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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로뎀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빌린 땅에 도토리 심기
땅콩에 담긴 창조섭리
머뭇거리지 말고 일어나 남은 땅을 취하라 유다와 요셉의 두 아들이 받은 기업 다음으로 남아있는 지파는 일곱 지파입니다. 그들은 실로의 회막(Tent fo Meeting) 에 모였습니다.
여자는 하늘, 남자는 땅인가 어떤 아들이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고려장하고자 등에 업고
평평한 땅
묵은 땅 이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본래는 착한 마음이었으나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는 가운데 그 마음이 굳어져 좋지 못한 습관이 생기고 그 뿌리가 깊어 집니다. 즉, 세상 생각과 사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 이생의 자랑과 교만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마음속이나 그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만 없는 것이 아니라 초신자나 열심있는 성도의 옥토와 같은 마음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묵은 땅은 예리한 보습으로 굳은 땅을 깨뜨리고 부드럽게 갈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속에 있는 뿌리까지 뽑아서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옥토로 만든 후에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길이 박혀 있는 죄악의 뿌리를 뽑을 때 심한 고통이 따르듯 철저히 회개하여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요나 선지자나 마가, 요한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마음이 옥토같았으나 어쩌다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져 자기 주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곧 잘못을 회개하여 다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묵은 땅이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권세없고, 돈 없을 때는 옥토였는데 지금 묵은 땅이 된 심령은 없습니까? 지체말고 마음밭을 개간하여 옥토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들은 기도를 끝내기 전에 눈을 떴다. 그들은 그곳에 알버트 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부탁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우리의 왕은 또 우리에게 분노와 상처를 정복하도록 항상 안내하신다. 당신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려라.전능의 왕께서 용서할줄 아는 용기를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
땅에 엎드린 염소
고센 땅 고센 땅이야 말로 야곱의 자손들이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름진 옥토가 될 것이다. - 그리고 항상 그 땅은 메마르지 않고 기름지고 풍성한 은혜의 물줄기가 흘러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벗어날 수 있는 위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언제든지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자세로 살아야 함을 가리킨다.
2. 손상되는 국가 이미지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가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3. 구약의 법 정신 4. 앞으로의 과제 개교회 적용지침
며칠 전 밤 늦은 시간에 TV에 방영된 <죽어가는 일본의 땅>이란 다큐멘타리를 본적이 있다. 대 단위 농장을 경영하는 한 농부가 쌀을 재배하여 정미소로 가지고 가서 쌀을 빻았는데 쌀이 힘없이 밀가루처럼 부서져 버리는 것이었다 농부는 큰 충격을 받고 그 땅을 살리기 위해 유기농법을 주장하고 새로운 흙을 논에 뿌리고 쇠똥과 풀을 섞어 만든 퇴비로 거름을 만들어 논-땅을 살리는 운동을 벌였다. 일본 전역의 토질을 조사한 결과 거의가 죽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는 땅임을 확인한 그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라도 땅을 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글을 통해 홍보하고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었다.
김홍균 기자> 본사 『시사월간 WIN』취재팀이 안용복의 행적(『WIN』5월호 게재)을 추적하는 일본현지 취재중 발굴한 이 기록은 그의 두차례에 걸친 일본행중 1차 도일(1693년)
하나님은 사람은 지으시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심히좋았더라"(창 1:31)라고 말씀하신다. "심히"= (원어)메오드 - 스트롱코드(3966) = 열렬함, 열렬하게, 최상급을 뜻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제일 기뻐하셨던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방법으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 사람은 끊임없이 번성하여 오늘날 가히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이제 수적인 증가만이 충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목적과 다른 만물을 창조하실때는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오늘도 원하시는 것이다. 세계인구 56억4천만명....2020년엔 79억 돌파 통계국은 이날 공개한 `94년 세계인구현황'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히고세계 인구 증가율을 1.5%로 집계했다. 지역별로는 개도권이 1.9%이며선진권은 0.4%로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남북한의 올해 현재 인구는 한국이 4,508만3천명이며 북한은 2,306만7천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증가율은 북한이 1.8%로 한국의 1%보다크게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인구 1천명당 사망율은 그러나 남북한 모두가 각각 6명으로 같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세계보건기구(WHO) 집계를 인용, 지난해 중반 현재 전세계에서1천4백만명이 HIV(사람 면역부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땅은 거룩하다- 인디안 추장 시애틀의 편지 - 당신이 어떻게 이 하늘을, 이 땅의 온기를 사거나 팔 수 있겠습니까? 우리 백성들한테는 이 땅 구석구석이 모두 거룩합니다. 나무들 속에서 순환하는 수액이 붉은 피부를 띤 우리네들의 기억들을 실어 나릅니다. 바위 투성이인 여러 산꼭대기와 풀밭의 에너지와 조랑말의 체온 그리고 인간 …. 이 모두가 동일한 한 가족에 속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줍니다. 또한 형제에게 쏟아부을 애정을 이 강들한테 베풀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동일한 호흡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께 그 분의 첫 호흡을 허락해준 바람이 또한 그의 마지막 숨을 받아 안습니다. 나는 서양문명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만 죽이는 들소들보다
