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
일반적으로 16-18세기를 절대왕정 또는 절대군주 시대라고 한다. 민족국가 형성에 왕정의 역할이 컸고, 왕권신수설이라는 이론까지 뒷받침했다.
절대왕정은 권력을 지키고,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관료조직과 군대가 필요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금을 더 걷어야 했다. 징세를 위해서 농업보다는 상공업을 육성-지원했다.이로서 토지에 기반한 귀족 세력의 약화와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약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프롱드 난)
권력이 왕이 머무는 궁전으로 모이자, 궁정문화가 발달한다.(바로크와 로코코) 근대과학(뉴턴 등)과 근대 철학이 나타난다.(베이컨의 경험론, 데카르트의 합리론, 칸트의 관념론 등)
뒤 이어서 계몽사상이 나타났다.
** 루이 14세1638년 9월 5일 ~ 1715년)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실질적인 통치는 재상 마자랭이 1661년까지 대신하였다. 왕권신수설을 믿고, 절대 권력을 휘드르므로 ‘태양왕’이라 불린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전형이 되었다.
카가 작아 하이힐을 신은 것이 유행을 퍼트렸다고 한다.
루이 13세의 아들이다.
1643년에 부왕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5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에 즉위하였고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하였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종교갈등이 폭발하여 1618년에 30년 전쟁이 발발하여 1648년까지 지속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프롱드의 난 (1648년 ~ 1652년)
30년전쟁으로 인한 국민피로도 증가,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증세 등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1648년 6월에 파리 고등법원이 칙령 등록을 거부했다. 마자랭은 이를 무시하자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콩데 공이 반란을 진압했다. 재차 반란은 마자랑이 진압했다. 루이 14세에게는 프롱드 난이 일생에 거쳐 큰 트라우마로 남게되었다. 이후에 대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데 정책을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절대주의로 나아갔다.
루이 14세와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와 정략 결혼을 했다. 이것이 나중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는 구실이 되었고, 스페인 왕실을 부르봉 가가 접수했다.
1621년부터 네덜란드의 독립투쟁이 재개되었고, 1635년부터는 프랑스와, 1640년에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가 독립투쟁을 벌려 많은 재정이 소모된 스페인은 마리 테레즈의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또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결혼으로 남성 직계 혈통이 끊어질 확률이 높았다. 후계가 단절될 경우에 마리 테레즈와 같은 모계 혈통을 통해 그 후손에게 왕관이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스페인의 왕위는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로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을 계승하고 있다.
1661년 3월에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재상(수석대신)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국정을 챙기며 실질적인 친정을 실시했다.
마자랑이 죽은 후에 콜베르를 등용하여 중상정책을 시행했다. 결과로 국고수입은 1660년대에 4,500만 리브르에서 7,500만 리브르로, 1670년대에는 1억 리브르로 급증했다.
문학과 예술 후원도 많이 했다. 뒤에 좀 더 상세히 다루겠다.
루이 14세 시대는 전쟁을 아주 많이 하였으므로,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했다.(미술에서 다룰 것입니다.)
1. 귀족들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활동하고 생활하다보니 사치와 낭비가
일상화 되었다.
2.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예티켓을 도입했다.
에티켓의 마지막 목적은 왕과 왕실을 떠받드는 질서론이다.
*귀족을 공, 후,백,자, 남으로 계열화하여 에티켓에도 차별을 두었다.
3. 왕을 모시는 것이 최고의 명예이다.
왕의 변기를 다루는 자리도 서로 할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4. 노브레스 오불레즈 는 직위가 높을수록 덕망과 책임의식이 높아야 한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귀족의 의식’이다. 평민이 해야 하는 일을 귀족이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이다.
종교 문제에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카톨릭을 제외한 종교에 대한 일종의 탄압이었다. 상공업에 종사하던 약 20만 명의 위그노가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이로서 프랑스 산업과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루이 14세의 에티켓
5세에 왕이 된 루이 14세는 귀족의 난(프롱드 난)까지 겪으면서 왕과 귀족의 관계에서 자신을 돋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더 나아가서 신격화할 필요가 있었다.(절대왕정의 탄생이 된다.)
이로서 왕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여러 규칙(법도)을 만들었다.
1. 왕을 모시는 사람에게 왕의 권위가 나타나야 한다.
왕을 돋보이게 하는 규범을 만들었다.
왕 앞에서는 머리를 숙인다.
등을 보이지 않는다.(뒷걸음으로 걷는다)
귀족에게 공, 후, 백, 자, 남으로 서열화했다.(질서 세우는 일이다.)
2.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방법 – 왕의 특권이 필요했다.
이것이 법도(에치켓)가 되어서, 귀족을 거쳐 평민에게로 확산되었다.
3.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식들
대관식 – 엄숙하고, 질서있게 치룬다. 왕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4. 질서란 계열화하여 지키는 것이다.
귀족의 명예는 귀족이 평민보다는 우위이다.
5. ‘답게’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답게’는 ‘명예’의 개념이 강하다. 명예를 지킨다의 뜻이고,
명예는 자존심과도 연결되며,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다고 하였다.
*귀족 답게 살기 — 양반전에 나오는 '귀족들이 지켜야 하는 질서(에치켓)로
명예를 지키는 삶'의 뜻이다.
귀족은 관료로, 군대의 장교로 살아가기 좋도록 훈련받은(가문의 전통) 사람이다.
따라서 평민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 ‘답게’ 살기를 한다.
(노블레스 오브리즈)
5. 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키아벨리즘을 수용했다.
<에치켓의 유래>
루이 14세 때, 베르사이유에서 왕은 몇 십 개의 변기를 가지고 다녔다. 왕의 변기를 관리하는 사람도 귀족이었고, 왕의 측근에서 모셨으므로 귀족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다.
궁중을 드나드는 사람들(귀족이든, 고용인이든) 용변이 급하면 정원으로 나가서 ‘쉬이’ 했다. 정원은 악취가 진동했다. 정원 관리인이 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물을 꽂았다. 금지한다는 팻말의 문구가 ‘Etiqette’ 이었다.
에티켓의 바탕은 도덕률이고, 의미는 ‘금지’가 강하다.
(매너는 에티켓과는 달리 , 태도 또는 버릇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