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9:19~23, 요나서 4:1~4, 11
지난 월요일에 아무리 자동차를 잘 관리해도 부품의 수명이 다한 것은 빨리 교체하지 않으면 생명도 위험하게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에 감사하며 한주를 보냈습니다.
각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헌신의 차이는 모두 다르나 그 것을 행하는 것은 모두 동일합니다. 헌신은 인간의 입장으로 볼 때 즐거울 수 없는 것이나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즐거워집니다. 또 인간의 입장으로 헌신을 감당하다보면 즐거울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의 춤을 추게 되거든요!
올해 첫 번째 드려지는 헌신예배를 준비하면서 본문의 말씀과 요나서 4장의 말씀을 주시면서 한 가지 질문을 제게 던지셨습니다. 어떡해야 헌신이 즐거울까? 헌신의 대한 한글사전의 뜻은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즐거운 헌신의 뜻은 무엇일까요? 헌신은 성경 전체에서 네 번 나옵니다.
출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삼천명을 죽이는 헌신>
“헌신하게”(히/마레) 기본 어근이 “채우다” 인데요. 성취하다, 완성하다, 공급하다 뜻으로 여호와가 원하시는 것을 사람의 노력으로 성취와 완성으로 채우고, 채워지기까지 자신들의 희생을 공급하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삿5: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삿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드보라가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니 “백성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라고 나오는데요. 여기서 “즐거이 헌신하였으니”(히/나다브) 재촉하다는 뜻의 기본 어근으로 군인으로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아낌없이 자신을 바침으로 채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즐거이 헌신하니”(히/네다바) 자발적인 의미로 아낌없이 자원제물을 풍성하게 자원하여 기꺼이 드린다는 뜻으로, 또는 자기 자신을 여호와 선물로 자원하여 드린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니 주의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고백처럼, 드보라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니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다는 말씀처럼 우리 주향기교회 직원들과 기관장과 모든 성도들이 즐거이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임한 소리가 이것입니다.
너는 교회에서 일할 때 왜 즐거웠고 행복했느냐? 이 질문에 저의 고등학생 시절과 20~28살의 청년시절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년 전에 한명의 성도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제 마음 한곳에 언제나 주님을 위해 일부분의 역할을 하고 싶어 했고, 그 일이 존경받게 되는 일이든 손가락질과 무시당하는 일이든 행복했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장소에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교회, 20~28때는 제주도를 뺀 전국에 제일 먼 곳이 금일도 까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 주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쫓겨나기도 했고, 경찰서에 불려 들어가기도 했고, 부천에서는 극장을 빌려줘서 그 가득한 극장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해봤습니다. 육체적으로, 금전적으로도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창조주가 원하시는 일을 했다는 그 자체가 그저 행복이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한 헌신이 불행하다 느낄 땐?
실망이죠.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 때문이고. 나도 이제는 이런 위치에 있는데~~ 그러면서 좀 존경받고 높아지고 싶을 때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시키시는 목사님께 실망의 마음이 들더라고요. 교회 밖에서는 초교파적으로 매우 사랑받으며 사역하는데 그 교회에서는 제자 양육외 실제 나서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죠. 제가 그 교회 간다고 서류를 넣은 것도 아니고, 장로님과 목사님이 찾아와서 스카우트해서 데려간 것인데, 그런데 막상 그 때는 몰랐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니, 나의 생각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불행하다, 왜 나만 이렇게 하는 생각은 창조주가 나를 창조하신 이유의 반한 마음이다. 라고 화요일에 인정하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 중 발판이 되었는데 그는 높아지고 정작 나는 더 보잘 것 없어 보일 때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헌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장 많이 흔들렸고, 비참했다 표현하면 맞을 듯합니다. 현재 그를 보면 그 교회에서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 다음의 영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크신 그림을 그 23살 때 그 젊은 혈기와 열정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23살 그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다시 행복한 헌신의 자리로 설 수 있었을까요?