이런 경우를 심리학적으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K목사와 I여전도사는 하나의 작은 일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거기에 너무나 집착되어 예배를 인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성경에 위의 것이 아닌 땅의 것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시험에 빠질 수 밖에 K목사의 경우, 오래전 얘기다. 재크린이 억만장자인 오나시스와 재혼한다는 기사가 방송과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아니 세상에 케네디 대통령 미망인 재크린이 오나시스와 재혼하다니!} {그래,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역시 K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권세와 명예와 돈,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다 누려본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또 무엇이 아쉽고 미련이 있어 다시 재혼을 하다니, 그는 주일이 되어 강단에 섰다. 그런데 강단에 서도 이런 생각이 머리속에 꽉차 예배를 인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는 띵하고 온통 그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는 할 수 없이 성도들에게 예배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시켰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머리가 아파 도저히 예배를 인도할 수 없으니 저를 위해 잠시 통성기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별 것도 아닌 것에 괜히 깊은 관심 갖다가 -- 그리고 겨우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I여전도사 경우는 이렇다. 어느 해 봄이다. 훈훈한 봄바람이 부니 만물들이 긴 겨울잠에 깨어 나무마다 새싹이 움트고 들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났다. (아니, 이거 돋나물 아냐! 와... 이리도 많지.)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약속시간도 잊은 채 정신없이 돋나물을 뜯었다. 이렇게 한참 나물을 뜯다 [앗차!]하고 서둘러 심방 할 집으로 갔다. {집사님 계세요.?} {그렇지요.} (아니, 내가 왜 이럴까. 주여! 주여!) 이어 찬송을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여전히 돋나물이 아른거리며 유혹의 손짓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찬송을 부르고 기도와 설교를 했는지 모른다. 이에 예배후 결단을 내렸다. {아니, 아까는 좋다고 자랑까지 하시더니--.} {지금은 아니에요. 난 이거 싫어요.} (그까짓 돋나물이 무어길래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아. 그래. 버리는 거야.)
<예수 탄생 2천년 기념 대축제>가 오는 7일부터 11일까지 예루살렘에서 개최됩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허가한 최초의 개신교 집회인 이번 대축제는 기독교 역사의 한페이지를 수놓을만한 비중있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이러한 분쟁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기대돼온 양심적 세계 지도세력을 표방하는 나라건 유엔같은 국제기구건 이처럼 절실한 문제에 대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최근 몇년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르완다 사태와 비슷한 양상의 인종적 갈등과 참극이 빚어져 왔지만 기대한 만큼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음은 이미 여러 경우에서 드러난 바다. 르완다 종족 갈등의 근원은 이미 오래돼 온 것이지만 이번과 같은 대량 살륙으로 폭발한 것은 꼭 1년전인 지난해 4월이었다 8백만의 인구중 1백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명이 학살을 피해 난민화하면서 국제사회는 르완다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식민세력으로서 연고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벨기에가 군대를 파견해 보기도 하고 유엔도 안보리결의를 통해 평화유지군을 내보내는 등의 일을 해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구호단체를 비롯해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의 자원봉사 단체들이 난민들에게 식량,의료등 지원활동에나섰다. 그러나 23일 빚어진 난민촌의 대학살극은 이러한 활동들이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미국을 비롯 많은 나라들은 이미 소말리아를 비롯,유고슬라비아의 경험에서 이러한 종류의 분쟁에 영향력 행사는 한계가 있고 또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한계에 부닥치는 것은 유엔 역시 마찬가지다.문제는 이처럼 국제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르완다와 같은 종족, 인종분쟁이 지구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이미 터진 분쟁의 수습도 중요하지만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분쟁의 예방도 중요하다 국제사회가 지향해야 할 역할이다. << 48면 3섹션 정보신문 중앙일보 >>발행일 : 95년4월24일
사랑의 동기로 중국 땅에
생태학적 신앙고백 - 땅은 주님의 것 땅은 소중하다. 땅은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땅이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과 모든 부족민의 전통의 핵심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은 땅의 가치와 경이로움을 제대로 평가한 첫번째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0).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6-18). “하나님께서는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를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0-21). “하나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4-25).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31). 땅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있어 소중하다. 땅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땅은 유일무이한 것이요, 땅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한 무명의 땅의 연인은 우리를 땅에 대한 명상으로 초대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판 어딘가에서 몇 피트 상공을 떠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도처에서 몰려올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그것의 큰 물웅덩이들과 작은 물웅덩이들, 그리고 그 웅덩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위에 있는 돌기들과 그것 안에 있는 구멍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매우 얇은 가스층, 그리고 이 가스 위를 떠도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둥근 공 모양의 표면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할 것이다. 이 둥근 공 모양의 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목숨바쳐 보호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없이는 그들의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54년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Seattle)은, 부족민들은 땅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이 땅의 모든 부분이 우리 부족민에게는 신성하다. 