 경당 또는 성지(聖地)에 조성된 옥외 장소에서 바쳐야만 한다. 이 기도를 할 때는 한 처에서 다음 처로 이동하며 바쳐야 한다. 단, 공동으로 바치는 경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동할 수 없는 경우에는 기도를 주관하는 사람만 이동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서 있어도 된다. 아울러 14처 전체를 순서에 따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바쳐야 한다. 만약 전체를 바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한대사(부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초기에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14세기에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기도문이 체계화되었다. 이 기도의 목적은 당시 이슬람교 세력의 예루살렘 정복 때문에 성지 순례 여행에 차질을 빚게 되자 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과정에서 주요한 장면을 떠올리며 기도로서 영적인 순례 여행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길은 총 14처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처에서 바치는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짐.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당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한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마가 14:36, 마태 26:39, 누가 22:42)라고 기도하셨다. 견디기 어려운 인간으로서의 고통(苦痛)과 하느님에 대한 순결한 신앙(信仰)을 드러낸, 마지막 기도이다.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겟세마니동산에서 공포와 근심에 싸여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위로하지 못하고 잠들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겁을 내어 도망치거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며 부인하였던 행위를 보속하는 내용으로 기도가 꾸며져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뜻밖에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부인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을 통곡하며 동행하고 있다.(루카 23,28) 여기에는 당연히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전, 한 제자에게 십자가 앞까지 따라와 계시던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부탁하셨다.(요한 19,25-27)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각 처를 옮길 때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 라고 합송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라가고 계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당시 어머니 마리아의 처절한 심정과 극도의 아픔이 깃든 형극(荊棘)의 길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어머니의 마음, 시메온이 예견했던 그 칼에 꿰찔리는 아픔은 그야말로 단장(斷腸)의 아픔일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다. 진(晉)나라의 환온(桓溫)이라는 사람이 촉(蜀)나라로 가던 도중, 환온(桓溫)의 종자가 양자강(揚子江)의 삼협(三峽)에서 원숭이 새끼를 싣고 가자 그 어미가 새끼를 그리워하여 울부짖으며 백 여리나 달려와 배에 뛰어 들더니 죽고 말았다.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 한 처 한 처, 자연석 바위에 각 처의 주제(主題)를 음각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오늘 청정하기 그지없는 날이다. 그 동안 자주 하지 못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하며 산길을 올라갔다. 처처마다 발길을 멈추고 주제에 따른 묵상을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올라가는 사이, 성당 앞에 도착했다.
성모동굴성당
순교자 김범우 묘소로 올라가는 초입에, 순교자를 기념하여 축성한 성모동굴성당이 있다. 밝은 가을 햇살이 성지를 환하레 비추고 있다. 동굴성당의 입구는 단아한 팔작지붕의 아담한 한옥이다. 성당 바로 앞 가장자리에 영문으로 된 김범우 약력—[Kim Beom Woo / 1751~1787]—을 자연석 빗돌에 새겨서 세워 놓았다. 성당은 지금 미사 중이었다. 그래서 먼저 김범우 묘소를 찾아 올라갔다.
묘소(墓所)로 올라가는 길
빗돌에 새긴 한국천주교회와 천주교 부산교구의 약사(略史)
성모동굴성당 맞은편에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약 50~60m의 비탈길이다. 거기 길목의 좌측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아담한 오석(烏石)에 한국천주교(天主敎)의 약사(略史)와 천주교 부산교구의 역사를 대목별로 새겨 놓았다. 그 빅돌에 새긴 내용을 하나씩 읽으면며 올라갔다.
* [빗돌1]― 조선반도에 복음의 빛이 강생(1779년) ▶ 17세기 초부터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에 의해 한문 서학서가 수입되어 읽히기 시작했다.1779년 성호 좌파의 유학자들이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한문 서학서에 대한 강학회를 가졌다.
* [빗돌2]― 한국교회 창설(1784년) ▶ 1784년 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로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가을에 이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이 땅에 교회공동체가 탄생하였다.
* [빗돌3]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1785년) ▶ 1785년 김범우의 집인 명례방에서 집회를 가지고 있던 교회공동체가 포졸들에게 적발 당하였다. 양반들은 방면되고 중인인 김범우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배교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밀양 단장으로 유배당하였다.
* [빗돌4]― 신해박해(1791년) ▶ 1790년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상제사 금지라는 지시를 받아왔고, 이것으로 양반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자신의 모친 장례 때 신주와 위패를 모시지 않는 천주교 장례로 인해 권상연과 함께 순교했다.
