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207.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기쁨. 등 )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기쁨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참에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에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지적 능력으로 아는 것이 있고,
진리나 진실처럼 지혜로 깨달아 아는 것이 있는데
제 생각에 깨닫는다는 말은 ‘깨다’와 ‘알다’가 합친 말입니다.
그러니까 1+1=2라는 것은
지적 능력만 있으면 되지 깨달아 알 것까지 없지만,
진리나 진실은 반드시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참과 거짓은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는데
거짓이 깨져야 참이 드러나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어리석음이 깨져야 지혜가 열리고 참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항상 자기가 어리석었고 바보였음을 깨닫고,
그래서 거짓을 참인 줄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마치 알이 깨지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자신이 크게 깨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처음부터 참만 알고 거짓은 아예 알지 못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리석음과 잘못된 앎이 있었기에
깨달음이란 새로운 앎도 나에게 있고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기뻐해야 합니까?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을 위해 앞서 슬픈 것이
솔로몬처럼 기쁘다가 나중에 슬퍼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처럼 젊어서는 어리석어 돈 많은 것이 행복인 줄 알다가
돈도 잃고 건강도 잃는 아픔과 슬픔을 겪게 되지만
그 덕에 늙어서 참 행복의 지혜를 깨달아 기쁘게 되는 것이 낫습니다.
내일 독서에서 보게 되듯이
솔로몬처럼 젊어서는 지혜롭게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 칭송받고 행복하다가
늘그막에 지혜의 눈이 멀어 슬프게 되는 것은 참 슬프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손이 깨끗한 것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이 더 낫다는 진리를 깨달으라고,
그래서 마음이 깨끗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진실한 생활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제 주일에 글을 올릴 수 없을 경우,
이메일로 글을 보내드리겠다고,
그러니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아주 많은 분이 이메일을 알려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카톡으로 보내달라고도 하시고,
어떤 분은 매일 보내달라고도 하시는데
저는 카톡을 할 줄 모르고,
매일 보내드리는 것은 너무 큰 수고가 필요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이점을 양해주시길 바랍니다.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5)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제 안을 선으로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에 담아야 할 것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 고 말합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면 더럽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욕망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는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정돈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 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빈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 그릇의 쓰레기를 버리고 예쁜 꽃을 심으면 예쁜 화분이 됩니다. 담기는 것에 따라서 그릇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스턴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17년 동안 사목하던 신부님의 ‘은퇴미사’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성당 주보에 신부님을 떠나보내는 교우의 글이 있었습니다. 교우는 이렇게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신부님과의 이별이 눈앞에 와 있네요. 우리의 인생이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지만, 신부님과의 헤어짐을 생각하니 텅 빈 가슴에 슬픔과 아쉬움 쌓여 하얘짐을 느낍니다. 그동안 신부님과 같이 만들어낸 많은 시간과 추억들 그리고 어떤 저울로도 잴 수 없는 신부님의 깊은 사랑이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깊고 크신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짧은 글로 표한 할 수 있을는지요. 목자 잃은 양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도미니코 사제를 우리들의 아버지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때 만남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갑자기 오셔서, 모든 것이 생소 하시고, 힘드셨을 텐데도 목자 없이 굶주렸던 저희들에게 믿음과 성령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신부님이 본당신부님이라고 많이 부러워함을 들을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신부님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오빠처럼, 때로는 형님처럼 저희들의 아버지로서 저희들과 함께 17년을 보내셨습니다. 17년이라 함은 아기가 태어나서 거의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이입니다. 저희 신자들의 믿음의 나이도, 신부님께서 좋은 양식을 골고루 많이 주신 덕분에 영적으로 골격과 살이 붙어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저희 스스로 조금은 서 있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본당 신자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실 때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슬픔을 같이하며 우셨고, 아픔과 여러 가지 고통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양떼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가슴 아파하셨고, 병마로 희망을 잃은 양들에게 손을 잡고 같이 아파하시는 모습에서 저희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갑자기 닥쳐온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삼년 동안 고통과 절망에 잠겨 있는 신자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헤아릴 수 없는 애를 쓰셨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쏟아 부어 주신 깊은 아버지의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이 저희들의 가슴에 닿아 옴을 느낍니다. 