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경주김씨天下와 홍경래 난(亂) 정조는 재위 이십사년에 학문을 위주로 한 소위 문치(文治)에는 많은 공적 을 남기고 사십칠세 칠월, 전신에 종기를 앓다가 백약무효(百藥無效)로 승 하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겨우 열한살의 소년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 임금이 순조(純祖)다. 새로운 임금이 어렸으므로 궁중에서 제일 어른 되는 영조의 미망인 정순왕 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섭정(攝政)이 되어서 소위 수렴정치(垂簾政治) 를 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척신세도 (戚臣勢道)를 부리는 동시에 반대파 숙청의 풍파를 일으켰다. 정순왕후는 임금 순조의 증조모뻘이라 대왕대비(大王大妃)라고 불렀다. "늙은 대왕대비가 친정 일가만 내세우니 인젠 경주 김씨 천하가 되었구나. 늙은 암탉이 조정에서 활개를 치니 우리 나라는 이제 망했다." 그런 욕을 하면서도 불우하게 내쫓기는 소위 시파(時派)에서는 전전긍긍했 다. 대왕대비는 선왕(先王) 때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김구주(金龜柱)를 복권 (復權)시키고 이조판설 추증까지 했다. 이것은 경주 김씨가 속하는 벽파 (僻派)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다 마침 천주 교가 시파 중심으로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벽파에서는 사학(邪學) 추방이라 는 명목으로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학의 괴수 정약종(丁若鐘)과 그 도당을 잡아서 처단하라!" 대왕대비는 이런 엄명을 내리는 동시에 사학 반대에 철저한 목만중(睦萬 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약종, 정약전(丁若銓) 및 그의 아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을 비롯한 이가환(李家煥), 이존창(李存昌), 홍교만(洪敎萬) 등이 맨 먼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서양학문을 연구하는 자유와 종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학문까지 당파싸움의 희생으로 악용 한다고 반박했다. "어느 편이 당파싸움을 일삼느냐. 너희들이 그따위 역설을 하는 것부터가, 학문이니 종교니 하는 명목으로 당파 음모를 하는 사학의 본색을 스스로 폭로하는 증거다." "우리가 배우려는 학문은 결코 사학이 아니고 정학(正學)이요." "정학은 공자님의 유교 뿐이다. 공자님보다도 서양 오랑캐들의 예수가 정 교란 말이냐?" "유교보다도 예수교가 전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정교(正敎)라고 믿 소." "너희들은 임금도 없고 조상도 없단 말이냐?" "하나님이 우주의 임금이시오. 인류의 아버님이요." "그래서 불충 불효하는구나. 그래서 제 할아비 제사도 지내지 않는구나. 그 대답으로 무군 무부(無君無父)의 대죄가 성립된다." 그런 위협과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귀양 보내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용도 형들의 관련으로 잡혀서 문초를 받았는데 "나는 소년시절에 천주교를 한 때 믿었던 것이 사실이요. 그러나 중년 때 종교적인 신앙은 버렸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미 나라에 나의 태도를 상소 하였소. 다만 서양의 학문만은 우리가 취할 바가 많기로 지금도 연구하고 있소." "그러나 너희 형 약전은 독신자가 아니냐?" 하고 신문자는 추궁했다. 정약용은 정색을 하고 "당신은 인륜 도덕을 주장하면서 아우가 형의 죄를 증명하라고 하는 거요? 당신이 그럴 경우엔 어떤 대답을 하겠소?" 신문하는 자도 더 추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는 사형을 면하고 귀 양 정도의 벌로 그쳤던 것이다. 섭정하는 대왕대비가 그렇게도 엄금하는 천주교였으나 불우한 왕족들 가운 데서도 천주교에 의탁해서 고민을 위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기 시작했 다. 사도세자와 영빈 임씨(英嬪林氏) 사이에 출생한 은언군(恩彦君)의 부 인인 송씨(宋氏)와 송씨의 며느리 즉 상계군(常溪君)의 처 신씨(申氏)는 천주교 신부 집을 찾아가서 영혼의 구원을 호소했다. 시아버지는 역적으로 끌려서 강화도로 귀양 가서 빈농(貧農)으로 몰락했 고, 신씨 남편도 역적으로 몰려서 독약을 먹고 죽었던 것이다. 신부는 불우한 왕족을 위로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모든 불행과 고민에서 구원 받는다고 설교했다. 그들은 그 후로 천주교 예배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거기 모이는 여자들의 친절에도 감명을 받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도 천주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기도 때만은 당파 싸움에 대한 저주도 잊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는 "신부님, 또 악착스러운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 탄압은 소위 남인(南人)파를 잡아 죽이려는 핑계입니다. 신부님은 위험하오니 어디로 피하십시오." 라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일렀다. "아니요. 다른 신도의 죄를 대신해서 내가 희생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신도가 달려와서 신도 중에서 배반한 자가 있어 천주교의 모든 신도들을 관가에 밀고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주신부 는 의금부(義禁府)로 자수해 나가서 천주교도를 죄인으로 몰지 말 것을 호 소하고, 그 책임은 자기 하나에게만 지워 주면 십자가를 지고 달갑게 희생 되겠다고 말했다. 의금부에서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중국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영 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보고했다. 영의정도 청국을 두려워하는 사대주 의자(事大主義者)였으므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상국인(上國人)이라 특별대우를 하겠소. 그러니 신자들 소재만은 정직하게 말하오." "남자 신자는 이번에 모두 잡혀서 처형되고 두세명의 여자 신자밖에 없 소." 중국인 신부는 남은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한말이었다. 그러나 영의정은 "여자 신자의 신분을 밝히시오." "여자까지 처형하시겠소?" "처형은 않더라도 알아는 두어야겠소." "처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말하겠소." 신부는 공연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으나 꺼낸 말을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 이다. "여자를 무슨 처형을 하겠소. 어서 말하시오." "송씨와 신씨는 불우한 왕족이요, 김씨는 나를 구해 준 여인이요." "왕족의 송씨와 신씨?" 