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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운동
청교도 운동은 A.D 1555년 당시 여왕인 엘리자베스 1 세가 종교 통일령을 발포한 때부터 시작하여 제임스 1 세 때에 왕성하게 번창하면서,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가서는 정치적인 주도권까지 쥐게 된다. 그러나 찰스 2세기 왕위에 오르면서 성공회 감독들의 탄압과 함께 A.D. 1652년 대추방령에 의하여 청교도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A.D. 1517년 10월 31일에 있었던 루터 종교개혁 운동은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에게까지 그 여파가 밀려왔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났다.
1. 핸리 8세.(Henry 8.)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들과는 달리 그 기원에 있어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국왕의 개인적인 문제와 교회 정책적인 문제에서 시작됐다. 즉 튜더왕조의 헨리 8세 국왕의 이혼과 결혼 문제를 둘러싼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가 발단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헨리 7세(A.D. 1485~1509)에 의해 시작된 튜더 왕조(A.D. 1485~1603)는 강력한 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A.D. 1509~1547)에 와서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영국교회는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교회의 국교화 추세가 나타났다. 원칙적으로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교황이 권한을 지닌다고 인정됐지만 실제로 교회법은 왕권에 의해 제한됐다.
에드워드 3세(A.D. 1327~1377)는 「성직 임명 제한법」(1351)으로 교황의 성직자 임명을 제한했고 성직에 대한 분쟁에서 교황청에 상고하는 것을 금지한 「상고 금지법」(1353)을 발표했다. 하지만 어느 교황도 이 제한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러한 국교화 추세는 영국 교회가 로마와 단절하는데 현실적인 배경이 됐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영국 교회는 종교 개혁적 성격을 띤 국가주의 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위계 제도나 전례, 신심 생활 등에 있어서는 늘 전통적, 가톨릭적 특성을 간직했다.
헨리 8세는 A.D. 1509년에 아라곤 왕가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15세때, 4개월간 헨리의 형이자 왕위 계승자인 14세의 아서와 결혼했었는데 중병을 앓고 있던 아서가 사망했고 A.D. 1503년,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12세의 헨리와 약혼했다. A.D. 1509년 헨리가 즉위한 뒤 결혼식이 거행됐고 18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7명의 아이를 두게 된다. 그러나 메리 1세만 남고 모두 어려서 죽었다. 그 후 42여년 어간에 6명의 아내와 결혼했다
A.D. 1525년에 애볼린과 결혼했고 A.D. 1532년에 제인 시무어와 결혼 했고 A.D. 1535년에 클리브스 앤과 결혼했고 A.D. 1540년에 케서린 하워드와 결혼했고 A.D. 1543년에 케서린 파아와 결혼했다.
핸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후 아들을 갖지 못하자 정부였던 앤볼린을 좋아하게 되고 그와 결혼을 위해 케서린과의 결혼 무효 선언을 교황청에 청원했지만 1531년 교황 글레멘스 7세(A.D. 1523~A.D. 1534)는 의회와 어떤 법정에서도 만일 교황의 명을 어기면 파문될 것이라는 위협 아래 왕의 결혼을 풀거나 또는 무효로 선언하는 것을 금지했다.
헨리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결심을 하고 토마스 크랜머(T. Cranmer, 1489~1556)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만든 후 궁정 고문인 크롬웰(T. Cromwell, 1485~1540)의 도움을 받아 A.D. 1531년 영국 성직자 전체회의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회의를 통해 영국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허용하는 한 국왕은 영국 교회와 그 성직자들의 최고 으뜸이며 보호자』라고 선언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로마교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은 열열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으나 그의 부인인 캐더린과의 이혼 문제에 제동을 건 카톨릭과 단절하고 A.D 1529년 영국의 독자적인 교회를 세워 A.D. 1533년에는 「상소 제한법」으로 의회가 어떤 소송도 교황청에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고 A.D. 1534년에는 의회가 국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전권을 지녔다고 규정한 「수장령(首長令)」을 제정해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교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크랜머 대주교는 A.D. 1533년 1월 비밀리에 헨리를 앤과 결혼시켰고 이어 A.D. 1533년 5월 23일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다. 한편 교황은 A.D. 1533년 7월 11일에 파문을 경고했고 이듬해 5월 교회 재판을 통해 헨리의 캐서린과의 결혼이 유효함을 확인한 뒤 7월 헨리 8세, 앤 불린, 크랜머 대주교 모두에게 각각 파문이 내려졌다.
영국교회는 여전히 가톨릭 체제를 유지했다. A.D. 1536년에 헨리 8세는 수장령을 거부하는 수도자들을 처형하고 수도회를 해산, 재산을 압수했지만 A.D. 1539년에는 가톨릭 교리와 규율을 담은 「6개 항령(Six Articles)」를 반포하기도 했다.
영국 의회가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권위를 지닌 머리로 수장령(首將令)을 결의하고 선언했다.
핸리 8세의 수장령 선포는 대륙의 종교개혁을 흠모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던 선각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종교정책 자체가 로마 카톨릭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아서 잉글랜드 국가와 교회를 동시에 통치하는 자가 되었고 신부들의 결혼을 금지하였으며, 라틴어 예배만 허용하였고, 모든 종교적인 형상들이 예배당에 설치되었다.
온전한 종교개혁이 단행되지 못한 것을 본 개혁자들은 루터의 개혁사상과 200여년 전에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샛별인 존 위클리프의 사상 및 월리암 틴데일의 개혁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카톨릭과 성공회의 모든 가르침과 제도를 개혁하자고 더욱 목소리를 크게 합니다.
