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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② 삼랑진→ 양산(원동)
2020년 11월 09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재(再) 출행
* [오늘의 여정] ▶ 삼랑진역→ 경부선 굴다리→ 송지시장→ 삼랑진성당→ 낙동강역(경전선)→ 낙동강 제방길 바이크로드→ 직선의 제방길→ 수변공원(생태문화공원)→ (처자교 유적지)→ 굴다리(경부선)→ 작원관지(깐촌-한남문-의령탑)→ 천태산 시루봉 절벽→ (작원잔도)→ 수변공원→ 양산(원동 중리마을 굴다리)→ [수변공원]→ 가야진사공원→ 원동천 하구(굴다리-원동)→ (원동 순매원 전망대)→ 작은 굴다리(하얀집팬션)→ 서륭공원→ 화제천 하구(김정한 수라도 문학비)→ 원동취수장→ 황산베랑길→ 물금취수장→ (경파대)→ (용화사 / 임경대)→ 양산시 물금 황산공원→ 경부선 굴다리→ 물금 서부마을→ 물금역 (블리스호텔)
삼랑진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삼랑진(三浪津)이 있다. 삼랑진은 밀양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들어 세 갈래(三) 물결(浪)이 일렁이는 나루(津)라 하여 삼랑진(三浪津)이라 했다. 원래 지명은 밀양시 하동면(낙동강의 동쪽)이었다. 1928년 하동면은 삼랑진면으로 바뀌었다. 지역명을 따라 역명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지만 역명이 지역명으로 바뀐 특별한 경우이다. 지금은 삼랑진읍이다.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인 삼랑진에는 후조창이라고도 부리는 삼랑창(三浪倉)이 있었다. 마산창(馬山倉)·가산창(加山倉)의 설치로 세곡운송의 폐단이 제거되는 것을 보고, 인근 주민이 자신들의 고을도 조창에 소속시켜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1765년(영조 41) 우참찬(右參贊) 이익보(李益輔)의 주창에 의해 이루어졌다.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後曹倉遺址碑石群)’은 조선 후기에 후조창(後漕倉)이 있었던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하부마을에 서 있는 8기의 비석이다. 지역 주민을 잘 보살피고 뛰어난 공적을 세운 역대 수령과 관찰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주철로 만든 철비석이 특이하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삼랑진역(三浪津驛)은 경부선의 부산과 대구의 중간에 있다. 하루에도 수십여 대의 기차가 지나간다. 삼랑진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慶全線)의 시발·종점역이다. 밀양 삼랑진역에서 광주 송정역을 잇는 308.2km의 경전선은 경사가 심하고 곡선이 많다. 삼랑진역은 경전선의 출발역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 삼랑진과 마산포를 잇는 공사를 시작으로 1905년 마산선이 운행을 시작함으로써 지금의 경전선이 탄생했다. 삼랑진역은 경전선의 요람인 셈이다.
그 후 1922년에 광주 송정과 순천, 1923년에 마산과 진주, 1968년에 진주와 순천을 잇는 경전선이 완성되면서 경전선은 그 이름에 걸맞게 경상도와 전라도를 달리는 기찻길이 되었다. 300km가 넘는 경전선이 완성되는 데는 6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 1968년까지만 해도 60여 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지만,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역들이 자취를 감췄다.
오늘의 출행, 삼랑진역
삼랑진역 앞 숙소에서 아침을 맞았다. 어제는 만어산 유적지를 탐방하고, 오늘은 삼랑진을 출발하여 작원관 - 가야진사 - 원동(양산시) - 낙동강 물길(바이크로드)을 따라 양산시 물금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오전 8시 모텔에서 나와 간단하게 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이른 아침이라 대부분의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다. 삼랑진 돼지국밥은 이 지역에서 서민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이다. 아침에 유일하게 영업을 하는 식당이었다. 식사 후 인근의 GS 편의점에서 김밥과 우유 등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의 여정은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사이에 조성된 바이크로드이므로, 그 길목에는 요기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없기 때문이다.
오전 8시 50분, 삼랑진역 앞을 출발하여 낙동강역 앞 제방의 바이크로드까지 걸어서 갔다. 날씨는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서 맑은 햇살이 내리고 신선한 가을아침 공기가 더없이 맑고 쾌적했다. 어제 오후 저물녘에 다녀온 1022번 도로를 따라 경부선 굴다리를 지나 미전천 다리를 건너 송지시장 사거리에 이르렀다. 굴다리 입구의 벽에 ‘딸기 시배지 삼랑진’이라고 크게 써 놓았다. 아, 그 유명한 삼랑진 딸기! 삼랑진은 우리나라에 처음 딸기를 재배한 곳이다!
삼랑진, 딸기시배지
'딸기 시배지 삼랑진' — 말 그대로 삼랑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딸기를 심은 시배지(始培地)다. 1943년 당시 삼랑진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故) 송준생(1976년 작고) 씨가 일본에서 모종 10여 포기를 들여와 삼랑진 송지리 밭에 심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흔히 밀양하면 유명한 깻잎, 고추, 대추 등에다 얼음골의 사과, 초동의 단감, 하남의 감자와 함께 딸기는 밀양을 대표하는 농산물이다.
삼랑진은 1943년 삼랑진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 송준생 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벼슬딸기’ 모종 10여포기를 가져와 심은 것이 국내 최초의 딸기 재배라고 한다. 그후 1954년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요즘도 밀양은 전국 딸기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여 딸기시배지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딸기 시배지의 위상과 삼랑진 딸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4월이면 『삼랑진딸기한마당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송지시장과 낙동강역
아침을 맞은 송지시장 부근에는 가게가 문을 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거기 사거리에서 28번 국도를 따라 직진하여 올라가는 길, 차들이 분주히 오간다. 삼랑진성당 앞을 지나고 수마트 앞을 지났다. 그리고 중앙고속도로 교각을 지나 낙동장여관을 지나 낙동강역공원에서 낙동강 제방에 올라섰다. 삼랑진역에서 1.7km 걸어온 지점이다.
