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장구목이 입구-이끼계곡-삼거리-정상(1,561m)-삼거리-중봉-숙암분교
산행거리와 시간: 약 11.5km, 6시간 소요(휴식시간 30분 포함)
산행참가: 피플러버 회장님, 컴불 형, 알 형, 주정흔 님, 가상이, 오솔길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 그 숲길에 푹 잠겼다가 왔다.
고도 1000미터쯤의 임도를 벗어나 1500미터의 정상부에 이르는 숲길에서는, 땅과 물과 바람, 곧 자연이 잉태시킨 귀한 생명체들이 군락을 이루며 도란도란 살아가고 있었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견디며, 기묘한 형상으로 자라온 주목들. 박새와 함박꽃, 꿩의다리 등등의 야생화 군락. 낮은 고도의 산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희귀본의 식물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오늘, 나는 죽었구나!’
7:03분. 버스는 사당역을 출발한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에 오르면서부터 내 기대는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함께 산행할 팀원들의 면면을 살피니 모두 전문 산꾼의 포스가 느껴지는 남성 산객들이다. 우리팀 넷을 제외하면, 이번 산행에 여성 참가자는 많지 않았다. 순간 난 직감했다.
‘오늘, 나는 죽었구나!’ ㅎ
7:13분. 양재역에서 회장님, 주정흔 님, 가상이가 탑승하고, 정확히 20분 후에는 복정역에서 컴불 형과 알 형이 버스에 오른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곧이어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상이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문막휴게소다. 15분간의 휴식. 버스는 다시 영동고속도를 달려 10시 30분, 산행 들머리인 가리왕산 장구목이 입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오늘의 일정은 16시 하산 완료, 30분 동안 하산주와 식사를 겸한 뒤풀이를 한 뒤 16시 30분 출발예정이란다.
입구에서 인증샷과 함께 우리는 서둘러 산속으로 스며든다. 많이 가파르진 않지만, 조금씩 고도를 올리면서 걷는 길이다. 첫 번째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자 다시 한 번 더 기념촬영. 이후부터는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비록 6명의 대원이지만, 대오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다. 컴불 형을 필두로 회장님, 주정흔 님, 가상이 모두 성큼성큼 앞서 나간다. 나는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선두를 먼저 보내며 천천히 걷는다.
얼마쯤 올랐을까? 등로에 서서 날 기다리시던 회장님께서 내가 너무 뒤처지게 될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함께 걸음을 맞춰 주시겠다 한다. 하지만 페이스를 놓치면 회장님마저 힘이 드실 테니 먼저 가시라고 한다.
등로는 오른쪽으로 이끼계곡을 끼고 오르게 되어 있다. 예전 지리산 함박골 이끼폭포 사진을 보면서, 한 번쯤 가봐야지 했었는데, 비록 지리산은 아니지만, 가리왕산의 이끼계곡도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꽤 입소문을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저 이끼바위들과 함께 놀다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어느새 내 뒤까지 바짝 따라붙은 오늘 산행의 후미대장은 "시간 충분하니까,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도 된다"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앞서가는 대원들과의 간격이 좀 더 벌어졌다 싶으면 내 발걸음은 자꾸만 더 빨라졌다. 제한된 하산시간을 가급적이면 지켜야 하는 단체산행. 다른 팀원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치면 내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럼에도 무거워진 내 발걸음은 또 따로따로 논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꼭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다. 숙녀 체면에 이건 좀 심한 셀프디스인가? ㅋ
보다 못한 알 형이 내 배낭을 달라 한다. 똑같이 힘든 산행에서 배낭을 남의 등에 신세지는 일은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 그러나 다른 팀에 폐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배낭을 대장에게 넘긴다. 참, 배낭이 건네지기 전에는 제법 무게나가는 물 500밀리리터와 우산, 우의 등이 이미 가상이 배낭 속으로 투입되었다.
"가상아, 늘 고마워."^^
주목, 함박꽃, 꿩의다리, 박새
이날 산행팀 중에서 우리팀이 가장 후미였지만, 주목 군락지에 이르러서는 우리 모두 잠시 시간을 잊은 채 즐겼다. 텅 비어버린 주목의 몸집, 바싹 마른 수피들에서는 비애마저 느껴졌다. 수액(樹液)이 빠져나가면서, 풍화되고, 또 풍화되었을, 텅 비어버린 주목의 몸통에서는 수백 년 풍상을 견뎌왔을 그 시간의 공허(空虛)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주목들 사이사이로는 화려한 함박꽃도 한창이었다. 사진이 아닌, 실제 대면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산목련이라고도 불리는 함박꽃은 북한의 국화(國花)다. 진달래꽃? 아니다. 함박꽃잎을 우려내 차로 마셔 본 적이 있다는 주 박사는 “그 기품 있는 향과 맛이 가히 최고였다”며 치켜세웠다. 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 ‘함박꽃 몇 송이 주워(따)올 걸 그랬다.’^^
땅 위에서는 박새 군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산돼지가 헤집어놓은 땅 속에서 뿌리가 뽑힌 박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박새 군락 역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지난달 대암산 산행에서 주 박사의 특강이 있었다는데도 알 형은
“이게 박새야?”
