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림사거리
1970년대 조세희의 난장이 가족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에 살았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살았다. 이 동네에도 난장이 가족이 살았다. 관악산 자락에 닥지닥지 붙은 작은 집들은 낙원과 멀었고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살았다.
관악구는 애초 경기도 시흥군에 들어 있었다. 관악산 북쪽 사면의 땅이다. 관악산이 바위가 많아 보기만 좋지 그 아래 산자락에는 붙여먹을 만한 땅이 별로 없다. 큰 마을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이 빈한한 땅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버려진 땅'이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서울에 유입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산자들이었고, 이들이 무허가의 판잣집을 지어 살 수 있는 땅으로 관악산 아래가 마땅했던 것이다. 이 일을 정부도 거들었다. 청계천변을 비롯한 서울 한복판에도 판잣집이 들어섰는데 이들을 몰아다 관악산 아래에 밀어넣었다. 관악구 신림동, 봉천동, 난곡동 일대다. 달동네라는 말도 이 즈음에 만들어졌다. 이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1973년 7월 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이다. 관악구청장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관악구는 6만6759동의 건물이 있으나 그 가운데 정상적인 것이 2만8683동으로 전체의 42.9%밖에 안 되며 나머지 57.1%인 3만8076동이 불량 건물이라는 점 하나만 들어도 이곳이 얼마나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는 지역인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 주택들의 대부분이 산비탈이나 고지대에 밀집해 있어 56만6820명의 주민 중 50.5%밖에 급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장마철이면 축대 붕괴, 산사태 등이 잦고 화재 위험이 많으며 소방도로도 뚫리지 않아 화재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취약점도 안고 있다."
관악구민의 절반 이상이 난장이 가족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취약점' 개선을 위해 무허가 판잣집들을 강제로 철거했다. 쫓겨나는 이들에게 시영 아파트 입주 딱지가 주어졌으나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난장이 아버지처럼 굴뚝에 오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살았던 1980년대 초반의 관악구는 거대한 공사장 같았다. 무허가 판잣집들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땅에는 제법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천은 그 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했다. 관악구를 관통하여 강남과 구로공단을 이어주는 남부순환도로는 2호선 지하철 공사로 번잡했다.
나는 1982년 겨울부터 14개월 동안 공군사관학교(지금의 보라매공원 자리)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했다. 가슴팍에 방위 마크가 달린 '개구리복'을 입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퇴근을 했다. 군 면제면 신의 아들, 방위면 장군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당시 공군사관학교 방위들은 빈자의 아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방끈이 짧아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방위가 되었다. 이들은 수시로 탈영 등의 사고를 쳤다. 헌병에게 잡혀 들어온 방위의 변명은 이런 것이었다. "가족 중에 돈벌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노가다 뛰느라 출근 못 했다." 난장이 가족은 그렇게 살았다.
퇴근을 하면 방위 동기들과 신림시장에 순대를 먹으러 갔다. 신림시장은 신림사거리에 있었다. 시장은 지붕이 덮여 있었다. 나무 골조에 양철 천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붕 안의 공간은 높고 넓었다. 시장 한 귀퉁이에서 보면 건너편의 사람이 가물거렸다. 그 넓은 시장에 여러 장사꾼들이 칸칸이 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순대볶음을 파는 좌판이 10여 곳 있었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불판을 앞에 두고 앉았고, 그 앞으로 손님이 앉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다. 불판에 순대와 채소를 볶아서 접시에 담아내었다. 가난한 방위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쌌다.
시장 건물 옆에 신림극장이 있었다. 2본 동시 상영을 하는 극장이었다. 개봉관에는 절대 걸릴 것 같지 않은 요상한 이름의 에로 영화 사진이 늘 붙어 있었다. 비디오가 보급되기 전 '야동에 대한 욕구'는 이런 극장에서 해결됐다. 그러니 객석에는 남자들만 가득하고 담배 연기가 뿌옇게 스크린을 가렸다.
극장 근처에는 양아치들이 있었다. 서너 명이 에워싸고는 돈을 요구했다. 앞에 선 양아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었다. 커터 칼이 들어있다는 뜻이었다. 극장을 끼고 도는 골목 입구에는 야바위꾼이 있었다. 그 곁으로 늙은이들이 윷을 놀기도 했다. 물론 그 윷판에는 술주정뱅이도 있었고, 시비 끝에 패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장 쪽의 도림천변에는 작부집이 줄지어 있었다. 가건물에 간판도 없이 유리창에 '맥주 양주'라고 썼다. 작부집 골목 입구에는 경찰서에서 세운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술만 파는 작부집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봄 학기 개강 무렵이 작부집의 대목이라는 말을 그때에 들었다.
관악산에서 내리는 개천 하나가 서울대 옆을 지나 신림사거리 쪽으로 흐른다. 도림천이다. 도림천의 상류를 바라보고 왼쪽이 봉천동, 오른쪽이 신림동과 난곡동이다. 도림천을 따라 서울대 쪽으로 길이 나 있고, 남부순환도로에 이르는 곳을 두고 신림사거리라 한다. 그러니까 신림사거리는 관악구의 달동네 주민들이 밖으로 나다니는 길목 중 하나다. 신
림사거리에서 왼쪽으로는 구로공단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낙성대 고개를 넘어 강남에 닿게 된다.