빛나는 소나무 잎들, 모래가 쌓인 해안, 울창한 숲속의 모든 안개, 투명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곤충은 우리 부족민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요 …, 우리 선조들의 재(ashes)는 신성하다.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요, 마찬가지로 이 언덕들, 이 나무들, 땅의 이 부분도 우리에게는 신성하다 … 공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같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땅의 정령(spirit)을 땅이 지지해주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나눈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하다. 땅은 하나님께서 인류 및 모든 생물과 함께 나누시는 생명과 사랑의 모든 은총을 요약해주는 상징이다. 땅은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적인 현실(relational reality),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명과 사랑을 역동적으로 중재하면서 활기에 넘치게 생존해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땅은 빵이나 쌀과 같은 친교요, 모든 존재의 통일성(togetherness)의 경축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은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독점하는 일을 피하고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은 그 어디에서나 인류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가능성에 봉사하려는 땅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에서만, 기본적인 자원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한 분배가 정당화될 수 있다. 땅을 포로로 사로잡고 또 땅이 땅의 배고픈 자녀에게 생명의 우유를 가지고 신속하게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 (땅에 대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땅이 몇 사람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땅의 본성 및 목적과 상반되는 불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땅은 언제나 땅 본래의 친교적인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의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 땅은 언제나 성찬식의 신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땅은 이 세계의 생명을 위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빵이요, 하나님의 몸이다. 많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취했던 자세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초기 교부들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교리/가르침의 기초는 인간의 평등이었다. 평등은 다음에서 흘러나온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공통된 기원(또한 우리는 땅의 마음과 자궁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의 공통된 성격(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본적 욕구들과 사랑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3) 우리의 공통된 운명(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인간 상호간의 삶에로 부름받고 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고 있다. 이 평등한 권리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공기를 호흡하고, 대지를 걷고, 고귀한 인간 실존에 필요한 땅과 그밖의 생산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 우리는 동일한 대지를 공유한다. 공동의 대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권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평등은 하나님의 땅이 집중화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금지한다. 2. 땅은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가족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땅은 교부들이 공동의 재화(ta koina)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예정된 것이다. 땅은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ta idia)이 아니다. 교부들은 공동의 하늘, 공동의 빛, 공동의 우주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땅과 공기, 물은 “생명의 근원들”(causes of life)이다.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박탈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소유권, 다른 사람을 무소유와 가난한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땅의 집중과 부의 축적은 사기와 강탈, 약탈과 근본적인 불의를 내포한다. 가난한 사람 한복판에서 부자는 도둑놈이다.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훔친 물건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 훔친 물건을 다시금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것은 정의의 요구다. 4. 교부들이 정죄하는 것은 사적 소유권의 남용만이 아니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 제도까지를 문제삼는다. 그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탐욕, 폭력, 박탈, 약탈, 그리고 도둑질과 동일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유재산은 온갖 불화와 갈등,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 황제의 법에 불과하다. 그것은 땅이라는 직물(fabric) 안에 분명히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된다. 5.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사적 소유권을 우상숭배로 여겨 배척한다. 사적 소유권은 탐욕을 내포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탐욕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한다. 독점적 권리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주장은 땅과 땅의 온갖 풍요로운 것들에 대해 갖고 계신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적 권리에 맞서는 행위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부를 존중하는 한에서만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부는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 모두, 우리의 모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땅과 부는 우정과 함께 나누는 생명/삶의 매개체다. 6. 