낙동강역은 삼랑진역에서 출발하는 경전선이 낙동강을 건너기 전에 있는 역이었다. 경전선 부산-삼랑진역에서 순천으로 왕래하는 열차만 서는 역이었다. 경전선(慶全線)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다 하여 붙어진 이름의 철길이다. 전라도 광주 송정역과 경상남도 밀양의 삼랑진역을 잇는, 총 길이 300.6km의 단선이다. 운행시간은 6시간 동안 순천-진주-마산 등40여 개의 역에 정차한다. 낙동강역은, 1906년 12월 기차가 개통한 이래 100년이 훨씬 넘은 역이지만 지금은 폐역이 되었다. 순천-진주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가 삼랑진역 북쪽에서 경부선에 합류하여 밀양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 [낙동강 제방 길로 가는 빠르고 쉬운 다른 길이 있다] ☞ 삼랑진역 앞에서 양산으로 가는 1022번 도로(천태로)를 따라가 내려다가 검세리에서 경부선 굴다리를 통해 낙동강 강안의 제방 길로 들어가면 거리도 짧고 시간도 절약되지만, 지난번 11월 3일 밀양—삼랑진 바이크라이딩이 끝나는 지점(낙동강역 근처 ‘태극기가 휘날립니다’ 국수집)에서 오늘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낙동강역 앞까지 나아간 것이다.
낙동강역 앞 제방, 바이크로드
오전 9시 35분, 28번 국도의 삼랑진교와 중앙고속도록 낙동대교 중간 지점의 제방에서 오늘의 종주를 시작했다. 낙동강 강안의 너른 둔치는 수변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강의 상류 쪽을 바라보면 중심부에 세 개의 아치가 시설된 삼랑진교(28번 국도)가 보인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면 중앙고속도로의 두 개의 거대한 고가도로가 그대로 낙동강을 건너가고 있다. 완강한 콘크리트 교각이 시선을 압도한다. 거대한 교각을 지나고 나면, 제방 가장자리에 팔각정과 간단한 운동시설 그리고 간이 화장실까지 있는 쉼터가 있다. 거기 ‘낙동강 종주 밀양시 자전거길’ 안내판이 있었다. 그 바이크로드 밀양구간이다.
낙동강 종주 밀양 구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서 낙동강 제방을 따라 내려오는 바이크로드는 밀양아리랑오토캠핑장-천주교명례성지를 지나, 해동마을회관 앞에서 1022번 도로에 합류하여 가다가 상남천[오산교]를 건너 직선의 제방 길 끝에 밀양강 하구에 이른다. 밀양강 하구에는 바로 건너는 다리가 없으므로 밀양강 제방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1022번 도로의 교각 옆에 있는 잠수교를 건너면 밀양강 좌측 제방 길에 올라선다. 그리고 길고 긴 직선의 제방 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하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바로 삼강서원이다. 그곳 상부마을에서, 마을도로(삼랑1길)에 합류하여 경전선 철교의 교각을 지난다. 그리고 봉해횟집 앞에서 삼랑진 인도교(일명 ‘콰이강의 다리’)와 만나 삼랑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삼랑진 구 철교 교각을 지나면 낙동강 자전거종주의 제방 길에 올라선다. 이 구간은 내가 카니발과 바이크로 내려온 여정이다.
필자는 지난 11월 3일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서 벗들과 함께, 카니발을 타고 낙동강에서 밀양강을 거슬러 올라가 밀양(密陽)과 청도(淸道)의 문화유적을 탐방하고 왔다. 그리고 영남루 수변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밀양강 물길을 타고 내려와 지금 이곳 삼랑진의 28번 도로, 낙동강역 앞[지도의 경유1]까지 라이딩한 바가 있다. ― 여기가 오늘 낙동강 종주 삼랑진에서 물금으로 가는 출발지이다.
삼랑진 낙동강 제방 길
오늘은 지난 여정에 이어, 삼랑진 28번 도로의 두 개의 교각[삼랑진교]을 지나서 중앙고속도로 낙동대교 교각 아래에 있는 ‘팔각정’에서 본격적인 종주에 돌입하는 것이다. 앞을 바라보니 삼랑진 낙동강 제방 길은 자로 그은 듯 한 일(一)자로 뻗어 있다. 여기에서부터 미천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까지 직선의 주로(走路)가 이어진다. 제방의 좌측 아래 가까이의 텃밭, 그 너머로 매봉산 아래 삼랑진 읍내의 건물들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멀리 만어산 구천산 금오산의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제방 길의 정면에는 우람한 천태산이 낙동강 강안까지 내려와 있다.
강의 둔치가 넓어 광활한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낙동강은 제방에서 멀리 떨어져 호수처럼 고여 있다. 저 하류에 건설된 부산 낙동강하구둑으로 인하여 청람빛 강물은 그렇게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짙은 청보석처럼 빛나는 낙동강! 그 건너편은 김해시 영역이다.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사망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체가 고요한 낙동강을 품에 안고 있다. 이곳에서 약간 상류인 밀양시 하남읍의 낙동강 건너편은 창원시 영역이었다.
낙동강 둔치는 삼랑진생태문화공원으로 자연의 녹지를 그대로 살려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공원에는 잔디밭이 어우러진 시원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지금은 만추의 계절, 곳곳에 조성된 억새밭에는 하얀 억새꽃이 만발하고 있다. 계절의 정취가 넘치는 드넓은 잔디밭과 억새밭에 여기저기 서 있는 가을나무가 누런 빛깔로 그 아름다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하다. 남도의 아침 햇살이 곱다.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돈다. 쾌적한 낙동강 물길, 묵직하고 균형 있는 발걸음으로 거침없이 제방을 따라 걷는다. 참으로 행복감이 넘치는 여정이다. 홀로 가는 길, 이런 시간은 저절로 천상천하 대자유인이 된다. 맑은 하늘 아래 시퍼런 강물 따라 쭉 뻗은 길이 무한한 설렘을 안겨준다. 지금까지 내내 낙동강 물길을 홀로 걸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오늘 따라 그 쾌적한 기분이 더욱 가슴을 채운다. 이제 낙동강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앞두고 있으니 바다가 멀지 않았다. 바다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하나로 품은 우주적 생명의 현장이다. 멀고 고된 길목에서 온몸은 천근처럼 무거워도 내 영혼의 촉수는 무한한 대양을 꿈꾸고 있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바이크로드 바닥에 이정(里程)을 적어 놓았다. ‘↑낙동강 하구둑 47km, ↓안동댐 338km’ — 아아, 이제 앞으로 백 리 남짓 걸으면 낙동강이 바다에 임하는 하구둑에 다다를 수 있다! 발걸음이 더욱 당차게 나아간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1300리 장정을 앞두고 얼마나 아득했던가. 이제 여기까지 와서 보니 상투적인 말이지만 ‘시작이 반이고, 묵묵히 가다 보면 끝이 보인다’는 말이 새삼 실감있게 다가온다.