* [빗돌5]― 주문모(周文模 : 야고보) 신부 입국 ▶ 1794년 교회 공동체에 중국인 성직자 주문모가 입국하였다. 신자들의 성사생활이 가능하게 되었고, 정약종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명도회의 창설로 교리 교육이 강화되고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 [빗돌6]―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천주교에 관대한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천주교에 적대적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1801년 정부에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공식 박해령을 내렸다. 그 결과 정약종을 비롯한 300여 명의 신자가 순교하거나 유배당했다.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숨어 교우촌을 만들었다.
* [빗돌7]― 조선대목구 창설(1831년) ▶ 신유박해 이후 교회는 폐허가 되었지만 교우촌이 정착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1811년에는 신자들의 명의로 교황에게 서한을 전달하기까지 되었다. 이런 활동으로 1831년 조선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그후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초대 주교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다.
* [빗돌8]―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 1836년부터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교회는 안정을 찾음 발전하였다. 기해박해는1939년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력을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박해이다. 이 박해로 선교사들과 정하상을 비롯하여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순교하였다.
* [빗돌9]―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1845년) ▶ 1636년 세 사람의 신학생(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상해 금가당성당에서 서품받고 황당교회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그해 10월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6월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을 준비하던 중 황해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9월에 순교하였다
* [빗돌10]―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3년)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제쳐두고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였다. 이 박해는 서세동점의 국제상황 속에서 위정척사 사상과 맞물려 일어났다. 특히 러시아의 남하,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도굴, 신미양요 등 외세와의 갈등 속에서 박해의 규모와 가혹함 희생자의 수는 엄청났다.
* [빗돌11]― 부산본당 설립(1890년) ▶ 1890년 경상도 남부지방의 선교를 위해 부산의 영도(현 청학성당 부근)에 부산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듬해 섬이라는 한계 때문에 초량으로 이전하였다.
* [빗돌12]― 한, 프 수교통상조약(1886년) ▶1876년 한국은 일본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후 미국,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와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체결이 미루어지다가 1886년에 체결되었다. 이로써 프랑스선교사의 선교자유는 허용되었고 본당이 창설되었다.
* [빗돌13]― 안중근 의거 ▶ 1909년 10월 안중근(토마스)는 한국의 초대 총감으로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를 하얼빈에서 포살하였다. 이 의거는 일본에 합병되기 직전의 대한젝국의 국민들에게 독립투쟁의 희망을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 [빗돌14]― 79순교자들의 시복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대성전에서 교황 비오11세에 의해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79명이 시복되었다.
* [빗돌15]― 부산대목구 설정(1957년) ▶ 6·25 전쟁 이후 부산은 피난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세가 꾸준히 확장되었기 때문에 교구 설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57년 1월 21일 부산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초대교구장에 최재선(요한) 주교가 임명되었다.
* [빗돌16]― 한국교회 제도(1962년) ▶ 1962년 교황의 강복 대리구였던 각 교구들이 정식 교계제도 아래 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교구 제도의 설립으로 한국천주교회들이 자립교회가 될 수 있었고 포교지의 성격에서 벗어났다. 서울과 대구 그리고 광주의 교구장이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한국교회는 세 관구로 나눠지게 되었다.
* [빗돌17]― 이갑수 주교 교구장 취임 ▶ 1975년 6월 28일 이갑수(가브리엘) 주교가 부산교구 2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1999년 8월 은퇴하기까지 25년 동안 부산교구장이었다.
* [빗돌18]― 순교자 103위 시성(諡聖) ▶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부산을 방문했다. 5월 5일에는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순교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 [빗돌19]― 세계성체대회 개최 ▶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평화·감사·회심,일치’를 기원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통일 기원미사도 봉헌되었다.
* [빗돌19]― 정명조 주교 부산교구장 취임 ▶ 1999년 8월 28일 정명조(아우구스투스) 주교가 부산교구 3대 주교로 착좌하였다. 새 천 년을 향한 부산교구의 힘찬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 묘소로 올라가는 길목, 작은 오석판에 새겨진 19개의 내용을 읽어 보니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고 이곳 부산교구의 교회 설립과 교구의 발전과정을 알 수가 있었다.
김범우 묘역의 묘비명(墓碑銘)
순교자 묘역에 들어섰다. 그 입구에 김범우의 생애(生涯)를 새긴 자연석 빗돌을 세워 놓았다. 일종의 묘비명(墓碑銘)이었다.
‘김범우는 1751년 서울에서 중인 역관 김의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천녕 현 씨를 아내로 맞아 이듬해에 장남 인고를 낳았고 1773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여 한학우어별주부에 이르렀다. 그는 이승훈 등 초기 교우들과 가깝게 지냈고, 1784년 가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이 교회가 되어 ‘명례방공동체’가 생겨났다.
