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앓는 조국강산
부여 답사를 마치고 이날 서울시 서천 연수원에서 묵었다. 함께 여행한 박 선생 딸이 서울시에 근무해 공무원과 가족이 이용하는 연수원을
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방도로를 따라 한시간 쯤 바닷가를 끼고 산길로 들어서니 해변에 연수원 건물이 나타난다. 휴양지의 고급 리조트
분위기인 연수원은 노을관, 하늘관, 창의관, 다산관 등 몇 개 동으로 나누어져 있고 사우나, 노래방, 수영장, PC방, 오락실 등 모든
편의시설이 무료다. 커다란 침실 두개와 부�에 취사도구 등 모든 것이 갖추어진 호텔수준의 연수원 하루 이용료가 1만 5천원이니 거의 무료에
가깝다. 우리가 투숙한 노을관 5층은 아름답다는 서해 일몰을 방에서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내가 한국에 살던 당시에는 공무원 대우가
열악해 부정, 부패가 심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사기업 못지않은 대우에 연금과 복지혜택이 좋아 취업경쟁이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공무원들이
무척 친절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분은 공무원의 복지부동한 근무태도는 여전하다고 비판한다. 어쨋든 이렇게 공무원 가족친지에게까지 고급
휴양시설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공무원 노릇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천읍내에 나가 제철이라는 주꾸미와 해삼, 멍게 등을 사와
객실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길에서 만난 사이인데도 함께 먹고 마시고 지내니 십년지기처럼 가까워진다.
다음날 아침 해변 산책길을 걸었다. 건너편 무인도에는 낚시꾼이 밤낚시를 한듯 서성거리고 있다. 이들은 밀물이 들어오면 낚시하다 썰물 때
걸어다닌다. 서해안의 이런 현상을 '모세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오전을 한가롭게 즐긴 우리는 대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한국의 네비계이션은 재미있다. 단속구역이 나오면 몇 백미터 앞에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요즘에는 팔도사투리와 애교 아가씨 버젼까지 나와
웃겨준다고 하니 장거리 운전도 지루할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대전 외곽의 '옛터 민속박물관'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개인 수집가의 사설
박물관으로 식당을 겸한 곳이다. 마당에는 장독이 수백 개 놓여 있고 진열관에는 시대별로 다양한 토기와 민속품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구내에는
너와집을 비롯한 전통가옥들이 식당과 각종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박물관은 분야별 유물에 대한 전문서적까지 발행하고 연 2회 특별 테마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밖에도 박물관에는 천연염색, 닥종이 인형, 민화그리기 등 체험과 교육과정까지 마련되어 영리보다는 공익 비지니스처럼 보인다.
하긴 요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지방마다 전통술, 옹기, 장신구 등 특정 분야 사설 박물관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일행과 서대전역에서 작별한 나는 이튿날 보문산에 올랐다. 몇 번씩 대전을 오가면서도 보문산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50년 전 공군
훈련소에 입대해 대전과는 조금 인연이 있다. 그러나 50년 후 대전은 옛 도청건물만 생각날 뿐 유성온천도 공군 훈련소와 육군 통신학교 자리도
가늠할 수 없이 온통 아파트 숲이다. 훈련병 외출 때 맛있게 먹던 대전떡집도 찾을 길 없다. 반세기가 지났으니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뀐 것이다.
나는 막연히 보문산을 서울의 남산 정도로 기억하고 우습게 알았던 것 같다. 해발 458미터 보문산은 생각보다 산세도 크고 보문산성 등 삼국시대
유적지도 많이 남아 있다. 대전의 산소 공급원인 보문산 녹음은 대전 8경의 하나이다. 예전에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다.