삼랑진생태문화공원
바이크로드는 제방에서 오른 쪽 수변공원으로 내려간다. 제방 길을 그대로 따라 가면 삼랑진에서 내려오는 미전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미전천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하구의 습지 구간을 지나 검세리에서 둔치가 없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양산으로 가는 바이크로드가 이어진다.
억새꽃의 사색
수변생태공원의 바이크로드 또한 변함없이 뻗어가는 일직선의 주로(走路)이다. 길 주변은 무성한 억새꽃이 만발하여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봄꽃은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은은한 가을의 갈색은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한다. 세상의 무거운 짐이나, 세상의 어줍잖은 것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느낌이다. 스스로 마음이 정화되어 맑은 영혼을 되찾게 하는 가을이다. 특히 억새는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억새꽃을 눈부시게 하는 것은 가을의 맑은 햇살이다. 여리고 가는 줄기 끝에 부스스하게 피어난 꽃무리, 맑은 빛이 다가와야 눈부시게 빛나는 꽃이다. 존재의 오묘한 이치를 느끼게 한다.
조용히 생각하면서 가을 속을 걸으면 지루한 줄을 모른다. 무심한 생각에 젖어서 걷다보면 어느새 다음 포인트에 이른다. 목적지에만 목을 매달고 기쓰기만 하면 삶은 피곤하고 지루하다. 무슨 일이든 순간순간을 따뜻한 마음으로 집중하면 인생이 즐겁다.
눈앞에는 전도(前途)가 양양한데 왕버들 나무가 강가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여전히 키 작은 억새가 살랑이고 있다. 억새밭을 지나고 나니 앞이 환하게 열렸다. 둔치가 좁아들면서 낙동강 강물이 발아래 가까이 다가와 있고 강가는 잔디밭인데, 낙엽송 같은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강을 지키고 서 있어 스스로 고고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낙동강 강물이 청보석처럼 빛난다. 그리고 또 여린 듯 늘씬한 버드나무 두 그루가 강을 지키고 있는데 그 또한 그림같은 낙동강 풍경이다.
길게 이어지는 수변공원 길이 낙동강을 옆구리에 끼고 좌측으로 휘어지면서 계속 곧게 뻗어간다. 돌아보니 멀리 삼랑진 낙동대교(중앙고속도로)가 아련하게 보인다.
이제 삼랑진의 끝자락, 미전천 하구에 이르렀다. 미전천 하구의 물줄기는 미미하다. 주변은 군데군데 늪과 습지로 이루어져 있고 잡초와 억새가 공생하고 있었다. 물줄기가 있는 부분은 나무테크로 다리를 시설해 놓았다. 이렇게 미전천의 하구에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 것은 삼랑진 읍내 위쪽에 간이보(簡易洑)를 만들어 삼랑진호수공원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낙동강과 함께 물이 넘친다. 그래서 이 바이크로드에는 비가 많이 오면 출입을 통제한다는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이곳 검세리의 미전천 하구에는, 금오산—천태산 산곡에서 발원하여 안태호(양수발전소의 하부댐)를 경유하여 내려오는 안태천도 낙동강에 유입된다.
낙동강 12경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는 상류의 안동댐에서 부산하구둑까지 385km가 하나의 노선으로 이어져 있다. ‘낙동강정비사업’을 한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낙동강 12경을 지정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제1경’은 을숙도 생태공원-철새도래지,
‘제2경’은 양산의 황산경-물금신도시-오봉산 임경대,
‘제3경’은 삼랑진 하중도-딴섬 생태누리,
‘제4경’은 창녕 화왕산 억새-산과 들의 갈대 향연,
‘제5경’은 합천·창녕보-들꽃의 향연-우포 따오기,
‘제6경’은 강정·고령보-달성습지, 사문진 강변,
‘제7경’은 칠곡보-호국공원-호국경-호국의 다리,
‘제8경’은 구미보-선학경-해평들 철새도래지-흑두루미,
‘제9경’은 낙단보-낙강경-낙동나루터,
‘제10경’은 상주보-경천경-상주자전거 축제,
‘제11경’은 삼강절경-삼강주막-노목,
‘제12경’은 안동 하회마을-부용대-병산서원.
여기 삼랑진의 ‘낙동강 딴섬 생태누리’는 ‘낙동강 12경 중의 제3경이다. 삼랑진 하중도를 비롯한 ‘낙동강 변에 펼쳐지는 은빛 물결의 일렁임 — 세 갈래 물줄기가 굽이쳐 하나의 희망으로 모이는 삼랑진 억새 군락지’이다. 밀양시에서는 삼랑진 미전천 상류의 수변공원에서부터 미전천 하구와 우곡천이 합류한 안태천이 유입되는 지점까지의 생태누리의 습지를 아울러 '삼랑진 생태문화공원'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곳 삼랑진은 밀양군의 2읍 9면 가운데 하나로 밀양군 동남면에 위치하여 밀양, 양산, 김해 등 세 고을의 접경을 이루는 곳이다. 동북쪽으로는 화강암 지대의 울퉁불퉁한 산악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그 지천들의 연안에 충적토로 하여 임천, 안태, 송지, 율곡리 앞에 넓고 비옥한 평야를 이루기도 한다. 특히 안태리의 천태산 높은 산록에 낙동강 물을 끌어 올려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대한 양수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이 낙동강 강안 일대는 빼어난 관광지를 이루었다.