영의정은 곧 은언군의 미망인과 며느리라고 깨달았다. 그는 곧 그 사실을 확인하고 대신들을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대왕대비 김씨에게 의외의 사실을 보고했다. "역적의 내실이었지만 여자라고 용서했더니 또 역적 무리와 야합했구나. 그년들을 엄중히 다스리게 하오."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송씨와 신씨를 잡아다가 신부와 대질시켰다. 주문모 신부는 그들이 여자신자라고 시인했다. 혹시나 하고 의아하던 대신들은 깜 짝 놀랐다. 임금 순조의 삼촌댁인 숙모와 사촌 형수가 죄인으로 걸려 들었 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통과 법을 핑계로 내세우는 당파심은 몰락 왕족의 미망인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은 역적의 과부들이 반성치 않고 또 역적의 온상인 천주교를 믿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신부와 만나 풍기도 문란시켰으리라는 조건을 들어서 엄벌해야 한다고 대왕대비의 뜻에 맞는 말을 공식으로 제기 했다. 대왕대비는 곧 사형선고를 내리고 사약(賜藥) 집행을 명령했다. 송씨와 신 씨는 대왕대비가 내린 독약을 받고서 천국으로 갈 것을 믿으면서 기도한 뒤에 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벽파에서는 두 여자를 처형한 뒤에 다시 송씨의 남편을 또 죽이려는 좋은 구실로 이용했다. 송씨의 남편 은언군은 글도 잘했고 또 인품이 온후해서 강화도에 귀양 보낸 후에도 종종 서울집에 와서 처자와 상봉하는 특전을 베풀어 준 것이 선왕 정조의 아량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아내와 며느리로 하여금 역적음모를 시키기 위해서 천주교와 결탁시켰다고 몰아서 그까지 독약을 내려서 죽여 버렸다. 이렇 게 해서 대왕대비는 친정 척신(戚臣)의 김씨 일파로 완전히 정권을 농락하 게 만들었다. "손자 내외와 증손자 며느리를 죽인 대왕대비 김씨는 악독한 여자다. 그렇 게 극성 맞은 경주 김씨 세도가 오래 갈까?" 궁중과 항간에서는 이렇게 저주하는 소리가 높아 갔지만, 권세에 취한 김 씨 중심의 벽파 귀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이에 불평을 말했던 자는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는데 천안(天安)의 윤가기(尹可其)와 임 시발(林時發)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불평을 무마시키려던 선왕의 공신 (功臣) 윤행님(尹行恁)까지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다.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한 벽파와 세도정치는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동 시에 자기 일파만 벼슬을 하도록 노력했다. 벼슬만 제대로 했으면 백성에 겐 상관 없었으나 그들의 부패는 국고를 좀먹고 각종 명목의 중세(重稅)로 민간재물을 취해 사복을 채웠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악이 쌓이고 쌓인 끝에, 순조 십일년에는 마침내 관서지방(關西地方)에서 홍경래(洪景 來)의 반란이 폭발했다. 이 영특한 야인(野人)은 부패한 세도정치에 반기를 들고 민중을 선동해서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소위 정당의 파벌과 는 직접 관계가 없이 부패한 관권에 대하여 초보적인 민권(民權)을 주장하 는 일종의 혁명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반란의 또 하나의 특이성은 조선 건 국 이래로 서북인사를 벼슬 시키지 않는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 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서북지방을 휩쓸어서 각 읍의 수령을 무찔 렀고, 그 후에는 충청도 일대에까지 파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이년 동 안 끌었다. 시파로 몰린 남인파에서는 큰 기대를 걸고 은연중 이에 호응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홍경래 반란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었다. "김가 놈들의 세력이 너무 극성을 부리더니 이번엔 망하고 말 것이다. 홍 경래는 제갈량의 꾀에 관운장의 용맹을 겸한 영웅이란다. 하루에 천리를 자유로 날아 다니는 둔갑술도 있다더라. 벌써 개성이 함락되었다니까 서 울 입성도 시간 문제다." 하는 풍문에 서울에서도 피난 가는 사람이 생기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때를 이용해서 홍경래의 밀령을 띤 건달 유한순(兪漢淳)이 서울로 잠입해 서 민심을 선동하고, 김씨 일파에 몰린 불평 정객을 규합해서 서울에서 반 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영조 때 일시 명 어사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던 박문수(朴文秀)의 집 안은 그 일대로 벼슬줄이 그치고 말았는데, 그의 증손이라는 박종일(朴鍾 一)은 자기가 직계의 증손이면서 겨우 봉사(奉事)라는 나으리 노릇밖에 못 한다고 불평만했다. 그는 건달 친구로부터 홍경래의 밀사로 서울에 잠입한 유한순을 소개 받고 함께 거사할 것에 뜻을 모았다. 박종일은 유한순보다는 유식했으므로 민심 선동의 격문도 써 주면서 반란 음모에 참가했다. 그리고 순조를 갈아치우 고 새로 들여 놓을 임금으로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은언군의 아들을 추 대하기로 했다. 은언군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다행으로 아드님이 강화도에 건재하고 있다. 『왕실의 정통은 그밖에 없다. 지금 임금은 가짜다. 천의(天意)와 민심은 은언군의 아드님을 새 임금으로 등극시킬 것이다.』 이런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격문으로도 써서 서울거리에 붙였다. 이 런 풍문이 나돌자 자기가 은언군의 아들로서 거사하려고 서울로 잠입했다 는 거짓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들 가짜 왕자와 혼란통에 한몫 보려던 건달들을 잡아 서 처단했다. 유한순만은 도망쳐 버렸으나 강화도에서 영문도 모르고 있던 은언군의 진짜 아들 해동(海東)은 또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은언군의 자식 해동을 잡아 죽여 없애야지. 그 놈이 살아 있기 때문에 놈 들이 추대하려고 한다." 조정의 강경파는 은언군의 유족까지 멸종시키려는 구실을 삼았다. 순조 십이년에 홍경래는 싸우다가 잡혀 죽었고 반란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원수 홍경래가 살아서 피신 중이며, 병자년(丙子年=순조 십육 년)에는 다시 난리를 일으키고 새 임금을 맞아서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풍 문이 나돌았다. 심지어는 가짜 홍경래까지 가끔 나타나서 조정의 신경을 어지럽게 했다.
