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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일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유 래영9
1970년대 전방 최전선부대의 추억 비하인드 스토리
글을 쓰면서
나는 70년대 전방 휴전선 부대에 근무하면서 당시에는 힘든줄도 모르고 근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어렵고 고된 나날이였는데 지금은 누구도 모르고 인터넷 에서도 사진은 있지만 글이 없기에
나는 이런사실을 몸소 체험했기에 당시에 있었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객관적 으로 표현을
하는 것도 의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글을 쓰고자 하며, 이런 내용은 지금 나이로 60대 후반부터 70대
이상의 분들에게 아련한 군대의 향수를 일으킬수있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데 중요한 사실중에 하나인 사진은 한장도 남아있지 않고 인터넷 에서도 70년대
전방부대 사진은 전혀 없고 80년대 이후의 사진만이 있어서 남감했지만 그래도 그런 사진들이 있어야
설명이 되기에 아래의 모든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왔으니 이런점을 참고하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전방부대 설명도 내 주관적으로 기술했기에 틀린 것도 있을 것이고 다른내용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당시를 생각하면서 28사단을 근무 하면서 경험 했던 내용을 올리겠습니다
- 달리 생각하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보았다고 하는식이나 마찬가지일수도 있습니다,,,
전방의 혹독한 추위는 모든 장병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어서 그런지 더 춥고 배고푼 시절이였다, 당시의 전방 주변의 겨울은
영하15도 내외인데 내가 근무 했던 전방지역 (28사단, 1974~76년)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접하고 있어서
강바람이 휘몰아칠때의 체감온도는 영하25도 이상이였으며 GOP 에서 소초장으로서 근무시에는 옷을
5겹정도 껴입어도 추웠으며 눈이 오면 작전상 모든 통로가 막히기에 야간에도 횃불작업을 하면서
눈을 치우지만 '악마의 똥가루"인 눈을 그칠줄 모르고 내렸기에 GOP나 FEBA상에서 근무를 할때는
유독히 겨울철만 되면 월동준비와 함께 힘들고 어려운시기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신조 여파로 당시는 밥만 먹으면 구보를 한다고 매주, 매월 구보대회가 열려서 고생이 많았다
74년도 28사단 82연대 전투지원중대 106mm 소대장으로 보직받았다
74년 1월 4일 사단장 신고를 마치고 82연대로 가는데 안내장교는 저기가 북한이라고 겁을 주어서 공포에
떨었으며 연대장 (대령, 육13기, 임동원,국정원장과 통일부장관역임)신고후에 연대직활인 106mm 소대장
으로 보직을 받았으며 지프차를 타고 다녔기에 연대 RCT 훈련에서도 고된 행군도 면제받았고 소위로서는
권총을 차고 다녔기에 같은 동기에게 부러움을 받았다, 당시에 한달 하숙비와 쌀 한가마(80kg)는 5,500원
이였고, 소위봉급은 18,700원 이며 술안주는 동두천시내에서도 300원을 넘지 않았다,
당시에 병사들은 40명이 한내무반에서 생활 했으며 75년에 폭행과 구타를 근절하고자 얼차려 제도가
신설되였고 사병식당을 개선한다고 1식 3찬제도가 처음으로 시행이 되였으며 간첩이 자주 출몰하여
대간첩작전을 많이 다녔으며 또한 국가가 가난하였기에 병사의 복지는 꿈같은 말이였으며 장교와 사병들
모두가 힘들고 어렵던 시절이였고 또한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우리소대에 5명정도 있어서 일과후에