처자교(處子橋) 이야기
미전천 하구를 지나온 바이크로드는 왼쪽의 경부선 철로 아래에서 직선의 바이크 주로로 뻗어 있다. 오른쪽은 생태습지이다. 억새와 잡초가 우거진 습지 안에는 웅덩이도 있고 늪지대도 보였다. 큰 웅덩이 주변에는 왕버들 한 그루 휘어져 있고 은백색의 억새와 갈색의 잡초들이 어우러져 자연생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처자교(處子橋)’에 대한 빛바랜 해설판이 서 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해설판에 쓰인 내용은 이러하다.
매장문화재 발굴 역사문헌 중, 1530년 중종 때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작원교 앞 사포교’, 「밀주징신록」에서 ‘승교, 처자교’, 「밀양지」에서 ‘숙종 때 세운 아치형으로 처녀교, 승교’의 기록이 있다. 밀양지명고에서는 ‘직원관 근처의 작은 절에 한 스님이 살았는데, 근처에 사는 미모의 한 처자를 연모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걸고 다리 놓기 시합을 벌였다. 스님은 형곡천 다리를 맡았고, 처자는 우곡천 다리를 맡아 작업을 시작했다.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본 스님이 교만에 빠져 있는 사이, 처자가 다리를 완성했다. 이를 부끄러워한 스님이 낙동강 물에 빠져 죽자 처자도 따라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스님이 만든 다리는 승교, 처녀라 만든 다리는 처자교로 불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4대강 살리기 낙동강정비사업 현장에서 발굴된 처자교는 조선시대 영남대로 상에 남아 있는 보기 드문 쌍홍예교로 그 규모가 폭 4.25m, 길이 25.3m, 높이 3.2m 교량으로, 당시의 건축이나 토목양식을 잘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처자교는 2011년 6월 발굴 후 낙동강 강물에 의한 훼손 및 유실 방지를 위하여 현재의 이 자리(우곡천 하류)에 매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위치 : 100m ➡)
처자교는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처자교는 만어산에서 발원한 ‘우곡천’이 검세리에서 ‘안태천’과 만나 낙동강에 유입되는 곳에 있는 돌다리였다. 2011년 발굴 당시의 희미한 사진을 보니 정교하게 돌로 쌓은 두 개의 ‘홍예교(虹蜺橋)’이다. — 「작원진석교비」에 의하면, 안태리 주민 200호가 1690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노력해서 홍예교를 놓았다는 사실을 적어 놓았다. 지금 ‘작원진비각’에 보존되어 있는「작원진석교비」는 영남대로를 통과하던 삼랑진 안태리에 있던 행곡천(안태천)에 석조 홍예교를 지은 것을 기념하여 1690년(강희29년)에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다.
홍예교(虹蜺橋), 아치교(arch bridge)는 교량 밑이 무지개 같은 반원형의 형상을 하고 있어 ‘무지개다리’고도 한다. 한국에 남아 있는 홍예교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는 전라남도 보성의 벌교에 있는 ‘홍교(虹橋)’로 보물 3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의 홍예교(虹蜺橋), 승주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는 상류와 하류에 2개의 홍예교가 있다.
‘처자교 해설판’을 지나고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 가을빛이 완연한 천태산의 산줄기가 낙동강 가까이 다가와 있다. 안태천 하구의 나무테크 다리를 건넜다. 이제 습지 구간이 끝나고 낙동강 강물이 발밑에 출렁이는 물길이 시작된다. 왼쪽은 산록의 가파른 옹벽 위에는 경부선 철로가 있어 수시로 열차가 다닌다. 상·하행선의 각종 열차가 차르륵 차르륵 요란한 쇳소리를 남기고 질주하고 있다. 맑은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는 물길을 따라 한가로운 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한가롭고 편안했다.
작원나루[鵲院津] 굴다리
파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검푸른 낙동강물이 출렁거린다. 늦가을 햇살은 따사롭고 강바람은 서늘하게 온몸을 감싼다. 느긋한 마음으로 물길을 따라 걷는다. 옹벽 위의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발아래는 수심(水深)이 깊은 낙동강이 시퍼렇게 출렁인다. 고기잡이 배 두 척이 강안에 묶여서 무심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여기가 바로 옛날 유명한 작원나루[鵲院津]이다. 작원관지(鵲院關址)를 안내하는 이정표 옆에 굴다리가 있다. 경부선 철로 아래의 굴다리로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작원마을, 이곳에서는 ‘깐촌’이라고 부른다. 마을에서 약 100여 미터 올라가면 산뜻하게 단장한 문루가 있다. 복원한 작원관 한남문이다.
삼랑진 작원관지(鵲院關址)
작원관지는 영남(嶺南)지방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요로(要路)의 역원(驛院)인 ‘작원관(鵲院關)’의 옛터로 ‘까치원터’라고도 한다. 고려 고종(高宗) 때 창건했다. 관원들의 숙박소 기능과 함께,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 구실도 하는 등 원(院)·관(關)·진(津)의 역할을 겸했다. …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에 있는 영남대로 작원관(鵲院關)은 고려시대 이후 동 · 남 육로와 남 · 북 수로의 요충지로,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었다. 낙동강변의 절벽에 위치하여 부산 동래에서 한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경의 조령관(鳥嶺關)과 함께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교통 및 국방상의 2대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공무로 출행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였다.
김해와 밀양 등 낙동강 유역에 창궐하던 왜구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였던 작원관은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300여명의 병졸로 소서행장이 이끄는 18,000여 명의 왜적을 맞아 전투를 벌인 곳이다. 작원관의 천험적인 지리를 이용하여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처절한 전적지이다.
원래 이곳에 500m 아래에 있던 작원관에서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 장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막기 위해 제일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항전(抗戰)을 펼쳤으나, 전투에 패한 후 폐허가 되었고, 일제시대 경부선 철로를 건설하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다만 그곳에 터[鵲院關址]를 표시하는 비석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 지금의 이곳에 작원관의 성문인 ‘한남문(捍南門)’을 복원했다. 한남문(捍南門)은 남쪽을 막는다는 뜻을 지닌 관문이다. 이에 앞선 1983년 7월 20일 작원관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장방형의 작은 비석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놓았다.