1785년 봄 모임을 갖던 중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는데, 양반들은 모두 풀려나고 그만이 모진 고문 끝에 ‘단장’(밀양군 단장면)으로 귀양을 가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의연히 산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7년 형벌의 여독으로 귀천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한 동안 잊혀졌던 묘소는 1984년 200주년 준비과정에서 추적하기 시작하여 1989년 후손들의 증언으로 파묘, 치아 등을 수습, 감정을 거쳐 확인하였으며 2003년 묘지를 꾸며 이 돌을 세운다. / 2003년 9월 14일 천주교 부산교구’
― 이 비문(碑文)과 19개의 오석판에 새겨진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김범우(金範禹)는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한 아주 초기에 세례(洗禮)를 받았다는 것, 자신의 집을 최초의 교회인 명례방공동체(明禮方共同體)로 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명례방 모임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에서 유독 형조의 가혹한 고문(拷問)을 당하고 유배(流配)를 당하고 끝내 그 장독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는 것, 그리하여 김범우 토마스는 최초의 순교자(殉敎者)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김범우 토마스의 역할(役割)과 위상(位相)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일개 순정한 신자로서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신앙을 온몸으로 증거하였고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간 길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불교적 신앙이 강한 부산·경남지역에 순교자 김범우의 묘소는 천주교 부산교구의 중요한 성지(聖地)가 되었다. 더구나 만어산은 천년 고찰 만어사(萬魚寺)가 있는 곳이 아닌가.
‘正之 토마스 金範禹’ 묘소
김범우 토마스 묘소(墓所)는 푸른 송림(松林)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봉긋하게 조성된 봉분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다. 묘소 뒤쪽에 자연석 십자상을 모셔 놓았다. 묘소는 그리스도 품안에 자리하고 있는 구도이다. 그리고 묘소 좌우에 싱싱한 소나무가 각각 시립하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자연석으로 된 제단상석이 있다. 상석 전면에 ‘正之 토마스 金範禹’라고 음각해 놓았다. 완만하게 경사진 묘소의 전면은 비교적 널따란 잔디 광장으로 조성되어 있어 시공의 앞면 확 틔어 있었다. 산 아래는 우측의 청룡산과 만어산 산줄기 등 중첩된 산봉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령 칠은(七恩)의 길
그런데 묘소의 뒤쪽의 산록에는 ‘성령 칠은의 길’과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묘소의 우측에 산길이 나 있고 그 입구에 ‘성령 칠은의 길’이라는 표지석이 있고, 두툼한 마대를 바닥에 깔아놓은 산길이 칠은(七恩)의 길이다. 천주교에서 성령(聖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일곱 가지 도움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를 ‘성령칠은(聖靈七恩)’이라고 한다.
‘성령칠은’은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의견, 지식, 굳셈(용기), 효경, 경외(두려워함) 등이다. 물론 이러한 은사(恩赦)들은 세례(洗禮) 때 처음으로 주어지고, 다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통해 더욱 풍성하고 확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중 지혜와 통달(깨달음)과 의견과 지식은 우리의 ‘지혜(智慧)’을 도와주며, 굳셈(용기)과 효경과 두려워함은 우리 ‘의지(意志)’를 도와준다.
‘순교자 김범우 묘소’ 참배를 마치고 ‘성령 칠은의 길’로 들어섰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이다. 오후의 햇살이 화사하게 내린다. 공기는 더없이 신선하고 쾌적하다. 묘소 주위는 청정한 소나무 숲이 군락을 이루 에워싸고 있는데, 묘소 뒤쪽의 산록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누렇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이 계절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오늘, 묘소에서나 칠은(七恩)의 산길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조용히 호젓하게 산을 오른다.
첫 번째 은석(恩石)에 이르렀다.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기단 위에 커다란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자연석 정면에 동판을 붙여 그 안에 '경외(敬畏, TIMOR)'를 주제로 한 신자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그리고 기단에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은혜’라고 적어 놓았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공경심을 말하고 있다. 침식방지용 마대를 깔아놓은 산길을 따라 한 구비 돌아서 올라간다. 두 번째 은석에는 '공경(恭敬, PIETAS)'—'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아는 은혜'를 새겨 놓았다. 하느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이다. 산굽이를 돌아 올라간다. 세 번째 은석은 ‘용기(勇氣, FORTITUDO)’—'끊임없는 유혹과 싸워서 이기는 은혜'였다. 어떨한 경우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신앙심을 지닐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은혜이다. 세 번째 은석을 지나 조용히 올라가니 산의 능선이다.
