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영화가 성경에 대해 말할 때 해마다 성탄시기를 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차분한 감동으로 젖게 하는 영화,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성직자였던 헨리 반다이크(Henry Van Dyke, 1852~1933)의 소설 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벤허 (Ben-Hur, 1959)>, <바라바 (Barabbas, 1962)>처럼 성경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비록 몇 구절 안 되는 성경의 한 대목일지라도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과 신앙적 묵상이 결합될 때 얼마나 풍요로운 삶의 지혜가 나오고 또한 그것이 영화화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신앙적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네 번째 동방박사>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세 명의 동방박사 이야기’(2. 1-23)를 바탕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못했던 또 한 명의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르타반, 헤롯왕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페르시아에 살던 그는 젊고 똑똑하지만 화재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잃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집안도 부유하고 지위도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그에게 닥친 재난의 아픔을 잊기 위해 학문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다가 마침내 별의 움직임 속에서 세상을 하나로 만들고 평화를 가져다 줄 왕의 탄생에 관한 하나의 징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별을 관측하면서 위대한 왕의 탄생과 더불어 그를 만나면 그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극복하게 해 줄 새로운 삶의 의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재물을 팔아 위대한 왕에게 봉헌할 사파이어, 루비, 진주로 바꾸고, 그의 하인 오르테스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미 아르타반은 세 명의 동방박사들과 한 곳에서 만나기로 했고, 별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폐허가 된 바빌론 성벽 근처에서 열병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르타반은 옷단을 움켜잡는 그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병간호를 하다가 서둘러 약속된 장소에 와 보니, 이미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이스라엘로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는 움직이는 별을 발견할 수도 없었기에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그는 그가 치료해 준 이스라엘 노예가 준 조언, 즉 위대한 왕은 그들의 성경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사파이어를 팔아 낙타와 식량을 사서 베들레헴에 가까스로 도착합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위대한 왕은 이집트로 피난하고 헤롯왕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태어난 아기들이 죽어가는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아르타반은 아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한 여인의 아기를 구해주는 대가로 이스라엘 군인에게 루비를 뇌물로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으로부터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와 부모는 이집트로 갔다는 조언을 듣고 다시 위대한 왕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수년 동안 이집트 왕실을 뒤지면서 위대한 왕을 찾아 헤매다가 이집트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 있는 랍비로부터 위대한 왕은 이스라엘인이기에 아마도 이스라엘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위대한 왕은 성경에서 예언한 것처럼 가난한 이들, 헐벗은 이들 가운데 계실 것이라는 조언을 듣게 됩니다. 결국 아르타반은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투덜거리는 하인 오르테스와 함께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지만, 랍비의 조언대로 이스라엘 외곽지대에 있는 거지 굴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거지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그가 마지막으로 위대한 왕에게 드릴 진주마저 빼앗깁니다. 결국 진주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찾아내게 되지만, 그는 진주를 돌려받는 대신 그곳에 있는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루만 머문다는 것이 이틀, 사흘, 마침내 그 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들을 병자들을 치료하며 지냅니다. 하지만 왕을 만나겠다는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그들의 가난과 질병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발견한 그는 마침내 그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농사를 가르치고 함께 경작합니다. 그러면서 30년이 흘렀고 이제는 위대한 왕을 찾는 것을 잊고 그들 안에서 행복을 느껴가는 순간, 이를 시기한 동네사람들이 그들이 경작한 밭에 불을 질러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또 절망합니다. 동시에 그의 고향친구가 그를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과 그의 인생은 실패라며 그를 핀잔하자 더 큰 절망에 빠져듭니다. 이제는 아르타반 자신도 늙고 병들었고 위대한 왕마저 만나지 못했다는 절망의 나락에 깊이 빠져있을 때, 그는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왕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드릴 소중한 진주를 들고 늙고 병든 몸으로 예루살렘에 갔지만, 위대한 왕을 만나려는 그 순간 자신의 친구의 딸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진주를 뇌물로 주고 친구의 딸을 구해줍니다. 정작 위대한 왕에게 다가왔지만, 그에게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절망한 순간, 더더욱 절망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왕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묘하게도 위대한 왕을 만나기 위해 그는 노력했지만 한 번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제 절망할 기운도 없이 죽어갑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그 순간에 위대한 왕이 부활한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는 그제야 만나게 된 위대한 왕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에 상심하자, 그 위대한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르타반, 나는 네가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왕의 말에 그는 다시 되묻습니다. “제가 언제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고, 제가 언제 당신에게 먹을 것을 드렸으며, 제가 언제 감옥에 갇혔을 때 당신을 찾아주었습니까?” 그의 반문에 위대한 왕은 대답합니다. “바로 네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 마침내 아르타반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지금껏 걸어온 30여 년의 여정 속에서 위대한 왕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위대한 왕을 늘 만나왔고, 그 순간에 그는 늘 행복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평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왕을 만나게 되면서 얻게 된 평화와 행복을 간직한 모습입니다. 영화 <네 번째 동방박사>는 평생토록 주님을 만나기 위해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도 그 시기가 어떠했든 영세를 받음과 동시에 신앙의 빛을 따라나선 또 다른 동방박사일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의 지식과 체험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남음이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언제나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실의와 좌절을 겪고 절망에도 빠집니다. 