1970년대 구로공단은 '수출역군'이, 삽질이 한창이었던 강남에서는 '노가다'가 필요했다. 달동네 주민들은 아침이면 신림사거리까지 나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흩어져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신림사거리를 거쳐 자신들의 달동네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신림사거리는 달동네 주민들에게 예전 농촌에서 살 때의 읍내 비슷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신림사거리에 시장과 극장, 작부집, 동네 양아치, 야바위꾼, 윷놀이 늙은이, 술주정뱅이 등등이 있었던 까닭이다.
1985년 공군사관학교 자리가 보라매공원으로 바뀌었다. 그 무렵에 나는 신림동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았다. 1990년대 들어 신림시장과 신림극장이 헐렸다는 말을 들었다. 2000년대 초반 어느 날 신림사거리에 갔다가 길을 잃을 뻔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젊은이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술집과 가게의 면면을 보면 이대앞 또는 건대앞과 흡사했다. 젊은이들이 유흥의 거리로 신림사거리를 소비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부집들은 어찌 바뀌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태 전 신림동 순대를 취재하기 위해 신림사거리에 갔다. 1980년대 초반 내가 방위였을 때 먹었던 신림시장의 순대가 그 사이에 서울의 명물 음식이 되었다. 신림시장 자리에 상가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 건물에 순대 가게들이 집단으로 들어가 영업을 하고 있다. 이를 신림동 순대 타운이라 부른다. 2개 동에 나뉘어 60여 순대 가게가 있다.
신림시장에 '철판에 순대와 채소를 볶은 음식'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순대 대중화가 시작된 딱 그 지점이다. 신림동 순대의 조리법은 원조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철판에 순대와 채소를 함께 넣고 볶는 음식은 신림시장 외에도 서울의 여느 시장 골목에서 흔히 보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 신림시장의 순대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 규모가 상당해 어떤 특별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순대 먹는 방식에 주목해볼만하다. 신림동 순대는 순대보다는 당면, 가래떡, 양배추, 당근, 깻잎 등이 더 많이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여기에 기름을 두르고 볶으면 넉넉한 안주가 된다. 순대볶음에 술 한잔 하고 나서 밥을 볶으면 끼니까지 해결할 수 있다. 신림동은 가난했고 그래서 안주 겸 끼니의 순대볶음이 번창했던 것이다.
방위 소집해제 이후 나는 신림동 순대를 먹은 적이 없다. 방위라는 게 그렇게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그때에 여러 방위들과 먹었던 순대도 추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순대볶음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순대 타운의 한 가게에 앉아 순대를 먹다 말다 하며 이러저리 훑어보는데, 간판이 온통 전라도 지명이란 게 눈길을 끌었다.
전라도는 농업 지역이다. 한국 산업화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 유입 인구 중에 전라도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관악구의 달동네에 전라도 사람들이 당연히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전라도 지명의 간판을 달았을 것이다. 간판의 지명은 현재에도 읍내가 있거나 적어도 읍내의 흔적이 있는 소도시의 것이다. 신림사거리가 달동네의 읍내였다는 기억을 간직하고픈 사람들이 이 동네에 아직 많다는 증거다. 아름다워 보이는 관악산의 골짝골짝에는 여전히 무허가 건물들이 있고, 그 납작한 집에 난장이 가족이 살고 있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 순대의 역사.. '창자' 뜻하는 말이며 옛이름은 '핏골집'
돼지고기도 귀하던 때 서민음식 정착
순대는 돼지의 작은창자로 만든다. 작은창자를 뒤집어 말끔하게 씻은 다음에 선지와 숙주, 우거지, 찹쌀 등을 채워 찐다. 동물의 내장에 피나 고기 등을 넣어 만드는 음식은 육식을 하는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데, 우리의 조상도 오랜 옛날부터 순대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순대는 원래 창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요즘 우리가 순대라 부르는 음식의 옛 이름은 핏골집이다. 발음하기에 섬뜩한 느낌을 준다.
순댓국을 이르는 말로 혈장탕(血臟湯)이라는 단어도 있다. 옛날 기록의 순댓국은 돼지내장탕으로 묘사되어 있다. 듣기 거북한 핏골집과 혈장탕을 버리고 대신에 돼지 창자를 뜻하는 순대를 그 의미를 확장해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순대가 대중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순대를 북한 음식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돼지를 치는 한반도 전역에서 순대를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넉넉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30~40㎏ 정도였던 한반도 토종 돼지의 크기를 감안하면, 창자는 매우 작고 피도 많이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니 순대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순대가 서민 음식의 상징이 된 것은 한국 양돈 산업이 제법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돼지를 많이 키워봤자 당시 서민들에게 돼지고기는 여전히 귀한 것이었다. 맛있는 살코기인 안심과 등심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한국인은 지방이 많은 삼겹살과 뼈에 겨우 살이 붙어 있는 돼지갈비를 맛있는 부위라 여기고 구워 먹었다. 다리살은 돼지불고기, 발은 족발이 되었다. 이들 부위조차 먹지 못하는 서민들에게는 돼지머리와 내장이 주어졌다. 시골 오일장에 순대 골목이 형성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렇게, 순대는 대한민국 서민의 음식이 되었다.
돼지의 피는 돼지 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비릿한 피 냄새가 나다가 오래둘수록 쇳내가 심해진다. 철분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선한 돼지 피를 익히면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 그러나 신선한 선지로 만드는 순대를 만나기는 어렵다. 돼지 피가 위생적으로 관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첫댓글 순대가그런 음식이었군요.
어째튼 지금도 잘먹어요.평소에도 포장해서 집에서도 먹고,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