성모동산의 마리아상
아트막한 산의 능선에 ‘성모동산’이 있다. 묘소를 품고 있는 산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가는 산길의 정점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성모 마리아상이 숲속에 모셔져 있었다. 순백(純白)의 마리아상은 이곳까지 올라온 순례자(巡禮者)의 마음을 따뜻이 위로하듯 자비로운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가슴을 울렸다. 저 아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최초의 순교가 김범우의 수난과 죽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모습도 겹쳐서 오버랩 되었다.
― 조용히 머리를 숙여 경건한 마음으로 성모송(聖母頌)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성모상 앞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인 듯 성모상 앞은 너른 공간이고 그 가장자리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돌판석이 즐비했다. 나도 잠시 돌판석 위에 앉아, 맑은 공기와 순결한 가을 햇살이 내리는 산속에서 사랑과 죽음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했다. 참다운 사랑과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했던 김범우 토마스, 그것은 처절하고도 숭고한 사랑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마음, 모든 어머이의 마음이 아닌가. 문득 나의 어머니 평산 신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물겹도록 어려운 생애를 살면서도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던 어머니!.
― 고개를 들어보니 맑은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청정한 공기, 조용하고 그윽한 성모동산에서 낙동강 여정의 무거운 몸은 내려놓고, 지친 영혼이 어머니의 품 안에 돌아온 듯, 더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객지에 떠돌던 몸이 본향을 찾아온 듯, 뜨거운 은혜와 충만한 사랑에 젖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생각에 젖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내려가는 산길, 다시 이어지는 칠은(七恩)의 길
이제 다시 산을 내려가야 한다. 올라오는 길의 반대쪽, 묘소의 좌측으로 내려가면서 ‘칠은(七恩)의 길’이 계속된다. 성모동산에 조금 내려오니, 은석이 기다리고 있다. 네 번째 은석에는 ‘지식(知識, SCIENTIA)'—‘교리와 성서를 알아듣는 은혜’이다. 성서를 통하여 참다운 신앙의 길을 알게하는 은총이다. 은은히 깊어가는 가을 산의 정취, 인적 없는 산속의 호젓함이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했다. 다섯 번째 은석은 ‘의견(意見)’—‘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은혜’이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참다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은총이다. 맑은 가을 햇살이 노랗게 물든 활엽수 나뭇잎을 비추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섯 번째 은석은 ‘통찰(洞察, INTELLECTUS)’—‘하느님의 참된 진리를 깨닫는 은혜’이다. 참된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갖게 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은석은 ‘지혜(智慧, SAPIENTIA)’—‘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은혜’이다. 이렇게 성령 칠은의 길을 따라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입구에 ‘성령7은의 길’ 표지석이 있다. (묘소에서 출발하다 보니) 일반적으로 행하는 칠은의 길을 역순으로 돌아내려온 것이다.
잔디밭의 ‘원주(圓周)의 십자가상’
그리고 ‘피정(避靜)의 집’
― 산을 내려오면 장방형의 반듯한 잔디광장이 있다. 만추의 금잔디 위에, 작은 나무를 촘촘히 심어 ‘원주[동그라미] 속의 십자가’를 조성해 놓았다. 잔디밭은 아래에 입구가 있는 ‘성모동굴성당’의 지붕이다. 그리고 그 위쪽의 산록에 벽돌로 지은, 산뜻한 2층 기와집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ㄱ(기역)자 형태의 2층 기와집은 순례자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머물러 기도하는 ‘교육관·피정의 집’이다. 천주교에서 피정(避靜)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지내는 일을 말한다. 피정의 집 아래에는 성모동굴성당이 있고 그 좌측의 안쪽에는 ‘사무실’, ‘사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기념 성모동굴성당은 김범우 묘역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1번지에 99평 200석 규모로 2011년 9월 20일 봉헌되었다.
성모동굴성당
언양성당 스테파노 신부님의 축도
성모동굴성당으로 내려오니 이제 막 미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성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행사를 겸하여 미사를 올린 듯, 꽃다발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고 ― 하여 무슨 특별한 행사인가 물어보았더니, 언양성당 레지오단원들이 오늘 특별히 김범우 순교자 묘소를 참배하고 성지순례 기념 미사를 올렸다고 했다.
