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편자한 육상효씨가 日刊스포츠 기자로 활동 했을 때 김현식의 자서전을 담당하면서 쓴 내용입니다.
2집 후에 그는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조직한다.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김종진, 전태관과 박성식, 장기호 그리고 역시 요절한 가수 유재하가 그 멤버들이었다. 이 그룹은 나이나 음악경력으로 보아 리드하기 시작한 최초의 그룹이다. 이들과 3집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라이브콘서트 방식도 개척해가게 된다. 이 그룹은 그가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동질감을 많이 느꼈던 그룹이기도 하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얘기다.
특히 유재하에게 김현식은 후배에 대한 애정과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존경을 동시에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대 음대에 재학중이었던 유재하를 이 그룹에 끌어들인 것도 김현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재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군(群)에서 정규학교의 음악교육을 받은 첫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거칠게 음악을 체험해온 자신들 못지않은 음악적 감각까지 갖춘 그를 김현식은 늘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재하도 김현식도 걱정할 정도로 지독한 폭주가였다.
"한번 마셨다 하면 길에 큰대자로 누울 때까지 마시는 그런 녀석이었어."
언젠가 김현식이 한 말이다. 유재하의 곡 「가리워진 길」이 김현식 3집에 들어 있다.
어느 날 유재하가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떠난다. 형식상으로는 독집 준비였지만 실제로는 멤버들과 '잘 안 맞았던'게 원인이었다. 미묘하고 섬세한 음악적 부분에서 유재하는 그룹의 멤버들과 가끔씩 의견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유재하는 어느 날 김현식에게 와서
"형, 형이 아무리 때리더라도 이젠 그룹을 나가야겠어."
하고 짐을 챙겨 떠나는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그 뒤로도 김현식은 두고두고 얘기했다.
이때는 김현식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가장 불우했던 시절이었다. 호흡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서서히 음악으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을 무렵 그는 그의 아내와 별거하게 된다. 아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 완제와도 떨어져 살게 되는 것이다. 김현식의 주벽과 자유분방함을 견디지 못한 그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상도동의 친정으로 갔다. 또한 이즈음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 중의 하나인 누나도 결혼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유난히 주변 인물들에게 정이 많았던 그는 극심한 인간적 외로움에 빠져든다.
이때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술만 취하면 상도동으로 아들을 보러 가곤 했다고 회상한다. 아들의 생일이라도 되는 날이면 작은 케이크를 정성스럽게 들고 가 근처 놀이터로 완제를 불러 쓸쓸한 생일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그는 처가에서도 환대받는 사위는 아니었던 듯싶다.
이 시절, 그는 어느 자리에선가 「아침 이슬」의 가수 김민기 씨와 벌였던 다툼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른다. 둘은 실상 서로를 잘 알고 있지는 못했던 사이였다. 70년대말 김민깄 씨가 현실참여적 포크(Folks)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었고, 김현식은 밤무대를 전전하는 무명의 가수였을 때 둘이 얼굴은 몇 번 맞부딪친 적은 있었지만 거의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 둘은 80년대 중반 지금은 미국 버클리로 음악 유학을 가 있는 김광민 가족 상가에서 조우한다. 이때 둘은 음악의 주제에 대한 얘기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김현식의 말로는 자신은 '사랑'이 가장 소중한 메세지라고 이야기했고 김민기 형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날의 격론도 어떻게 보면 다분히 술취한 김현식의 시비조의 말들로 시작됐을 가능성이 짙다.
김현식을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은 그가 언제부턴가 막연히 '민중문화'라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사랑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쓸쓸함 등의 노래들을 불러왔지만 80년대 광주 이후로 한국 전 문화계에 거대한 문화적 힘을 엮어가던 '민중문화'에 대해 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얘기를 꺼내곤 했다는 것이다.
김현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은 3집을 위한 준비에 다시 들어갔다. 「빗속의 연가」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와 단둘이서」 등 그가 틈틈이 만들어왔던 곡을 다듬었고, 유재하는 자신의 곡 「가리워진 길」을 이 선배의 앨범을 위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최대 히트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3집의 머릿곡이 되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3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같이했던 후배 박성식이 만든 곡이다.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의 노래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데도 그는 좀처럼 TV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볼 기회란 레코드 자켓의 사진이나 콘서트장에서밖엔 없었다. 그를 기억하는 팬들은 그에게 '얼굴 없는 가수'라는 별명을 이때부터 붙여준다.
