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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25장 다윗과 아비가일
엔게디 동굴 사건과 그 다음 26장에 나오는 하길라 기습 사건 사이에 발생한 삽화적 사건이 바로 나발 사건이다. 다윗이 나발로 인하여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누를 끼칠 뻔했으나 아비가일의 기지로 사태를 모면하게 된다. 초두에 사무엘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다소 기이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광야로 내려간 것과 그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식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무엘은 신정 왕국 건설을 준비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아 다윗에게 기름 부음을 하였고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때에 그의 죽음을 가시화한 것은 구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 나발의 망발과 다윗의 분노 (25:1-13절)
사무엘의 사후에 다윗은 바란 광야로 거처를 옮기고 거기서 유다 백성을 돌보며 비교적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다윗은 나발의 가축도 돌보아 주었는데 물론 그것은 나발의 요청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유다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구원자로서 자임했던 다윗은 누구든지 돌보아야겠다는 간절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보호로 인하여 나발 역시 큰 혜택을 입은 것은 틀림이 없다.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잠시 중단되었던 사무엘의 소식이 전해졌는데 바로 그의 죽음 소식이었다. 사무엘의 죽음은 그의 나이 85세 때로 추정된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하나님께 소명된 목적 곧 신정 왕국의 건설을 준비하는 직무를 완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고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백성들은 마치 아비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도 같은 슬픔에 잠겼고 애곡과 애통의 날을 보냈다. 사사 시대 말기에 나타난 영적 어둠에서, 정치적 군사적 쇠퇴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연약에서 그들을 회복시켰던 사무엘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으며, 청렴결백한 그의 인품은 모든 지도자들의 귀감이 되었고 특별히 선지학교를 세워 영적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이스라엘의 복이 되었던 것이다.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이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시신을 그의 집 정원, 혹은 공지에 장사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더 이상 사울과 인접한 지역에 있을 수 없어 엔게디 광야에서 일어나 유다 최남단이 바란 광야로 거처를 옮겼다. 바란 광야는 브엘세바와 인접한 곳으로 사울 왕을 피하여 남쪽으로 멀리 내려간 것이다. 사울 왕이 견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 사무엘이 죽자 다윗은 멀리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다윗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이전에 거주했던 마온으로 다시 올라온 듯하다.
‘마온’은 ‘거처’ ‘장소’라는 뜻으로 ‘십’과 ‘갈멜’ 부근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마온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나발이다. 그의 생업은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였는데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였다. 갈멜은 사울이 아말렉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 곳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사울이 영웅시 되었으며, 사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을 것이다. 나발이 가진 가축의 수효는 욥의 재산에 비하면 절반도 채 못 되지만 그래도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엄청난 부자였다. ‘나발’의 뜻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그의 별명일 가능성이 높다. ‘아비가일’은 ‘기쁘게 하는 자’ ‘기쁨을 주는 자’라는 뜻이며 이 여인은 남편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총명’이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외적, 내적으로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여인으로서 수려한 면모를 갖추었고 그녀의 심성 또한 착하고 선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나발은 완고했는데 이 말은 거칠고 굳은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악을 일삼는 자였으며 갈멜 족속이었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갈렙 족속이라는 뜻이다. 역대기 상에는 갈렙 자손의 족보가 소개되고 있다.
*대상2;42-45 여라므엘의 아우 갈렙의 아들 곧 맏아들은 메사이니 십의 아버지요 그 아들은 마레사니 헤브론의 아버지이며 헤브론의 아들들은 고라와 답부아와 레겜과 세마라 세마는 라함을 낳았으니 라함은 요르그암의 아버지이며 레겜은 삼매를 낳았고 삼매의 아들은 마온이라 마온은 벧술의 아버지이며..
갈렙의 족보를 보면 그의 후손에서 마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갈멜 지역에 있는 마온 지방을 건설한 사람이며 마온의 후손 중에 나발이라는 인물이 나온 듯하며 아비가일 역시 갈렙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갈렙은 모세로부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 땅 일부를 약속받았고 그는 자신이 약속받은 그 땅을 정복하였다.