* [頌德碑] — 壬辰倭亂 당시 護國英靈들의 거룩한 犧牲을 기기기 위한 鵲院關址聖域化事業에 土地 7,934㎡를 喜捨하여 礎石을 다지게 하였으니 베푸신 恩惠가 河海와 같아 그 고마운 뜻을 後世에 길이 빛내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 기증일 : 1990년 11월 12일 / 기증자 : 작원(깐촌)마을 주민 강갑들, 강말순, 강명득, 강인득, 김기동, 김도○, 문석모, 문종수, 박명화, 박춘자, 서영순, 양이근, 오우기, 오정희, 오태환, 이 경우, 이상현, 이용덕, 이용재, 이종호, 윤중근, 윤중환, 장길형, 주경자 / 2014. 5.16 / 작원관지보존위원회 건립
내용을 읽어보니 작원관 복원을 위하여 이곳 깐촌 주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기꺼이 내어놓아 이렇게 문루를 세우고 역사를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작원관 복원의 자세한 내용을 적은 비석도 있다.
작원관복원기념비
이곳 작원관은 옛날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하던 곳으로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 300여 명이 왜적 1만 8천 7백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1592년 4월 17일)을 벌였던 전적지(戰跡地)로서 구국충혼(救國忠魂)이 잠들어 있는 성지이며, 수백 년 동안 피땀을 흘린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 변에 그 터를 잡았으나,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 그 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를 복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었다. 선생께서는 작원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작원관을 복원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그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他界)하셨다.
뒷날 선생의 작원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역민의 노력으로 지금과 같이 우뚝 서게 되었으니 이를 기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 사랑을 실천하고 선조(先祖)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작은 의지로 이 비(碑)를 세운다. / 삼랑진읍민 일동
작원관위령탑(鵲院關慰靈塔)
한남문 오른쪽 산록의 높은 곳에 ‘작원관위령탑’이 있다. 직선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긴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동래성 함락 이후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해 이곳 작원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관군과 의병들을 위한 위령탑(慰靈塔)이다. 중앙에 두 개의 높은 화강암 주탑을 세우고 그 사이에 ‘鵲院關慰靈塔’(작원관위령탑)을 현시해 놓았다. 주탑의 하부에는 좌우로 경사지게 반듯한 병풍석을 시설하고 그 전면의 네 곳에 당시 전투를 지휘하던 장군과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의 모습을 부조해 놓았다. 그리고 좌·우의 오석판 벽면에 각각 해설문이 있다. 왼쪽에 ‘작원관임란순절용사위령비’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작원관’에 대한 해설(解說)을 새겨놓았다. 비문을 읽어본다. ‘작원관임란순절용사위령비’ 비문(碑文)은 이러하다.
평화로운 사월, 느닷없는 도이(島夷)의 침략 소식에 부사의 소집령이 급박하였으니, 놀란 가슴을 진정할 길도 없이 보던 책과 쟁기를 팽개치고 작원관(鵲院關)으로 내달았다. 이미 고니시(小西)의 잔폭(殘暴)한 이만 병력 앞에 부산, 동래가 떨어지고 기장, 양산이 무너졌으니, 이에 작원관은 향토의 보루(堡壘)요 국맥(國脈)의 요처(要處)가 되었다. 아! 부사(府使) 박진(朴晉) 공(公)은 비록 장략(將略)이 있었으나, 어찌 삼백(三百)의 병사로 수많은 왜병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울긋불긋한 기치(旗幟)와 피 묻은 창칼을 높이 들고 몰려오는 저 흉악한 왜구(倭寇)들을 바라보며 가슴 저미는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작별도 제대로 못한 부모처자 생각에 속으로 울었도다. 돌아보면 공소(空疎)한 말다툼으로 세월을 허송하며 국방을 돌보지 않은 고관대작(高官大爵) 홍유석덕(鴻儒碩德)들이 그토록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험난(險難)한 지형(地形)을 의지하여 버티기 수일 만에 양산으로 우회한 적병들의 공격에 관(關)은 무너지고 콩 볶는 듯한 조총(鳥銃)의 탄환에 동료들이 쓰러졌다. 분노(忿怒)로 치를 떨며 창 휘둘러 적을 치니, 고함은 천지를 울리고 핏물은 허공에 뿌려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군세(軍勢)는 미약(微弱)하고 용력(勇力)이 다하여 마침내 왜적의 창날 아래 목숨을 잃으니 그 안타깝고 억울함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수백 년 이름 없는 원혼이 되어 비바람 몰아치는 밤이면 꿈인 듯 생시인 듯 찾아와 울었으나 그리운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덧없는 것이던가. 아! 충절(忠節)과 효우(孝友)의 고을에서, 나라를 보전코자 목숨과 이름을 돌아보지 않은 영령(英靈)들의 순충(純忠)을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오! 그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치열한 자취는 후인(後人)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고 청사(靑史)에 길이 기록되어 있는도다. 사백여 년이 지난 오늘 향토의 후예(後裔)들이 선인(先人)들의 충국헌신(忠國獻身)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전적지를 정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향화(香火)를 잇고자하니 이에 영령들은 깊은 한(恨)을 풀고 영원히 안식할지어다.
명(銘)하노니 / 한번 죽음으로 쓰러지는 나라를 떠받치니
그 의기(義氣) 천하에 높아 장부(丈夫)의 가슴을 떨어 울렸다.
언제 공명(功名)을 생각했던가! 마음속에 가국(家國)의 안위(安危)뿐이네.
후인(後人)들이 그 정성을 높이 받드니 지나는 이 반드시 옷깃을 여밀지라.
鄕後生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敎授 朴丙鍊 謹撰
매우 격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지만, 임란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아주 자상하게 서술해 놓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뜨거운 충혼(忠魂)을 기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작원관’ 해설이 있다.
작원관위령비가 서 있는 이 산은 산세가 험하나 경관이 수려하고 유연하여 천태암산에서 고야산을 지나 불끈 치솟다 낙동강에 내리꽂힌 돌을 깨고 관도를 열어 고려시대부터 요새를 둔 곳이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鵲(작)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이 쉬어가던 역원이 있어 院(원)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와 관문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을 ‘鵲院關’(작원관)이라 이름하고 문을 ‘捍南門’(한남루), 누를 ‘拱雲樓’(공운루)라 편액하였다.