2. 에드워드 6 세(Edward 6)
에드워드 6세의 어머니 제인 시무어는 산후병으로 그를 낳은 지 12일 만에 죽었다. 에드워드 본인도 아버지로부터 선천성 매독이 유전되어,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매우 병약했다. 그러나 남달리 지성이 높고 이해력이 높아 라틴어·그리스어·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으며, 신학에 대한 조예가 역시 깊었다. 덕분에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성공회는 개신교적 방향의 종교개혁 영향을 지향하여 종교개혁 노선을 걷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죽자마자 10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A.D. 1547년 2월 20일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권력자들에게 휘둘려지는 것을 염려하여 에드워드가 어른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가 그를 보좌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서머싯 공작인 에드워드 시무어는 이를 묵살했다.
서머싯 공작은 에드워드의 맏 외숙으로 에드워드 6세의 즉위 날과 같은 날인 2월 20일에 스스로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헨리8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옆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켰던 크랜머는 영국의 국교를 로마 교회에 버금 가는 엄숙하고 화려한 의식을 갖는 교회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아직 어린 왕인 에드워드 6세(1547~1553년)를 통해 1549년 종교 통일법(Act of Uniformity)을 선포하고 모든 교회에 대해서 국교 기도서의 사용과 통일된 의식 행사의 준수를 명령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정식 선포였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도 허용하는 등 유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행정의 중추 기관인 추밀원의 관료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들이었으므로 이 통일령을 잘 따르려 하지 않았다. 한편, 에드워드 시대에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사회 문제였다.
첫째, 헨리 8세의 강압 정치 속에서 양성된 군인들은 이제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이게 되었고, 둘째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은광을 발견한 이후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가격 혁명'이 일어나 경제가 흔들렸으나, 신대륙에 은을 캐러 건너간 많은 이주민들이 의복의 필요로 영국산 모직을 선호하자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의 귀족층은 이 모직업의 상거래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됨으로써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구획[울타리, 인클로저(enclosure)]을 그으려는 시도를 하여 평민층 이하의 농민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에 추밀원(樞密院) 이 젠트리 계층에게 파괴된 농지의 부흥과 농지의 경작을 유도하며 1인당 2천 두 이상의 양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득 앞에서는 이 법률도 부당 행위를 막지 못해 효과가 없게 되었다.
당시 젠트리들은 이 법망을 피하려고 친척 명의로까지 양의 수를 배정해 놓고 농지의 부흥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황폐한 토지를 골라 겉보기식 농사를 지어 정부의 감시를 피했다. 게다가 치안 판사까지 젠트리 계층이고 보니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이런 현상은 로버트 케트(Robert Kett)라는 진보주의자가 농민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이 폭동은 진압되었지만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에드워드 6세의 왕권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당시 그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Seymour, 제인 시모어의 동생)가 등장하여 왕을 보좌했으나, 존 더들리(John Dudley : 후일 노섬벌랜드 공작이 됨)가 추밀원 의장이 되면서 성공회보다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정치를 펴기 위해 에드워드 시모어를 제거하고 심지어 가톨릭에 대해 심한 박해를 시도했다.
A.D. 1552년 서머싯 공작이 실각하며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역시 호국경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A.D. 1553년 5월 21일 에드워드의 병세가 심해지자, 노섬벌랜드 공작은 어린 왕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에드워드의 2명의 이복누이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고자 자신의 아들인 길드포드 더들리를 에드워드의 내종생질녀(오촌조카)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켜 제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라고 에드워드에게 강요했다.
에드워드는 너무 어렸고 병약하기도 하였고 통치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이복 누나 [메리 1세]에게 위협 받았다. 에드워드는 아내 없는 독신으로 전에 약혼하였다 깨어진 메리 스튜어트를 항상 비난하기도 했다.
왕위 계승법으로 볼 때, 제인보다는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계승 순위가 더 높았지만, 메리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엘리자베스는 당시 스캔들의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가 스스로의 의지로 제인을 선택했을 것이라 한다. 제인은 에드워드와 같은 가정교사로부터 학문을 배운데다가 열렬한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은 이러한 처사를 납득하지 않았으며, 제인은 훗날 9일 여왕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아버지가 이룩한 종교개혁으로 성립된 영국 성공회의 전례문서인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1549년 제정되어 전례와 교리도 많이 바뀌었다. A.D.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에드워드 6세 사망 이후 더들리는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Jane Grey)를 자기 아들 길퍼드 더들리와 결혼시킨 뒤 여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더들리 경의 이러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으로 사회 혼란이 커지면서 가톨릭을 동경하는 세력이 등장하자 이를 간파한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가 에스파냐에서 가톨릭을 지지하는 무리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하여 더들리경 집안과 제인 그레이(16세로 왕위에 올랐다가 9일 천하로 끝남)를 참수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3. 메리 1세(Maey 1)
영국 튜더 왕조를 통치한 여왕이며 메리 튜더라고도 한다. 헨리 8세(Henry VIII)와 그의 첫번째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의 딸이다. 어머니 캐서린은 스페인 아라곤 왕조의 페르난도 2세(Ferrnando)의 딸이며 정통 가톨릭교를 신봉하였다. 부왕(父王)인 헨리 8세가 통치하였던 시대에는 어머니 캐서린과 아버지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혼란스러운 정치적 격동을 겪었으며 또한 헨리 8세가 주도한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과 단절되어 불우하였다.