구수한 성우들의 목소리와 재미있는 내용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과연 한국은 방방곡곡 전설의 고향이다. 보문산에 얽힌 전설도 여러가지가 전해오는데
공통적인 내용은 보물이 묻힌 산이라는 것이다. 옛날 착한 나무꾼이 옹달샘 옆을 지나는데 물고기 한마리가 햇볕에 죽어가는 것을 보고 물에
넣어주었다. 조금 후 물고기가 있던 자리에 주머니가 있어 집에 가져와 동전 한 잎을 넣었더니 순식간에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다. 쌀 한톨을
넣으면 쌀이 쏟아지고 넣는 것마다 쏟아져 나와 나무꾼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못된 형이 있었는데 사실을 알고 주머니를 가로채 도망치는
도중 주머니가 땅에 떨어져 흙이 들어가자 걷잡을 수 없이 흙이 쏟아져 큰 산을 이루고 주머니는 그 속에 파묻혀 버렸다. 사람들은 산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혔다하여 보물산이라 부르고 그 것이 변해 보문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날 오전 숙소인 용두동 조병기 신부 댁에서 나와 보문산을 향해 걸었다. 대산 초등학교를 끼고 능선을 따라 걷는데 사방에 참호가
파져 있다. 한 시간 정도 걷자 커다란 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북 5도민들이 세운 망향탑인데 명절에 북쪽을 향해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조국 분단의 아픔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도로라고 한다. 따라 내려가니 약수터와 송학사 절이
보인다. 송학사는 초파일을 앞두고 산길을 따라 연등을 길게 매달아 마치 산 전체가 절마당처럼 보였다. 봄철에는 한국의 산과 들 가는 곳마다
연등줄로 화려하다. 하긴 일년에 한 철이니 이해할 만도 하다. 기독교 명절인 성탄무렵에는 종교와 관계없이 전국이 트리와 전구장식으로 요란하지
않는가. 나는 다시 길을 거슬러 정상 시루봉을 향해 걷는다. 이제부터는 길이 가파르다. 중간에 고척사라는 어느 학교재단에 소속된 절이 있고
그 뒤로 급경사가 계속된다. 고척사 뒷편에는 부처상을 닮은 바위가 있어 신도들이 그 쪽을 보고도 기도한다. 과연 있을만한 곳에 절이 세워진 것
같다. 정상 팔각정에는 여러 등산객이 자리잡고 있어 끼어들 틈이 없다. 목책에 기대어 활짝 핀 매화를 보고 있으려니 할머니 한 분이 어디서
오셨냐며 말을 붙인다. 대전 토박이라는 할머니는 80세 나이에 지난 50년을 거의 매일 보문산에 오른다고 했다. 젊은이들도 산에서는 자기에게
어림없다고 자랑하신다. 할머니는 눈앞에 펼쳐지는 사방 경관을 가르키며 자상히 설명해 준다. 내가 하산길을 묻자 할머니는 고척사를 통해
올랐으면 까치고개를 거쳐 과례정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며 방향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하산길에는 속도가 붙는다. 쉼터에서 숨을 고르는데 이번에는 중년남자가 어디서 오셨냐고 묻는다. 내 행색이 아무래도 유별난
모양이다. 이 남자는 나에게 한참 보문산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요즘 보문산 때문에 속상하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이 보문산을 개발한다며 온갖 공약을 내거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황당한 수준이란다. 그는 몇년 전 보문산 기슭에 세계최대,
최초라는 거창한 동굴 수족관이 세워졌는데 당시 시장의 공약사업이라고 했다. 민자 수백억원을 들여 만든 '아쿠아월드'라는 수족관이 1년도 못돼
경영난으로 닫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신명난듯 자세히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십년동안 보문산
지하에는 비밀요새가 있었다. 1974년 완공된 이 요새는 핵전쟁과 비상시 지휘본부로 사용되는 길이 220미터 터널로 6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많은 방과 광장이 있고 차량도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09년까지 매년 을지훈련 때 지휘본부로 이용했는데 도청이 홍성, 예산으로
이전하자 대전시는 이를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며 동굴 수족관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바다도 아닌 산 속에 수족관이 말이 되는 발상이냐며 결국
수족관은 거듭된 경매에도 원매자가 없다고 했다. 민자를 동원했다지만 시에서도 많은 돈을 쏟아부었으니 시민들 세금만 축낸 것이라고 그는 흥분했다.
또한 그는 이번 선거에도 후보마다 보문산을 개발하겠다는 공약이 만발하는 것을 보면 전설대로 보문산에 보물이라도 묻힌 모양이라고 빈정댄다. 그는
제발 보문산을 시민휴식처로 그대로 놓아두기 바란다고 했다.
나도 이번 여행동안 지방마다 여러가지 이유로 파헤쳐지고 개발되는 현장을 지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정말 기발한 착상으로 주민생활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도 많았지만 어떤 것들은 이방인인 내가 보더라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5대강 개발사업이다. 강을 살린다고 시작한 공사가 오히려 강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개발에 앞서 정밀한 타당성 검토와 의견수렴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대통령이나 자치단체장들이 공약만 내세워 밀어붙이고 그마저 임기 내 끝낸다고 수십년 걸려도 모자랄 공사를 몇 년 안에 졸속으로
해치우는 것이다. 한국이 제도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한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욕심많고 어리석은 정치인들 때문에 조국강산이
도처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국민들 혈세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도 없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임기 중 잘못한 것은 밝히고 끝까지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 것 같다. 정치인이나 당하는 국민들이나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기에 안타까웠다.
(2014.7.18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