-{헌종} 여체만 탐하는 허약(虛弱)한 정력 순조(純祖)가 사십오세로 승하하자 겨우 팔세의 헌종(憲宗)이 제이십사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조모(祖母)되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섭정이 되어서 수렴정치(垂 簾政治)를 칠년 동안이나 했다. 선왕 순조가 어렸을 때는 영조의 왕후(貞 純王后)가 척신세도정치(戚臣勢道政治)의 신례(新例)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동 김씨 출신의 순원왕후가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친정일파 가 전보다도 강력한 척신정권을 차지하고 들어 앉았다. 그렇게 되자 그전의 경주 김씨와 섭정이 되지 못한 헌종의 모친(순조의 왕 후) 풍양 조씨(豊壤趙氏) 친정과 안동 김씨 삼파전(三巴戰)의 암투가 벌어 졌다. 경주 김씨의 세력은 헌종 육년에 안동 김씨의 김홍근(金弘根)이 대 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십년 전에 생긴 경주 김씨 김노경(金魯敬)의 벼슬 을 추탈(追奪)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었다. 안동 김씨의 이런 가혹한 처사는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가 점점 왕의 세력 을 믿고 안동 김씨를 싫어했으므로 그것에 대한 위협수단이기도 했다. "경주 김씨 시대는 벌써 지나 갔다. 풍양 조씨가 아무리 외척이지만 안동 김씨가 있는 동안엔 꿈쩍 못한다." 섭정 순원왕후의 세력을 믿고 하는 장담이었다. 헌종의 나이 십오세가 되자 과부 조모의 섭정을 거두라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런 여론으로 순원왕후도 자기의 노령을 빙자하고 헌종의 친정 (親政)에 동의하고 후궁으로 물러났다. 오랫동안 정권을 독점해 오던 경주 김씨는 자기들 정권이 다시 튼튼해질 것이라고 과신하고 헌종의 친정을 환 영(?)했으나 그것이 큰 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헌종이 친정을 맡은 다음 해인 칠년부터 임금의 외척인 풍양 조씨 가 점점 득세하기 시작했다. 경주 김씨가 세력을 만회하려고 당황하기 시 작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경종의 외증조부 조인영(趙寅永)이 영의정으로 올라 앉았고 이어서 외사촌 형 조병구(趙秉龜)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서 국권(國權)을 장악했다. 경주 김씨는 한 때 눈부신 세도를 했던 만큼 그 몰락의 속도도 빨랐다. "세불십년(勢不十年)이라더니, 경주 김가도 인젠 풍양 조씨에게 몰려났 다." "궁중 치맛바람에 따라서 영의정 이하의 재상이 갈리고, 국정이 그들 외척 의 손에 농락되니 한심하다. 그래 인물은 외척에서만 난단 말인가. 척신세 도가 없어져야 나라 꼴이 된다." 척신의 발호를 욕하는 것은 불평 정객들만이 아니고 선비와 백성들의 탄식 이기도 했다. 민심이 이렇게 어수선하게 되자 불우한 몰락 왕족은 새임금 이 되리라는 미신 같은 풍문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으로 몰리 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대우도 받았다. 조석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가난한 전계군(全溪君) 이광은 그전의 정치 적 관계로 언행을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술을 비롯한 관상 등의 술법으 로 행세하는 이원덕(李遠德)이 전계군에게 왕운(王運)이 있다고 예감(豫 感)하고 그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 주었다. "이씨 왕실도 외척등살에 다 망해 가고 있습니다. 전계군만 하신 왕실 정 통(正統)이 없으니까 미구에 대통(大通)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사람 그런 무엄한 소리 말게. 누구를 또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 런 경솔한 소리를 하는가?" 전계군은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는 일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퍼지면 자기에 게 큰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이원덕의 호의를 경원해 했다. 그러나 전 계군은 왕운의 대통을 보지 못하고 곤궁속에서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 다. 뒤에 남은 아들이 어렸으나 이원덕은 그 소년의 장래에 왕운이 있다고 내 다 보았다. 전계군의 큰 아들 이원경(李元慶)은 자기를 도와 준 이원덕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고 외로운 마음을 의지했다. 이원덕은 불평 정객인 민진용(閔晋鏞), 박순수(朴醇壽) 등과 만나기만 하 면 그들을 선동했다. "김가의 세도정치로 나라는 곧 망합니다. 나도 지금은 관상쟁이라고 천대 를 받지만 새 세상이 되면 대감쯤 지낼 것입니다." "자네 자기 관상만 자랑 말고 우리 관상도 봐주게." "보나마나 멀지 않아서 두 분 다 대감이 되실 좋은 상입니다. 관상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전계군 큰 아들 원경의 상이 금년 안으로 대통할 운 수입니다. 그래서 김가를 미워하는 몇몇 대감들에게 잘 말씀해 두었습니 다. 새 세상이 되면 그 분들이 새 임금을 돕기로 하고요." "세상이 바뀔 수 있긴 해." "그야 전계군 아들이 임금 될 수도 있지. 홍경래가 살아 와서 세상을 뒤집 더라도 누군가 이씨 왕족에서 새 임금을 세워야 할 테니까 말야. 그러고 살펴 보면 전계군 아들보다 가까운 종친도 없구만." 민진용과 박순수도 이런 맞장구를 쳤다. "영감들도 불평의 탁상공론으로만 말고 동지들을 규합해 두시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면 한 몫 보셔야 합니다." "기왕이면 직접 일을 하지. 왜 남의 힘으로 바꾸어질 때를 기다려?" 그들의 불평은 이런 적극적인 음모로 발전했다. 민진용은 이종락(李鍾樂) 을 죽산(竹山)으로 찾아가서 세도 부리는 김가 일파와 외척에 휘둘리는 무 능하고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전계군의 아들 원경을 임금으로 추대하자는 음모에 동지가 되라고 권했다. 그리고 또 포천(抱川)의 서광근(徐光近)도 권해서 충의계(忠義契)에 기명(記名)하게 한 뒤에 서울서 거사할 때에 폭 도를 몰고 상경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러나 서광근은 서울의 거사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중에 조부 서기순(徐 箕淳)에게 들켰다. 그는 충의계의 음모 사실을 말하고 조부에게도 협력을 권했다. 그의 조부는 한때 승지 벼슬까지 했으나, 김씨 세도로 몰려나서 시골에 내려와 있었으므로 이번 경주 김씨와 풍양 조씨의 외척을 몰아내는 혁명운동엔 으례 찬성하거나 묵인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감투욕에는 부자간의 정의도 조손간(祖孫間)의 의리도 없었다. 서 기순은 손자가 가담한 음모를 밀고하고 상으로 큰 감투를 쓰는 것이 더 빠 르고 안전하다는 야비한 계산에서 손자를 팔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 서 헌종의 장인 조만영(趙萬永)에게 충의계의 반란음모를 밀고했다. 이 밀고로 이원덕을 비롯한 관계자는 일망타진되어서 참형을 당했고, 밀고 한 서기순의 손자 서광근은 고문 중에 매맺아 죽었다. 그리고 왕족 원경도 십팔세의 소년으로 사형되었다. 그러나 외척들에게 세도정치를 내맡긴 헌종은 허위(虛位)의 임금으로서 국 정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또 왕자(王者)의 능력도 없었다. 자기의 임 금자리를 노리는 반란 소문조차 모르고 오직 여러 비(妃)와 빈(嬪)과 무수 한 궁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과음(過淫)으로 청춘의 혈기를 탕진해서 육체 까지 허약해졌다. 