어려서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의 아들과 약혼하였다가 아버지 헨리에 의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와 다시 약혼하였다. 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아버지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약혼이 수차례 번복되었다. 또한 헨리의 두 번째 부인이자 왕비인 앤 불린과 불화가 심했으며 아버지 헨리 8세에 대한 원망이 쌓여있었다. A.D. 1536년 어머니 캐서린이 사망했지만 메리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공주로서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A.D. 1553년 메리는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영국교회는 그러나 A.D.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 사망 후 즉위한 메리(Mary, A.D. 1553-A.D. 1558) 여왕으로 인해 다시금 가톨릭으로 전환됐다.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메리는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반교황적이고 반가톨릭적인 법령들을 폐기하고 친 가톨릭 교회 정책을 펼쳤다.
메리 1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개혁가들을 향한 무서운 핍박을 가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개혁가들이 유럽 대륙으로 피난을 갔다. 메리 1세는 300여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죽였다. 그녀의 학정 때문에 약800여명이 망명을 갔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고 칭했다. 백성들이 그를 '피의 메리'라고 불렀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잃었고 말년에는 로마 교황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메리의 일생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후세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메리라고 지어서 불렀다.
메리 1세는 열렬한 구교도로서, 즉위 이듬해에 구교의 나라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Felipe II)와 결혼했다. 펠리페 2세는 11살 연하의 사촌간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카를 5세 황제였다.
메리는 로마의 교황과 관계를 회복하고 아버지 헨리 8세와 동생 에드워드 6세의 2차에 걸친 종교개혁 사업을 전면 부정하였다. 그리고 구교(로마 가톨릭) 부활에 주력하였으며 이단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어 많은 신교도를 처형하였다.
메리 1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개혁가들을 향한 무서운 핍박을 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개혁가들이 유럽 대륙으로 피난을 갔다. 메리 1세는 300여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죽였다. 그녀의 학정 때문에 약800여명이 망명을 갔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고 칭했다. 후세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메리라고 지어서 불렀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잃었고 말년에는 로마 교황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메리의 일생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남편 펠리페는 아버지 카를 황제가 사망하자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메리는 실의 빠져 지냈다. 또한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펠리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속된 나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와 협력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유럽대륙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거점 칼레 마저 잃었다. A.D 1558년 11월 왕위를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에게 양위하고 4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
1) 엘리자베스 1세 출생.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A.D. 1533년 9월 7일 -A.D. 1603년 3월 24일)는 A.D. 1558년 11월 17일부터 A.D.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과인(寡人)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는 헨리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이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3년도 안되어 사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A.D.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어머니 앤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A.D. 1547년 엘리자베스가 열 세살 때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는 곧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일부 역사가는 엘리자베스가 그 곳에서 경험한 감정적인 위기가 나머지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당시 시모어는 나이가 40세에 가까웠지만 "매력적인 남성"이었고, 열 네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소란스럽게 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캐서린 파가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캐서린은 그 일로 토마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A.D. 1548년 5월에 엘리자베스는 그 집에서 쫓겨났다.
이복 남동생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 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로마 가톨릭 교회신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 탑에 갇히기도 하였고 숱하게 고문과 감시를 당했으며 살해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성격을 가졌던 그녀는 결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거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외국어에 밝고 운동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2) 엘리자베스 1세 즉위
A.D. 1558년 11월 17일에 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엘리자베스가 뜻하지 않게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의 나 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국왕 대관식에서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여왕 대관식의 전통을 따라 머리를 풀었다. 당시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상징했다.
3) 엘리자베스 1세의 정치.
엘리자베스는 추밀원(樞密院)과 균형적 관계를 유지했다. 엘리자베스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모욕하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경험들을 충분히 흡수했다.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의심해보고 또 결정을 재촉하는 추밀원 사에에 균형이 계발된 것이다. 이것은 거의 집단적인 리더십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은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이다. 메리 1세의 로마 가톨릭 복고 정책 그리고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등의 성공회 주교들을 포함한 약 300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으로 순교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종교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극단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A.D 1559년 헨리 8세의 반(反)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흔히 수장령이라고 부르는데, 왕위지상권이라고 하는 게 맞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영국 성공회를 다시금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여 자신을 영국 성공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물론 왕위지상권은 근대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에 속한 성공회 교회들은 영국 왕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교회)들이기 때문에, 성공회를 영국국왕이 수장인 교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엘리자베스는 1세는 대내적으로는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는 성실청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통해 통제하였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 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 또는 튜더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 근로 의욕을 꺽을수 있는 구걸과 개인적인 자선 행위를 금지한다.
② 구빈 세를 제정하여 사회 복지 비용을 마련한다.
③ 노동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마련하여 일을 하게하고 노동 능력이 없 는 사람(장애인,
노령자)등은 구제비로 마련한 사회복지 비용으로 돌보았다.
④ 교화소를 두어 노동 의욕이 없는 자들은 강제 노역으로 처벌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실시한 정치 방식의 핵심은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정치였다. 그녀는 1년에 두 번은 순시를 하면서 민중들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이다.
4) 반 에스파냐 정책.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A.D.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는 그 후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의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A.D. 1587년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모의된 배빙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되자 에스파냐는 잉글랜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A.D. 1588년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가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출동시켜 잉글랜드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무적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교묘한 작전을 사용한 영국 함대에 패하고, 그 후 폭풍우를 만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에스파냐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고, 유럽에서의 주도권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반면 잉글랜드는 이러한 내적 발전과 외국과의 대결 속에서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 영국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 활동을 즐길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 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의 동양적식 주식회사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 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부르게 된다.