사도행전 2장과 4장, 또 떡을 떼는 일에 있어서의 평등의 실천에 대한 본문들(고전 10장, 11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초기 교부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것은 그런 충족과 공동체였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화를 공동으로 소유하라는 종교적 명령들이 교회에 출현한 것은, 친구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원래적인 자기이해가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질식당하던 때, 그리하여 교회 자체가 로마의 사회적 현실의 모습을 따라 개조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독교 초기의 공동사회적(communitarian) 비전에 대한 어떤 기억을 지켜가려는, 또 “너희--하나님의 백성들--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 15:4)는 신명기적 권고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공동소유권의 이상은 교회에서 복음적인 가치로서 늘 높이 평가받아왔다. 복음적인 것이 많은 사람, 혹은 마을과 도시, 국가와 세계가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 이상은 아마도 우리의 신학적 및 영적 애매모호성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땅은 우리가 우리의 뿌리(roots)로 되돌아갈 것을, 그리하여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땅의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꽃피울 것을 요구한다.10)관심의 영역들 오늘날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세 가지 요인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요인들은 땅과 땅의 신비에 대한 성경적 및 기독교적 견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땅의 상품화, 땅과 인구비율의 전세계적인 불균형,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1. 그 어떤 진정한 휴머니즘이나 진정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땅은 그저 우리가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a thing)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예배 및 경험과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결코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고대의 부족민 전통에서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the Pacific Peoples)은, 우리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늘 상기시켜왔다. “나는 여러분이 땅 어머니(Earth Mother)의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부족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 우리는 땅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녀를 소유할 수 없다. 그녀가 우리를 소유한다.”11) 땅은 소유물이 아니다. 땅은 사람들이다(land is human beings). 벨록(Hilaire Belloc)은 인간을 “땅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땅은 절대로 매매와 가격 흥정의 대상인 시장의 한 상품이 될 수 없다. 땅은 우리의 몸이며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어머니의 몸이며 어머니 자신, 혹은 하나님의 성례전(sacraments)이다. 땅은 신성하다. 앞서 인용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더 들어보자: 워싱턴의 최고 우두머리께서 우리의 땅을 자신이 사기 원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 어떻게 당신네는 하늘, 또 땅의 따스한 기운을 사거나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가 대기의 신선함과 물의 활기띤 광채를 소유한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당신들은 그것들을 살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적인 깊이와 문화적인 세련됨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다. 모든 이민자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백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 지구는 백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다 … 백인은 땅을 돌보지 않는다 … 백인은 자기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빛나는 염주알처럼 사고팔고 약탈해도 좋은 물건인 양 다룬다”는 것이 바로 이들 원주민들의 뼈아픈 체험이다.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의 땅을 양도받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왔을 때, 블랙피트 부족의 추장은 이렇게 거절했다: 우리의 땅은 당신네의 돈보다 더 소중하다 … 햇빛이 빛나고 물이 흐르는 한, 이 땅은 여기에 계속 존재하여 사람과 동물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생명을 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팔 수가 없다. 이 땅은 위대한 영(the Great Spirit)에 의해 우리를 위해 여기에 놓여졌고 우리는 그것을 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소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당신네의 돈을 세고 또 그 돈을 불태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영만이 이 평원의 무수한 모래알과 풀잎을 셀 수 있다. 당신들에 대한 선물로서, 우리는 당신네가 가질 수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당신들에게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땅만은 절대로 안된다.12) 모든 원시사회가 공유하는 이런 세계관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가족, 우리의 자매와 어머니, 생명과 예배 안에서의 우리의 파트너,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공동의 순례자다. 이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이탈이다. 지파동맹체 시대(tribal period)의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견해도 이와 유사했다. 이런 초기의 신념들의 주목할 만한 흔적들이 성경의 최종적인 편집과정에서도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예를 들어, 땅을 영원히 팔아넘기는 것은 금지된다. 왜? 그것은 많은 사람의 땅이 몇몇 지주의 손에 집중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만약 내 추론이 맞다면,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나야 할 것이다: 땅은 절대로 사거나 팔 수 없다. 일단 팔린 땅도 언제든지 되살 수 있었다. 즉 땅의 원래 주인이나 그의 친척들이 돈을 되돌려주면, 땅을 산 사람은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땅을 산 사람은 땅을 계속 소유할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레 25장; 신 15장).