천태산(天台山) 벼랑을 따라 난 잔도는 매우 위험하여 몸을 구부려 내려다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낙동강의 소용돌이치는 물빛이 짙은 푸른빛을 띠고 두려움을 더하게 하는데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도 당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제일의 요해지(要害地)로 예전에 한 수령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어 원추암(員墜巖)이라고도 부른다.
1592년 임진(壬辰) 4월 17일 아침에 동래를 출발하여 양산을 거쳐 침입해온 고니시(小西行長)의 왜병 제1군 1만 8천 7백여 명이 부장 마쓰우라(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 들어 산의 위쪽 방향에서부터 조총(鳥銃)으로 사격을 가하며 달려들자 이곳을 방어하던 밀양부사 박진(朴晉)을 비롯한 군관 이태수, 김효우 등이 관병, 민병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이하 3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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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왜군의 주력 고니시부대가 한양으로 진격한 길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1592년 4월 17일 여기 영남대로 ‘작원관’의 처절하고도 패전과 장렬한 죽음이 9일 후인 4월 26일 ‘문경새재’에서도 규모는 다르지만 그러한 처절한 상황이 재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1572년 임진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의 주력인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쳐들어가는 영남대로에서 일어난 것이다. 문경새재의 상황은 이러하다
* [영남대로 문경새재] — 상주에서 토끼비리-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가는 길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 초 태종(太宗) 때 개설되어, 약 600여 년 동안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충주-장호원-광주-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로(要路)였다. … 영남대로 문경 새재는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력부대 18,000여 명을 이끌고 밀양-대구-상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길이었다. 상주에서 함창-유곡을 지나 토끼비리-진남관을 지난 고니시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 만에,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삼도도순변사로 신립(申砬)은 새재를 버려두고 충주 탄금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참패했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고니시가 한양에 입성하기 사흘 전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대한 분노로 경복궁 등을 불태웠다.
* 「문경현감(聞慶縣監) 신길원(申吉元)」— 왜군과 맞선 의기(義氣)와 장렬한 순국(殉國)!
그러나 왜적이 지나가는 문경새재에도, 작원관의 밀양부사 박진 장군과 같은 충렬(忠烈)한 분이 있었다. …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 공은 고니시(小西行長)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했다.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총상을 입은 신길원 현감은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公)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公)의 장렬한 순국(殉國)을 기리어 ‘縣監申吉元忠烈碑’(현감신길원충렬비)를 세워 그 충혼(忠魂)을 기리고 있다. ‘충렬비’는 새재 초입 ‘옛길박물관’ 입구의 오른쪽 길목에 있다.
― 여기 밀양에 ‘작원비리’(벼랑길)와 ‘작원관’(관문)이 있듯이 문경에도 ‘토끼비리’(벼랑길)와 ‘문경새재’-‘조령관’(관문)이 있다. 그리고 둘 다 천혜의 험준한 요새를 지니고 있으면서 사전에 전쟁을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관문을 방어하는 군사력이 미약하여, 속절없이 치욕적인 패배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처참한 상황이 아주 유사하다.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왜적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조선의 관군은 패퇴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야만적인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유린을 당했다. 전쟁은 처절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왜적에 맞선 충렬한 선열이 있었고, 선비의 기개로 창의한 의병장이 있었다. 그 순정한 의기와 충심이 결국 처참한 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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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위령탑 앞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
작원관 비각
비각 안에 보관된 비석은, 「작원관원문기지비」, 「작원대교비」, 「작원진석교비」이다. 작원관을 당초 위치에서 떨어진 현위치에 복원하면서 작원관 옛터에 있던 비석이 이곳으로 옮기고 비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작원관원문기지비」는 작원관의 본래 위치와 그후 이전 관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비석 정면에 ‘鵲院關院門基地’(작원관원문기지)라고 새겨 놓았으며, 측면에는 ‘昭和十四年十月日’(소화14년 시월일)이 음각되어 있다. ‘소화14년’은 1939년으로 이 헤 10월에 만들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작원진석교비」는 앞서 지나온 처자교에 대한 사적인데,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다시, 낙동강 종주의 길에 서다
작원관 한남문에 올라보고 산록의 긴 계단을 올라가 위령비를 참배하는 등 일원을 둘러보고 작원마을[깐촌] 앞을 지나 굴다리를 통하여 다시 강변의 바이크로드로 나왔다. 굴다리 옆의 옹벽에 「노을이 아름다운 깐촌」이라는 시 한 편을 산뜻하게 적어놓았다. 필자를 밝혀 놓지 않아서 누가 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이곳 깐촌(작원마을)에서 바라본 낙동강의 저녁노을과 멀리 보이는 삼랑진의 매봉산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빈 나루터에 고기잡이배가 노을진 물결에 출렁이는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지금은 석양의 시간이 아니지만 강가에 매어있는 빈 배를 보며 시 속의 풍경을 상상해 보기도 했디.
작원관 굴다리를 나와 다시 낙동강 물길, 바이크로드로 나왔다. 이곳 작원마을 앞 경부선 기찻길 굴다리 밖, 낙동강변은 밀양 삼랑진~양산 구간의 ‘낙동강자전거종주길’이다. 굴다리에서 조금 내려온 지점이 원래 작원관이 있던 자리이다. 거기서부터 천태산 산줄기가 뻗어온 낙동강 강안은 절벽이다.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옹벽 위를 지나가고 있지만 옛날에는 ‘작원잔도(鵲院棧道)’가 있던 구간이다. 지금은 낙동강 검푸른 물이 출렁이는 강안에 바이크로드가 산뜻하게 시설되어 있었다.