잠시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모동굴성당이라 제단 옆에 실물대의 성모 마리아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제 막 미사를 마무리하고 나오시는 신부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의 신부님이 아니라 부산교구 언양성당 서강진 스테파노 주임신부였다. 나도 본명이 스테파노라고 소개하고 서울의 명동대성당에서 왔다고 하면서, 낙동강 종주 여정 중 이곳 삼랑진의 김범우 토마스 묘소를 참배하러 올라왔다고 이야기했다. 신부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며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낙동강 대장정이 무사히 이루어지기를 축도(祝禱)해 주셨다. 뜻밖이었다.
나는 1982년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에 다시 추기경님이 집전하시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오늘 특별히 삼랑진에서 조용히 성지를 찾아 김범우 묘소를 찾아 올라온 길, 오늘의 순례자 스테파노가 부산교구 스테파노 신부님으로부터 축도를 받은 것은 분명 예기치 못한 큰 은혜이다. ‘성령 칠은의 길’을 다녀온 은총(恩寵)이 내린 것 같았다. 잠시 빈 성당에 앉아 조용히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산을 내려왔다. 오늘 따라 가을 햇살이 유난히 밝았다.
송기인 신부
삼랑진 식당에서 어떤 분에게, 여기 사제관에 송기윤(그레고리오) 신부가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세례를 준 송 신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분이다. 부산에서 문재인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하고, 이후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문재인의 정신적 멘토를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처럼 표면에 나서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또 개인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는 신부였다.
— 문득, 송기인 신부가 오늘날, 쓸개 없는 종북 좌파(주사파)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과 국정농단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송기인 신부는 단지 문재인의 순수한 신앙적 멘토일 뿐인가. 아니먄 사상적, 정치적으로도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이념과 노선을 지닌 분인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송 신부를 찾아들어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순수한 신앙적 양심을 지닌 분이라면 그 진실을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범우 묘소, 가톨릭 순교 성지
김범우(金範禹) | 한국천추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신분은 ‘윤지충(尹持忠)의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이전과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난 1801년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확연히 달라진다. (진산사건은 조선 시대 1791(정조 15)년에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그의 모친상(母親喪)을 신주를 버리고 가톨릭교 방식으로 행한 것에서 발단되어, 나라에서 가톨릭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여 가톨릭교 서적의 수입을 엄금하고, 교도인 윤지충, 권상연 등을 사형에 처했다.)
조광 교수는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진산사건 이전(1784년~91년)의 지도층 인물 12명 가운데 김범우(역관) · 최창현(의원) · 최필공(의원) 3명의 신분이 중인(中人)이라고 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장교 출신의 이존창도 중인으로 보기도 한다.
최창현(崔昌顯)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양반 중심의 천주교 신도층을 평민층까지 확산시켰으며, 김범우(金範禹)는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다. 지도층 12명은 대부분 1784년에 입교했으며, 이 가운데 김범우(金範禹)가 가장 이른 1786년에 순교(殉敎)하였다.1)
조광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신유교난 이전 10년 간의 지도자 38명 가운데 21명이 중인(中人)으로 절반이 넘었다. 새로운 종교를 통해 사회를 바꿔 보려던 그들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명동,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영세(領洗, 洗禮)를 받은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다산 정약용의 자형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손위 동서인 이벽(李檗, 1754~86)의 권유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이 1783년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따라갔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머물며 베이징 남천주교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필담으로 교리를 익히고 프랑스인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領洗) 신자가 되었다. 그는 1784년에 수십 종의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진] ☞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북경 ‘남천주교당’. / 베이징의 선무문 안에 있어 '선무문교당'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사신들이 묵는 옥하관에서 가까워 박지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이 자주 들러 구경했고, 이승훈도 이곳에서 영세를 받았다. 사진 속의 건물은 190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벽(李檗)은 손아래 동서인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중인(中人)이 많이 살던 청계천 수표교 옆으로 이사했으며,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중인 들을 찾아다니며 천주교 교리를 전하였다. 당시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이었으므로 신부가 없어,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10명의 ‘가신부’에게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조선인 신자들끼리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를 익혔다.
김범우(金範禹, 1751~1786년)는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종6품 한학주부까지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여 정약용의 자형인 이벽과 가깝게 지내다가, 이벽이 1784년에 천주교 교리를 전하자 그의 권면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이 영세를 베풀기 시작하자, 김범우도 이벽의 집에서 그에게 영세를 받아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영세식이었는데, 이존창 · 최창현 · 최인길 · 지홍 등이 함께 받았다. 김범우(金範禹)는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동생 이우(履禹)와 현우(顯禹)까지 입교시켰다.
