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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통영방향으로 길을 가다보면 진동을 지나 진북면사무소를 지나면 해병대진동리전투 전첩비가 있습니다. 국도에 있다보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좋은 곳인데 이곳에 해병대전첩비가 왜 있을까요? 이곳에 어떤 일 들이 벌어졌을까요?
▼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서울이 3일만에 점령을 당하고 남으로 남으로 국군은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미군과 한국군이 전선을 정비하고 방어전을 편것이 낙동강방어선 구축을 준비할때 입니다. (사진은 함안역에서 피난을 떠나는 국민들)
▼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북부지역을 맡고 미군은 낙동강을 방어하는 전략으로 마산의 경우 미군이 방어를 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낙동강방어선을 워커라인(Walker Line)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방어전략을 구성한 것은 인민군의 전력이 산악전투에 잘했기때문입니다.
▼ 마산의 경우 낙동강이 창녕 남지에서 밀양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곳에는 동북부와 같이 산악지형으로 미군들이 방어하기에 불리한 곳이기도 하고 인민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역입니다. 한국군과 미군의 경우 이곳이 무너지면 곧바로 김해,진해가 무너져 임시수도인 부산까지 위태롭기 때문에 받드시 막아야 하는 지역입니다.
▼ 마산지역과 함안 칠원지역 방어를 하는 미군은 미 25사단으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사단은 일본 혼슈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미 25사단은 각각 2개 대대로 편성된 제27보병연대, 제35보병연대, 제24보병연대로 편성 되었으며 미 육군 사단으로는 한국전선에 2번째로 투입되었고 1950년 7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한국에 도착합니다.
▼ 마산을 공격하는 인민군의 경우 방호산(方虎山)소장이 이끄는 약 4,000명의 인민군 6사단이었습니다. 인민군 6사단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중국내전에 참전했던 전투경험이 풍부한 사단이었으며 6월 25일 당일 개성을 점령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6월 28일에는 김포읍을 점령하고 호남지역을 점령한 후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진격합니다.
▼ 미 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 해병 제5연대(1여단), 그리고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 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가 마산을 방어하는 전략이었습니다.
▼ 아래 지도는 인민군의 공격루트와 미군과 한국해병대의 방어전략입니다. 인민군의 경우 여항산을 중심으로 진동방향으로 공격을 함과 동시에 서북산에서 진동면사무소로 공격을 합니다. 미25사단의 경우 사등리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펴고 취산에서 방어선을 폅니다.
▼ 미25사단 24연대 3대대가 방어를 했던 사등리일대의 모습
▼ 미25사단 24연대 1대대가 방어를 했던 취산의 모습
▼ 인민군의 주 공격루트 및 방어선을 펼쳤던 평지산
▼ 미 25사단 24연대의 경우 시루봉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인민군 6사단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 시루봉의 모습 배모양으로 된 건물이 황실온천입니다.
▼ 미25사단이 마산 어느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으로 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진동지구에 투입이 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한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마산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 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으로 8월 6일부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게 되는데 바로 김성은부대입니다.
▼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수리봉 (557) 서북산(739)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일부 목표를 점령게 됩니다. 이러한 성과때문에 미군들이 한국해병대에 대한 전투력을 인정하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수리봉과 서북산일대의 모습)
▼ 인민군6사단이 방어를 하다가 후퇴를 한 야반산의 모습
▼ 한국군의 경우 미군에 비해 장비면에서는 불리하였지만 혁혁한 전과를 세워 마산 진동지구방어에 성공하게 됩니다.
▼ 서북산의 경우 마산 진동지구해병대전첩비에서 한참을 들어올 정도로 계곡이 깊은 곳입니다.
▼ 인민군과 미군 그리고 한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서북산일대의 경우 산세가 높아 양측 모두 힘든 전투를 치렀던 곳입니다.
▼ 해병대 김성은부대의 경우 현재 마산시 진북면 고사리까지 진출하여 인민군 6사단을 물리치고 고성방향으로 내려가서 인민군의 세력을 물리치게 됩니다.
▼ 김성은부대가 인민군을 물리치고 공격을 간 14번 국도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진동리전투전첩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 여기는 마산시 진전면 고사리일대로 함안방면입니다. 인민군 6사단이 서북산일대 전투를 치루던 6사단의 점령지였습니다.
▼ 마산서북지역 전투도를 그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 김성은부대는 이후 통영전투를 치루면서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칭호를 듣게되고 해병대 사령관까지 진급하게 됩니다. 마산 진동지구 전투를 치룬후 김성은 중령은 미군의 손을 잡고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게 됐다며 감격하기도 합니다. 2007년 5월 17일 김성은 중령은 작고하게 됩니다.
▼ 2009년 4월 30일 서북산일대에서 벌어졌던 국군의 유해를 찾아서 영결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출처:마산 진동리전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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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투내용이 너무 잘못되어 있으며 일제시대 지도에 여항산이 없는 관계로 미군과 인민군은 여항산.봉화산.베틀산.인성산.서북산등 진북면.진전면 군북면 여항면.함안면 일부에 있는 산을 서북산으로 표현하니 여기서 전투기록이 일명 개판으로 문제가 많으며
19번을 뺏고 뺏긴 혈투의 장소는 함안군 근북면 오곡리 산1번지 665고지 전투산이며 임시수도 부산을 방어한 절대방어구역으로 진동리지구 여우고지 옥녀봉과 두격전지의 공통점은 도로를 차단하는 곳으로 이상한게 잔투도 미미한 서북산에 매몰되어 전투현황이 잘못되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