이십이 되도록 많은 여자를 관계했으나 세자가 될 아들도 딸도 낳지 못했 다. 그러자 조모, 모친 등 과부만 득실거리는 궁중에서는 자꾸 빈궁(嬪宮) 만 늘였다. 그래도 소생은 없고 젊은 왕의 청춘만 병들어서 마침내 과음으 로 인한 부족증이 걸렸다. 현대 의학으로는 일종의 폐병의 증세였을 것이 다. 이십세가 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 삼년 동안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하고 심한 불면증까지 겸해서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하도 록 수척할 뿐 아니라 체온까지 낮아졌다. "상감마마, 몸이 얼음장같이 찹니다." 밤낮으로 안기는 후궁들도 허약한 왕의 정력에 불안을 느꼈다. 그런 왕에 게 생남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여자 의 죄라고 탓하면서 양가(良家)의 딸을 자꾸 빈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문제로 부사과(副司果) 이승헌(李承憲)은 상소를 올리다가 화를 입었 다. 왕후 김씨, 계비 홍씨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또 빈궁을 모실 것이 아 니라, 중전의 태후(胎候)를 돕기 위하여 경도(徑道)를 보강하면 될 테니 좋은 약을 쓰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이런 왕자 출생을 위한 의학적인 상소도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이에 대해서 부수찬(副修撰) 윤경선(尹景善)은 불경한 상소문을 올린 이승헌을 처벌하 라는 상소문으로 반박했다. 이것도 실은 당파가 빚어낸 소동이었다. 그러나 손을 보려는 대왕대비는 김재청(金在淸)의 딸인 십오세의 소녀를 맞아들여서 경빈(慶嬪)으로 봉했다. 이것으로서 젊은 헌종은 정식부인만도 세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관계하는 궁녀가 수십명이나 되었던 것 이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의 경빈의 몸에서 요행히 태기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큰 경사라고 생남기도를 하고 기다렸으나 아기는 왕세자가 될 아들이 아니 고 딸이었다. 그 공주마저 왕의 허약한 혈통 때문이었는지 곧 죽고 말았 다. 궁중 과부 왕비들의 실망은 컸고 헌종의 허약한 부족병은 점점 중해지기만 했다. 혈통을 남기지 못한 젊은 왕은 언제 세상을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위 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당파싸움은 날로 심해 가기만 했다. 헌종 십삼년에는 십년 동안 세도한 풍양 조씨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이 맹렬해졌다. 헌종의 외조부 조만영의 부자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가까운 외척으로는 조인영(趙寅永) 부자만 남았 기 때문이다. 대사헌(大司憲) 이목연(李穆淵)까지 조병현(趙秉鉉)의 비행을 열거했다. 즉 외척의 위복(威福)을 방자하게 남용해서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 거 만의 사재를 축재하였다고 폭로하고 그런 무리는 숙청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대사헌의 이런 상소에 대해서 헌종은 일을 무마하려고 했으나 대 사간(大司諫)까지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헌종도 하는 수 없이 그를 귀양 보냈다. 얼마 후에 철종(哲宗)이 등극하자 새로 득세한 안동 김씨가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다. 헌종이 이십 이세로 승하하는 동시에 외척 풍양 조씨의 세도도 완전히 끝났던 것이다.
-{철종} 일자무식 야생아(野生兒)- 강화도령(江華 道令) 헌종이 이십이세로 세자가 없이 승하하자 후계 임금문제가 급하게 되었다. 이때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로 상일을 하던 고아(孤兒) 이원범(李元範)이 뜻 하지 않게 임금이 되었다. 이원범의 조부와 부친과 형제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거나 귀양살이 를 했다. 그의 조부는 사도세자의 이복형제 은언군(恩彦君)으로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 삼형제, 즉 상계군(常溪君), 풍계군(豊溪君), 전계군(全溪 君)이 있었다. 이중에서 상계군은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고, 풍계군은 은 전군(恩全君)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전계군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빈궁 속 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전계군에게 또 아들이 삼형제 있었다. 맏아들 원경(遠慶)은 술 객 이원덕(李遠德)의 허황된 음모사건에 이용되어서 역적으로 죽었고, 둘 째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원범만 살아 남았는데 그는 후처의 소 생이었다. 그의 모친 염씨(廉氏)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원범은 사고무친한 몰락 왕족 의 고아가 되었다. 헌종과의 촌수는 칠촌 숙질간이어서 가까운 집안이었으 나 역적의 후손이라고 생활도 돌보아주지 않았다. 강화도 섬에서 농사지을 땅 하나 없는 십사세의 가난하고 무식한 고아는 강화도 성 밖의 오막집에서 홀로 살면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남의 집 의 농사 일도 거들어서 겨우 살아 갔다. 먼 친척은 있었으나 도와 주기는 커녕 냉대만 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이 고아를 왕족이라고 놀려댔다. 강화도령이란 대명사 는 우대하는 편이었다. <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범아. 너도 왕족이면 양반씨로선 제일인데 글이라도 배워야 하지. 그런 일자무식으로 아주 섬 상놈이 될 거냐?" "밥 먹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글 공부를 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주마. 작대기를 땅에 놓으면 한일(一)자요. 네 낫은 정 음의 기억(가)자다. 낄낄." "불쌍한 왕족을 울리지 마라. 그러다가 왕의 용꿈이라도 꿔서 등극하면 경 친다. 히히힛." 동네 악동(惡童)들이 놀려대면 원범은 자기의 몸에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 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그는 다른 총각들과 떨어져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상놈의 총각들도 열대여섯살이 되면 장가를 들었다. 원범은 그들이 부러웠 다. 열일곱살의 사춘기가 되어도 장가들 가망이 없었다. 섬 상놈이라도 그 를 사위로 삼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고생을 할 바엔 상놈의 집에 데릴사위로라도 들어가고 싶다.' 