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3> 全義 이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2-01-24 19:27:44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7세손 이천 때 크게 번창… 세 아들이 문중 3대 인맥 이뤄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로 알려져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원래 이름은 치(齒)였다고 하며, 그의 집안은 금강 어귀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되었다. 왕건의 군대가 금강에 도착했을 때, 홍수로 강물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뱃사공을 하고 있던 치 등이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왕건의 군대를 무사히 건네주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는 홍수로 왕건의 군사가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비책을 전혀 세우고 있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왕건의 군대가 들이닥쳐 대패하고 말았다. 견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왕건은 이를 도와준 치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했다. 그 후 전의이씨 일족은 지금의 연기군 전의면 이성산(李城山) 아래에서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의(全義)로 정한 것이다. 일부 예안지방으로 세거하게 된 전의이씨 일족은 예안이씨로 분관을 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통합하여 전의 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의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1071가구에 13만3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의이씨의 연혁과 인물
전의후에 봉해진 이도는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이성(李城)에서 살았는데, 지금도 충남지방문화재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성은 운주산 북쪽에 소재한다. 산봉우리에 돌로써 축성하였는데, 이도가 살았던 고거로 전해진다. 성의 안은 넓고 평평하다. 둘레는 1884척이고 성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도 이후 전의이씨는 그의 7세손인 이천(李仟)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천은 고려 고종 때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이자원(李子?)이고, 둘째가 이혼(李混)이며, 셋째가 이자화(李子華)이다. 이들 세 아들은 전의이씨 문중의 3대 인맥을 이루고 있으며, 각 파에서는 이들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직문한서(直文翰書)를 역임하고 대사성에 증직(贈職)된 장남 자원(子?)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의 파조이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한 3남 자화(子華)는 선부전서공파(選部典書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한편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차남 문장공(文莊公) 혼(混)은 문장공파(文莊公派)로, 그 손자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익(翊)이 예안군(禮安君)으로 봉군(封君)되어 그 군호(君號)를 따라 전의(全義)에서 예안(禮安)으로 이적(移籍)하여 예안이씨(禮安李氏)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전의이씨는 이들 3개 파에서 다시 5대손에 이르러 45개 파로 나누어진다. 백파(伯派)인 대사성공(大司成公) 자원(子?)의 5대손에서는 18개 파가 생겨나고, 중파(仲派)인 문장공파(文莊公派)에서는 2개 파가, 계파(季派)인 전서공파(典書公派)에서는 25개 파가 생겨났다.
전의이씨 가문에서는 이도의 후손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고 있다. 그중 이천의 손자이면서 자원(子?)의 아들인 이언충은 충렬왕 때 문과에 등재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가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승진되었다. 뒤에 대사성·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지제고(知制誥)·선부전서(選部典書)·전의령(典儀令)을 역임하고, 충숙왕 때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갔으며, 집의(執義)를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예문관 대제학·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왕(忠惠王)의 네 왕을 섬기면서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정간(李貞幹)은 천(仟)의 현손이며 언충(彦沖)의 재종손으로, 세종(世宗) 때 강원도 관찰사를 재임하였다. 하지만 노모 봉양이 힘들자 관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또 나이 80세였을 때 100세인 노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였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세종이 그의 벼슬을 정2품으로 올리고 사연(賜筵)과 궤장(?杖)을 하사하였다.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세종이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이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는데, 전의이씨 문중에서는 이 문구를 가훈으로 전하고 있다.
정간(貞幹)의 손자 이서장(李恕長)은 한성부윤 사관(士寬)의 아들이다. 세조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의정부 사인((議政府含人)에 오르고 이듬해 도통사(都統使) 이준(李浚)의 종사관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토벌에 참여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 대호군(折衝將軍大護軍)에 특별 임명되었다. 얼마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며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이덕량(李德良)은 이지장(李智長)의 아들인데,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형부이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이 되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회령부사로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졌다. 성종 때,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병조참판·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탁(李鐸)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 명종 때는 이조정랑을 거쳐 사인(舍人)·집의가 되어 대사헌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권신 이기(李틒)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 되어 대사간 박순(朴淳)과 함께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선조 때 우찬성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이덕수(李德壽)는 참판 이징명(李徵明)의 아들이며, 박세당(朴世堂)·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숙종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문의현감(文義縣監)으로 임명되었다. 경종(景宗) 때는 홍문관의 수찬과 부수찬,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죽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현필(李顯弼)이 책문(策問)을 볼 때 영조를 비방한 사건으로 탄핵받았을 때나,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의 일을 거론해 화를 입었을 때 이광의를 은근히 비호했다 하여 탄핵받았을 때도 영조의 신임으로 무사했다.
이상진(李尙眞)은 인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효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었으며, 여러 차례 직언으로 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헌종 때에는 이조참판, 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때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왕비의 폐위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폐위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숙종(肅宗)의 진노를 사고, 함북 종성과 북청, 강원도 철원 등지로 귀양갔다가 용서되어 부여에 있는 옛집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렇듯 전의이씨는 우리나라의 주요 문벌로 이름을 떨쳤는데,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전의이씨 근현대 인물
근현대의 전의이씨 인물로는 이한응(李漢應)을 꼽을 수 있다. 이한응은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외교활동을 통해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찬탈하자,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英日同盟)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되자, 그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해 임지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후 가선대부 내부협판(嘉善大夫內部協辦)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철승(李哲承)은 학생 운동가이자 정치인, 시민 사회단체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반일 학생운동과 학도병 거부 등으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광복 직후에는 우익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김구·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자유당에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3대, 4대, 5대, 8대, 9대, 10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5·16 이후에는 반군정운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김영삼·김대중과 신민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중도화합론을 주장했다 하여 사쿠라로 몰리기도 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 은퇴,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지도하였다.
이시종(李始鍾)은 정치인이자 민선 5기 충청북도지사이다. 충주시장을 4차례 역임했고 충주시 국회의원을 지냈다. 충주시장 출마 당시에는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았고, 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했으나,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각각 충주시 국회의원과 충북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 외에도 근현대 전의이씨 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전 지식경제부 장관 이윤호, 전 국방부 장관 이상희, 국회의원 이종근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한글학자 이극로, 학술원 회원 이희승 등이 있고, 경제인으로 인터파크 회장인 이기형씨, 연예인으로 가수 이문세, 탤런트 이원종·이정웅, 개그우먼 이경실, 그리고 이응로 화백과 이현세 화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