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편자한 육상효씨가 日刊스포츠 기자로 활동 했을 때 김현식의 자서전을 담당하면서 쓴 내용입니다.
70년대말에서 90년대초로 이어지는 기간의 가요계는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음반산업 전체의 시장 규모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앨범에만 의존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와 방송가수 등의 구분이 없었고, 가수들이 밤일말고는 마땅히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밤일이야말로 이때 가수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존재 실현의 장이었다고 그때를 지나온 중년 가수들은 술회한다.
때문에 대부분 그룹의 결성과 해체도 바로 밤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국도호텔 나이트클럽은 밤일을 하는 가수들의 집산지였다. 이 업소에서 어떤 면으로 보면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1세대에 해당하는 세션맨들이 같이 연주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세션이래야 70년대 후반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노래인 포크를 들고 나왔던 통기타 가수들을 집단적으로 승계하는 간단한 악기들을 가지고 모여서 같은 호흡으로 연주하는 수준이었다. 이 세션맨들에게 지금은 서울방송의 라디오 본부를 맡고 있는 이혜성 씨가 '동방의 빛'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룹 '동방의 빛'에는 조동진, 조원익, 강근식 등이 구성원으로 있었다.
김현식은 이 국도호텔에 거의 매일 들러 노래도 하고 또 자기 무대가 없을 때면 와서 술을 마셨다. 이승희, 정광대, 최성원 등의 또래들과 함께 거의 매일 찾아와 선배들의 연주와 노래를 듣고, 오늘은 좀 말을 걸어볼 아가씨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고, 선배들의 무대가 끝나면 밤새 술을 마셨다. 음악 얘기, 스물한두살의 젊음들이 품은 사랑 얘기, 불안한 자신들의 인생 얘기로 이들은 매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때 이 업소에서 연주하던 한 음악 선배는 이들을
"원, 깡패 같은 젊은 녀석들이 매일 찾아와 술마시고 여자들이나 희롱하고 해서 한 번 혼내주려 했는데, 어느 날 노래부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가수 지망생들인 줄 알았다."
고 술회했다.
이때 대부분의 가수들은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는 세대들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른 나이부터 듣고 연주해온 감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작곡을 위해서 악보를 그리지도 않았다. 생각나는 가사를 시처럼 쭉 적고, 그 위에 기타를 연주해가며 코드를 붙였다. 심지어 앨범을 녹음할 때도 그런 조잡한 악보가 전부였다. 소위 헤드 어레인지라는 방식인데 아무 기초도 없이 말과 간단한 연주로 의사소통을 해가며 앨범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앨범 심의를 위해서 음악을 들으며 다시 악보를 만들었다. 악보에 의해 음악이 나오는 방식이 아니고 음악이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채보한 악보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초창기 언더그라운드 가수들 대부분은 전혀 이 방식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느낌을 더 쏟아붓는 방식으로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한다. 물론 김현식도 악보를 그릴 줄 몰랐다. 그 역시 이 방식의 작곡을 통해 죽기 전까지 무수한 곡들을 만들었다.
매일매일 밤업소를 찾아다니며 노래부르고 술마시던 어린 김현식이 최초로 앨범을 만들게 되는 기회는 스타가수일 뿐만 아니라 그즈음 사업가, 음악기획자로도 한국 가요계에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이장희에 의해 찾아왔다. 이장희는 그때 무교동 동아일보 옆에서 커다란 반도패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사직동 관상대 옆 아이템풀 학원 지하에는 음악 연습실을 차려 가수들을 연습시키고 앨범 취입을 시켰다. 이장희는 밤업소를 전전하며 고독하고 음울한 청춘을 보내고 있었던 김현식을 낮에 이 음악 연습실로 오게 했다. 그리곤 김현식이 틈틈히 만든 곡들을 들어보며 이 얼핏 보기에는 건달 같은 스물한 살의 가수가 음악에 대한 대단한 감수성과 호소력 있는 목청을 가졌다고 판단, 그의 독집 기획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