원범은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그런 처복조차 없었다. "야 쇠돌아. 너 장가든 맛이 어떠냐?" 원범은 새로 장가든 친구에게 농을 걸었다. "이놈아. 어른에게 쇠돌이가 뭐냐? 서방님이라고 해야지." 장가든 상놈의 청년은 원범을 호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래에 무슨 큰 꿈도 꾸어 보지 못하는 원범은 세상이 야속하고 두렵기만 했다. 가족이 모 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그 참상만 듣고 보면서 자란 소년 의 마음에는 장래에 대한 꿈은 싹조차 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칠세 쯤 되자 힘도 농사를 지을 만큼 되었다. 사고무친한 그는 자기의 육체 노동만 믿고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산비탈을 개간 해서 농사를 짓고, 나무도 해다 팔고, 품팔이도 했다. 거친 밥이라도 제 힘으로 벌어 먹게 되자 '임금이니 벼슬이니보다 이런 농사꾼 팔자가 편하다. 조부나 형제들 같이 역적으로 몰려 죽을 염려도 없고...' 이런 체념의 철학까지 체험한 그는 글 배울 욕심도 없어졌다. 오직 어떤 상놈의 딸이라도 아내만 얻으면 즐거운 가정을 이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의 가난은 면할 수 없었고 열아홉살이 되어도 남루한 옷에 머리를 땋아내 린 외로운 섬 총각의 때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종 십오년 유월, 헌종이 세상을 떠났으나 강화도의 고아 총각 이원범은 국상이 났다는 소문을 늦게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촌수로는 칠촌 아저씨 인 왕이 승하했어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건너 마을에 살던 아는 상놈이 죽었다는 소문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장가를 못들어 갓을 쓰지도 않았으므로 다른 백성들처럼 검은 갓을 흰갓(白笠)으로 바꿔 쓰는 그런 형 식적인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궁중에서는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중대한 회의가 중희당(重熙堂)에서 열렸다. 궁중의 어른인 대왕대비 안동 김씨는 옥새를 가지고 발친 상좌에 나와서 중신들의 회의를 주관(主管)하고 있었다. "어떤 왕족을 새 임금으로 모셔 들어야 할까..." 대신들도 창졸한 문제라 대왕대비의 의중을 몰랐다. 그러나 안동 김씨파의 고관 몇몇만은 대계(大計)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대왕대비께서 종사(宗社)에 대한 분부를 정해 주십시오." "일시도 보위(寶位)를 궐할 수 없사오니 대왕대비 어명을 바라옵니다." 원로 정원용(鄭元容)과 좌의정 김도선(金道善)이 재촉했다. 대왕대비는 울 음 섞인 음성으로 그러나 기정 방침대로 말했다. 대신들의 귀에는 울음 섞 인 낮은 말이 들리지 않았다. "글자로 알려 주십시오." 대왕대비의 울음소리와 함께 헌종의 모친 대비도 또 왕비도 눈물을 흘리며 울었기 때문에 좌중은 비창한 가운데 숙연했다. 왕대비는 정음으로 영묘 (英廟)의 혈손(血孫)으로는 원범밖에 없으니 그로 하여금 종사를 잇도록 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향은 어떠냐는 의미의 글을 써서 내렸다. 안동 김씨의 몇몇 신하를 제외한 여러 신하들은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그 때서야 전계군의 막내 아들 원범이가 아직도 강화도에 생존해 있었던가 하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당하온 말씀이옵니다. 곧 승지에게 교서(敎書)로 번역(한문으로)해서 선포하고, 새 상감을 강화도에서 모셔 오겠습니다." "원로인 판부사가 직접 영접사로 가서 모셔오시오." "예, 망극하옵니다." 정원용은 대사가 간단히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동 김씨들은 속으 로 만세를 불렀다. 헌종이 승하하자 전격적으로 임금을 정한 것은 안동 김 씨 일파의 계략이었다. 이 문제를 국상 뒤로 미루고 질질 끌면 각 당파에 서 신왕 추대의 암투가 벌어져서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대 왕대비와 사전에 결정하고 곧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이런 벼락 임금의 희소식도 모르는 원범은 그날도 폭양 볕을 쪼이며 지게 를 지고 들로 풀을 베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영접사 대시들보다 먼저 달 려 온 교군(校軍)들은 신왕의 집을 찾아서 헤매다가 동리 사람의 안내로 초라한 초가삼간집으로 달려갔다. 이웃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불쌍한 원범이까지 또 역적의 씨라고 잡아 죽이려고 서울서 병정이 몰려 왔구나. 원범이 신세가 가련하다." 하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댁 도련님께서 어디 가셨소?" "모릅니다. 산으로나 들로 꼴비러 갔겠지만요." "빨리 불러 오시오." "우리가 어디 간지 알아야지 불러 옵죠." 교군들도 동리 사람에겐 임금으로 모시러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신성한 기밀은 대신들이 직접 예를 갖추어서 할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들은 황송한 줄 알면서도 도련님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 은 그 때문에 꼭 잡으려고 온 군사인 줄만 알았다. 원범의 동무되는 총각들은 그에게 이 변을 알리고 어디로 도망을 보내려는 우정에서 몰래 그를 찾아서 들로 뛰어갔다. "원범아, 너 여기서 꼴 베고 있었구나. 큰일났다." 헐레벌떡하고 찾아온 친구 총각은 원범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어?" 원범은 태연한 태도로 반문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또 나를 놀리려는 장난이구나." "서울서 병정 수십명이 와서 네 집을 포위하고 동네 사람더러 너를 찾아내 라고 야단이다. 또 무슨 난리가 나서 너를 역적으로 몬 모양이다. 잡히면 죽을 테니, 빨리 도망쳐라." 원범은 깜짝 놀라서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죄없이 죽었구나 하는 절망으로 눈 앞이 캄캄했다.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놈아, 정신 차리고 빨리 도망쳐야 산다." "빨리 알려줘서 고맙다. 그러나 이 섬에서 도망하면 어디 숨겠니? 네 집 에 숨겨 달래도 겁나서 못 숨겨 주지 않겠느냐? 숨을 곳도 없고 숨겨 줄 사람도 없다. 조상의 죄를 지고 죽을 뿐이다." 그러나 제발로 걸어가서 잡히기도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땅 속으 로 그대로 들어만가고 싶었다. 이때 다른 친구가 또 달려왔다. "원범아, 너한테 큰 운수가 티었다. 서울서, 아니 궁중에서 너를 데리러 왔다. 잡으러 온 줄 알았더니 병정들 말이 서울 데려다 왕족 대우로 잘 살 게 해준다는 거다." "원범아, 그 놈들이 너를 잡으려고 꼬이는 수작이다. 속지 말고 어서 도망 쳐라." 먼저 왔던 친구가 그럴싸한 말을 했다. 원범은 반신반의로 한숨만 쉬었다. 잡아가거나 모셔가거나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 렇다고 도망할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운명만 기다리고 있을 때 들로까지 찾아 나온 교군들이 저쪽에 보 였다. 