하고 또 물었다. 해서 궁금한 것은 참아내지 못하는 내가 조심스럽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형, 혹시, 그때, 주 박사 설명 들으면서, 하늘에서 박새 찾고 계셨던 거 아녔어요?” ㅎㅎ
가녀린 꿩의 발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하얀 꽃 ‘꿩의다리’도 한창이었다.
더없이 앙증맞고, 예뻤다.
↑ 왼쪽 아랫쪽 연두식물이 박새풀이다. 여긴 하산길. 등로에서는 군락을 이루며 무리지어 산다.
운무에 갇힌 '가리왕섬'
오후 1시 30분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정상에 도착했다. 능선 삼거리에서 정상까지는 200미터. 우리는 모두 삼거리에 배낭을 벗어둔 채 정상으로 향했다. 운무에 갇힌 가리왕산 정상은 흡사 외딴 섬과도 같았다. 맑게 갠 날은 북동쪽으로는 두타산과 발왕산, 상원산, 그리고 서쪽으로 중원산, 남쪽으로는 청옥산 등 1,561미터 상봉에서 내려다보는 장쾌한 산군의 줄기와 봉우리들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서둘러 정상석 인증샷을 남기고 돌아 나와 삼거리 조금 지나서 점심상을 펼쳤다. 회장님은 망고와 우유를 갈아 얼린 달콤한 스무디를 만들어 오셨고, 컴불 형은 현미밥과 불고기와 김치 등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알 형은 댁에서 직접 만들어서 드신다는 쑥떡을 싸왔다. 쑥향이 그만이었다. 오솔길도 모둠영양찰떡. 가상이는 산악회서 점심제공하는 줄 알고 걍 왔단다. ^^ 주 박사는 직접 만든 떡과 살구, 포도 등 알차고 푸짐한 점심과 간식을 싸왔다. 맛난 음식도 음식이지만,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왔다는 사실에 대해 난 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그녀와 좀 더 많이 친해져야겠다. ^^
정상에서부터 숙암분교까지 하산거리는 7.2킬로미터. 이정표 표기로는 5시간 소요다. 그런데 이건 좀 오버다. 나 같은 느림보 걸음으로도 2시간 반 정도면 내려올 수 있는 코스다.
하산 시점부터 나는 같은 버스의 일행들이신 다른 팀에 파견가게(?) 되었다. 점심식사 후 서둘러 먼저 출발하면서, 능선에서 뵙게 된 일행들이신데 결과적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따뜻했던 발길에 감사를!
6킬로미터쯤의 짧지 않은 거리를 앞에서 끌어주고, 내 바로 뒤에서 발 맞추어주신 GS맨님(고교 동문들이셨는데, 학교명의 이니셜이 GS다)들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내 앞에서 걸으셨던 GS맨님은, 오전에 내가 가파른 오르막에서 힘들어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셨다고 했다. 그러했던 내가 혼자 걷고 있으니, 아마도 조난당한 것쯤으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을 거다. ㅋ 살아가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 내밀어야 할 때, 가리왕산에서 느꼈던 GS맨님들의 선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오름길에서처럼, 민폐녀가 되지 않기 위해 쫓기듯 서둘렀던 출발. 뒤에 출발하시는 회장님과 주정흔 님 모두 따라붙을 거라 예상했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회장님도 많이 힘이 드셨던 모양이다. 하산 도중 한 차례도 만나질 못하였다. 광화문 뒤풀이자리에서 회장님은 “오솔길, 의리 없게,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가더라”고 하셨다. 다음부터는 제가 회장마마 케어를…. ㅎ
하산 분기점인 중봉 이정표 표지목에서 기념촬영을 하면서는, 평창동계올림픽 스키 경기장 건설로 사라질 운명이던 이곳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바로 이틀 전인가, 알 기자가 전해주었던, 남녀경기장의 공동운영으로 중봉의 상부 개발이 일부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그 분들께 전했다. GS맨님들 모두 다행이라며 반색했다.
맨 뒤에서 걸으셨던 GS맨 님과는 세월호 참사 보도행태, 이로 인해 CEO가 자리에서 물러난 지상파방송사의 변화되어야 할 모습 등 요즈음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걸었다. GS맨님도 나처럼, 저녁 메인뉴스로는 세월호 소식을 늘 톱뉴스로 전하고 있는 한 종합편성채널을 고집하고 계시다 했다.
GS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멀리 숙암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돌계단을 내려서서 조금 더 걸으니, 만발한 개망초 꽃밭이 장관이었다. 우리의 6시간 산행의 노고를 치하하듯, 하얗게 하얗게 피어 있었다.