5)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팔았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의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反)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조종법도 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A.D. 1596년~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들의 의욕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엘리자베스 여왕의 충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Earl of Essex)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른다.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총독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다.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A.D.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런던에서 겪은 반란의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우울증과 지병이던 노인성 질환들이 심각하게 발생되면서 기력을 잃어가던 그녀는 A.D. 1603년 3월 24일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2. 청교도 신앙 형성.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그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불렀다. 원래 이 말은 'precisian'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매우 까다로운 사람 혹은 '아주 꼼꼼한 형식주의자들'이라는 의미로서 그들을 비아냥거리는 욕설로 사용된 용어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천카톨릭의 많은 정치적, 종교적 신조들을 거부하였으나 국가뿐 아니라 교회까지 통치하려는 야욕 때문에 개혁가들을 극단주의로 물아 부치며 그들의 주장을 배격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종교적 모형에 순응하도록 촉구했다.
A.D. 1559년 부활절이 지난 후 그녀는 공공기도서를 개정하면서 '종교 통일령'을 발포했다.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자들을 주교들로 임명하면서 A.D. 1563년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것이 성공회 신앙고백서인 39개 조항(39 articles)이다. 이것은 A.D. 1552년 에드워드 6세 때 만들어진 42개 조항을 약간 수정한 것으로서 교회 수장권 문제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칼빈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는 개혁가들과 카톨릭 양측을 다 만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권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청교도'로 비아냥거림을 받는 개혁가들은 성직자의 성의착용 문제와 오르간 연주, 세례 줄 때 성호를 긋는 것,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는 것, 그리고 종교적 축일을 폐지하고 주일을 성수 할 것, 또한 성성이나 성유물 숭배 등을 철저히 금지하고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생활을 회복하자는 등 잉글랜드 교회의 성직자 회의에서 A.D. 1563년 청교도 조항(Puritan Articles of Convocation)이라는 문서로 다루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 교회 개혁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추구하려는 개혁가들'이 공식적으로 '청교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주장은 성직자 회의에서만이 아니라 왕권에 의해서도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더 이상 정치권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혁하자는 생각을 버리게 되고 이때부터 새로운 방법으로 교회의 개혁 사상을 펼치게 된다. 그것이 전에 없던 열정을 가지고 강단에서의 설교와 문서 출판 및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 즉 프랑스의 종교개혁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개혁의 물결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상향식 개혁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실제 청교도주의의 역사는 영적 성장과 순수한 종교적 문제에 관한 신앙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게 된다. 따라서 청교도 운동은 권위 있는 어떤 기관에 의한 역사라기보다는 경건한 교회와 경건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신앙인들의 활동이 되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후반기부터 단독적인 정당이 결코 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초기 사역에 있어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같은 목적과 이상과 마음으로 철저한 개혁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잉글랜드의 얼굴을 새롭게 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게 된다. 그들을 따라 다니는 핍박과 가난 및 질병의 연속 가운데서도 그들은 교회의 영적 각성과 경건한 종교의식과 생활은 교회는 물론 국가와 세속적인 삶의 체계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양심의 위치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양심의 법들과 자유에 대한 바른 신학이 군주를 대항하게 하였으며, 군주의 발밑에 놓이지 않는 교회의 독립성과 신앙의 주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3. 제임스 6세(James 6)
이름은 찰스 제임스 스튜어트(Charles James Stuart)이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Mary I of Scotland)와 단리 경(Lord Darnley)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 1세가 영주들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A.D. 1567년 7월 24일 돌이 갓 지난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James VI)로 불렸다.
A.D. 1589년 8월 덴마크의 왕인 프레데리크 2세(Frederick II)의 딸 앤(Anne of Denmark)과 결혼했으며, A.D. 1594년에 맏아들 헨리(Henry)를 낳았으며, A.D. 1600년 둘째 아들 찰스(Charles, 뒷날의 찰스 1세)를 낳았다.
A.D. 1598년 아들 헨리를 위해 왕권에 관해 논한 <자유로운 군주권의 참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을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기초해 왕은 의회의 조언이나 승인이 없이 자유롭게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D.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가서 그해 7월 25일 왕위에 올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공동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렸는데, 스튜어트 왕가에서는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앤(Anne) 여왕 때인 A.D.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가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통의 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있어 ‘왕관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고도 불리는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추진했다.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King of Great Britain)이라고 불렀으며, 유나이트(the Unite)라는 공동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기인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와 스코틀랜드의 국기인 성 앤드류의 십자가(St. Andrew's Cross)를 합하여 유니언 잭(Union Jack)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영국의 국기를 만들어 통일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의 완강한 반대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A.D. 1604년 국교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영어로 만들라고 지시하여, A.D> 1611년 오늘날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 KJV)이라고 불리는 <흠정역 성서(欽定譯聖書)>를 간행했다. <흠정역 성서>는 19세기 말까지 영국 국교회에서 사용된 유일한 공식 영어 성경이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와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다. 그는 의회의 특권과 관행을 무시했고, 사사건건 의회와 대립했다.