그분이 어쩌면 너무 멀리 계시다는 것에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체취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마치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그 느낌에 무척 행복해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주님은 또 다시 찾고 만나야 할 분으로 저만치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깨달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지만 우리의 삶에 따라 그분은 저만치에 계시기도 하고 가까이에 계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삶 속에서 그분의 체온과 체취는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자 그의 여정은 우리의 여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 <동방박사들의 여행(The Journey of the Magi) by T. S. Eliot> 하느님, 당신이 제게 하신 일은 서운합니다. 당신이 주신 전부는 그저 떠나라는 말씀과 하늘의 별 하나 그런데도 제가 지금 쉬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길을 가리켜주는 저 별 때문입니까? 아 아 그러나 이미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미 너무 먼 길을 와 돌아갈 수도 없고 당신의 약속과 이 모든 여행과 그리고 이 여행 끝에는 나의 욕망과 의지를 버리고 비우게 하는 두렵고도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 고되고 힘든 여행은 처음부터 제 힘과 제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이제는 저의 욕망과 의지를 이 추위 속에서 얼어붙게 해주소서. <동방박사들의 여행>은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황무지>란 시로 유명한 T. S. Eliot(엘리엇) 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는 1927년에 쓰였는데, 이 시의 내용은 성경에서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이미 많은 예언자들로부터 예언된 만민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그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 여정에서 느끼는 갈등과 회의, 그리고 희망과 신뢰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멀리 동방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박사들 세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점성가들로 알려진 그들은 하늘 위에 범상치 않게 빛나는 별을 목격하자 그 별에 매료되게 되고, 그래서 자신들의 지혜와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 별의 의미를 밝혀내고 움직이는 별을 따라 그들의 일상 세계를 떠납니다. 성서역사학적 연구를 토대로 보면 그들이 별빛을 따라 온 길은 하루아침에 오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동쪽 아라비아(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또는 페르시아(바빌로니아를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에서 이스라엘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하나,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뭔가는 알 수 없지만, 그 별을 따라가면 지금까지 그들의 노력과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여정이 순탄했을까?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여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동방박사들의 여행>은 담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장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지켜보리라는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T. S. 엘리엇은 그의 시, <동방박사들의 여행>에서 별을 따라가는 동방박사들이 여정에서 느끼는 심경을 또 다른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여행을 하기엔, 그토록 긴 여행을 하기엔 연중 가장 고약한 때였지요. 길은 푹푹 빠지고, 날씨는 매섭고, 바로 한겨울이었지요. 거기다 낙타들은 상처가 나고, 발이 붓고, 고집을 부리며 질척거리는 눈 위에 누워버렸습니다. … 그리고 낙타꾼들은 욕지거리에 불평을 하며 도망치고, 술과 계집을 요구했습니다. 밤에는 모닥불도 꺼지고, 쉴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도시는 적대적이며, 마을은 불친절했습니다. 동네는 불결하며, 바가지 요금을 강요했습니다.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토막잠을 자면서. 이 모두가 바보짓이라는 목소리가 우리 귀에는 들려왔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가까스로 이스라엘에 도착했지만 정작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 한계를 드러낸 곳은 헤롯 왕실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입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면 당연히 유다인의 왕궁에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헤롯 왕실엔 그들이 찾는 유다인의 왕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오랜 고생 끝에 찾아온 그 정점에서 그들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오랜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절망할 거라면 처음부터 오랜 여정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여정 끝에는 반드시 그들의 노고와 수고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성취가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구원의 손길은 외부로부터 오게 됩니다. 조언자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스라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거라는 예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지혜와 과학적 지식이 아닌 새로운 예언 정보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요구됩니다. 중요한 것은 왕은 무조건 화려한 왕실에만 있어야만 한다는 그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예언을 받아들이고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마침내 동방박사들은 그들이 예측했던 곳과는 다른 베들레헴에서 유다인의 왕,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성서는 이들의 반응을 ‘대단히 기뻐하면서’(마태 2, 10)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현실을 목격했지만 그들에게 일어난 신의 섭리에 기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났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여행은 그들의 지혜와 과학적 지식을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내면의 변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면의 변화가 마침내 그들의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루게 합니다. 그들의 노력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은총이자 섭리입니다. 맹자의 가르침에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는다.’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어 그 이전의 가치는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체험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를 묵상합니다. 영화 <네 번째 동방박사>와 시 <동방박사들의 여행>은 각각 다른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다루고 있고 내용도 다르지만 신앙인의 여정이라는 점에서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인의 여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또한 문학적 상상력과 영화적인 상상력도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문학과 영상분야에 종사하는 우리 교우들에게도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 출처 : 전주교구 쌍백한 제27호 -
[성탄] 485. 동방에 나타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