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땅을 모독하는 행위는 계급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런 행위는 고대 로마에서 일상적인 관행이 되었고, 봉건사회로 전달된 로마의 법은 고대 문화에 대한 식민지 정복의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정신으로서 전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제 땅은 상업적 문화의 노골적인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례전으로서의, 그리고 우리의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본래적인 존엄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땅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과 모순되는 두번째 중요한 요인은, 지구의 표면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분포가 현재 전세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로 제기하는 티사 발라수리야는 이런 불평등한 분포에서 “세계체제의 주된 결점들과 불의들 중의 하나”를 목격한다.13) 1500-1950년에 이르는 유럽의 팽창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땅들의 대부분을 유럽인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유럽인들은 북미와 중미, 남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유럽의 한 민족인 러시아인들은 태평양과 중국과의 경계선까지 그들의 제국을 넓혔다.14) 유럽인들은 “지구의 거대한 열린 공간들 중의 대부분”을 제것으로 만들었으며, 유럽과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하나의 세계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세계는 “백인 민족주의의(white-racist) 세계체제”이다.15) 불균형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체 인류의 40퍼센트를 구성하는 인도와 중국, 일본의 인구는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만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세계인구의 겨우 1퍼센트를 구성하는 캐나다와 호주와 뉴질랜드는 지구 표면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보다 아주 조금밖에 작지 않은 브라질은 중국 인구의 겨우 10분의 1만을 먹여살린다. 볼리비아는 일본보다 세 배나 큰데, 일본이 1억 1,500만의 인구를 가진 것과 비교하여 겨우 5백만 인구밖에 안된다. 뉴질랜드 면적의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는 뉴질랜드의 25배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살린다. 북미에서는 땅 대 농업노동자의 비율이 78.4대 1임에 반하여, 아시아와 태평안 연안 국가들에서는 그 비율이 0.98대 1이다. 중국과 다른 중앙집중화된 경제지역들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낮아져 0.51대 1이다.16) 이런 인위적으로 야기된 부당한 불균형에는 인종차별주의적인 차원 또한 담겨져 있다:전체 세계체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서로 상이한 인종집단들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개별적이고 불평등한 “보전자”(preser-ves), 즉 땅을 할당받는다. 황인종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갖고 있다. 흑인은 아프리카를 갖고 있다. 갈색 인종(brown people)에게는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동남 아시아가 할당되어 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주로 백인들 몫이다. 흑인과 황인종, 혹은 갈색 인종이 백인 지역에 자유롭게 이민을 갈 수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주로 백인을 위한 노예 혹은 값싼 노동자로서 그러할 뿐이었다.17) 이런 현상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 호주는 백인이 자기네 땅에 들어와 살도록 광고까지 하며 짐바브웨에서 25만의 백인을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2만5천의 아시아인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그것도 나름대로 기술과 교육과 재정적인 여력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영토가 넓은 그 어느 나라도, 세계인구의 재정착(resettlement)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실들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영토에 비해서) 인구가 적은 모든 나라들--미국, 소련,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은 아시아인을 차별대우하는 이민법을 갖고 있다.”18)이런 전세계적인 불균형과 인구가 적은 나라들의 이민정책은 “인간의 발전과 정의를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들 중 하나”다. 따라서 여러 민족에게 땅을 평화롭게 재분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협의사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창조적인 성장이 땅의 올바른 사용 및 변형과 관련맺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은 오염과 쓰레기를 줄일 것이다. 왜? “북미와 호주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들과는 달리, 제3세계 사람들은 땅을 돌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발전의 문제들을 다루는 그 어느 국제기구도 문제의 이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 현재의 영토분포는 손을 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an untouchable Absolute)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9) 그러나 땅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땅의 자녀들 모두에게 거주할 집을 주고, 또 그들을 알맞고 바르게 양육하고 싶어하는 땅의 소명과 갈망과 같은 근본적인 실제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3. 땅과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심지어는 인간적인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세번째 요인은 생태계의 위기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혹은 그밖의 견해들과 신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이 지구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행성 위에서의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오늘날 지구는 산업과 농업, 대중매체의 모든 면에 있어서 이익지향적인 과학적-기술적 현대문화의 낭비적이고 방탕하고 약탈적인 관행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의 집으로서의 지구의 본래적인 위치와 의미와 역사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위기의 징후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소중한 자원들이 무기경쟁, 핵무기 축적, “별들의 전쟁”(Star Wars), 그리고 이와 유사한 미친 짓거리들 같은 파괴적이고 해로운 목적에 헛되이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와 지구의 생명을 부분적으로, 전적으로, 혹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할 수 있으며 또 지금까지 파괴해왔다. 핵폐기물, 방사능폐기물, 그리고 그밖에 치명적으로 유독한 폐기물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바다나 섬, 대륙에 마구 쏟아부어지고 있다.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및 이로 말미암은 산성비와 함께, 이것들은 식물과 새, 짐승과 물고기, 호수와 강, 인간에게 대규모의 질병과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성 연기로 자욱한 대부분의 도시의 대기는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몇 개의 지명만 거론해보더라도, 쓰리-마일 섬, 비키니 아톨, 보팔과 체르노빌은 우리의 경제적 및 정치적 체제라고 하는 현대의 몰록(Moloch)이 요구하는 인간적 희생물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릇 선택한 방향으로 계속 돌진할 때, 땅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는지 알리는 불길한 경고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는 토양을 오염시키고 지력을 떨어뜨린다. 