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고난주간)
* 시작 기도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철저히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숨을 드리는 섬김이었습니다.
나는 내 목숨이 어찌 될까봐 겁이 나서 어떻게든 그런 자리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자였습니다.
물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주님께서 그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면서 당신은 친히 죽음과 무덤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주께서는 어떠한 경우도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닌 한결 같았음을 압니다.
나는 주님에 비하면 발뒤꿈치의 때만도 못함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연약한 나는 끊임없이 넘어지고 자빠져서 여기저기 깨지고 부러지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내 주제를 알기 때문에 주님 품안에서 살아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면목 없음과 죄스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아갑니다.
죄의 자리에 빠져 헤매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힘입어서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놀이터는 오직 십자가의 강이요 보혈의 강입니다.
그곳에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고난주간 넷째 날입니다.
인간적 감성으로 주님의 고통을 보지 말게 하시고 영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눅 23:33-43
제목 :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갖은 고초를 겪으셨다.
육체적으로는 채찍에 맞으면서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고초를 당하셨다.
이는 로마 군병들이 사용하는 채찍으로 그 끝에 쇳조각이나 동물의 뼛조각을 붙여서 때리기 때문에 그 채찍끈이 몸을 휘감아서 그 조각들이 살을 뚫고 들어가 박히면 잡아당길 때 살점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온 몸에서 피가 흘러 범벅이 되셨다.
그뿐 아니라 온갖 말로 조롱을 당하였다.
(눅 22: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또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자기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를 부인하고 다 도망하였다.
게다가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이 가장 아픈 시간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로마 군병들이나 유대인들에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이를 모두 감내하셨다.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지고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 하는 데로 가신다.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 예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걸어가실 때 자주 쓰러지셨다.
그 때 구레네에서 온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고 골고다까지 가게 하였다.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이와 함께 두 강도도 예수님의 좌우에 각각 못 박혔다.
이렇게 못이 박힌 상태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벗긴 옷을 나눠서 제비를 뽑아 가졌다.
무리들 중에서 백성들은 서서 구경을 하였다.
관리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다.”
로마 군병들도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나와서 신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이죽거렸다.
예수님의 머리 위 곧 십자가 끝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다.
두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한 강도가 그 사람을 꾸짖으면서 말한다.
네가 로마 총독으로부터 동일한 벌을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므로 마땅하다. 하지만 이 사람 예수가 행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이 강도가 예수님께 요청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해골의 곳 골고다는 원래 아람어인데 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 뜻은 그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의 뼈가 많다는 의미와 그 산의 모양이 해골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두 번째 의미가 지배적이다.
이처럼 해골 곧 사람의 뼈는 왠지 으스스 하고 꺼림칙하게 한다.
하지만 복음이 그러하듯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빼놓고는 복음을 말할 수 없다.
복음은 우리가 원하는 만사형통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이 있지 않고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가서 요셉의 때까지는 바로 왕의 선정(善政)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그의 아버지 야곱이 임종을 맞는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의 뼈(해골)을 수습해서 조문객의 맨 앞에 앞세워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창 50:13) 그(야곱의 시체)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그 후에 요셉도 죽는다.
요셉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언을 한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인도하실 것과 너희가 나갈 때 나의 해골을 메고 올라갈 것을 말하였다.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에 모세를 필두로 출애굽 할 때 히브리 백성들은 요셉의 해골을 메고 떠났고 후에 여호수아가 그 해골을 요셉 지파의 땅에 매장하였다.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수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사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여러 대적들을 만났지만 그들을 능히 이겨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요셉의 해골을 앞세워 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셉의 해골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죽음을 앞세워 나갈 때 어떤 대적이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난까지도 주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며 나아갈 때 그들이 가야할 곳이요 소망의 나라인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가나안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 시대에 영적인 출애굽을 하는 우리들도 죄악된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그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 걸음 속에 고난도 어려움도 애통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것까지도 주님의 뜻인 것을 수용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하나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요 미지의 어느 한 곳으로 알았었다.
그래서 그 나라가 손에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막연한 관념적 지식에 그칠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물론 죽음이란 누구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속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과 무덤에 장사되심에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는 연합의 삶을 살게 되면 더 이상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가 바로 그렇다.
전에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떨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나라이다.
물론 그 나라가 주는 영생은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가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망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롬 5:2-4) 또한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환난도 즐거워할 수 있는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이 땅에서의 환난이나 고통이 우리를 옥죄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견고해져서 단단해질 것이다.
하여 오늘도 육신의 질고가 여전하지만 이를 넉넉히 수용하여 영원한 소망의 나라를 바라며 즐거워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을 알지 못할 때는 그저 죽음, 장사됨, 해골, 무덤과 같은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고 오싹해지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거저 얻는 것이 아님을 주님은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합니다.
하물며 생명을 주는 기독교에서야 두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는 단순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알지 못할 때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시는데 그 고난이 바로 복음임을 이제는 압니다.
나 역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던 자였기에 그저 예수의 이름으로 나의 유익을 구하는 데에만 구하였던 자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이름으로 구해도 되지 않을 때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분명히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나는 주의 이름을 향유해야 함에도 이용하는 패역을 저질렀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야 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패역한 자가 아니라 향유하여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의 십자가를 앞세워 주님과 함께 연합한 자로 나아갑니다.
그 나라에 한 걸음 가까울 때마다 나의 작은 입은 크게 열려 더 크게 찬양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