당시에는 양의 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고 잔치를 베풀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하는 날에 해당된다. 이런 관례에 따라 다윗은 부하들의 식량을 얻기 위하여 나발의 집으로 소년들을 보냈던 것이다. 다윗은 열 명의 소년들을 보냈는데 이는 육백 명의 부하들이 먹을 만큼 많은 양식을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열’이라는 숫자는 상대방에게 최고의 예의와 존경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소년들에게 ‘나발을 만나 내 이름으로 문안하라.’고 하였다. 당시 다윗의 이름은 유대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차기 왕으로서 권위가 있었으며,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의 존재였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름으로 문안을 받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며 존귀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영광이었다.
다윗은 소년들을 통하여 나발에게 세 번의 평강의 인사를 하였다.
첫째, 너는 평강하라고 하였다. ‘솰롬’은 히브리식 인사이며 이 인사는 인사를 받는 상대에게 평강이 실제로 임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단순한 염원 그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둘째, 네 집도 평강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나발뿐만 아니라 그의 집 전체의 평강을 기원하였다. 나발의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하인들 모두에게 평강을 기원하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평강을 기원하였다.
셋째,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인사 곧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에까지,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강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할 수 있는 대로 예절을 갖추어 나발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는 다윗의 절실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진심이었다. 사실 다윗이 비록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쫓기는 형편에 있었지만 그는 왕의 사위요, 요나단 왕자의 친구요, 군대의 천부장이요, 국가의 중요 인사였다. 더군다나 다윗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신령한 사람이었다. 이런 다윗이 나발 같은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고 평강을 세 번이나 축복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양식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평강’의 인사는 자신의 영혼에 평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귀중하고 복된 인사이다. 다윗이 비록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생명을 지탱해 주시며 원수의 잔악한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웃에게 평강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시며 ‘ 그 집을 위하여 평강을 빌라. 너희가 빈 평강이 그 집에 머물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셨다.
*눅10: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신앙인들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이웃에게 평강을 빌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평강의 축복을 한 후에 다윗은 소년들의 방문 목적을 소상히 말하고 그간의 사정도 알리며 잔치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는 의견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소년들은 다윗의 명에 따라 나발을 만나 털 깎는 잔치가 열린 것을 축하하고, 그동안 나발의 목자들이 갈멜과 마온에서 양을 치며 지낼 때에 다윗의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평안히 목축할 수 있도록 도운 사실과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준 사실을 전하였다. 유대 광야에는 베드윈 족속들과 아멜렉 족속들이 살고 있었으며 저들은 약탈과 노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다윗은 외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며 상대방에게 존경과 헌신을 표시하기 위하여 소년들을 나발의 종으로, 자신을 나발의 아들로 낮추어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애로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겸손의 표현이었다. 물론 다윗이 나발의 양과 재산을 지켜준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털 깎는 날을 기다렸다가 최대의 예의를 갖추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후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을 보면 당시의 나발은 다윗과 동년배 정도 되었을 것인데 그에게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다윗의 사환들의 말을 다 들은 나발은 다윗에 대하여 거절뿐만 아니라 경멸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라는 이 말은 다윗을 무시하는 부정적 시각에서 나온 말이며, 이 말은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나발이 생각하기를 다윗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불충한 종이라는 것이다. 사울이나 그의 아들 왕자 요나단도 다윗을 차기 왕으로 보는 마당에 일개 졸부에 지나지 않는 나발이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단히 둔감한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유력한 차기 대통령 대권 주자의 문안 인사를 받고 약간의 양식을 구하려는 그를 개처럼 무시하고 욕하고 배반자로 낙인찍어 내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만행을 저지른 것과 같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울이 당시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윗이 왕이었다. 그렇다면 나발의 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을 모욕하고 왕의 청을 거절했으며, 왕에게 씻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동냥을 주지 못해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발은 떡과 물과 고기를 주지 못해도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하는데 거기에다 욕설까지 퍼부었다. 나발은 다윗 일행에 대하여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욕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에게 쫓겨 떠돌아다니는 부랑아들, 건달들로 몰아 부친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다윗은 심히 격분하였고 부하들 사백 명에게 칼을 차게 하고 출전 명령을 하달했다. 그동안 나발의 양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한 냉정한 거절과, 식량을 얻기 위하여 최선의 예의를 갖추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모욕적 언사로 응답한 것에 대한 징계로 나발에게 속한 모든 자를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에게 했던 것처럼 나발에게도 역시 원수를 갚는 것은 율법에서 분명히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다윗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나발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어야 옳은 일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는 관대했지만 백성인 나발에게는 단호하게 응징하려 했던 것이다.
