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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젊은이 여러분,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코헬렛 저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는 인생의 산전수전과 우여곡절을 다 겪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현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이 세상을 초월해서 살던 사람, 인생의 지혜와 경륜으로 충만했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과 권고는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빛나는 보석 같습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틈만 나면 연필로 꾹꾹 눌러 필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코헬렛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나름 인생을 좀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대 갈팡질팡하는 후배들에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선배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때 그따 적절한 조언과 행동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코헬렛 말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요긴한 말씀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마음에 새길 명언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편도나무: 아몬드 나무라고도 합니다. 성막의 등잔대가 아몬드 나무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집니다.
*참양각초: 근동 지방에서 서식하는 생존력이 강한 나무, 케이퍼 나무로 추정됩니다. 건조한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어여쁜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연어 요리를 먹을 때 이 열매를 절여 곁들여 먹곤 합니다.
젊은 형제 자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순식간에 세월은 흐르고 마치 번개처럼, 섬광처럼 인생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에 충실하십시오. 젊은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실 삶을 추구하십시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는 축복과 은총과 구원의 날입니다. 부디 오늘을 허송세월하지 마시고 충만히 누리고 만끽하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9,43-45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하루에 책 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습니다. 맞습니다. 다독합니다. 물론 많은 분이 이것저것 많이 읽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정독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정독보다 다독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한 권의 책만 읽는 것보다는 여러 장르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깊이가 부족해도 넓게 지식을 갖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질보다는 양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도 질보다 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라는 ‘양’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도자기 공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기 과제를 내면서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평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50개 이상을 만들면 A, 40개 이상이면 B, 그 이하는 C”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몇 개를 만들든 가장 잘 만든 한 점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만들면서 실패의 과정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양보다 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 높은 ‘나’를 만들려면 양적으로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실패에 질적으로 높은 성공을 가져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역시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힘 있는 임금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들어오는 영광의 임금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다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늙은이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오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이야기하지 마라(조너선 스위프트).
죽음 앞에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네.”(코헬 12,7)
흙에서 온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되돌아가고
하늘에서 주신
우리의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네.
이 세상 삶이
끝나는 날이 오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도
각자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기도는 인간의 배부른 삶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결핍에서 하느님을 찾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인간의 본능이 저지르고 있는 시기질투의 욕망
인간의 아픔과 슬픔에 젖은 비탄,
죄 없는 무고한 이들의 고통,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의 횡포,
가난한 약자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
오히려 굶주리고 눈물 흘리고 아파하면서
고통 중에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우리네 삶의 현실에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굶주림과 목마름이 선포되는 곳이
기도의 장소가 되고
기도의 소재고 재료가 됩니다.
기도가 삶 자체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을 토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복음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죽어있는 활자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처럼 여전히 몽매하다면 말이지요.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참사람이
계십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넘겨지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하느님 마저
자신의
이해득실에 의해
넘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넘겨지심으로
삶의 소중함을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람을 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당신의 목숨을
맡기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힘 없이
우리들에게
넘겨지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넘겨지면서도
사람을
도와주시는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짓밟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겨지심으로
오랫동안의
악순환을
끊으십니다.
넘겨지심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내어주시는
사랑임을
십자가의 수난에서
배웁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 내어주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느님
사랑 없이
존재할 순
없습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향하는
사랑의 참된
새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부활의 대전제인 죽음!'
오늘 복음(루카9,43ㄴ-45)은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추신 분, 곧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는데, 먼저 '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리고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때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는 '마지막 표지인 십자가', 곧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 사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 표지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난과 죽음 없는 영광과 부활을 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희생과 봉사 없는 구원, 고통 없는 기쁨, 죽음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내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7-8)
"아버지, 이민홍 베드로의 영혼을 아버지 품 안에 받아 주소서."
(~ 2열왕7,10)
복음말씀
제1독서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