김범우(金範禹)의 집은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明禮坊) 장예원(掌隷院) 앞에 있었는데, 천주교 서적이 많이 있어 신자들이 자주 모여 미사를 드리거나 이벽이나 이승훈의 설교를 들었다. 양반 이벽의 집에는 하층민이 드나들기 어려워, 중인 출신의 김범우가 수표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1784년부터 그의 집은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교회에 해당한다.
↑[사진 설명] ▶ 명례방공동체 기도모임에서 이벽이 설교하고 있다. 중앙의 이벽(푸른색 도포)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 윤지충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김범우(서 있는 이) 그리고 지황, 이존창이 이벽과 마주 보고 있다. 이벽의 왼쪽 앞에 이승훈 (그 뒤에 김종교 최필공) 최창현 홍익만 그리고 책상 끝에 정약용, 그뒤에 최인걸이 앉아 있다. 갓이나 옷차림으로 볼 때 양반과 중인 그리고 상민이 함께 자리하여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하고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밀양에 유배되다
1785년 어느 봄날, 이승훈과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와 궐철신, 권일신(權日身) 등 양반과 중인(中人)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李檗)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刑曹)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다. 그곳에서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는데, 이를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 을사는 1785년, 추조는 형조를 가리킨다.
서학(西學)에 대해 비교적 온건했던 정조(正祖) 시대였으므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사대부 자제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의 김범우와 최인길 두 역관만 잡아 가두었다. 그러자 권일신(權日身)이 그의 아들과 함께 형조(刑曹)에 찾아가, 자신도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聖像)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형조판서 김화진은 양반 자제들을 처벌하기 어려워 다시 잘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대부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중인(中人) 김범우는 풀려나지 못했다. 그리고 김범우(金範禹)는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저버리지 않았다. 형조판서가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다. 잘못된 점은 모른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수하다, 가혹하게 곤장을 맞았다. 그리고 결국 단장(단양)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에 있던 천주교 교리서들은 모두 형조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다. 성균관 학생 정숙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완전히 절교하라.”고 통문을 보냈다. 1785년 3월에 돌린 이 통문은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문서이다.
달레 주교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김범우(金範禹)는 유배된 뒤에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였으며, 고문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경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첫 순교자(殉敎者)가 된 것이다. 두 아우는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殉敎)하였으며, 아들 인고는 밀양으로 이사와 신앙생활을 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김범우(金範禹)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고 하지만, 밀양일 가능성이 많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범우가 병오년에 사학(邪學) 사건으로 단양(丹陽)에 정배되었다.” 했는데, 충청도라고 하지는 않았다. 밀양시에 단장면(丹場面)이 있으며, 그의 묘가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 있고, 아들도 그곳에서 산 것을 보면 밀양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서 ‘場(장)’을 ‘陽(양)’으로 오기(誤記)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김범우는 형장에서 가혹한 문초를 받아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몸으로 삼랑진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귀향된 후에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의 기록에는 전해진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혹독한 매질의 여독(餘毒)으로 2년 동안 고생하다가 1787년 9월 14일 고문을 받은 상처의 악화로 귀천(歸天)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김범우(金範禹, 1751년 5월 22일~1787년 9월 14일)의 묘(墓)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에 있다.
1985년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과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1989년 극적으로 후손의 외손(外孫) 중 한 명을 만나 김범우의 묘로 지적해 준 묘(墓)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김범우의 묘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김범우의 묘소는 이 곳 만어산 중턱에서 발견하게 됐고 그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군은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서 깊은 밀양(密陽)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 대사, 휴정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재약산(858m의 표충사와 만어산(670m)의 만어사는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고찰이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인 김범우의 삼랑진 묘는 1989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져, 2005년 9월 14일에 유배 220주년 및 김범우(토마스) 묘역 준공미사가 1,500명 신자가 모인 앞에서 베풀어졌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에 명동대성당이 들어서다
1886년에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조선 땅을 여행할 권리와 더불어, 건물을 짓고 한양에 거주할 권리와 토지를 소유할 권리까지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푸아넬 신부’가 명례방공동체가 있던 김범우 생가 부근의 명례방의 대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의 가옥은 좁았기 때문에, 윤정현의 집을 비롯해 여러 채를 계속 구입해야 했다. 푸아넬 신부가 작성한 1887년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아직도 (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울 전에는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구입한 (명동의) 대지는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요한 기본 건물들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 김정동,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그러나 이곳은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가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 하여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고 착공을 지연시켰다. 1892년 봄에 설계(設計)와 공사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교회 터를 평평하게 닦아 놓은 뒤, ‘뮈텔 주교’가 머릿돌에 축복하였는데, 코스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898년 5월 29일에 ‘푸아넬 신부’가 명동성당을 준공하고 축성식을 올렸다. 지금 명동성당 오른쪽에 있는 문화관 ‘꼬스트홀’은 이 성당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한 꼬스트 신부님을 기리기 위한 회관이다. 명례방 높은 언덕이 종현(鐘峴)이어서 한때는 ‘종현성당(鐘峴聖堂)’ 또는 ‘뾰족집’ 이라고도 불렸는데, 곧바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1945년에 명동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명동대성당
김범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많은 지도자가 체포되고 순교한 지 100여 년 지난 뒤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바로 그 동네에 ‘명동성당(明洞聖堂)’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자리하고 있는 명동대성당은 바로 김범우가 그의 집을 ‘명례방공동체’로 내어 놓은 것이 게기가 되었다. 결국 그의 집이 한국 교회의 태(胎)자리 역할을 한 것이다.