2.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 (25:14-35절)
다윗의 정중한 요구가 나발에 의해 무참하게 묵살된 데 대하여 다윗이 분개하고 피를 뿌리게 될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아비가일의 기지가 발휘되어 다윗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사태를 수습하게 된다. 나발의 권속들은 다윗에 의하여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수없는 전쟁의 경험과 광야의 거친 연단 속에 살아온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일당백의 용장들이었으며, 나발의 목동들을 진멸하는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러나 아이니컬하게도 사태의 발발로 인하여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측은 나발이 아니라 도리어 다윗이었다. 나아가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알 리가 없는 다윗은 당당하게 진군하게 되고 사탄의 무서운 계략이 성공을 거두려는 때에, 감사하게도 슬기로운 여인 아비가일의 등장으로 사태가 무난히 수습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전령들이 돌아가자 나발의 하인들 중의 하나가 이 사실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렸다. 그렇다면 나발의 하인 중에는 다윗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인의 보고 내용은 다윗이 주인에게 문안하러 전령들을 보냈지만 주인이 그들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나발의 태도가 지극히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동안 자신들에게 선을 베풀었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한다.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라는 말은 나발의 하인들이 다윗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윗의 보호로 인하여 하인들이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며,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하인들과 함께 거하며 밤낮으로 담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담’이라는 말 ‘호마’는 ‘성벽’이라는 말로 확실한 보호를 말한다. 그렇다면 다윗은 나발의 가축과 목동들을 사나운 맹수나 약탈자의 손에서 지켜주고 보호했음이 확실하다. 하인은 나발에 대해 ‘불량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사악한 자의 아들’ ‘벨리알의 아들’이라는 말로 백해무익한 인간이라는 것이며 엘리의 두 아들에게도 이 말이 적용되었다. 하인은 나발에게 말해보았자 듣지 않을 것을 알고 여주인인 아비가일을 찾아 보고했으며 어떤 판단을 할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종이요 청지기의 지혜였다.
아비가일은 급히 여섯 가지의 음식을 준비했다. 떡 이백 덩이, 포도주 두 가죽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 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마련했다. 한 가족에게 필요한 떡의 양은 세 덩이다. 따라서 아비가일이 준비한 떡 이백 덩이와 음식물은 육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물은 다윗의 출격을 일단 진정시킬 목적으로 급히 준비한 것이기 때문에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하인에게 음식을 싣고 앞서 가게 하고 자기도 뒤따랐는데 예물을 먼저 보내는 것은 상대방의 호의와 은혜 입기를 소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사실을 나발에게는 고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침묵과 웅변을 적절한 때에 응용하는 것이 큰 분별력을 가진 자의 지혜인 것이다.
*잠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마온 황무지는 여러 개의 고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갈멜이며, 다른 하나가 다윗이 머물고 있는 요새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요새로부터 내려오고, 아비가일은 갈멜로부터 내려오다가 서로 마주친 것이다.