작원잔도(鵲院棧道, 작원벼랑길)
부산에서 한양까지 영남대로 구간에서 잔도(棧道)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 있다.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 암반을 깎아 내거나 가파른 절벽에 석축을 쌓아 길을 내었는데 이 길을 『조선왕조실록』에는 잔도(棧道)라고 하였다. 영남대로에는 양산의 ‘황산잔도’, 밀양 삼랑진의 ‘작원잔도’ 그리고 경상북도 문경의 ‘토끼비리’가 대표적이다. ‘황산잔도(황산베리길)’는 현재 물금읍의 황산역에서 원동에 이르는 낙동강 절벽에 만들어진 길이고, ‘작원잔도’는 양산 원동(용당리)의 하주막에서 삼랑진 까치원[작원]에 이르는 벼랑길을 지칭한다.
작원잔도(鵲院棧道)는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동국여지승람』밀양부편에 ‘작원잔도’는 밀양부에서 동쪽으로 41리(16km)에 위치해 있다. 작원으로부터 5~6리쯤 내려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만들어진 잔도는 매우 험한 길이다. 그런데 그 한 벼랑길은 돌을 깨뜨려 길을 만들었는데,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낙동강 물이 짙푸른 빛을 띠고 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닐 때는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움으로 걸었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적이 있다.
직선대로의 낙동강 바이크로드
그러나 경부선 철도의 옹벽 아래 시설된 지금의 바이크로는 2차로의 직선의 주로이다. 발아래에는 낙동강 검푸른 물이 출렁이고 있다. 사람 가슴 높이 정도의 가드레일을 갖춘 바이크로드는 거리낌 없이 뻗어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강안에 대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그윽한 정취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열리는 길, 낙동강 검푸른 물결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돌아보니 호수 같은 낙동강 물결 위로 멀리서 삼랑진의 삼각의 매봉산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나무테크로 시설되어 있었다.
밀양시와 양산시의 경계를 지나다
바이크로드는 밀양시와 양산시의 경계를 지났다. 벼랑위의 작원잔도가 끝나는 구간이며 나무테크 시설도 끝나는 지점이다. 이제 양산시 구간, 수변공원 자전거 길로 접어들었다. 길의 양쪽에 은백의 억새꽃이 바람이 하늘거리고 있다. 너른 둔치의 한 복판에 왕복 바이크로드와 추월로까지 곁들여 앞이 환하게 열린 길이다. 길을 따라 전주가 이어지고 가로수도 간간이 심어져 있다. 길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낙동강종주 이정표가 서 있다. ‘↑낙동강 하구둑 41km ↓안동댐 344km’, 이제 을숙도까지 100리를 남겨두고 있다.
양산시 원동 중리 수변공원
잔디와 억새꽃이 피어 있는 너른 둔치의 한 복판으로 바이크로드가 크게 굽이를 튼다. 양산시 원동 중리마을 안내판이 선명하다. 안내도에 의하면, 경부선 굴다리를 지나 들어가면, 중리마을 용서의 길, 그리고 길 초입의 좌측에 홍련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환생연꽃공원이 있다고. —
너른 둔치의 잔디광장에 두 동(棟)의 사각정 쉼터도 있고 강 쪽으로는 억새꽃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바이크로드, ‘↓삼랑진 4.2km ↑가야진사 1.5km’를 적시한 이정표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직선의 주로가 펼쳐져 있다. 강은 보이지 않고 가을 햇살을 머금은 억새꽃 군락이 눈부시다.
태극기(太極旗)에 대한 사색
낮 12시 20분, 가야진사로 가는 길목에 벤치가 있어 무거운 배낭은 내리고 휴식을 취했다. 하늘이 높고 맑은 햇살이 내리는 낙동강 수변공원,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벗어놓은 배낭에 꽂힌 태극기(太極旗)가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밝은 가을 햇살을 받은 태극기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순백의 바탕에, 사방 건(乾)·곤(坤)·감(坎)·리(離) 사괘(四卦)가 배치된 한 가운데 천지의 생명을 창조하는 음양(陰陽)이 상생 조화를 이루는 태극(太極)이 자리하고 있다. 건(乾)은 하늘이요 곤(坤)을 땅이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이 건곤, 즉 우주천지 가운데 존재한다. 그리고 감(坎)은 물이요 리(離)는 불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존재하는 근원적 에너지가 불(태양)과 물이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근거를 한 우리나라 태극기는 천지자연의 모든 존재(存在)와 생명이 무궁한 창조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 태극기는 무한한 생명창조의 원리를 담고 있는 철학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선량한 마음이 음양의 상생 조화를 통하여 세워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태극기(太極旗)는 대한민국의 그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생애(生涯)를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숙명적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인간(人間)의 삶이란, 갈등과 고난의 굴곡(屈曲)을 겪으며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절박한 존재론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교(宗敎)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갈등과 고민을 극복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예수와 부처와 공부자와 같은 분들은 이러한 인간의 숙명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을 걷고 이타적(利他行)을 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인류의 스승이 되었고 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
특히 공자(孔子)는 성군(聖君) 요·순(堯舜)으로부터 내려오는 사상과 가르침을 집대성(集大成)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조화(調和)를 이루어, 모든 사람이 다함께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하늘마음’[仁]이다. 이후, 시대마다 수많은 현인(賢人)들이 나타나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체계화한 것이 유가(儒家)의 공문도통(孔門道統)이요, 오늘날까지 전해진 ‘사서삼경(四書三經)’이다. 이 중에서 특히『주역(周易)』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응답하는 지혜의 보고이자, 가장 중심적인 경전(經典)이다.