그들은 세명의 총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중에는 분명히 대신같이 풍채도 좋고 비단 관복을 입은 노인이 교군과 함께 오더니 "어떤 분이 강화도련님이신지요?" 하고 세 명 총각에게 물었다. 세 명 중에서 제일 남루한 옷을 입은 원범이 풀밭에서 일어서면서 "대감, 제가 이원범이온데 무슨 죄로 잡으러 오셨습니까?" "황공하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늙은 대신은 원범에게 공손히 읍하고 "실은 대왕대비의 어명입니다. 곧 서울로 행차하십시오." 원범은 역적으로 잡으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알았다. 그러나 대신도 임금 으로 모시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방법 인 줄을 짐작할 원범도 못되었다. "원범아, 너는 서울로 잘 돼 가니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작별이 섭섭하구나." "이놈들 무엄한 소리 말고 저리 비켜라!" 상놈 총각들이 <너>라고 하는 수작을 망극하게 여긴 교군들이 원범의 친구 들을 호령하고 대령한 남녀(藍輿)에 원범을 태워 모셨다. 원범은 꿈만 같 았다. "너희들 우리 집과 논밭 좀 보살펴다오." "아, 그런 걱정 말고 잘 가거라." 원범은 집에 들려 갈 필요도 없었거니와 교군들도 남녀를 메고 그냥 큰 길 로 향해서 강화읍으로 직행했다.
- 임금에게 투석(投石)하는 민심(民心) 궁중으로 들어 온 원범은 대신들이 시키는 대로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대보(大寶)를 받고서 철종(哲宗)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글자 하나 모르는 야생아(野生兒)의 강화도령은 왕으로서의 호의호식이 도리어 성미 에 맞지 않았다. 대궐이라는 감옥에 갇혀 죄수처럼 자유가 없는 것이 제일 고통이었다. 고추장에 비벼 먹은 꽁보리 밥이 꿀맛 같았고 그것이 술술 소화되어서 건 강하던 몸이, 임금이 된 후로 먹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운동부족으로 소 화가되지 않아서인지 게트림만 나는 위장병에 걸려 버렸다. "임금으로서 선정(善政)을 하려면 글을 배워서 덕을 닦아야 합니다." 신하들은 무식한 왕에게 글공부를 권했다. 이십세나 된 임금이 천자문(千 字文)의 주먹 같은 글자들을 보며 "하늘천(天)" "따지(地)" 하고 읽는 것은, 배우는 왕이나 가르치는 학자나 민망스럽기만 했다. 그래 서 철종은 글읽기를 제일 싫어했다. 그러나 그런 무식한 철종이 정치에 무능하고 흥미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 세도정치를 하는 안동 김씨에겐 매우 편리했다. 처음부터 그런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는 왕의 결재를 취하는 형식을 밟았다. 대 신들이 무슨 문제를 보고하고 의견을 말하면 내용도 모르고, 또는 알려고 조차 하지 않고, <좋소, 그대로 하오.> 하는 식으로 일체를 안동 김씨 일 파가 하는 대로 방임했다. 이십세의 임금 철종(哲宗)은 아직도 여자를 모르는 강화도령이었다. 어서 대가집 미모의 규수를 왕비로 삼아서 장가라도 들여 주었으면 했으나 헌종 의 국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운 궁녀들이 밤낮으로 시중하는 남치마 바람에 그는 청춘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래서 왕후를 맞는 대혼(大婚)이 있기 전에 철종은 궁녀들 에게 동정(童貞)을 바치고 여색을 향락하게 되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으로 시골 색시의 손도 잡아 보지 못하던 철종은 고 운 궁녀들을 누구든지 수청들일 수 있는 것이 임금의 호강이라고 생각했 다. 정치에도 상관 않고 글 공부도 하기 싫은 그로선 궁녀들과의 유희가 유일한 기쁨이었다. 임금이 된 만 일년 이개월 만인 철종 이년 팔월에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 김문근(金文根)의 딸 십오세 소녀를 왕후로 간택해서 대혼례를 거행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대왕대비는 형식적인 섭정을 그만두고 친정(親政) 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무식한 철종으로서는 친정할 능력도 없었다. "상감의 뒤엔 국구(國舅)가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거북한 수렴정치를 그만 두겠소." 대비는 이같은 말을 대신들 앞에서 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친정이지만 실지로는 철종의 장인 김문근에게 섭정의 권한을 물려 준다는 선언이었다. 이 순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완전무결한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철종은 실제의 정치를 장인 일족이 하게 되자 할 일이 없었다. 철종의 일 과는 오늘은 어떤 궁녀를 데리고 자느냐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궁 녀들과 접촉에 말썽이 많던 대왕대비가 칠십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자 철종 은 아주 마음 놓고 무수한 궁녀들을 모조리 범하는 난음 생활에 빠져버렸 다. 무능하던 선왕 헌종도 과색(過色)으로 이십이세의 단명을 했고, 허약 때문 에 자녀도 남기지 못했다. 그 덕택으로 임금이 된 강화도령도 그 길만은 선왕의 전철을 밟아서 더욱 철저했다. 왕비 김씨와 그밖의 여러 궁녀가 십 여명의 자녀를 낳기는 낳았으나 모두 건강하지 못한 태아였기 때문에 모조 리 일년을 못 살고 죽었다. "왕은 과색으로 양기가 부족해져서 성한 아기를 낳지 못한다." 시의들은 왕의 양기를 보충하려고 인삼, 녹용의 보약을 장복시켰으나, 약 에서 얻는 양기 보다는 소비하는 양기가 많은 왕의 몸은 쇠약해지기만 했 다. "궁녀들의 치맛바람에 임금의 생명이 슬어진다." 이런 경멸적인 조롱이 궁중에서 공공연히 떠돌았다. 강화도령으로 이십이 되도록 여자를 모르고 건강하던 청년이었으나 임금이 되어서 궁녀들에게 그 야생적 본능을 탕진하자 삼십전에 노쇠한 몸이 되어서 허리를 못 쓰고 수족이 찼다. 그리고 뼈만 남은 몸은 홀로 지탱을 못했다. 철종은 권력에는 처음부터 인연이 멀었지만 여색으로 육체까지 이렇게 쇠 약해서 거의 폐인이 되자 처가인 안동 김씨의 세도만 극도로 번성했다. 재상급만 치더라도 영의정 김좌근, 이조판서 김병기(金炳冀), 동녕위(東寧 尉) 김현근(金賢根), 예조판서 김병지(金炳地)와 김병필(金炳弼), 형조판 서 김영근(金泳根), 병조판서 김병주(金炳주)와 김대근(金大根) 그리고 김 병국(金炳國)과 김병학(金炳學)도 차례로 영의정을 지냈던 것이다. 철종은 궁중에 선대의 과부 왕비들과 궁녀들뿐이로서, 종친 왕족도 없고 외로운 존재였다. 다만 가까운 종친(宗親)으로는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 뿐이었다. 철종은 역시 핏줄이 닿는 경평군을 때때로 궁중으로 불러서 서 로 고독한 심정을 위로하곤 했다. 경평군은 철종과는 달리 글도 잘했고 인품도 늠름해서 왕의 대리로 청나라 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처가인 안동 김씨들은 철종이 가까이 하 는 경평군까지 시기하여 궁중출입을 못하게 했다. "이씨 왕조는 김가 세도로 망한다. 금극목(金克木)이라더니 김성(金姓)이 목성(木姓)의 이씨(李氏)를 누르고 왕기(王氣)까지 범하는 말세가 되었 다." 백성들은 이런 오행설(五行說)까지 들추어서 극성맞은 김씨 세도를 욕했 다. 