명동대성당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양식의 교회 건물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지역 신자들을 사목하는 성당)이다. 그리고 한국의 첫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하여 정진석 추기경에 이어 지금은 염수정 추기경이 주석하시는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다.
― 장안의 명물인 명동대성당 입구에 일찍이 가톨릭의대 명동성모병원이 있었고 내가 근무한 계성여자고등학교가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계성초등학교와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수녀원을 제외하곤 성모병원은 강남성모병원과 여의도성모병원으로, 계성초등학교는 강남의 반포로, 계성여고는 성북구 길음동으로 옮겨가면서 계성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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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
한국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큰 구획을 그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이 막을 내리고, 이어서 1980년 신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80년대 초 5·18의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내재적인 민주화 열망은, 드디어 1986년에 ‘민주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명동성당(明洞聖堂)이었다.
당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제5공화국 신군부정권의 부조리하고 부당한 행태에 대하여 올곧은 발언으로 지적하면서 사회 정의(正義)를 줄기차게 제기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이 되었고, 수많은 대학생들과 민주 열사들이 구름처럼 성당으로 모여들어 역동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명동거리에는 화이트칼라 직장인에서부터 일반 시민은 물론 각지에 모여든 많은 군중들이 시위에 참가하면서 그 양상은 더욱 가열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킴으로써 이곳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0년 전에 지어진 명동성당은 1980년대 군부통치를 청산하고 민주화의 역사를 만들어낸 바로 그곳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선종(善終)하셨다.
다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오후 3시, 성모동굴성당 앞에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 올라갔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성당 앞에 설치된 제14처에서부터 역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것이다. 오늘의 십자가의 길은 여느 때하고는 다르게 매우 절절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 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김범우의 수난과 죽음이 그대로 겹쳐지기 때문이었다.
김범우 토마스! 그는 그 가혹하고 무참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배교(背敎)를 하지 않았다. 기꺼이 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면서 죽음을 감수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떠난 길을 그대로 밟아간 것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내어놓고 신앙을 증거한 처절한 사랑이었다.
파란 하늘 청정한 공기, 맑은 햇살이 온몸을 비추고 있었지만 큰길까지 내려오면서 내내 가슴이 저렸다. 온몸을 감싸고 도는 아픔으로 신앙(信仰)을 생각하고 인생(人生)을 생각했다. 자못 경건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내내 던지던 질문이 오늘 따라 엄청난 무게로 가슴을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비장한 느낌이었다.
묘소 입구의 삼거리에서 고개를 넘어 정혜암 입구를 지나 율동마을에서 만어사-우곡리에서 내려오는 큰길로 들어섰다. 늦가을 해가 낙동강 산 위에 걸려 있다. 여기서부터 삼랑진까지는 4km, 오전에 만어사로 올라오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이다. 자동차들이 자주 왕래하는 길, 그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만추의 햇살이 온몸에 내린다. 다리가 묵직하고 허벅지가 아팠다. 그러나 오늘 예정한 탐방지를 무사히 마쳤다는 자부심에 마음은 더없이 가볍고 편안했다.
