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많이 지났다.
종식은 많이 취한듯 하고 “와... 서울 진짜 좋네...”를 연발하며 비틀비틀 걷고 있고, 기태와 준혁은 뒤에서 종식의 모습을 보며
웃는다.
기태가 종식에게 말한다. “종식아. 괜찮냐? 많이 안 취했어?”
“그럼. 나야 아직 멀쩡하지... 잘 봐라. 이 놈들아.”
종식은 비틀비틀 걸으며 서울의 찬가를 부른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기태는 웃으며 “서울이 그렇게 좋으면 너도 와서 살지 그러냐? 가자. 내가 살게... 한 잔 더하자.”
종식은 “말이 그렇다는거지 난 강릉이 좋아. 이제 내려가야지.”
준혁은 “이렇게 취해서 어딜 가려고? 우리집에서 자고 내일 가.”
“아냐... 막차 타고 내려가면 돼... 집에 와이프도 혼자 있고 내일 조업도 나가야거든...”
“그럴래? 그럼 택시 잡아줄게 이쪽으로 와.”
잠시후 택시가 서고 기태는 종식을 태우며 “이 친구가 좀 많이 취했습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터미널을 향해 택시가 떠나는 걸 보며 기태는 “괜찮냐?”
“응. 괜찮어. 어디 가서 한잔 더할래?”
기태는 손을 저으며 “아냐. 많이 늦었다. 내일 아침에 계약하기로 온 손님이 있어서. 술 냄새 풍기면서 세일즈 할 수도 없구.”
“부럽다 인마... 넌 학교 성적도 일등이더니, 영업도 일등이구나. 그래. 그럼 들어가라.”
“부럽기는 ... 지금 가도 와이프 잔소리 귀가 따갑도록 듣겠구나. 조심히 들어가라.”
준혁은 기태의 어깨를 툭 치며 걸어가고, 기태도 준혁이 가는 길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수경의 원룸)
어두운 원룸 안...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수경이다.
술에 많이 취한 듯 구두도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비틀거리며 침대를 향해 간다.
핸드백도 대충 던져 두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지는데, 엎드린 채로 손을 뻗어 협탁을 더듬거린다.
협탁 위에 놓여진 카세트의 재생 버튼을 눌러 놓고는 그대로 잡이 들어버리는데, 카세트에서는 아르페지오 기타반주가 흘러나오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준혁의 목소리다.
Whenever I'm weary, From the battles that rage in my head
You make sense of madness, When my sanity hangs by thread
I lose my way, bit still you, Seem to understand
Now and forever, I will be your man
(준혁의 오피스텔)
같은 시각. 다른 오피스텔 안에서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이번엔 준혁이다.
불이 켜지자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과, 침대, 서랍장이 보이고 창가에는 여러 개의 다육식물이 줄줄이 놓여져 있다.
분무기로 다육 화분에 물을 주고 난 준혁은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는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샤워를 하고 나온 준혁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눕는데... 그냥 자려다 서랍을 열어 사진 한 장을 꺼내 본다.
뒤로는 등대가 보이고 등대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남자아이(어린 준혁)과 여자아이(어린 수경)이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있다. 침대에 누워 사진을 한참 보던 준혁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준혁의 회상이 시작된다. 때는 1990년 봄의 어느 아침.
(강릉시 주문진읍에 있는 주영초등학교)
작지만 아담한 초등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따라가보면 5학년 1반 팻말이 걸려 있고, 교실 안에는 30여명 정도의
아이들이 무척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다. 준혁도 그 무리에 섞여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는데 그 때 준혁의 반 담임 선생님이
한 여학생과 함께 교실로 들어온다.
그 여학생을 보자 준혁은 넋을 잃고 마는데...
교탁을 두드리며 “자자자. 조용히들 해요.”
선생님의 목소리에 아이들 모두 주목하고 있고, 선생님은 옆에 서 있는 수경을 반 학생들에게 소개한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친구를 소개할게요. 수경아, 수경이가 친구들한테 친구들한테 직접 자기소개를 해볼까?”
수경은 친구들을 보며“안녕? 난 서울에서 전학 온내 이름은 전수경이야. 피아노 치는걸 좋아해. 앞으로 너희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우리 친하게 지내자.”
수경이의 자기 소개가 끝나자 반 학생들이 박수를 보낸다.
박수가 그치자 “지금은 빈자리에 맨 뒤에 준혁이 옆자리 뿐이네. 다음주에 자리배치를 다시 하도록 할테니까 우선은 준혁이
옆자리에 앉아.”
모두 남남·여여 짝꿍인데 수경과 같이 앉은 준혁이 부러운 듯 또는 놀리려는 듯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경은 자리에 앉아 준혁을 보며 “안녕?” 라고 인사를 건낸다.