A.D. 1622년 화이트홀 궁전(Palace of Whitehall)을 확장하는 등 재정 지출을 늘려 의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하여 국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다. 그는 A.D. 1604년 국교회와 청교도 등의 종교계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가톨릭과 청교도의 양극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가톨릭과 청교도의 반감을 사서, A.D.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Guido Fawkes라고도 함) 등의 가톨릭 세력이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적대적 관계를 가져왔던 에스파냐와 화해하면서 유럽에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는 적국의 배를 공격하여 화물을 약탈하는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반(反)-에스파냐 동맹 관계에 있던 오스만제국과는 단교(斷交)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의 거센 반발로 국가가 부담하던 대사관 경비 등을 상인들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제국과의 국교는 유지하였다.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개척이 시작된 것도 그의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A.D. 1607년 5월 14일 북아메리카에 영국인의 정착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고 불렸다. A.D. 1620년에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집단 이주하기도 했다.
제임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의 시어볼즈 별궁(Theobalds House)에서 병사했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 찰스 1세
1) 찰스 1세의 출생.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찰스는 어린시절 병약해서 부친이 A.D. 1603년 영국 왕에 즉위했을 때도 여행에 따르는 부담 때문에 당분간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어야 했다. 형 헨리와 누이 엘리자베스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A.D. 1612년 헨리가 죽고 이듬해 엘리자베스마저 라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을 떠나자 몹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평생토록 찰스는 약간의 말더듬이에다 스코틀랜드 억양을 버리지 못했다. 키가 작았으며,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데이크 경이 그린 초상화에서보다 실제로는 위엄이 덜했다. 늘 수줍음을 탔으며 주위사람들에게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비쳤다. 신앙심이 돈독한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정 내에 저속한 분위기가 현저히 사라져갔다.
2) 찰스 1세 즉위.
A.D. 1625년 아버지 제임스에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는 더욱 강력한 종교정책을 펼치며 교회를 자기 손아귀에 쥐려 했습니다. 그는 왕의 통치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부왕의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찰스 1세는 고향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없애고 감독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당시 캔터베리 주교였던 라우드로 하여금 공동기도서를 작성케 하고 스코틀랜드 수도 에딘버러의 성 자일레스 교회로 보내 감독식 예배를 강행했습니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완강히 저항했다.
A.D. 1638년 2월 28일 찰스에 반기를 든 장로교도들이 자신들만의 언약서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을 ‘언약도’ 혹은 ‘계약파’로 부른자다. 이 언약서엔 그리스도의 왕권과 수장권(首將勸) 및 성경의 절대 권위와 장로정치를 끝까지 수호하자는 다짐이 들어 있다. 이 언약서를 만들 때 참가자들은 혈서로 서명을 했다.
찰스 1세는 이 소식을 들고 언약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부터 국왕의 군대와 언약도들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찰스는 먼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의 협조를 구하지만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요구를 반대했다. 이로 인해 A.D. 1642년 잉글랜드는 내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시민전쟁’이라 부른다. 처음에 의회군은 열세였지만 스코틀랜드 군대의 지원을 받아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를 제압한다. 국왕과 왕당파는 할 수 없이 A.D. 1643년 장로교를 국교로 한다는 비밀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3) 의회와의 충돌
찰스1세는 A.D. 1625년 3월 왕위에 오른 후 처음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당시 찰스 1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버킹엄 공작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즉각 분쟁이 발생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명백히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외교정책이나 전쟁비용 등에 관해 의회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하원은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왕에 동조하는 세력은 고교회파(高敎會派)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원고 없이 즉석에서 하는 기도나 설교방식을 옹호하고 있었던 반면, 고교회파는 기도문을 통한 기도와 예배의식의 엄격한 준수를 더 강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찰스 1세와 하원 사이에 반목이 생겨 의회는 톤세(稅)와 파운드세 등의 관세부과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경우에만 예외로 했다. 관세부과권은 그 이전의 군주들에게는 종신토록 부여된 권리였다.
찰스1세는 하원의 일부 지도자들을 출신 지방의 주장관으로 임명해 의회에서 교묘히 축출했음에도 불구하고 A.D. 1626년 2월 2번째로 소집된 의회에서 의원들은 왕의 정부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찰스 1세는 불법임을 잘 알면서도 강제로 국채를 끌어들였다 국채모집에 불응한 수석재판관을 해임하고 70여 명의 기사와 젠트리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고압적인 조치들은 국민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켰고 이 문제는 다음 번 의회에서 폭넓게 논의되었다.
A.D. 1628년 3월 3번째로 의회가 열릴 무렵, 라 로셸의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버킹엄 공작의 원정군이 위그노 전쟁에서 무참히 격퇴 당했으며, 정부는 완전히 신뢰를 상실했다 하원은 즉시 국왕이 멋대로 부과한 세금과 인신구속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어서 권리청원을 마련했다. 권리청원은 4가지 원칙을 세웠다.
1.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하지 말 것.
2. 정당한 이유 없는 구금의 반대.
3. 백성들의 집이나 소유지에 병사를 숙영시키지 말 것.
4. 평화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이 청원의 승인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청원에 정식으로 동의했다. A.D. 1629년 1월, 4번째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했다. 하원은 교회 내에서의 이른바 '가톨릭 관행'의 부활에 반대하고,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 국왕 직속관리들이 톤세와 파운드세를 부과하는 데 반대하고 나섰다.