태극기, 오묘한 철학의 소산
☆… 우리 선조들은 늘 하늘을 우러러, 하늘과 더불어 참다운 삶을 추구해 왔다. 특히 하늘의 이치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주역(周易)에 기초를 둔 ‘태극기(太極旗)’를 제정했다. 전 세계에서 주역(周易)에 기반을 두고 국기(國旗)를 만든 나라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유일하다. ‘태극기’에는 ‘☰ 하늘’과 ‘☷ 땅’ 즉 천지(天地)가 들어 있고 물을 상징하는 ‘☵ 감(坎)’과 불을 상징하는 ‘☲ 리(離)’가 짝을 이루어 구성되어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물과 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불가결의 요소이다. 그 한 가운데 ‘○ 태극(太極)’이 있고 그 태극은 음(陰, 청색)과 양(陽, 적색)으로 상생적으로 구성되어 생명 창조의 묘리를 담고 있다. 이렇게 ‘태극기’는 주역(周易) 그 자체이고 생명 그 자체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은연 중, 알게 모르게 주역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태극기의 유래
구한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가 ‘이응준의 태극기’ 중에서 태극도식에 맞춰서 태극의 회전 방향을 정정한 뒤 1883년 조선의 공식 국기로 제정되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태극기는 건乾 ☰ 곤坤 ☷ 감坎 ☵ 리離 ☲ 위치와 태극 문양의 방향이 여러 가지였지만 1882년 박영효가 정비한 태극기는 태극문양과 괘 모양이 현재의 태극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태극기, 3·1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구심(求心)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개화당이다. 철종(哲宗)의 부마(駙馬)로 고종의 고모부이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하여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의 좌·우를 바꿔 재 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이후로 태극기는 대한제국, 3·1만세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되어 있다. 현재 사용하는 태극기(太極旗)는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태극기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존재(存在)와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공화국
1945년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의 혼란기에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좌익세력이 발호하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공산당이 점거하면서,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UN과 미국의 협조를 받아 1948년 5월 10일 선거 가능한 지역(남한)에 대하여 총선을 실시, 7월 17일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렇게 건국된 대한민국을 UN총회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당시 UN의 주관 하에 탄생하고 UN이 승인한 나라는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이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근간으로 탄생한 공화국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1948년 8월 25일 흑백함 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북한의 실체는 첫째 공산주의 이념체제, 둘째 사회주의 통제경제, 셋째 소련·중공과의 동맹관계, 넷째 김일성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조선 김씨 왕조이다.
이렇게 국제법에 의거하여 UN이 탄생시킨 대한민국을, 북한의 김일성이 1950년 6·25 남침을 감행한다. 수많은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처참한 전쟁이었다. 남침은 ‘자유’를 말살하는 폭력이었고 UN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하여 UN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파병한 UN군을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여 공산군을 격퇴함으로써, 한국은 위기에서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렇게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 보존하게 된 나라이다.
사실,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이 땅을 공산화하기 위해, 대구 시월폭동, 제주 4·3폭동, 여순반란사건 등을 일으켰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나라는 전체주의 파쇼 공산국가가 아니라 하늘이 한 개인에게 내린 천부적(天賦的)인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공화국’이었다.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 18만 병력과 T-34 전차 242대, 자주포 142대, 100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앞세워 기습적으로 남침했다. ‘한반도 적화’라는 정치적 욕망 때문에 전쟁 3년 동안 500여 만명의 사람이 죽었다.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온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런 그런 처참한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일어서서 세 계가 주목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태극기(太極旗)는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독립의 염원을 담은 불굴의 정신이고,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하여 피로써 지켜낸 뜨겁고 순결한 우리의 표상이다.
위기의 대한민국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가? 지난 2017년 5월에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否定)한다. 철저하게 종북 좌파(주사파) 사상을 가진 문재인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正統性)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歪曲)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비롯된 6·25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 하고 미국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원흉이라고 외친다.
특히 종북 좌파 사상을 가진 대한교수들과 전교조 및 학생들과 일부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매도하고 철저하게 반미(反美)와 미군철수를 외치며 ‘우리 민족끼리’ 자주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끼리’는 북한 김정은 공산집단과 남쪽의 종북 좌파들을 아우르는 허울 좋은 표현이다. 문재인 주사파 정권이 청와대를 장악하고 그 아류들이 이 사회에 곳곳에 포진함으로써 내밀하게 역사 왜곡 작업을 하고 있다. 끊임없는 편 가르기로 대립구도를 만들어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정치적 만행을 저지르고 끊임없는 탐욕의 정치로 사리사욕의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 그렇게 온갖 비리(非理)를 저지르고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소위 그 ‘내로남불’의 뻔뻔함이 목불인견이다. 그래서 국민은 분노한다. 조국, 추미애, 박범계로 이어지는 권력의 횡포는 어느 때보다 비열한 신종 적폐를 만들고 있다. 문재인 정권 3년 동안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고 대한민국의 발전 동력은 추락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분노와 좌절에 빠졌다.
왜 태극기인가
내가 지난 8월 3일 태백에서 하늘에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낙동강 종주를 시작할 때 배낭에 태극기를 꽂았다.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지난여름 제8호 태풍 ‘바비’로 인하여 전국 곳곳에 폭우와 홍수가 발생하여 잠시 낙동강 종주를 중단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 8·15를 맞았다. 나는 정치적인 태극기부대는 아니지만,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제72주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을 맞아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나아갔다.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이다. 거기가 어디인가. 1919년 1월 덕수궁에 있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닜을 때, 그것이 일본인에 의해서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전국의 유림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분하였다. 그것이 3·1만세운동을 촉발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그날 나는 100여 년 전, 1919년 일제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 그 광장에 나갔다. 절친 ‘김대호 사장’ 등 몇몇 친구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반성을 촉구했다. 그날 광장에서 문득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에 나오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 (우리의 독립선언은) …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縻(기미)된 日本爲政家(일본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
― 이는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에 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우리 민족의 절절한 목소리다. 여기 문장에서 ‘日本爲政家’(일본위정가)를 ‘문재인 정권’으로 바꾸어 놓고 보니, 그날 8.15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뜨겁게 외친 구호가 되었다. 다음과 같다.
‘ (오늘 8.15광장에서 우리는) … 이미 한물 간 공산주의 사상과 3대 세습 왕조인 김정은에 얽매인 문재인 정권의 헛된 종북의 공명심(소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때문에, 망가지고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착오상태를 제대로 고치고 바로 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국가경영의 대원칙(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
― 독립선언서 한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현실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매우 착잡했다. 이 지경이 된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었다. 아! 나라가 어떻게 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
그 다음날 8월 16일, 나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으로 내려가 ‘현동역’에서, 낙동강 종주 2단계에 돌입했었다. 광장의 그 태극기를 배낭에 꽂고 ― 그렇게 태극기는 늘 나의 어깨 위에서 펄럭이며 나의 동반자가 되어 나와 함께 낙동강 종주를 해온 것이다. 지금 그 태극기가 양산시 낙동강 수변공원에서 밝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이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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