이런 풍설이 돌던 중 철종 십일년 구월에는 돈화문(敦化門)에 이씨 왕 조가 멸망하고 타성(他姓)이 왕위를 범하므로 빨리 화근을 없애지 않으면 말세가 온다는 흉서가 붙었다. 이것은 세도하는 김씨를 욕하는 동시에 왕을 위협하는 정치적 모략이었다. 이런 흉서사건으로 궁중은 궁중대로 안동 김씨는 안동 김씨대로 그 음모자 를 잡으려고 했으며 민심수습을 위한 대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경평군은 관직도 없는 몸이라 그런 각의(閣議)에는 참가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평상에 품었던 안동 김씨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 나라는 이씨의 것이냐? 김가의 것이냐? 왕족은 모두 쫓겨나가고 김 가만 세도를 부린다. 외척이 물러나야 나라가 바로 된다." 이런 말을 들은 김씨파에서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임금 철종까지 무시하 는 그들의 세도 앞에 경평군 정도를 숙청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들 일 파는 직접 철종에게 경평군의 망동을 규탄하고 처벌을 주장했다. "돈화문에 붙인 흉서도 경평군의 소행이 분명하오. 옛날부터 종친은 궁중 에도 정원(政院)에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법입니다. 상감의 지친일수 록 언행을 삼가야 하는데 도리어 상감을 욕되게 하고 국정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영부원군 김좌근을 비롯한 현관(顯官)들을 모함하는 망동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철종은 하는 수 없이 경평군의 궁중출입을 금하겠다고 하고 그 정도로 무 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재상들은 모두 결속해서 "불충 무능한 우리는 국정에서 손을 떼겠으니 경평군같이 충성되고 유능한 자에게 국정을 맡기시오. 우리는 자퇴하고 성 밖으로 나가서 근시하겠습니 다." 이렇게 철종을 위협했다. 경평군을 처벌하지 않으면 철종에게도 협력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시위행동이었다. 왕도 척신의 세도에 굴복하고 경평군을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귀양 보낸 후 그 배소(配所)에서 나오지 못하게 엄중한 경계를 하여 신변 구속을 했다. 사형 다음 가는 이런 처벌에도 분을 풀지 못한 김씨들은 그의 군호(君號) 를 삭탈하고 서민(庶民)으로 강하(降下)시킬 것을 요구했다. 철종은 너무 심한 왕족 모욕이라고 분하게 생각하면서도 외사촌 동생을 서민으로 강하 했다. 그래서 경평군은 칭호를 삭탈당하고 서민이 되어 이세보(李世輔)로 명백만 보존했다. "왕의 위신으로 사촌동생을 억울하게 죄 주는 위인이 무슨 왕이냐. 궁중에 선 궁녀에게 사족을 못쓰고, 국정에선 처가 등살에 사족을 못 쓴다. 이씨 왕조도 말세가 되었구나." 못난 임금의 소행은 항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위신이 떨어진 철 종에 대해서 백성들은 경멸과 반감을 품어 거동할 때에 어떤 백성이 돌을 던져서 왕이 탄 덩으로 날아드는 불상사까지 생겼다. "임금에게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은 유사 이래의 처음이다. 유사 이래로 못 난 임금이니까 당연한 대접이다. 민심이 천심이매 나라는 망하고 말 거 야." 임금에 대한 백성의 투석사건은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 화제 끝에는 으레 철종의 난잡한 사생활을 본 것처럼 들추었고, 세도 부리는 김씨에 대 한 불평이 따랐다. 조정에서는 돌을 던진 백성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배후를 캐서 김씨 반대 파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범인은 순진한 백성으로 자연발생적인 반발이 었으므로 관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못난 임금 체면을 유지하려고 했다. "언젠 임금이 실지 정치를 했나? 재상들만 잘 골라서 충성되고 유능한 신 하를 쓰면 되지 임금은 바보만 아니면 신하의 공로로 현군(賢君)이 되는 법이야." "그러나 지금 세도 김가에겐 나라에 대한 충성도 백성에 대한 책임도 없으 니 탈이다. 거기다가 임금은 바보에다 과색으로 부족병에 걸려 있다. 백 성의 돌벼락을 맞아도 싸다." 이런 투로 철종과 외척 안동 김씨의 폭정을 비난했다. "나라가 그 꼴이니 하늘도 노해서 흉년만 든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세상 은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근년에는 한발과 홍수가 잦아서 흉년이 자주 들었다. 거기다가 백성이 초 근목피로 연명할 때도 탐관오리는 가혹한 수탈로서 사복을 채웠다. 못 살 겠다는 민심 소동을 이용해서 불평 정객과 정치 건달들은 반란 음모를 꿈 꾸었다. 그리고 각처에서 기근으로 농민들이 산적으로 화해서 세상을 어지 럽혔다.
- 안동 김씨 세도에 비틀거리는 왕손(王孫)들 이런 때 별로 벼슬이 높지 않은 김순성(金順性)과 전현감(前縣監) 이긍선 (李兢善)은 몰락 왕족 이하전(李夏銓)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기도 했다. 김순성은 기해년(己亥年)에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서 축출한 때에 천주교에서 전향해서 신도 동지를 오위장(五衛將)의 무관 감투를 썼다. 그 러나 명색만 오위장이지 궁정근무에는 참여하지도 못하였고 규칙적으로 봉 록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생활이 곤란했다. 따라서 그는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호언장담을 일삼는 정치건달이 되었 다. 김순성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서 완창군(完昌君=李時 仁)과 친하게 지냈다. 완창군은 가난한 왕족으로서 당시의 임금 철종과는 촌수도 아득한 먼 종친에 지나지 못했다. 이 완창군도 철종과 세도 부리는 김씨 일파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나면 정치적 불평을 했다. 그런데 완창군의 아들인 이하전(李夏銓)은 똑똑하여 소년 때부터 글재주도 좋고 기품이 강직하며 용모도 준수했다. "도련님 글재주가 놀랍다지요?" 김순성은 완창군 집에 들리면 주인의 보비우겸 아들 이하전의 칭찬을 했 다. "소년 과거라도 시켜볼 생각이요." "도련님은 과거만 보면 실력으로 장원급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족을 배 척하는 김가패가 방해나 하지 않을까요?" "급제한대야 김가 세상에선 행세 못하겠지만 공부 실력이나 겨누어 본 뒤 에 세상이 바뀌면 써 주겠지." "세상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다간 또 딴 놈들이 세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서서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김오위장, 그런 소리하다 목 달아나려고. 나야 다 본 세상이라 아무렇게 죽어도 좋지만 아들만은 공부를 시켜야겠네." "그럼요. 장차 대통(大統)을 이어 받더라도 강화도령같이 일자 무식으로선 나라의 수치거든요." "허허, 이 사람 누구를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강화도 령이 그렇게 무식할까?" "저보다 잘 아시면서 무슨 딴청을 쓰십니까? 