신부님과 저희들이 같이 만들어낸 한순간 한순간들은 저희 보스턴 한인성당의 역사가 되어 많은 장을 장식하며 모든 신자분들의 영적인 가슴속에 영원히 머무르고 있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저희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끝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신자분들이 영적으로 많이 성장하여 미국 보스턴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이민교회로 우뚝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다져주신 튼튼한 저희들의 신앙을 새로 오시는 신부님의 아들 신부님이신 크리스 신부님을 공경하며 잘 모시고 도와 드리면서 튼튼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신부님께서도 저희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들도 신부님의 건강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 올려 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뻐하시고, 많이 웃으시는 신부님의 하루하루가 되시길 저희 모두 두 손 모아 온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도미니코 신부님을 저희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보내주시어 저희들에게 한없는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해 주신 사랑의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신부님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적은 글을 읽으면서 새삼 신부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아들 신부님은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MIT를 졸업하였고, 큰 기업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듯이, 그 청년은 보스턴에서 신부님을 만났고,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영적인 사랑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던 한 청년의 마음을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지혜는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랑을 주었던 신부님은 참된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도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32년 미국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무엇을 드셨습니까? 밥, 빵, 면, 김치, 우유, 수많은 음식….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려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먹은 모든 것은 우리가 먹기 전에 혹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 생명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힘이 없는 콘크리트나 철이나 돌을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려면 생명의 힘을 지닌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 중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이렇게 들려주십니다. 나쁜 생각과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이런 것들은 우리 안에서 나와 우리를 더럽힙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 자신을 죄인이라는 감옥에 가둬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죄책감이라는 올가미로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이런 것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는 주님 닮은 것도 나옵니다. 예를 들면…. 사랑, 자비, 온유, 겸손, 순명, 용서, 이해, 나눔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가 꺼내야 하는 것은 주님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둠과 빛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꺼내 들어야 한다면 빛을 꺼내 들기를 바랍니다. 주님 향기 나는 빛을 꺼내 들기를 희망합니다.
-----------------------
만보기
하루에 만 보를 걷는 것은 우리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걷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된다고 합니다.
걸음 수를 걸으면 걸을수록 돈을 주는 앱이 있다고 합니다.
만 보를 걸으면 100원을 준다고 합니다.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돈도 벌고….
우리 선조들은 이런 것을 ‘일거양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매일 만 보를 걷고, 100원이 전리품도 챙길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만 보를 걷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며칠은 열심히 걸었는데 그 후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찾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이 작든, 크든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기도든, 봉사든, 활동이든 꾸준한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꾸준히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한 발씩 꾸준한 신앙의 길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에서의 흥미로운 조사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가 신호에 걸릴 때, 외국인 노동자가 서 있는 차의 앞 유리를 재빨리 닦습니다. 그때 운전자는 그들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네곤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이 가장 많이 걷히는 도시는 잘 사는 도시 밀라노인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나폴리인가라는 비교 실험을 한 것입니다. 어디일까요? 당연히 부유한 도시인 밀라노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폴리였다고 합니다.
새 성전을 지은 신부님께서는 본당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봉헌을 해서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봉헌금을 살펴보니 돈 많은 사람의 봉헌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의 봉헌들이 모여서 이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해서, 또 여유가 없어서 봉헌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한 자매님도 기억납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신학생을 위해 써달라면서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분은 생활 보호 대상자였습니다. 신학생들을 후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여유가 없어서 기도로만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꽤 많이 받은 합의금으로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한 뒤에 성소자를 위해 써달라며 모두 가지고 와서 봉헌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멋진 모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자기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사람을 깨끗하게도 하고 더럽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준수만을 생각합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맞았을까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올바르게 보이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한 마음 역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위선의 마음은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
오늘의 명언: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언).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마음 관리
“회개의 여정, 자아초월의 여정”
삶의 선택-훈련-습관
다산 정약용의 2월7일자 어록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일년 열두달 매일 접할 수 있는 다산의 지혜입니다.