그것들의 과도한 사용은 이 땅과 땅의 생물의 건강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은 남용되거나 낭비되고 있으며, 지하의 물의 근원들은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축적과 일회용 소비자중심주의 문화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마구 열대림을 베는 것은 지구 온도의 상승, 기상조건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오존층 파괴를 야기시킨다. 이미 이것들은 지구의 울창한 산림과 비옥한 들판을 사막으로 전락시키는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문화체제 안에서, 환경의 파괴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오염들과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다. 실업의 증가, 음식과 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채우기 위하여 엄청난 수의 대중이 몇몇 권력의 중심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광범위하고 심화된 상품화된 삶의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착취당하고 날로 지위가 격하됨,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자연과의 조용한 친교로부터 떨어져나가고, 그들의 상호적인 관계가 약화되며 기계화되고, 시와 신비에 대한 그들의 소박하고도 필수적인 감정이 천박한 실용주의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메말라질 때 강렬하게 느껴지는 고독감과 무의미성의 고통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오염이다. 가장 큰 오염은, 이제 기계가 땅과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싱싱한 생명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국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파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인간과 땅의 느리거나 신속한 죽음을 암시해준다. “땅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우리 시대의 시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집인 땅을 약탈하고 파괴시키는 광기에 맞서는 날카롭고도 강력한 항의다. 땅이여, 독성이 서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최근 들어서 영적이며 신학적인 작가들은 우리를 회심에로 부르면서 우리가 멈춰서서 끊임없이 고갈되고 있는 땅과 땅의 충만한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고하고 새롭게 느껴볼 것을 요구하여왔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책임한 접근방법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하는 피조물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적 기독교적 오만”은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땅 자체의 법칙과 요구, 리듬과 한계에 대한 고려 없이 땅을 지배하기 원하는 것은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다”라고 말하는 티사 발라수리야의 주장은 참으로 옳다.21)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돌보라”고도 말씀하셨다(창 1:28; 2:15). 우리 자신에게서 물질에 대한 모든 비열한 경멸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존재하게 하는 것에 대한 존경스런 관심을 발전시키는 일은 꼭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시적인(poetic) 접근은 환원주의적인 과학적/기술적 접근과 균형을 이루면서 과학적/기술적 접근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서 꽃을 바라보고 새를 명상하면서 신비와 대면하는 것, 성프랜시스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의 평등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인간, 해와 달, 물과 불을 하나의 무지개 현실(a single rainbow reality)로 통합시키는 자매성을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형태의 생명에 담긴 신비와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땅의 신비에 대한 느낌도 중요하다. 이 신비는 궁극적인 신비, 즉 모든 실재의 자궁과 결합되어 있다.22)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저세상적(other-worldly) 및 이세상적(inner-worldly) 금욕주의를 넘어서 세상을 위하는(pro-worldly) 금욕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는 땅과 사람들, 하나님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conviviality)로 펼쳐진다.23) 이 잔치에서, 땅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상적인(terrestrial)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차리신 인류 공동의 식탁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쟁탈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즐거운 친교 가운데서 이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인다. 이런 잔치는 “땅과 생명에 필수적인 자원들의 불균형한 분배”를 유지시키는, 그리고 “생태계의 섬세한 내적 관계를 파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와 거절을 요구한다.24)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
쓰레기 수집이 취미? 재미있는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 토픽스란에 실려 있었다. 켈리포니아의 한 사나이는 쓰레기 수집이 취미다. 남이 버린 것들을 10년간 주어 모았는데 집안은 쓰레기로 가득찼다. 이것은 소방법 위반이어서 결국 동네 사람들이 두 추럭이나 되는 쓰레기들을 내다버렸다. 오랜만에 깨끗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그 다음 날부터 다시 쓰레기 수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들이 평생을 투자해서 열심히 모아들이지만 캘리포니아 사나이의 쓰레기 수집과 큰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9월10일자 일간스포츠(제6456호) 마광수교수는 느닷없이 [예수는 지금도 지하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게 틀림없다]고 단언하고 나선 것이다.
첫째, "겸비하라" - 겸손하라는 뜻이다. 자기를 스스로 낮출 때에 진실을 알게 된다. 교만한 자는 자기를 높이면서 진실을 잊어버린다...
잉글랜드 서부지방의 어느 높은 산의 비탈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아내는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아내는 나에게 가끔 사랑을 고백한다. 아내는 나에게 항상 최대의 예의를 갖춰 대해준다. 아내는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준다. 아내는 남편의 사소한 일들은 무시해준다. 아내는 해묵은 문제들을 들춰내지 않는다. 아내는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 아내는 항상 나를 보고 해맑은 표정을 지어준다. 아내는 나의 힘의 원천이다.