실망해서 말씀 자체를 가까이하지 않다가 버스로 이동할 때 성경을 읽으면서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말씀을 읽는 가까이 함이 회복되니 찬양이 들려지고, 듣기 시작하니 내 마음에 찬양이 가득함으로 부르게 되고,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다 보니, 입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도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수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현장은 바뀐 것 없이 여전히 발판인 내 자신이 행복해졌고, 그를 더 높게 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쏟게 되는 저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그래서 헌신이 행복했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반대가 되면 언제나 헌신이 노동이 되고, 나 자신을 넘어트리고, 불행의 원인으로 항상 등장했지요.
“말씀을 가까이하면 행복이 되나 멀어지면 불행으로 여겨지는 것이 헌신이다.” 23세살 때 쓴 성호의 명언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창조주가 원하시는 것으로” 사람이 세워져갈 때,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땐 사자 앞에 서는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 행복과 감사와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건 공식이 아니라 제가 경험한 경험치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헌신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그 옷을 입는 것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여 거북하고, 힘들고 괴로울 땐 우린 예수님의 품을 더 찾아야하고, 말씀을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요나서 4장에 기록되어 있는 요나와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범하게 됩니다.
니느웨 성안에 12만 명의사람 들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시기 전 한 번의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사람 요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과정은 부끄러웠지만 결과는 그 성 12만 명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킴으로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요나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 그러나 끝까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원망을 굽히지 않은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질문을 받은 유일한 사람. 그래서 성경은 요나의 마지막 기록을 미움의 마음이 그대로 있는 채 끝나고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요구를 완벽히 수행한 헌신 자 이었지만 그의 끝은 모름으로 끝났기에 천국에 가서 아버지께 물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헌신의 삶을 살다 끝이 좋지 않은 요나와 같은 헌신자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기는 싫으나 요나처럼 완벽하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수행하는 주향기교회 직원들과 기관장님들과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끝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사람의 헌신자로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주향기교회 성도들이 되는 것이 저의 변하지 않는 소원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의 일에 일을 주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성경에서 조금 불성실한 전도자로 보여 집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더니 12만 명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켰습니다. 성경에 이와 같은 회개의 사건을 일으킨 자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12만 명의 생명을 구원했듯 오늘 주향기교회 직원 및 기관장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하고, 주향기교회 모든 지체들이 부흥하고, 지역이 부흥하고 모든 것에서 잘 되는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B.C 8세기에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대에 요엘선지자를 통해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러면 여호와가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넘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병들어 죽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멸하려 하실 계획을 완성하시고 그들에게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계획 야곱 이후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향해있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시선이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기회를 부여하시는 시선으로 잠깐 향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나를 선택하여 말씀을 주시고 보내시죠.
여기서 우리들이 실수 하는 생각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일방적으로 일을 시키실까? 나의 동의를 물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요나의 생각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고,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오늘 로마서 9장22~23 본문의 말씀을 마음에 다시 새겨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다시 로마서 9:20~23.읽겠습니다.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지음 받은 우리들이 언제부터인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그런 잘못된 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조가가 어떻게 쓰시든 그것은 창조주 마음입니다. 천하게 쓰시든, 귀하게 쓰시든 그것을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지식으로 그 가치를 설정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은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 뜻에 순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힘써야 하고,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말씀을 읽어 채움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헌신이 즐거움이 되게 하려면 언제나 말씀과 친밀해져 있어야하고, 그 말씀을 채우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아야하고, 내 안에 진리 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채우는 것을 쉬지 말아야합니다.
요나가 헌신의 책무를 다하고 난 후 그가 보였던 행동은 매우 안타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육체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들이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바울 사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순응하기 위해서 쉼 없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행위(읽는 것), 기도하는 행위, 예배드리는 행위의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매일의 생활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바쁘고, 여유 없는 생활의 연속일지라도 주님과 차 한 잔 나누는 시간을 가짐으로 나를 지으신 창조주를 흡족하게 하는 헌신의 길을 걸어가는 주향기교회 직원들과 기관장님들과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