그가 방송을 기피하는 이유는 늘 선명했다. 방송은 그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효과를 위한 방향을 언제나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에게 또 언제나 제약이라는 것이다. 가령 옷을 어떤 형태로 입고 나와야 한다든가 몸의 율동은 어떠해야 한다든가 등등. 더구나 정확하게 계산된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방송의 속성은 그를 언제나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아파지고,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 흥이 타오르는, 그런 자기 방향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라이브콘서트였다. 그의 가창력과 오랜 음악 경험에서 체득된 리듬감은 이때부터 그를 라이브콘서트에서 빛을 발하는 가수 중의 하나로 만든다.
3집 이후 김현식은 자연스럽게 블루스에 경도돼간다. 사실 그때까지의 김현식의 음악은 어떤 성향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트로트·포크·소울·발라드 등 여러 장르들이 그의 음악 속에서는 조금씩의 지분을 가지고 섞여 있었다고 보는 표현이 좋을 것이다. 그는 한국 트로트의 전통 속에서 70년대 포크의 서대를 연 세대들의 바로 다음 세대였으며 60년대의 록큰롤을 들으면서 자랐다. 스스로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는, 그런 혼재된 대중가요의 양식들 속에 스스로 표현하고픈 메세지를 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정선과 엄인호가 이끌던 '신촌블루스'와의 만남은 그를 분명한 블루스 지향으로 몰아간다. 그의 목소리가 부쩍 탁해진 것도 이때이고 노래 중간중간에 제 흥에 겨워 나오는 듯한 애드립이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도 이때이다. 또한 그를 철저하게 혼자였던 현실적 삶에서의 그의 외로움이 진한 블루스 발성을 도와주었는지도 모른다. '신촌블루스'와 그는 두 장의 앨범과 몇 번의 콘서트를 같이했다. '신촌블루스' 2집의 블루스 메들리 「환상」과 「골목길」, 3집의 「이별의 종착역」 등이 '신촌블루스'와의 만남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그를 잘 아는 대중음악 애호가들 중에는 이때를 그의 노래의 절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신촌블루스'의 리더 엄인호를 그는 '엄선생'이라는 깍듯한 존칭으로 불렀다. '인호형'이나 '인호'가 아닌 '엄선생'이란 존칭속에는 그만이 갖고 있는 대인관계의 회로내에서의 엄인호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 같은 것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자주 술에 취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또 불쑥불쑥 한밤중에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더러는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이때 방배동의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조그만 카페에는 이 카페를 찾는 단골손님들의 주당 멤버가 생긴다. 시인 황지우, 사진작가 김중만, 가수 김현식과 그들을 잘 아는 몇몇의 사람들이 그들이다. 김중만과는 앨범 자켓 작업을 같이하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고 황지우는 그 술집에서 알게 된 사이이다. 그에게는 황지우라는 시인 역시 '민중문화' 내지는 '지식인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였던지 자주 술을 마시고 공격적 인사를 던졌지만, 주위의 사람들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같이 험악한 국면으로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1987년 가을 그는 다시 대마초 상용혐의로 구속된다. 전인권·허성욱 등의 가수들과 그는 각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수감된다. 대마초를 피워본 경험이 있는 가수들 중에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마초는 숙명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하지 않던 선율들이 마치 오감이 확 열리는 것처럼 뇌표피 위에 수동식 타자기로 두드려대듯이 정확히 와서 박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보면 동료 가수의 새 앨범을 들으면 대마초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가려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대마초로 구속 된 지 5개월 만인 1988년 2월 그는 63빌딩에서 재기의 콘서트를 한다. 다시 건강한 몸으로 음악을 한다는 자기 선언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삭발을 한 채 무대에 오른다. 63빌딩 컨벤션센터는 입추의 여지없지 사람들도 메워지고 그는 이날의 공연을 자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 12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