[이땅의 아버지들] 그래도 찡한 父情 [동아일보] 98.5.6이기홍 기자 “운동회 날인데요.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오셨는데 저만 아빠가 왔지 뭐예요. 왜 아빠가 오셨느냐고 막 신경질을 냈걸랑요. 그랬더니 아빠가 너무 미안해하며 안아주셨는데, 그러면서 막 우시는 거예요.” 지난해 아버지가 실직해 엄마가 식당에 나간다는 P초등교4년 최모양의 얘기다. 외롭고 힘빠진 아버지들. 허덕이는 일상속에서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푸석푸석해져 있는 가슴 속. 그러나 그 속엔 아직도 한 줄기 따뜻한 강물이 흐른다. 자식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민주야,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구나. 연탄가스 때문에 걱정이다. 동네 개나 큰방 개가 짖어댈 때는 잠을 자지 말고 주의를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삶의 큰 지혜가 아닌가 한다. ” 하지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깊이와 넓이. 모성애가 그렇듯 부성애도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IMF시대라 해서, 괴성을 지르던 X세대가 아버지가 됐다 해서 부성애가 사라지진 않는다. 아버지들은 사랑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로 병상에 누웠던 구회씨(38·경기 부천시 고강본동)의 회상. “늘 엄하게만 생각됐던 아버지가 다 큰 자식의 대소변수발은 물론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마사지하고 굽혔다 폈다 해주시기를 하루에도 수백번…. 어느 늦은 밤 병동사람들이 다 잠든 후, 아들에게 들킬세라 소리없는 흐느낌으로 침상 위에 피보다 더 진한 눈물을 토해내시더군요.” 아버지의 큰 사랑이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는 건 영화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단국대 이상훈교수(37)는 선천성심장질환을 앓는 아들 승리군(8)에 대한 애끓는 부정으로 5년간의 노력 끝에 최근 ‘공압식 심실보조장치’를 개발해냈다. 새 장치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을 따 ‘VICTORY(승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빈 자리에서 그의 사랑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마련. 다산 정약용, 네루, 김대중 등 저명인사들이 자식에게 보낸 편지는 그 속에 담긴 절절한 부성애의 힘으로 나중에 책으로 엮여나와 명저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 한 평범한 아버지의 맞춤법 안맞는 편지도 읽어보자. ‘아버님…’에 수록된 김경연씨의 사연. 그뒤 임신한 김씨. 어느날 집 근처 가게 아줌마에게서 청국장 보따리를 전해 받았다. 입덧하는 딸에게 주려고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고 온 아버지가 혹시 딸이 시댁식구 앞에서 불편해할까봐 가게에 짐과 메모를 맡긴 채 말없이 돌아가버린 것.
[동아일보] 98.5.5박중현 기자 “정석씨, 오늘 어디 나가요?” 아버지재단의 연구분과위원장 정채기씨(남성학자). “IMF시대가 끝나도 맞벌이를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가정이 늘어날 것이다. 서구처럼 엄마의 역할 중 상당부분이 남편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 ‘미스터 맘’이 많아질 것이다. ” ‘구조조정’의 시대. 껍데기는 가고 거품이 걷혀버린 우리사회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 될까. 서구의 남성학자들은 고도 산업사회에는‘미스터 맘’‘돈지갑형 아버지’ ‘방치형 아버지’ 등 세가지 유형의 아버지만 남는다고 설명한다. 돈지갑형 아버지“용돈 좀 주세요.” “뭐에 쓰려고? 얼마나 필요한데?” 자녀가 보기에 아버지는 ‘열린 지갑’. 돈지갑(Purse)을 통해 자녀와 관계를 형성하는 아버지가 주로 나누는 대화는 이처럼 간단명료하다. 어깨를 짓눌러온 가장의 책임감. 더이상 견뎌야 할 이유와 미래를 찾지 못한다. 탈출…. 거리를 헤매는 보헤미안, 지하철역 노숙자로 전락한다. 미국에는 2백만명이 넘는 ‘홈리스(Homeless) 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씨는 “서구의 ‘홈리스아버지’가 제멋대로의 삶을 영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최근 우리사회에 증가하는 ‘방치형 아버지’는 경제적 충격에 의한 ‘병리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 제삼의 대안?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다운시프팅(Downshifting)’이 유행하고 있다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근호가 보도. 다운시프팅이란 자동차의 기어를 낮은 단계로 변속한다는 뜻. 출세나 돈벌이에 매달려 숨가쁘 게 달리는 대신 인간답고 여유있게 살기위해 삶의 속도를 줄이는 생활방식이다. ‘아버지의 전화’의 정송대표. “우리의 경우 ‘다운시프팅’은 쉽지 않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
[동아일보] 98.5.3이기홍 기자 바람처럼 거닐다 만취해 귀가한 아버지. 그 큰 그림자가 문지방에 우뚝 서면 가족들은 숨을 죽였다. 집안의 절대군주. 그 힘은 돈에서만 나온 건 아니었다. 평생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밥벌이 한번 해본 적 없어도 아버지의 힘은 셌다. 바로 한세대전까지의 얘기다. 그러나 IMF시대, 아버지들은 작아지고 외로워진다. 쫓겨나듯 집을 나와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홈리스 아버지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저무는 거리,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문득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그 무거운 시선.
▼ 어려지는 아버지들 ▼ 조종사는 대부분 30대중반, 40대초반의 남자들. “안팎이 스트레스뿐인데 한번 무선조종 놀이를 해보니 너무 재미있어 취미를 붙였다”는 김민석씨(43·경기 과천시 부림동). “아이는 점점 반항하고 아내는 고집세고 뻔뻔해져요. 회사일은 점점 과중해지는데 체력은 약해져만 가고. 늘어나는 건 콜레스테롤뿐이지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여주인공 샹탈은 해변에서 연을 날리고 노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년 남성들이라는데 놀라며 “아기와 부인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아빠들, 그들은 이제 정부(情婦)의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해변에서 논다”고 탄식한다.