하산 종료 4시 20분. 월산악회('달'과 '벽'의 뜻이라고 한다^^)에서 준비한 뒤풀이가 끝나고 우리가 탄 버스는 정확히 17:00, 숙암분교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며칠 전, 가리왕산 중봉 개발과 생태계 파괴 뉴스를 접하면서 떠올렸던 문구로서 이번 여정을 마무리해야겠다. 자주 산에 드는 우리로서도 새겨들을만한 경구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진영만이 존재한다. 불모지의 대리인과 야생의 자연을 사랑하는 자,
생명을 구하는 진영과 생명을 짓밟는 진영이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
− 제이 그리피스의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야생의 땅 - 숲’ 中에서 −
첫댓글 와우! 글발 죽이네. 잘 읽었어. 근데 내가 2월 산행을 마지막으로 몇 달째 쉬고 있다 보니 더 좋은 데만 다니는 것 같아 약오르네. 몇 달만 더 희망과 용기의 귀환을 기다리게.
데스크로부터 받는 칭찬, 음, 나쁘지 않은걸요.^^ 그런데 앞으로도 몇 달을 더 산행을 못하셔야 하나요? ㅠ
@오솔길 지난주에는 화성 행궁 트레킹, 7월 둘째주에는 남한산성 트레킹, 점차 강도를 높여가다 보면 10월께는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오솔길이 조속한 회복을 빌어주면 금세 씻은 듯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희망과용기 제가 34년 전에 뛰어놀던 팔달산의 정기를 받으셨으니 금세 씻은 듯이 회복되실 낍니다. ㅎ
글쓰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밥벌이하는 고단함 덕분에 잘 쓰네. 앞으로 주욱~ 쓸래? ㅎ 그렇잖아도 침묵이 길어지면 내가 쪼을라고 했는데... 암튼 이번 산행에서 오솔길 발에 땀난 이유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음! 특히 여자들끼리 한 재미난 뒤풀이도 오래 기억할 듯. 근데 택시비는 오솔길이 냈나벼? 너무 많이 나왔는데... 술 한잔 살게.
밥벌이의 고단함, 하시니 생각나는 일화 한 토막. 꽤 오래 전에 수원 사는 동기 SM를 만나던 날, 제 손에 들려 있던 책은 <밥벌이의 지겨움>, 친구 SM 손에는 <학문의 즐거움>. 둘이 얼굴 보면서 웃었던 기억이....ㅋ
참, 택시비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면서 총무대리의 청원을, 추상 같은 대장께서 거절하셨어용. ㅋ
너무 잘썼네...
멋지다.
형과 함께 산에 갔던 일이 언제인지....
좀 쉬운 코스 정해지면 함께 가면 좋겠어요. ^^
주옥같은 글입니다
발음 빨리하지 말거라.
@희망과용기 형이 조금 이상해진 듯.
미.치.긋.다. ㅋ
오솔길 험한 산행에 고생했습니다. 산행기 전문 작가의 길로 들어서도 될것 같구먼. 같이 갔으면 좋았을텐데.... 짐이라도 하나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런 의미에서 만나면 수육에 냉면에 쇠주한병 쏠께
함흥으로 할까, 평양으로 할까? ^^
수녀니가 맞혔네, 1무 2패. ㅠ
너무 많은 칭찬에 난 질투남^^. 난 초가을-단풍 들기 전-에 갔었는데...힘들었다는 기억보다는 경이로웠다는 기억이 더 남은 산이었습니다. 수고했어, 혜진. 다시 가고 싶다....산행 하던 날 만난 친구(진경)도 다시 한 번 가자더라....
사실은, 최종적으로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친구의 선답 경험이었어. 둘이 산행능력이 엇비슷하니까. 고마워. ㅎ
다음에 진경씨랑 간다면 다시 가을 말고, 꼭 6월이나 5월 말쯤이 어떨까 싶어. 7~8월은 너무 무더울 테고. 숲이 깨어나 가장 무성하고, 왕성한 생명력으로 숨쉬는 시기일 터이니까.
정말 신비로운 숲길이었음.^^
오솔길아~~~
미안하다.이제야 읽었네.
요즘 카톡으로 소통하다보니 카페를 등한시했어.ㅋ
맛갈난 글 쓰느라 수고많았어.뒤늦게 잘 읽고 간다.
예, 앞으로는 카톡에도 링크를 걸어야겠어요. ㅎ
늦게 읽고서 뒷북 치나 싶어 슬그머니 나갔더니 컴불형 댓글 보면서 깨닫습니다, 사이버 공간의 예절을. 힘들게 올라가느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환상적인 풍광을 다음엔 내려오며 찬찬히 보고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한 산이었습니다, 가리왕산은. 빈 손으로 가서 점심을 가장 많이 먹었던 저는 배가 덜 꺼져 산악회에서 준비한 저녁 반 공기도 못먹었다는... 산행기의 정석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솔길 언니께서. 잘 읽었습니다! ^.^
가상아, 걱정 마. 그날 산행인원 중 게스트 외에 알 대장님이 아직 댓글 안 다셨잖어. ㅋ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