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서울의 예수>(198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정적, 애상적, 감각적(시각적), 의지적
◆ 표현 :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정서의 심화
(저녁해 : 사랑하였습니다. → 새벽달 : 울었습니다. → 새벽의 섬기슭 : 기다렸습니다.)
감각적인 표현으로 시상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주제를 강화함.
잔잔하고 담담한 여성적 어조(기다림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기대감으로)
경어체의 사용으로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함.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임에 대한 기다림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지는 저녁해 → 우울감, 소멸감, 절망감의 이미지
*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 임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을 자연 현상에
대치하여 표현함.
* 저문 하늘 → 홀로 사랑해야 하는 힘겨운 상황
* 별 → 사랑하는 '그대'
*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 모두들 잠든 세상 바깥에 새벽달이 텅빈
길을 비추면
* 빈 길 → 그대가 없는 길, 화자의 외로움과 단절감을 극대화하는 상관물
* 어둠의 바닷가 → 사랑하는 그대를 만나지 못하는 절망적 상황의 공간
* 저무는 섬 → 외로움에 부대끼며 파멸되어 가는 화자 자신을 상징함.
화자의 외로움과 단절감을 극대화하는 상관물
*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 외로운 사람들은 첫눈 내리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 새벽보다 깊은 새벽 → 새벽달이 떴을 때보다 시간이 더 흘렀음을 나타낸 표현
* 섬 기슭 → 심한 고독과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공간. 소외의 공간.
*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리는 처지를 '행복'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다짐의 말임.
임을 계속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통해 임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음.
◆ 제재 : 떠난 임에 대한 그리움
◆ 제목 : 정호승 시인에게는 '기다리는 편지'라는 시가 있지요. 그것을 의식해서 지어진
제목인 듯하다.
어쨌든 화자는 기다리는 편지가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힘든 기다림을 겪고 있는 듯하다.
◆ 주제 : 그대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오늘도 그대를 사랑함.
◆ 3~6행 : 그대가 없는 외로움과 슬픔
◆ 7~11행 : 기다리는 일의 행복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이 시에서 화자는 기다리던 편지가 오지 않았지만 다시 그 편지를 기다리려 한다. 또한 화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그대를 만나지 못했지만 기다리던 일이 더 행복했다며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시의 서두 부분은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가는 시간적 배경을 제시한다. '저물녘'은 소멸감이나 절망적인 상황을 동반하는 시간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대는 화자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과 우울한 심정을 유추하게 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그저 혼자서만 그리운 그대를 사랑해야 하는 처지가 '날이 저문 하늘'과 '보이지 않는 별'로 형용되어 있다. 그대가 없는 빈 길로 새벽달이 뜨도록 화자는 밤새 그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다 '어둠의 바닷가'로 나가 '저무는 섬' 하나를 떠올리며 울고 만다. 어둠에 묻힌 '바닷가'는 화자의 절망스런 현실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뭍으로 떨어져 나간 '섬'은 외로움에 마냥 부대껴야 하는 화자 자신을 가리킨다. '섬 기슭'은 단절과 격리된 공간으로 화자의 고립감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는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의 행복은 단절감과 그로 인한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결국 저녁 해에서 새벽에 이르는 시간대의 흐름 속에서 화자의 그대에 대한 기다림의 정감은 더욱 깊어만 간다.
[작가소개]
정호승 Jeong Ho-seung시인
출생 : 1950. 1. 3. 경상남도 하동
학력 :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수상 : 2008년 제23회 상화시인상, 2001년 제11회 편운문학상,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 : 도서, 오디오북, 공연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갈대』, 『수선화에게』 등이, 동시집 『참새』, 영한시집 『부치지 않은 편지』,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 『울지 말고 꽃을 보라』, 『모닥불』, 『기차 이야기』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김우종문학상, 하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어의 무늬와 심미적인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는 그의 언어는 슬픔을 노래할 때도 탁하거나 컬컬하지 않다. 오히려 체온으로 그 슬픔을 감싸 안는다.
오랜 시간동안 바래지 않은 온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그의 따스한 언어에는 사랑, 외로움, 그리움,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언뜻 감상적인 대중 시집과 차별성이 없어 보이지만, 정호승 시인은 ‘슬픔’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 승인하고, 그 운명을 ‘사랑’으로 위안하고 견디며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시편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구축하였다.
‘슬픔’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일구려던 시인의 시학이 마침내 다다른 ‘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성’은, 윤리적인 완성으로서의 ‘사랑’의 시학이다. 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순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한 그의 언어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