천자(千字) 책 한권을 몇 해 두고 배워도 못 떼었다는데야 알 것 아닙니까?" "천자 책은 본디 어려운 글이거든. 그 천자의 글을 짓느라고 옛날 유명한 학자도 머리가 희도록 오랜 세월 고생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고 하지 않 는가?" 주인 완창군도 철종을 조롱하는 농담을 했다. "그래서 재주 좋은 강화도령도 한평생 천자와 씨름하는 모양이죠. 핫핫 핫." 김순성 오위장도 농을 했다. 그런데 완창군이 자랑하는 아들의 글재주도 과거에는 보기좋게 낙방거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과거 본 글이 시관의 심사에서 낙방이 된 것이 아니 라 과거 보는 시장(試場)에서 안동 김씨 자제들의 시기로 굴욕을 당하고 스스로 붓을 꺾고 퇴장해 버렸던 것이다.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은 글을 잘못 지어도 이미 급제로 예정되어 기세 등 등한 안동 김씨 청년들을 알았다. "완창군 댁 도련님이 왜 우리들 백성과 함께 과거를 다 보러 왔나? 왕족 이면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과거로 벼슬을 하려고 하 지? 자고로 임금의 종친은 벼슬을 않고 점잖게 봉군(封君)의 국록만 먹을 것이지. 벼슬은 해서 백성의 재물을 긁어 먹을 야망인가." "이놈들. 내가 벼슬하려는 것은 너희들 김가 모양으로 조정의 세도를 잡고 사복을 채우려는 야망에서가 아니다. 임금을 돕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 는 포부에서다." "이놈. 먼촌 종친이라고 우리 안동 김씨를 모함하느냐? 당장 사과하라. 사과하지 않으면 역적 다음 가는 관가모욕 죄로 다스리겠다!" 세도 김씨의 청년들은 과거장에서 이하전을 공박했다. "너 같은 놈들과 한자리에서 과거 보는 것이 창피하다." 하고 이하전은 붓을 꺾어 버리고 퇴장해 버렸다. "하하하, 그 놈 과거에 자신이 없으니까 생트집을 하고 쫓겨 가는구나. 그 렇게 벼슬이 하고 싶거든 너의 조상 능의 능참봉이라도 시켜주마. 핫핫 핫." 안동 김씨 청년들은 과거장을 박차고 나가는 이하전의 등뒤에서 웃어댔다. 그러나 이하전은 그 뒤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몇 해 후에는 온후한 그 의 인품도 세상에서 인정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부친 완창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왕족을 너무 냉대한다는 비난도 막기 위해서 한직 돈녕 도정(敦寧都正)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일 체의 정치적 분쟁에선 멀리 하려고 조심했다. 철종의 무능과 척신(戚臣) 안동 김씨파의 세도에 불평하는 민심소란에는 으레 이것을 이용하려는 반란음모가 수반했다. 그리고 새로 추대해서 명분 을 세우는데 이용할 인물에는 언제나 몰락한 왕족 이씨(李氏)가 선택되었 다. 세도 김씨에게 역적으로 몰려서 귀양살이를 하거나, 아주 평민이 되어버린 몰락 왕족도 한번 원한을 풀고 임금이 되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겠지만 숨 어서 사는 그들을 충동하여 한몫 보려는 정치 건달들의 음모도 작용했다. 그러다가 그 음모가 실패하면 왕족들까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 어야 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이 임금이 되었으나 나약하고 무능해서 척신 김가에 게 휘둘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초도도령님(椒島道令任)에게 왕기(王氣) 가 비쳤다. 초도에 사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이야말로 왕실의 정통 (正統)이다." 이런 풍문이 황해도 일대에 유포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仁祖)의 맏아들이었는데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 과 손자들은 여러명이 역적으로 몰렸다. 그 후손에는 이명섭(李明燮)과 이 영섭(李永燮)이 있었는데 글도 잘하고 인물도 잘 생겨서 초도에서 인망을 받고 있었다. 다 같은 운명으로 귀양 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임금이 되어 있는 철종보다는 인물이 월등나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추대해서 왕을 갈아 치우려는 책동이 <초도에 왕기가 있다>는 정치적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 이다. 황해도 연안(延安)에 살며 정치적으로 불평객이던 진사(進士) 김응도(金應 道)는 이명섭의 부친 이정현(李庭賢)과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가끔 초도로 가서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했다. 그들은 부친이 죽은 뒤에도 가끔 찾아와서 위로해 주는 김진사를 고맙게 대했다. 그런데 한번 은 김진사가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도련님 형제는 귀한 혈통의 후신으로서 앞으로 반드시 귀하게 되실 것입 니다. 무식한 가짜 왕족이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꼴로 망해 갑니 다. 지금 초도에 왕기가 비치기 시작했으니 시운이 오기만 기다리시오." 이명섭 형제는 꿈 같은 말에 우선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부친과 막역한 친구요, 유식한 김진사의 말이라, 그런 행운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김진사의 말을 못 알아 들은 척했다. 그 후로부터 초도와 황해도 일대에는 <초도에 새로운 왕기가 돈다>는 풍문이 떠돌기 시 작했다. 그러나 이명섭과 이영섭 형제는 그런 풍문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또 임금 철종에 대한 반역의 꿈도 꾸고 있진 않았다. 그보다도 선대들이 역적 으로 몰려서 강화도에 고아로 고생 끝에 임금이 된데 대해서는 오히려 축 복을 했다. 같은 처지에서 고생하는 자기들도 무슨 덕을 볼 희소식이 있으 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은언군 댁도 이제 역적의 누명을 벗고 참 잘 되었습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하고 형제는 기뻐했다. "새임금과 우리와는 촌수가 어떻게 되지요?" 형 명섭은 오랫동안 족보를 따지고 나서 "십육촌간인가 보다." "그렇게 멀어요?" "십촌만 넘으면 남이라니까, 그냥 먼 촌 일가지뭐...허허" 형제는 좀 실망해서 쓸쓸히 웃었다. "그러나 불우한 왕족에겐 동정하시겠지." 그러나 그들에겐 새 임금이 들어선 뒤에도 아무런 기쁜 소식이 없었다. "우리 형제는 먹고 지낼 걱정은 없으나, 선친님들 누명이나 씻어 주시는 분부나 내렸으면 좋겠는데..." 형제는 이렇게 은근히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황해도 본토에 사는 불평객 채희재(蔡喜載)가 초도로 와서 이 명섭 형제의 집을 찾아왔다. "댁에서 과객에 대한 대우가 후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하룻밤 신세지려고 들렸습니다." "이런 섬까지 오셔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소. 누추한 집이나마 쉬어 가십시 오." 주인 형제는 풍체도 근사한 선비차림의 과객을 맞아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