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들의 속삭임
박 노 해<실패한 혁명가(?). 시인, 사진가. 이름없는 철학가)
새로 부임하신 우리 담임선생님한테 나는 반해 버렸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꼭 시를 한 편 읽어주시고, 재미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 다음 교과서 진도를 나갔다. 늘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교탁에 선 모습 하며, 칠판에 백묵으로 써내려가는 힘찬 글씨체 하며, 설명할 때 지어보이는 우아한 손짓과 표정 하며, 깊은 음성에 리듬감이 절묘한 서울 말씨까지, 참말로 그런 멋쟁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첫날부터 꽃 한 송이를 들고 와 교탁에 올려두었고, 늘 교실 창가 화병에 계절 꽃을 꽂아 두었고, 물어보면 모르는 꽃이 없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꽃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지어부렀다.
가을 종례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미리 겨울방학 숙제를 내주었다. ‘내년 봄에 동네랑 학교에 심을 꽃씨를 받아가져 오기‘. 꽃 선생님다운 내 맘에 쏙 드는 숙제였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집에 오자마자 엄니한테 창호문을 새로 붙이자고 했다. “수수 마치고 하는 건디…. 그러렴”
누나를 졸라 풀을 쑤고, 물을 뿌려 낡은 창호지를 뜯고, 다락에 모셔둔 한지를 꺼내 창호문을 새로 붙였다. 구멍이 자주 나는 문고리와 손잡이 쪽에는 책갈피에 눌러둔 모란꽃잎과 산국화와 단풍잎을 붙이고 창호지를 한 겹 더 발랐다.
“환하고 곱네. 이쁘게도 잘혔다.”
저녁 밥상에서 엄니가 칭찬을 해주었다. 난 싱글벙글 웃었다. 실은… 내 속셈은 따로 있었다. 창호문을 핑계로 귀한 한지를 꺼낸 것이다. 나는 몰래 한지를 조금 빼두었다가 서른 개가 넘는 꽃씨 봉투를 만들어 내 책상 서랍에 쟁여 놓았다.
다음 날부터 산과 들과 바닷가를 누비며 꽃씨를 받으러 다녔다. 고이고이 받은 꽃씨들을 종류별로 한지 봉투에 넣고 꽃 그림을 그리고 꽃 이름을 쓰고, 지끈으로 묶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고광꽃 참나리 분꽃 앵초 꿩의다리 초롱꽃 패랭이 봉선화 솔체 접시꽃 백일홍 금낭화 붓꽃 하늘매발톱 도라지꽃 구절초 채송화 과꽃 치자 동백꽃 산국화 작약 할미꽃 해당화… 하나하나 봉투가 채워질수록 내 가슴도 부풀었다.
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고,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 발걸음 소리가 울려올 즈음에 나는 꽃씨들이 답답할까 봐 꽃씨 봉투를 창호문 위 서까래에 매달아 놓았다.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왔다. 나는 동무들과 보리밭에서 공을 차고 연을 날리고, 꽝꽝 언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고, 누나를 따라 또롱또롱 여문 꼬막을 캐며 널배를 밀어주고, 토끼를 잡는 형들을 쫓아다니느라 짧은 하루가 더 짧아졌다. 종일 오돌돌 떨며 놀다 와서는 겨울바람에 울리는 문풍지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에서 아기곰처럼 길고 깊은 단잠에 빠졌다.
눈이 내리는 하얀 밤이었다. 잠결에 어디선가 부스럭부스럭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짝사랑하는 소녀의 창문에 작은 돌을 던져 신호하듯, 소곤소곤 잠든 나를 깨우는 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쫑긋 귀를 기울였다. 아, 저기다! 창가에 매달아놓은 한지 봉투 안의 꽃씨들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넌 무슨 빛이야? 향기는 어때?”
“어느 바람을 타고 꽃이 와?”
“어떤 새가 널 삼켜서 날아왔니?”
“벌이랑 나비랑 반딧불이랑 무당벌레랑 누가 젤 좋아해?”
“목은 안말랐어? 가시덩굴에 다치진 않았어?”
“넌 얼마나 먼 하늘길을 여행해 왔니?”
“총소리도 들었어? 많이 울었어?
”고라니가 무서워 멧돼지가 무서워 아님 비둘기, 까마귀?“
밤이 깊어갈수록 꽃씨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나는 있지… 사람들이 가시가 아프다고 피해. 근데 평이(박기평=박노해)는 해당화 향이 청아해서 최고라며 좋아해줬어. 나를 데려올 때 평이 손가락에 피가 나서 얼마나 속상하고 미안했는지 몰라.“
”난 평이 할머니 무덤가에서 왔어. 나를 보고 ’우리 할무니 같다. 할무니처럼 굽었네. 머리가 하얗네. 우리 할무니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이.‘하면서 나를 데려왔어.“
”난 말이야. 3년만에 싹이 트고 올해 처음 꽃향기를 날렸는데, 평이가 매일매일 보러왔어. ’고광꽃은 꼭 하얀 미사포 쓴 울 누나 같다아‘하는데 내가 눈물이 나서 향을 내쉬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것 있지.“
”나는 나는…“, ”있잖아, 나는…“ ”나도 나도…“
재잘재잘 종알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목이 마른지 또 잠잠해졌다.
”우리 중에 누가 누가 먼저 피어날까?“
”동백꽃은 젤 빠른 거야, 젤 늦은 거야?“
”빨리 봄이 오면 좋겠다. 햇살이 너무 그리워.“
”아냐. 더 단단히 말려야 해. 어둠이 더 필요하다니까.“
”맞아 맞아. 그래야 빛깔도 맑고 향기도 좋지.“
”난 있지. 사나운 것들 속에서 피어나려면 강해져야 해.“
쉴 새 없이 밀어를 나누던 꽃씨들이 내가 뒤척이자 쉿! 조용해졌다.
”우리가 종알대는 바람에 평이가 잠 못 드는 거 아냐?“
”가만가만 소리 좀 낮춰 봐.“
”지난달에도 많이 아팠는지 끙끙 앓았잖아.“
”어젠 울었어. 죽은 아빠를 부르기도 했어.“
”노을 질 때 마루 기둥에 이마를 대고 한참 있던데.“
”어떡해. 서러운 일이 있었나 봐.“
”나도 갓 올린 꽃대를 밟힌 게 아직도 아픈데…“
”애, 얘, 저것 봐. 평이가 웃는다. 좋은 꿈을 꾸나 봐.“
그러다 다시 수런거림이 커지고 은미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창호문 밖엔 눈보라가 치고 언 바람이 부는데, 사그락사그락 내 꿈결을 걸어오는 꽃씨들의 속삭임. 잊히지 않는 그 겨울밤의 꿈이었다.
봉지 속의 꽃씨들이 땅에 묻혀 새근새근 연초록 새싹을 내밀고 그 환하고 해맑은 얼굴로 향기를 날리며 피어날 봄을 기다리며, 내 안에도 나만의 속꽃이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