나와 대학을 다니던 병사들이 번갈아가며 한글을 가르쳤는데 그 병사들이 얼마후에 한글을 깨우치고
집에 편지를 쓰는데 감격스러웠고 나중에 막걸리 한말을 사들과 와서 모두가 유쾌하게 한잔했다
보병 연대에 1개소대뿐이 없는 106mm 소대의 소대장을 했다
70년대 전국의 모든 내무반은 40명이 들어갈수 있도록 소대단위로 생활을 할수있도록
했으며 1인용 스폰지 메트레스와 모포3장이였고 자기옷등 사물도 사진처럼 조그만 사물칸에
올려놓았으며 맨위에 철모와 탄띠등 장구류를 보관 했는데 지금보면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에 내무반안에서 담배를 피웠기에 공기가 엉망이였고, 훈련을 다녀오면 흙과 먼지로
가득했지만 공기청정기는 꿈같은 이야기고 당시에 내무반은 숙식과 정신교육장, 회식장
노래자랑등 다목적 장소였는데 사진처럼 70년대는 운동화가 없었고 통일화뿐이 없었는데
위사진은 군복색갈이나 츄리닝과 운동화로 볼때 80년대 사진으로 생각합니다
매년 9월에 준비하는 월동준비
전방부대는 겨울을 대비하는 월동준비를 통상 9월초부터 월동장비 준비를 하는데 페치카 가동을 위해
전곡에 있는 철도수송대(?)에 가서 분탄을 수령해서 오고 잔류 부대원들은 진흙과 조합하여 연료를
조개탄 형식으로 페치카에 들어갈수 있더록 주먹만하게 만드는데 생각보다 힘들다, 그리고 폭설에 대비
하여 제설작업준비를 위하여 싸리나무를 베어서 빗자루를 준비하고 염부나 48베니다를 짤라서 넉가레를
만들었으며 중대막사의 모든창문은 비닐로 덧씨우기를 하고 김장등 모든 월동준비를 하고 10월 25일
부터는 채난기간이라고 하여 내무반에 페치카를 가열했으며 행정반에는 나무 난로를 때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장병들이 산에서 싸리리나무를 채취하여 싸리비를 서울 자매 고교에 수백자루를 기증했다
전방에서 초소근무자를 위하여 밥통을 새끼줄로 만든 보온밥통 모습
모든 창문에는 바람과 눈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설치하는데
웃기는 것은 부대에서 행정비가 없기에 각중대에서 알아서 돈을 염출한다는 것이다
싸리비를 만드는 모습인데 도시에 살던 병사는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애를 먹었다
눈을 옮길수 있도록 당카를 만드는 모습인데 당시의 군복 색갈은 민무뉘 퍼런 색갈이였다
휴전선 경계근무는 힘들고 고달프다
1976년도에 휴전선 철책근무를 했는데 여름에는 제초작업과 겨울에는 제설작업으로 힘들었으며 당시에
장병들은 생명수당으로 부대에세 단체로 라면을 구입해서 야간근무중에 간식으로 먹었는데 문제는 비가
오는날은 각초소마다 들고 다니면서 배달을 했으며 야간근무후에는 주간에 취침토록 했지만 주간에도
검열과 기타이유로 2시간정도만 자게하고 매일 군대 일상업무에 동원되였다고 생각하며 실탄과 수류탄과
크레모아를 가지고 근무를 섰는데 다행히 총기사고가 한번도 나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휴전선 근무는 74년 까지는 전방연대가 6개월마다 돌아가면서 교체를 했는데 75년부터는 1년단위로
부대교체를 했는데 장교들은 3개월에 한번씩 1박2일 외박이 있았으며 가정이 있는 하사관은 한달에
한번정도 였으며 병사들은 외출 외박은 없고 휴가도 엄격히 통제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임진강으로 북한 간첩들도 침투하였고 수색대가 매복시에는 만약을 대비해 4,2인치 박격포등으로
엄호하였고 포병 FO 장교가 사격지휘를 하기위해 상황실에 나왔으며 식사는 전방위주로 특식이라고
나왔지만 별반 차이가 없었으며 철책근무시에는 상급주대 감독관들이 거의 매일 순찰나왔다
겨울의 전방의 휴전선 야간사진인데 이사진은 2017년 겨울사진으로 육군 불러그에서 퍼왔는데 철책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으며 혹독한 겨울에 일반 초소에서 보온대책없이 야간근무를 섰다
언제나 추운 겨울이지만 특히나, 이른 새벽이나 야심한 밤에는 기온이 더욱 뚝 떨어지기에
병사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는데 여름에는 모기와의 전쟁이고 겨울에는 추위와 눈과의 전쟁이였다.