수경을 보고 첫 눈에 반한 준혁이었지만 인사를 하는 수경을 본 채 만 채하며 연필로 책상에 줄을 긋는다.
“너 앞으로 이 선은 넘어오지마.”
그런 준혁이 모습이 귀여운 듯 수경은 그냥 웃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수경의 곁으로 모여든다.
“너 정말 서울에서 왔어?” , “그럼 63빌딩도 가봤어?”, “어린이 대공원에는? 어린이 대공원에 가면 진짜 호랑이도 있어?”
친구들의 질문에 수경이는 웃으며 대답하지만 자기... 아니 수경이 주변에 몰려들어 있는 남자 아이들이 준혁의 눈에는 거슬린다.
준혁은 “너네들은 서울도 한 번 안가봤니?” 말하며 친구들을 밀쳐내지만
친구들은 아랑곳없이 “너네집에 피아노 있어?”, “너네집 정말 부자구나?”하면서 질문들을 늘어 놓는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고 마치는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종례를 하며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구... 잠깐, 이번주 자습당번이 누구지?”
준혁이 손을 들어 “선생님. 제가 당번인데요.”
“응... 준혁이가 당번이구나. 혼자서 자습당번 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내일부턴 수경이와 같이 하면 되겠구나... 그럼 반장.”
하굣길... 수경은 여전히 친구들에 둘러 싸여 가지만 수경은 저만치 앞서가는 준혁을 부른다.
“준혁아... 잠깐만...”
준혁이 뒤돌아보자 수경이 다가온다.
“수경이구나... 왜?”
“자습당번 말이야... 그게 뭐하는거니?”
“아... 그거? 1교시 수업 시작하기 전에 산수문제 풀이하거든... 다른 친구들이 등교하기 전에 일찍 나와서 칠판에 스무문제정도 적어 놓으면 돼.”
“그렇구나... 그럼 일곱시 삼십분쯤 오면 되는거야?”
“응.. 그 쯤이면 돼.”
“고마워. 준혁아...”
준혁과 수경은 얘기를 나누면서 교문을 빠져나간다.
“저 수경아...”
“응?”
“집은 어디야? 아직 길도 잘 모를텐데 내가 바래다 줄까?”
“아냐... 괜찮아...”
“집까지 잘 찾아갈 수 있어?”
“그게...”
잠시 망설이던 수경의 모습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가씨. 이 쪽입니다.”
학교앞 도로에는 수경이네 집 기사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준혁아... 내일 보자.”
인사를 한 수경은 차에 올라 먼저 가고 준혁은 멍하니 바라본다.
뒤따라오던 친구들이 수경이 타고가는 차를 뒤쫓아가며 “와... 저거 말로만 듣던 벤츠 아니야? 수경이네 정말 부잔가봐..”
수경을 보고 첫눈에 반한 준혁이었지만... 왠지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수경을 보며 씁쓸해한다.
다음날 아침, 자습당번인 준혁은 헐레벌떡 뛰어 교문에 들어가고 뒤이어 교문 앞에 멈춰선 차 안에서 수경이 내린다.
뛰어가는 준혁을 바라보며 수경이가 부르는데... 함께 교실로 들어가 칠판에 자습 문제를 적으면서 둘은 서로를 보며 웃는다.
홀어머니에 가진 것 하나없는 가난한 환경을 생각하며 수경을 향한 마음을 단념하고자 했지만 수경 앞에만 서면 절로 웃음이
나는 준혁이었다.
칠판에 자습문제를 적고 있던 수경이 말을 꺼낸다. “준혁아... 너 오늘 저녁에 약속 있니?”
“약속? 그런거 없는데... 왜?”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 부모님께 말씀 드렸어. 새로 사귄 친구들을 집에 꼭 초대하고 싶다고...”
“그래? 그래서?”
“부모님께서 그러라고 하셔서... 준혁이 너도 꼭 오라고...”
“오늘 저녁에?”
“응... 엄마가 맛있는거 많이 해주신다고 했으니까 꼭 놀러와... 준혁이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거야...”
“그... 그래... 알았어...”
수경의 초대를 받은 준혁은 하루종일 기분에 들떠 있다.
길었던 하루의 수업이 끝이 나고 수경은 친구들에게 집에 놀러오라며 초대를 하고 친구들사이에선 환호성이 터진다.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 들어온 준혁은 엄마께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첫댓글 잘 보고 가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 통 작업을 못하다가 님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연재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끝까지 재밌게 읽어주세요^^
초딩시절이 그립군요. 잘 읽고 갑니다
그리운 초딩시절... 그리고 첫사랑ㅋㅋㅋ 아~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