▼ 깊어지는 외로움 ▼
[동아일보] 98.5.5박중현 기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것은 인생사의 진리일까. ▼유아기(3∼6세)〓본능에 이끌려 자기욕구를 충족하려는 시기. ▼초등학교(7∼12세)〓아버지의 권위와 지식, 경제력을 동일시하는 시기. ▼중고등학교(13∼18세)〓욕구의 폭이 넓어지고 종류도 다양해지면서‘1차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시기. ▼청년기(19∼결혼전)〓독립기.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에 대한 불만을 토로.
[문화일보] 98.4.4 金承炫 기자 “당신들 정체가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과연 정직합니까. 도대체 당신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鄭교수는 “광복이후 한국종교는 불교, 기독교, 유교는 물론 새로 생겨난 종교들까지 융성일로를 걸어왔다”면서 “그러나 종교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종교는 건강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鄭교수는 종교를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는 상징체계’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는 일반인에게 인정받는 해답의 상징체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현재의 모든 우리 종교는 “종교인이 되면, 지금 여기서, 고통받지 않고, 춥고 배고프지 않으며, 사회에서 꽤 힘을 쓰며, 남보다 못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공통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해답은 철저히 사람을 기만하는 해답이라고 鄭교수는 비판했다. “한국 종교는 '지금 여기서'를 강조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와 단절된 '자폐적 공간'속에 안주시켜 사람을 무책임하게 만든다. 또 자기 함몰적인 공간에서 개인적인 복을 빌면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감사만 넘친다. 이같은 祈福(기복)신앙이 팽배하면서 종교는 상품화된다. 종교는 특히 교인에게 물질적 富(부)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부를 종교에 바치라는 이율배반적인 착취를 현실화하고 있다.” 鄭교수는 또 우리 종교가 제도화된 힘을 갖게 되면서 다른 종교 또는 사회의 다른 세력과 타협하고 경쟁하고 유착되면서 종교 본래의 오롯한 자세를 지켜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우리 종교는 교세확장을 위해 종교의 원리를 버릴만큼 ‘놀라운 융통성’을 보여 “과연 저 종교에 기대 살아도 괜찮을까”하는 우려마저 낳게 한다는 것이다. 鄭교수는 이와 함께 사람을 자유롭게 해야할 종교가 ‘기호화된 의미’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자유로운 인성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희랍어로 ‘惡’을 뜻하는 ‘파울라’에는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한다’는 뜻이 있다. 우리 종교가 행사를 열고 성명서나 내 놓으면서 규모의 확장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 유명한 종교 유적지가 왜 모두 폐허가 됐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6.25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난국을 맞아 종교는 위선을 벗고 고뇌하는 모습으로 겸허하게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종교는 현실에 정직하고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
@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히브리어에 '훗파'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명료하게 번역 하여 표현하기는 어렵다.'몹시 무례하다'혹은 '사람을 더 이상 우롱할 수없다'라는 의미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사내아이가 부모를 살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자. 이때 사내아이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판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가엾은 고아입니다.] 어느 때인가 로드 공항에서 총기 사건으로 소동을 일으켰던 오카모드란 자가 재판정에서 '나는 스타가 되고 싶다'라고 떠들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훗파'라고 비웃었다. 하늘과 땅을 웃기고 싶거든 먼저 고아를 웃겨라고 하는 말이 결코 '훗파'의 의미를 띤 행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늘지고 비참한 어떤 곳이고 간에 웃음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고아란 의지할 데 없는 가엾고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아처럼 가엾고 불행한 사람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이고 밝아지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별로 눈길을 끌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웃음이 이 세상 모두를 밝게 해 준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상을 당해도 한달 이상 슬픔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된다. 유태인이 존경하는 하나님은 태양처럼 밝고 즐거우며 게다가 아주 웃음을 즐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직책에만 빠져 있었서는 안된다. 우울한 기분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으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해야 한다.' 이러한 경구말고도 <탈무드>에는 사람은 쾌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많다.한가지 더 인용하여 보면, '잘못 때문에 법정에서 벌긁을 냈으면 신나게 휘파람을 불면서 나오라.'이러한 일 때문에 유태인들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뻔뻔스럽다는 조롱을 당하기도한다.하지만 이들의 생활 이면에는 앞에서와 같은 생활 철학이 깔려 있는것이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우리가 땅만 바라보고 달릴 때 길에 떨어진 동전까지 마음이 끌리게 되지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달릴 때 세상의 황금 사과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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