철책선은 민간인 통제구역인데 지금은 안보코스 관광지로 변했다고 한다
6,25 전쟁후에 비무장지대를 설명하는 사진이다
전방 비무장지대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전방의 GP와 GOP를 설명하는 사진이다
하지만 북측이 먼저 이 DMZ 내부에 감시초소를 설치해서 남한도 대응적 성격으로 GP를 DMZ 안쪽에
설치하게 되었다. 물론 DMZ의 의미상,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이러한 군용 시설물인 GP는 철거되어야
마땅하지만 상호 전진초소 개념으로 설치해놓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상태인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각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현재는 양측이 간격을 당겨서
구간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500M~1KM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GOP (GENERAL OUT POST: 일반전초)
GOP란 군사용어로 일반전초 란 말이다. 즉 전방 부대의 최전방이란 말인데 현재 한국군의 GOP개념은
전방 철책선이다. 남방한계선 철책근무가 GOP근무다 라고보면 된다. 부대가 상주하는 막사 및 초소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일정 구역을 담당하는 보병사단 예하 보병연대에서 1년~ 주기로 보병대대들을
순환식으로 투입시켜 GOP에 각 소대별로 주둔한다. 병사들이 각 소대별로 지정된 초소에 들어가서
철책경계근무를 실시하는 곳이다.
GP (GUARD POST :경계초소)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안에 위치한 고립된 형태의 요새화된 아군초소를 말합니다 즉 철책선 안의
경계초소로 가장 위험하고도 중요한 육군의 눈이다. 전방 연대의 수색중대 인원들이 3~4개월 단위로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투입된다. 이 기간동안 외부로 나올수 없기에 투입기간 중 휴가 등 외출이 불가능하다.
GOP 보다 더힘든 FEBA 부대의 각종 검열과 훈련
전방 철책부대에서 일년 근무후에 부대교체에 따라서 후방부대인 FEBA 부대에 오니 무슨 검열이 그리
많은지 중, 소대 ATT는 빼더라도 RCT (연대전술훈련)와 ATT(대대전술훈련) 과 사단 지휘검열과 전투
지휘태세 검열과 사단, 군단 기동훈련과 육본, 국방부 특명검열단등 일년에 7~8번은 검열을 받는데
죽을지경 이였고 또한 동절기에 한미 연합훈련인 TEAM SPRIT 훈련을 더하면 거의 초죽음의 연속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기에 특별대우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 이다
또한 북한군의 동향과 간첩사건으로 준비태세가 발동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데프콘 4 : Double Take
(더블 테이크) 일상생활에서 준비태세와, 데프콘 3 : Round House (라운드하우스)로 적이 도발징후가
있을때와 데프콘 2 : Fast Face (페스트 페이스)가 발령되면 진지에 투입되고 외출과 외박도 보류되며
데프콘 1 : Cocked Pistol (칵트 피스톨)이 발령되면 전쟁직전인데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나는 경우가
문제는 데프콘 2는 훈련과 실전상황으로 나누는데 자주 반복 되여 장교들도 비상시 긴급 복귀해야 한다
FEBA부대 : Forward Edge of Battle Area, 전투지역전단
휴전선에서 한발짝 물러난 전방지역으로, GOP 경계 사단들의 후방 연대와 예비사단, 동원사단이
주둔하는 곳이다, GP, GOP는 전면전이 터지면 각 초소나 토치카에서 시간을 벌고 FEBA에선
후방 대대들과 기동/화력장비들을 집결시킬 준비를 하게 되므로 사실상 FEBA에 주둔중인 부대가
전방사단의 주력부대가 된다
당시에는 어느 훈련이든지 김신조 여파로 행군이 주된훈련이였는데
나는 RCT 때는 하루에 40km 이상을 걸으면서 훈련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방부대 RCT 훈련중에 화생방 제독훈련모습으로 생각한다
사진은 83년도 팀스프리트 훈련에서 중화기중대에서 81mm 박격포를
운반하는 모습으로 설명했으며 철모에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는 표시다
길고도 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김장작업
9월 중순부터는 모든 부대에서 김장김치 작전이 펼처지는데 수송부에서는 배추와 무와 양념을 실어오고
장병들은 맨손으로 냇가에서 배추와 무를 씻는데 남자를이 하니 내가 봐도 대충하고서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고 김장을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빨간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해서 땅을 파서 휘발유통 큰것을