“일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일을 맡아도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이어지는 맹자의 공자에 대한 평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공자는 곡식 창고 관리가 되어서는 ‘회계를 정확하게 했을 뿐이다’라고 하시고, 가축을 기르는 관리가 되어서는 ‘소와 양이 잘 자라게 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꽃자리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음의 순수요 저절로 샘솟는 기쁨과 행복에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이겠습니다. 어제 선물처럼 흰눈에 봄꽃(春花)이 아닌 나무마다 눈꽃(雪花)이 만발했지만 눈이 녹으면서 완연해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봄이 들어가는 말마디들-봄꿈, 봄길, 봄밤, 봄비, 봄향기, 봄바람, 봄빛등-, 다 예쁘고 마음을 따뜻하고 푸근하게 합니다. 말그대로 파스카의 봄이며 다음 주 부터는 사순시기에 돌입하니 계절과 전례주기가 너무 잘 어울리는 우리의 사계절입니다. 어제 안개꽃과 후리지아가 잘 어울리는 꽃꽂이 생일 선물을 받고 다음 시로 화답했고 행복했습니다. 참 자주 인용하지만 늘 마음 설레게 하는 “꽃”이란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이 그러하니 꽃보다 더 예쁜 영혼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모두가 꽃보다 더 예쁜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얼마전 참 많이 나눈 “봄길”이란 시도 또 예전에 나눴던 “봄비”란 시도 제가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 예수님과 함께
봄빛을 받으며
봄길을 하늘길을 걷습니다.”
지금도 수도원 봄길을 걸을 때 마다 외워보는 마음 행복하게 하는 시입니다. 이어 봄비가 내릴 때 마다 생각나는 20여년전의 “봄비”란 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 관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시편을 노래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는 마음 관리에 얼마나 기막힌 축복의 선물인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마음의 순수요,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갑니다. 바로 이런 전례기도은총이 우리 삶의 부패를 막아 부패인생이 아닌 향기로운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열왕기상권의 솔로몬의 삶의 시작은 참 좋았습니다. 아직은 삶이 부패하기 전이라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지혜를 지닌 분이었고, 스바 여왕과의 우정의 시작도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스바 여왕의 찬탄은 우리가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임금님의 업적과 지혜에 관하여 내 나라에서 들은 소문은 과연 사실이군요. 이제 직접 보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사실의 절반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부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 말로 행복합니다.”
참행복의 소재를 말해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에 빗대어 저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저희야말로 행복합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서 주님의 지혜를 듣는 저희 제자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바로 이런 솔로몬과 우리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화답송 시편 37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며,
그의 혀는 옳은 것을 말하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37,30-31)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본래 우리 인간 본연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또 시편 40장중 다음 구절도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며 우리의 참기쁨도 주님의 뜻을 행함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법이기에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한마디로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도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어제 읽은 어느 분의 지혜로운 훈육에 대해 자녀교육은 물론 제자들 교육에 지침이 될 듯하여 나눕니다.
“1.칭찬하라, 2.선을 그어라(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3.야단처라.”
그리고 야단치는데 세원칙을 지켜라.