A.D. 1629년 3월 2일 찰스 1세는 의회의 휴회를 명령했으나, 이에 앞서 하원의장이 의장석에 착석한 채 국왕의 행위를 비난하는 3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찰스 1세는 이 같은 의회의 조처를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영국을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더이상 의회의 보조금 승인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프랑스 및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왕실의 채무는 100만 파운드가 넘었지만, 이로써 확대된 무역에서 생기는 관세수입과 전통적으로 국왕의 수입원이 되어왔던 강제징세를 합치면 평화시 수입원으로는 충분할 것이었다. 또한 왕실지출을 절약하려 애썼으며, 해군 유지를 위해 소위 선박세를 부과했는데 A.D. 1634년 항구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내륙 도시들까지 부과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재무법원 소속 재판관들이 이를 적법한 것으로 인정했으나 A.D. 1638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완강한 저항이 일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으므로 국민이나 의회가 아닌 오직 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양부(養父)'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종종 나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주로 행정개혁을 지시할 때는 열정적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군업무와 궁정의 세세한 일에까지 개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찰스가 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 A.D. 1639년까지 대체로 왕국은 어느 정도는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버킹엄이 공작이 죽은 뒤 왕의 측근 고문관이 된 두 사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유능한 아일랜드 총독인 스트래퍼드 백작의 자문에 따라 찰스는 A.D. 1640년 4월에, 나중에 단기의회로 알려진 의회를 소집했다. 소집 목적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회는 먼저 정부에 대한 불만사항을 논의할 것을 주장하며 전쟁 재개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5월 5일 찰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고 선박세 징수는 계속 시행되었으며 전쟁도 계속되었다. 8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진격해왔을 때 찰스의 군대는 뉴번에서 속수무책으로 포격당했다. 2차례나 패한 것에 상심한 찰스는 귀족회의를 열었고 그들의 자문에 따라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장기의회는 A.D. 164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되었다.
새로 선출된 하원의원들은 단기의회 의원들만큼이나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최근에 찰스가 시행한 조처들을 비난하고 스트래퍼드를 비롯한 각료들을 반역죄로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찰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3년마다 1번씩 의회를 개최한다는 법안(Triennial Act- 3년 회기법)에 동의했다.
찰스 1세는 자신이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스트래퍼드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으나 이 일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A.D. 1641년 5월 12일 스트래퍼드가 참수대로 향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찰스는 의원들의 동의 없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는 법령에 동의해야만 했다. 또한 선박세와 그밖의 자의적인 금융조처가 위법임을 선포하며 지난 11년 동안의 통치방식을 전면적으로 비난하는 법안도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양보하는 한편으로 8월에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반(反)의회파를 규합, 지지세력을 구축하려 했고 이를 위해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완전한 확립에 동의하고 스코틀랜드 신분의회 의원들을 왕실관리로 지명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는 사이 휴회기간이 끝난 의회는 런던에서 다시 소집되었다.
A.D. 1641년 11월 22일 하원에서는, 즉위 이후 찰스의 실정을 낱낱이 밝힌 대간의서(Grand Remonstrance)를 159:148로 통과시켰다. 가톨릭교도인 왕비가 탄핵될까 우려한 찰스는 극단적인 행동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상원의원 1명과 하원의원 5명을 반역죄로 체포할 것을 명하고 400명을 이끌고 직접 체포하러 나섰다. 그러나 의원들은 의사당을 빠져나가 런던 시내로 숨었다. 일이 실패하자 찰스는 1월 10일 잉글랜드 북부로 떠났다. 왕비는 2월 찰스를 위해 왕실의 귀금속 등을 저당 잡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났다.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7월에 와서 양 진영은 모두 긴급히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찰스는 8월 22일 공식적으로 노팅엄에서 왕실 상비군을 조직했고, 곧 온 나라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4) 내란
A.D. 1642년 9월 의회파 군대의 사령관 에식스 백작이 중부지방을 맡기 위해 런던을 떠났고, 찰스는 웨일스 변경의 군대를 충원하고 병사를 양성하기 위해 슈루즈버리로 사령탑을 옮겼다. A.D. 1643년 왕당파 진영은 요크셔와 남서부 등지에서 승승장구했다. 찰스는 궁정과 군사령부를 옥스퍼드로 옮기고 자신은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냈다. 그러나 의회군은 스코틀랜드의 서약파와 동맹을 맺고, A.D.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에 입성했다. 찰스의 군대는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런던에 집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찰스는 옥스퍼드 서부 및 남서부 전역에 걸친 내부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고, 조카인 루퍼트 공에게 나머지 지역의 기병대 지휘를 맡겨 급파했다. 약 1년간은 찰스의 진영이 우세했으나 결국 여러 차례 평화를 타진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무 소득이 없었으나 의회파에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A.D. 1645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6월 14일 토머스 페어팩스와 그의 부관 올리버 크롬웰이 조직한, 고도의 훈련과 전문성을 갖춘 신형군(New Model Army)이 네이즈비 전투에서 찰스와 루퍼트 공을 격파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과 가을 내내 왕당파 군대는 기나긴 패배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11월 5일 찰스는 옥스퍼드로 돌아왔으나 A.D. 1646년 봄 옥스퍼드가 포위되었다. 4월말 변장을 한 찰스는 2명의 동행인과 함께 옥스퍼드를 떠나 5월 5일 뉴어크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약파 진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A.D. 1647년 1월 서약파는 의회파의 승리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로 떠나면서 찰스 1세의 신병을 의회파에 넘겼다.