다윗은 요새를 떠나기 전에 나발의 학대에 격분한 나머지 보복을 하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다윗이 심히 격분한 것은 광야에서 나발의 소유물을 지켜 주어 하나도 손실이 없도록 막아준 수고가 모두 허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발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기 때문에 이제 그를 응징하여 악을 제하겠다는 것이다. 그 응징의 내용은 나발에게 속한 남자를 그 다음 날 아침까지 모두 죽인다는 것이다. 이 명령을 두고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여호와의 벌이 자기에게 내리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윗은 나발이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수고의 대가 즉 자기의 몫을 교활하게 떼어먹었음을 은연중에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라는 말 ‘마쉐틴 메키르’는 직역하면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이며 남자를 경멸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즉 나발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경멸하고 다 죽이겠다는 분노에 찬 욕설을 쏟아낸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더 나아가 다윗의 발에 엎드렸으며 지혜로운 권면의 말을 올렸다. 아비가일에게서 나타난 지혜는 네 가지이다.
첫째, 겸손한 자세이다.
아비가일은 오만불손한 그녀의 남편 나발과는 대조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성품은 완고한 남편을 통하여 더욱 연단 받고 다듬어졌을 것이다.
둘째, 희생정신이다.
아비가일은 남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러한 희생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셋째, 하나님 의식이다.
아비가일은 맹목적으로 다윗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를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피 흘려 보수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막고 계심을 느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식을 근거로 하여 제기된 아비가일의 호소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아비가일의 하나님 의식을 긍정했고 수용했던 것이다.
넷째,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아비가일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다윗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통찰력은 그녀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비가일이 자신을 낮추고 다윗을 최상으로 높인 것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함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차기 왕이 될 것을 보편적으로 예측하고 있었고 특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소유했던 총명한 여인 아비가일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로 불렀는데 그녀는 행동뿐만 아니라 언사까지도 겸손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하인들이 지은 모든 죄악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는 그녀의 희생정신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자기의 희생을 통하여 집안 모든 남자들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한 것이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를 상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불량한 사람이며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곧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차기 이스라엘 왕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떠돌이 종이라고 했으며, 마땅히 다윗에게 지불해야 할 다윗의 몫을 가로채고 도둑질한 주인이었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죄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이유로 자신이 나발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남편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실수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허물과 죄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자신이 다윗의 유혈 보복을 중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사자임을 자임하였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통하여 그 일을 막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비가일이 이처럼 속히 다윗을 만나러 온 목적은 나발과 그의 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윗의 실패를 막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피 흘리는 복수를 하는 범죄를 저지를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셨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해하려는 모든 세력과 다윗의 원수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어리석음’은 필연적으로 받게 될 ‘불경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자신이 가지고 온 음식을 예물이라고 표현했다. ‘베라카’라는 이 말은 ‘복’ ‘축복’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남편 나발은 전령들에게 모욕적인 언사와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자신은 사환들에게 축복의 예물을 가지고 왔다고 함으로써 남편의 악한 행위를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음식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다윗에게 바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지만 소년들에게 주는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장래에 대해 다시 예언하면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다윗을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윗의 왕권을 굳건하게 하실 것이라는 표현이다. 든든하게 세우신다는 것은 신적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말인 것이다.
*시89:28-29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야가 나와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이 열린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해서 이미 언급된 바가 있다.