“1.일관성있게, 2.화내지 말고, 3.짧은 시간에 끝내라”
정말 지혜로운 훈육이라 공감했습니다. 참으로 절제와 중용의 지혜를 지닌 현자라면 이런 자녀훈육, 제자훈육이겠습니다. 타고난 선한 마음도 없습니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선과 악이, 밀과 가라지가 혼재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도 방치하면 잡초밭의 박토가 되는 마음밭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새삼 마음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방심과 나태는 금물입니다. 부단한 기도와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이 마음의 순수를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좋으면 삶도 글도 말도 행위도 좋습니다. 먹는 음식은 물론 밖에서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어떻게 하든 하느님 앞에서 나는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나일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안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아래 항문에서 나오는 것은 화장실을 통해 정화조로 가서 정리되는데, 위의 입으로부터 배설되는 다음 오물같은 부끄러운 것들은 자신은 물론 주변을 오염시켜 더럽힙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고정불변의 순수한 마음은 없습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부단한 좋은 수행 덕목의 선택-훈련-습관화를 통한 마음의 순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가 샘솟아 자신은 물론 이웃을 깨끗하게 하지만 쓰레기통과도 같은 불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자신은 물론 이웃을 더럽힙니다.
이래서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의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매일 과제의 실행으로 희망과 기쁨, 생명과 빛, 온유의 겸손의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의 일치의 훈련과 습관화에 전념하는 것이며 하루하루 날마다 계속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경쟁자는 공동체의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히 우리를 정화, 성화시켜 주시고, 부단히 나를 뛰어넘어 주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참자유이고 싶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내 밖에서
나 아닌 것이
나를
더럽힐 수 없으니
나는 자유다
내 안에서
나마저
나를
더럽힐 수 없어야
나는 참자유다
나는
간절히
자유 너머
참자유이고 싶다
----------------------------------------------------
24020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인내로 끊어야 하는 쓰라린 악순환
종들인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축복받을 수 있도록 저주를 참아 냅시다! 인내심이 부족할 때는 나를 거슬러 쏟아지는 쓰라리고 악한 말을 들으면, 똑같은 쓰라린 말로 되갚아 버리거나 표출되지 않은 분노 때문에 나 스스로 고통을 겪습니다.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보복한다면 내가 어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으니 말입니다(마르 7,15 참조).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엑카르트는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의 의미를 얕잡아 보아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보다 훨씬 풍부한 삶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은 친구 사이에 맺는 우정 관계보다 훨씬 깊다. 함께하는 삶에는 분리와 거리감이 자리하지만, 안에 있는 삶은 그러한 차이를 지워 버린다. 안에 있는 삶은 일치와 합일이다. 엑카르트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레임스 공의회와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께 말했다.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의 독생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육화의 진정한 목적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여러분을 독생자로 낳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같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다. “내가 너희의 뜻이 되리라."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 엑카르트가 또 다른 대목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처럼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투명하고 만유내재신론적으로 될 수 있고, 에워싸고 에워싸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스스로 그 자신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었듯이 여러분에게도 하느님이 될 것이다.(116)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성직 서임권 투쟁:
당장은 하인리히의 패배였다. 하지만 그는 다시 형세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카노사 사건은 독일 왕권에게 재기불능의 심각한 타격을 의미하였다. 서구의 주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에게로 넘어갔다. 그레고리오가 더 강자임이 입증되었다.
제국에서 독일의 제후들은 하인리히에 대한 교황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1077년 3월에, 슈바벤의 루돌프를 대립 왕(+1080)으로 선출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왕위를 위하여 싸워야 했다. 내란이 독일을 뒤흔들었다. 하인리히와 교황과의 관계는 곧 다시 악화되었다. 1080년 3월, 그는 두번째로 파문되고 폐위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편에 있는 라벤나의 비베르트를 대립 교황으로 세웠고, 자신을 클레멘스 3세(1080∼1100)로 명명하였다.
하인리히는 로마로 진군하였고, 그레고리오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에게로 도망쳤다. 그는 1085년 5월 25일 살레르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외면적으로는 패자였으나 실제로는 승자였다.
다툼은 그레고리오의 사망 후에도 계속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빨리 해결될 수 없었다. 그 문제는 제국과 사회의 전 구조와 매우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종전 신성한 왕권에서 정점에 도달한 국가와 교회의 종교적 • 정치적인 일치 대신에,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에 관하여 방대한 문헌들이 나왔다.(2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