A.Dd. 1467년 8월, 런던 행군이 있은 후 햄프턴 궁으로 옮겨진 찰스는 2명의 자녀 헨리와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그는 11월 11일 탈출했으나 찰스를 데리고 저지를 거쳐 프랑스로 가려던 친구의 계획이 어긋나는 바람에 아일오브와이트로 가게 되었다. 충실한 의회파인 이곳의 주지사는 찰스를 캐러즈브룩 성에 가두고 감시했다. 이곳에서 찰스는 군대 지도자와 잉글랜드 의회 및 스코틀랜드인들과 복잡한 협상을 벌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한쪽에 약속한 내용과는 반대되는 것을 다른 쪽에 약속했다.
A.D. 1648년 8월 찰스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인 최후의 군대가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제2차 내란이 끝났다. 군대는 이제 찰스 왕을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이자 참사의 원인으로 비난하고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A.D. 1648년말 햄프셔의 허스트 성으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기간에 윈저 성으로 이송되었고, A.D. 1649년 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에 설치된 특별 법정에 섰다.
5) 찰스 1세의 죽음.
찰스 1세는 대역죄와 왕국에 대한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는 법정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국왕은 지상의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재판받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변호도 거절하고 자신은 '영국민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노라고 항변했다.
찰스 1세는 A.D. 1649년 1월 27일 사형이 발표되었다. 폭정, 반역, 살인, 사회에 해악을 끼친 죄로 처형 명령이 내려졌다. 사형은 A.D. 1649년 1월 30일 화요일 아침 화이트 홀의 연회장 바깥에 세워진 처형대에서 집행되었다. 찰스는 여전히 자신은 '국민의 순교자'임을 주장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윈저 성에 묻혔다.
청교도 운동 -3
1.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는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 A.D. 1642~1651)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A.D.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시작되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A.D. 1653년에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초대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A.D. 1658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전권(專權)을 행사했다.
1) 크롬웰의 출생.
크롬웰은 A.D. 1599년 4월 25일 영국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헌팅던(Huntingdon)에서 젠트리(Gentry)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크롬웰(Robert Cromwell, A.D. 1560-A.D. 1617)은 지주(地主)로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A.D. 1533~A.D. 1603) 때에 하원의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크롬웰은 헌팅던(Huntingdon)에서 그래머스쿨(Grammar school)을 다니다가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Sidney Sussex College)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런던의 링컨즈 인(Lincoln's Inn)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A.D. 1620년 런던의 부유한 상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Elizabeth Bourchier, A.D. 1598-A.D. 1665)와 결혼해 5남 4녀를 낳았다.
2) 크롬웰의 철기대(鐵騎隊)
크롬웰은 A.D. 1628년 헌팅던(Huntingdon)에서 하원의 의원이 되었으나, 찰스 1세(Charles I, 재위 A.D. 1625~1649)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하여 그 뒤 11년 동안 소집하지 않았다. A.D. 1631년 크롬웰은 소유한 땅을 처분한 뒤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엘리(Ely)로 옮겼다. 이 시기에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세금 및 부과금, 종교 정책에 비판 의식을 지닌 청교도(淸敎徒)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A.D. 16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크롬웰은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케임브리지(Cambridge)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A.D.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월 에지힐(Edgehill)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워 군사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켰으며, 그의 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A.D. 1643년 7월 게인즈버러(Gainsborough) 전투, 1644년 마스턴무어(Marston Moor) 전투 등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기병대는 철기대(鐵騎隊, Ironsides)라는 명성을 얻었다. A.D. 1645년 의회파는 그의 부대를 본떠 신형군(New Model Army)을 편성했으며, 크롬웰은 이를 이끌고 네이즈비(Naseby)와 랭포트(Langport)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646년 찰스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Oxford)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A.D.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A.D.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A.D.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3) 공화국 의장 크롬웰.
크롬웰은 공화국에서 국무회의(Council of State) 의장이 되었고,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재분배, 법률상의 완전한 평등 등을 요구한 수평파(Leveler)를 탄압하였다. 그리고 A.D. 1649-A.D. 1651년에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섰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A.D. 1660~A.D. 1685)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크롬웰은 A.D. 1650년 9월 던바(Dunbar)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고 A.D. 1651년에는 잉글랜드로 공격해오는 찰스 2세(Charles II)를 우스터(Worcester)에서 물리쳤다. 결국 A.D. 1651년 10월 찰스 2세가 프랑스로 탈출하면서 1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은 끝맺게 되었다.
A.D. 1651년 크롬웰은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의 활동을 제한하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s)를 제정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의회에 대한 군대의 불만이 높아지자 1653년 4월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7월 4일 자신이 지명한 사람들로 의회(Barebone's Parliament)를 구성했다. 하지만 12월 지명의회마저 해산시키고,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호국경(Protectorate) 정치를 시작하였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4) 호국경 크롬웰의 죽음.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A.D. 1654년 9월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A.D. 1655년 1월 해산하였고 A.D. 1656년 9월에 소집된 의회도 A.D. 1658년 2월에 다시 해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법률 개혁과 교육 진흥 등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라틴어 교육을 담당하는 중등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A.D. 1655년 왕당파의 반란이 다시 일어나자, 전국을 10여개의 군사구역으로 나누어 군정장관을 배치하는 등 군정(軍政)을 강화하였다. 크롬웰은 A.D.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A.D. 1626~A.D. 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A.D. 1608~A.D. 1670)에 의해 A.D.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내걸려졌다.
2. 청교들의 항해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이 된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와 그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1649)는 왕권신수설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하였다. 이에 대해 일단의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 메이 플라워 호의 항해.