*삼상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든든히 세우시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을 가리킨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이 피 흘리는 보복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성전 수행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만 다윗이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전과 왕권은 절대적인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둘째, 다윗의 일생에 악한 일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사람이 일어나서’ 라고 한 말은 사울을 말하는데 그가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죽이려 하지만 다윗의 생명은 마치 사람이 값진 보석을 싸개에 잘 싸서 보관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서 안전과 보호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다윗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이 여호와께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에서 허공을 날아가는 원수들의 생명을 대조시켜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나발을 죽이지 않을 경우 다윗이 후일 왕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비가일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대로’ 라고 하였는데 그녀가 어떻게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은밀한 교제까지 알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선지 생도들과 긴밀한 교제를 통해 다윗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아비가일이 말하고 싶은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반드시 왕위에 올린다는 것이며, 그 일이 성취될 때에 나발의 일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들을 죽인 후 나중에 그 잘못을 깨달았을 때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발 일행을 죽인 일을 백성들이 알 경우 다윗의 왕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왕의 권위와 영광에 큰 장애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분노를 참으면 더 이상 마음에 걸릴 것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비가일은 마지막으로 당부하기를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에 자신의 일을 기억해 달라고 하였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을 듣고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급히 온 까닭은 남편의 구명이라는 사사로운 차원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었음을 인식한다. 그 결과 다윗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데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놀랍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 것이다. 다윗은 ‘오늘 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했던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했는데 ‘칭찬’이라는 말 ‘바라크’는 ‘찬송할지로다’라는 말과 동일하기 때문에 두말할 나위 없이 아비가일에게 그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지혜’라는 말 ‘타암’은 신중한 행동을 동반하는 분별력, 판단력을 가리킨다.
*욥12;12-13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라고 할 때에 ‘바라크’역시 ‘찬송할지로다.’와 동일한 말로서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복을 빌어 주었는데 이는 일반적인 축복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복을 주는 주체자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복을 비는 기도와 찬송과 고백을 했던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청을 모두 허락하고 그녀가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았으며 그녀를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게 하였다.
3. 다윗의 혼인 (25:36-44절)
슬기로운 아내의 중재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끝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던 나발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실 나발의 죽음은 아비가일에 의해서 이미 예견되었으며 다윗은 직접 칼을 그에게 대지 않고도 자신을 욕되게 한 대적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아비가일의 간절한 애원을 받아들인 그의 신앙적 판단은 매우 적절했던 것이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왔을 때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큰 잔치를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있었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 다윗의 작은 요구를 거절하고 모욕했던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나발은 자신이 욕심껏 먹고 마시는 일에는 풍족했지만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몫을 나누는 데 인색했던 미련한 자였다. 나발은 술에 대취하였고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나발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밝은 날 아침에 그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 자초지종을 모두 말하였다. 나발은 다윗이 분노하여 자신과 모든 남자들을 죽이려고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버렸다. 나발은 열흘 동안 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는데 큰 충격을 받아 전신 마비 증상이 왔든지, 중풍에 걸렸는지 움직이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고 말았다. 나발이 범한 죄는 네 가지이다.
첫째, 공적인 면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였기 때문에 그를 섬겨야 했지만 섬기지 않았다.
둘째,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종들과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이었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인데 거절하고 모욕했다.
셋째,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넷째,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에 교만과 악한 행동으로 일축하였다.
결국 나발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격을 상실하였고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죽음의 보응을 받은 것이다.
나발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신의 모욕당한 것을 갚아 주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막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기억하였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는데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구혼하게 된 것은 그녀가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자기의 내조자가 되기에 적격자였으며, 다윗의 처 미갈이 다른 남자와 재혼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청혼을 받은 아비가일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겸손한 태도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도 이미 다윗의 사람이 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은 다윗의 부하의 발을 씻기는 여종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다윗의 구혼은 분에 넘치는 과분한 것으로서 감사하게 받아들임을 물론 부하들의 발을 씻기는 일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겸손을 보인 것이다. 아비가일의 집은 대단한 부호였으므로 몸종이 다섯 명이나 되었고 그 여종들을 대동하고 다윗에게로 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이 일은 순수한 애정의 감정이나 신앙적인 목적 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울의 딸 미갈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헤브론에 입성할 때 유다 지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갈렙의 후예인 아비가일을 신부로 맞이하여 대동함으로써 유다 지파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아비가일의 많은 재산 역시 다윗의 광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 결혼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는 길르압과 다니엘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형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족보에 의하면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출생하였다.
*삼하3;3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대상3;1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다윗은 또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역시 그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에 유다 사람을 자기편으로 이끄는데 많은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아히노암은 ‘암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증오심이 되살아나서 그의 둘째 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다윗과의 약속을 어기고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 같이 둘째도 다윗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재혼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을 규합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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