김범우 토마스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낙동악 종주 여정에서 삼랑진의 ‘만어사’와 ‘김범우 순교자의 묘소’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렇게 날을 받아 일부러 탐방하게 된 것 또한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놀랍고 가상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나 자신 33년간 명동대성당 구내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세례를 받고 그 대성당에서 정년퇴임식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그 땅의 주인이었던 김범우 순교자의 종적(蹤迹)과 죽음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번 낙동강 종주, 삼랑진 여정을 통하여 김범우의 생애와 목숨을 다한 뜨거운 신앙심을 자각하게 되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순교자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그 아픔을 묵상할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은혜이다. 순교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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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오후 4시 30분, 아침 만어산으로 출발했던 삼랑진역 앞에 돌아왔다. 삼랑진은 예부터 교통(交通)의 요지이다. 옛날에는 낙동강 수운(水運)의 중심 기지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경부선과 경전선 철로가 건설되고 근래에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각종 도로가 가설되면서 더욱 복잡한 교통망이 구축되어 있다. 특히 삼랑진은 지형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김해시와 접해 있으며 또 지천인 ‘미전천’이 샛강처럼 읍내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여러 갈래의 도로와 철도를 잇는 여러 교량(橋梁)이 낙동강과 미전천을 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철도의 경우, 우선 밀양에서 밀양강을 따라 내려온 경부선이 미전천 동쪽의 강안으로 이어져 삼랑진역으로 이어지고, 당초 김해에서 낙동강을 건너온 경전선 철교[지금은 열차가 다니지 않은 구 철교]가 삼랑진역으로 이어졌는데, 근래에는 서울—밀양—진주를 잇는 KTX가 생기면서 김해에서 건너온 낙동강 철교[신 철교]가 삼랑진역을 거치지 않고 밀양으로 가는 경부선 철로와 바로 합류하는 관계로, 삼랑진의 미전천 위로 상행선과 하행선 두 개의 철도 교량이 가설되어 있다.
도로의 경우, 밀양에서 부산/김해로 이어진 중앙고속도로가 미전천 서안에 있는 삼랑진I.C를 지나서, 삼랑진 읍내 한 복판으로 두 개의 고가도로가 철도 위를 가로질러서 낙동강 교량[낙동대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김해에서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28번 도로는 낙동강 다리[삼랑진교]를 건너와 삼랑진 송지시장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밀양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창녕의 남지읍에서 낙동강 동안(東岸)을 따라 밀양시 하남읍을 경유하여 밀양강을 건너온 1022번 도로는 미전천 서안에서 28번 국도와 합류한 뒤 송지시장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미전천[미전교]을 건너자마자 경부선 철도의 굴다리를 지나 삼랑진역 앞으로 이어진다. (삼랑진 역 앞의 이 1022번 도로는 천태산을 넘어 양산시 원동(면)을 경유하여 양산의 물금읍까지 이어진다. 이 도로는 지난 11월 3일 필자가 벗들과 함께 삼랑진에서 양산시 물금읍까지 카니발을 타고 지나갔던 길이다.)
삼랑진에 가설된 낙동강 교량은, 밀양강이 합류하는 아래쪽에 지금의 경전선이 운행하는 낙동강 신 철교, 그 아래 차들이 다니지 않는 옛날의 삼랑진교(인도교), 그리고 지금은 관광용 바이크 길로 활용하는 경전선 구 철교, 그 아래 28번 국도가 지나는 삼랑진교 그리고 그 아래 복선의 중앙고속도로의 고가도로와 이어진 낙동대교가 있다.
삼랑진 시가 산책
오후 5시, 내일의 출행을 위하여 낙동강 물길[바이크로드]이 시작되는 곳을 확인하게 위해 답사를 했다. 삼랑진역 앞에서 1022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 경부선 굴다리를 지나서 미전교를 건너 송지시장으로 나아갔다. 늦은 오후라 시장은 파장이 된 상태지만 이 지역에서는 제법 흥성한 재래시장이다.지방의 소읍이지만 의원, 농협, 제과점, 스마트폰 매장, 치킨집, 각동 식당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나는 내일의 출발지인 낙동강 강안으로 가기 위해 송지시장 사거리에서 58번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삼랑진성당 앞을 지나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다니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걷는다. 높고 거대한 중앙고속도로 고가도로(高架道路) 아래를 지나 낙동강역[옛날 완행열차 역이지만 지금은 폐쇄된 추억의 철도역] 앞을 지나갔다. 11월 3일 밀양에서 바이크 라이딩으로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 길을 두 발로 걸으면서 지난 여정을 확인해 본다. 그 때 맛있게 먹었던 국수전문점 ‘태극기가 휘날립니다’ 집까지 올라갔다. 오늘은 영업시간이 지났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낙동강 강안 낙동대교 교각 아래의 제방으로 나아가 내일 출행할 바이크로드를 확인했다. 그리고 읍내로 다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었다. 오늘은 만어산의 만어사 탐방과 김범우 묘소를 참배하는 등 약 30km를 두 발로 걸었다. 다리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고 온몸이 천 근(千斤)이었다. 내일은 삼랑진에서 낙동강 물길을 따라 양산시 물금까지 걸을 예정이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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