1620년 8월 5일, 메이플라워 호와 스피드웰 호가 런던 남서쪽 사우샘프턴 항구를 떠났다. 메이플라워 호는 180톤, 스피드웰 호는 60톤으로서, 두 척 다 돛배였다. 그러나 항해는 좌절되었다. 스피드웰 호에 물이 새어 되돌아온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A.D.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 호만 플리머스에서 출항하였다. 스피드웰호가 두 차례 출항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이 배를 버리고 승객들은 메이플라워호에 몰려타게 된 것이다. 그 배에는 102명의 이주민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행선지는 신대륙 아메리카였다.
4,425㎞에 걸친 66일간의 여정은 험난했고, 승객 중 하나인 윌리엄 버튼과 선원 하나가 죽었다. 엘리자베스 홉킨스라는 승객은 항해 중에 아들을 낳아 '오세아누스'라는 세례명을 붙였다.
항해하는 도중 배의 한 부분이 파손되는 일도 있었으나, 출발에서 9주간이 지난 A.D. 19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 호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선상의 질병으로 시달리면서 66일간의 어려운 항해를 거쳐, 케이프코드 끝의 낚시 바늘 모양의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은 A.D. 1920년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의 일이었다.
2) 미국 건국의 기초.
(1) 플리머스의 서약.
그들은 상륙 지점인 지금의 보스턴 근방에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자신들이 출항한 추억의 땅, 영국의 플리머스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었다. 이들은 훗날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순례 시조)'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신대륙에 상륙하기 전에 서로 계약을 맺고, 통치 형태의 기본을 정한 터였다. 이른바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이 서약에는 미국 독립과 헌법 정신의 기초가 된 것이다.
신대륙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낙원이 아니라 자연의 혹독함이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모진 추위로 해서, 그해 12월 말부터 다음해 봄에 이르기까지 일행 중 약 절반이 죽었다.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그들에게 인디언들이 옥수수를 나누어 주어 겨우 연명하며 겨울을 났다.
봄이 되어 산과 들에 나무와 풀의 새싹이 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힘을 합쳐 신대륙의 식민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해안에서 언덕에 이르는 길 양쪽에는 초가지붕의 집이 세워졌고, 처음으로 지어진 집회소에서는 감사 예배를 드렸다.그 무렵 청교도들은 자유롭게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개간하는 한편, 우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당을 지었으며, 청교도 정신에 입각하여 건전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신대륙에 뿌리내린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움은 점차 극복되고, 미대륙의 식민은 진전되었다. 현재도 런던과 포츠머스 등 영국에 있는 지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주로 영국의 국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그중에는 청교도뿐 아니라 퀘이커 교도와 구교도들도 많았다. 18세기에는 그들을 중심으로 북부에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성립되었고, 마침내 13개 주 식민지로 발달하여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 미국 건국 기초
청교도들의 메이플라워호의 항해는 미국 건국 신화 중 하나가 되었다. 160t의 메이플라워호에는 약 30명의 선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남성, 여성, 어린이 통틀어 약 102명의 청교도가 함께 여행 중이었는데, 이들은 주로 노팅엄셔에서 영국 국교회와 단절하고 나와 국가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레이덴에 피신했던 추방당한 분리주의자 청교도 회중 가운데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메이플라워호는 폭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11월 11일에 케이프 코드(오늘날의 매사추세츠)에 상륙했으며 12월 21에는 영구 정착촌을 세웠다. 항해를 무사히 마침으로써, 뉴잉글랜드의 초기 영국 정착촌에는 강한 청교도적인 성향과, 중심 권력으로부터의 완강한 독립심과, 신이 특별히 가호를 내려 준다는 의식이 깃들었다. 몇 명의 청교도들이 바른 신앙 위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지 300년도 채 못 되는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 되었다.
(3) 신앙의 기초.
청교도들은 프리마우스에 도착하여 한해 겨울을 지낸 다음에 농사를 지어 첫 추수를 하게 되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져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d의 기원이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 때 옥수수 다섯 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옛날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정착할 때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를 회상했다.니다. 도착해서 한해 겨울을 지낼 때 먹을 것이 없어 1인당 옥수수 5개씩을 배급받아 그것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한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 도착했던 사람 중의 반이 죽었고 산 사람도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건강한 사람은 일곱 사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추위와 질병과 인디언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그 다음 봄이 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영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청교도들은 그 곳에 그대로 남아서 땅을 일구어 인디언들이 자신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어 수확을 했고 굶어죽지 않도록 배려한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추수한 곡식, 과일과 야생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이다.
A.D. 1620년 12월 26일 찬 겨울 미동북부 해안인 풀리머우스에 도착한 그들의 일곱 가지 감사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했다.
둘째. 평균 시속 2마일(걷는 속도 보다 느리다)의 항해였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
을 감사했다.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 했다.
넷째. 폭풍으로 중심 되는 큰 돛이 불어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했다.
다섯째. 여자들 몇이 파도 속에 밀려들어갔으나 모두 구출됨을 감사했다.
여섯째.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지를 찾지 못해 한 달을 바다에서 방황했으나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상륙지점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했다.
일곱째. 고통스러운 삼 개월 반의 항해 중 단 한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했다.
첫댓글 후원참여가 전혀 안되고 있습니다
공과금.지병'치료비.먹거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6번의 인슐린과 혈당체크 하루에 내몸을 10번을
찌르며 살다보니 많이 지치고 저혈당 쇼크등으로
머리도 이젠 예전같지 않고 어눌해지고 있어요...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매일 이걸 해야하나 갈팡질팡하고 갈등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인데 요즘은 너무힘드네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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