세척하여 비닐로 감싸서 그안에무와 배추를 같이 넣는 방법인데 당시에 먹을 것이 없을때라서 그런지
매일 나오는김장김치는 짜고 맛이 없을 것 같지만 모두들 맛있게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사진은 1990년대로 보이는데 70년대는 아주 열악한 상태에서 김장을 했다
밤새 악마의 똥가루라 불리는 눈을 치우는 철야 제설작업
전방은 춥기 때문에 눈이 많이 오는데 도로에 눈이 쌓이면 보급로가 차단되고 전쟁을 대비하여 실시하는
근무진지가 막히고 보급품수송이 중단되고 무엇보다도 군대의 목적은 전쟁에 대비하는 것인데 눈이 오면
교통과 통신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두절되기에 눈이 오면 모든것을 중단하고 제설작업을 하는데 문제는
통상 주간 보다는 야간에 눈이 많이 오기에 제설작업은 횃불을 들고 작업하는데 눈이 많이오면 2과 1/2
트럭에 밥을 추진하여 먹는것은 물론이지만 문제는 보온이 제대로 안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고역이였으며
야간에는 횃불로 불을 밝히면서 제설작업을 하는데 모든병사가 추위에 맞서서 정말로 힘든작전이였다
- 나는 개인적으로 군 생활중에 가장 힘들었던생활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제설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겨울에는 눈이 자주내리기에 병사들이 눈 을 오죽하면 악마의 똥가루 라고 하면서 저주스러워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날 부산출신 신병이 들어와서 하늘에서 눈이 뿌리고 쌓이는것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이를 바라본 고참병사가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처다보면서 오늘 제설작업을 해보면 알것이다 라고 비웃었는데
그날따라 오전부터 시작된 제설작업이 자정까지 하게 되였는데 소대원들은 그 신병에게 " 야 아직도 눈오는
것이 좋으냐 ? " 라고 물으니 부산 신병은 너무춥고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던 기억이난다,,,,
요즘은 제설작업이 커다란 송풍기와 염화칼슘으로 한다고 하며 과거처럼 도로의 제설작업도 지방자치시도
에서 특수차량으로 하기에 군인들은 도로작업을 거의 안한다고 들었으며 또한 몇년전에 국방장관은 앞으로
GOP에서 제초작업과 제설작업은 민간인에게 용역을 주겠다고 했는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데
당시에는 염화칼슘이란 용어조차 없었을때니 당시에 70년대에 군대생활을 했던 분들의 노고는 대단했다,
눈이오면 모든 것을 중단하고 제설작업을 하는데 사진을보면 플라스틱 눈삽이 있는 것으로 보아
90년대 이후로 생각하며 70년대는 싸리비와 베니다판으로 만든 넉가레가 전부였기에 고생이 많았다
진지와 일반도로를 연결하는 전방의 모든 도로를 군인들이 다했다
오죽하면 '군인들의 최대의 적은 눈이다'라는 말까지 생겨 났을까? 매일 밤 병사들은 내일 눈이
내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이 든다는 속설도 있다. 사회에서는 눈을 기다리고 반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전방 군대에서만큼은 어떤 병사에게도 불청객 1위가 바로 눈이다.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군대에서는 월동비품으로
제설작업에 필요한 넉가래, 눈삽, 모래,를 미리 마련해 둔다. 그만큼 겨울에 눈을 치우는 작업만큼
군대에서 자주, 그리고 많이 행해지는 작업이 없으며 전방에 눈은 50cm는 기본으로 많이왔다
정말 맛없었던 군대라면 이야기
당시에는 쌀이 부족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요일 중식은 반드시 라면으로 먹었는데 취사부에서는 통상
중대단위(130여명)로 라면을 끌리기에 처음에 먹는병사는 면이 꼬들하지만 중간이후에는 떡으로 변해서
아주 역겨웠지만 안먹을수가 없었는데 문제는 군대라면에 맛들여져서 그런지 지금도 라면은 퍼진 것만
먹기에 가족들과 갈등이 많은데 그래도 퍼진라면이 맛잇다, ㅋ 그후 식량자급이 가능하여 라면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70년대에 군대생활을 했던분들은 라면과의 추억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위 사진은 80년대말이후로 생각하며 70년대는 중대별 약 150여명분의 라면을 한솥에서
끓였으니 라면이 아니라 떡이였지만 배고푼시절이였기에 그것도 감지덕지 하며 먹었다
이것은 소대원(약 35명)의 라면을 끓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저정도의 라면은 그래도 먹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봉지에 끓는물을 넣어서 먹는 것으로 오늘날의 컵라면이다
1975년쯤에 1식 3찬이라는 제도가 나왔는데 당시에 음식맛은 말해서 무엇하리오 ㅠㅠㅠ
야외훈련중에 반합에 라면을 끓여먹던 맛은 모두에게 환상적인 음식이다
우리때는 밥도 매몰차게 주었지 사진처럼 자율급식이나 밥을 많이 먹을수
없엇으며 돌아서면 배고푼 시절이라고 말할수 있다
2000년도 병사의 급식사진이라고 하는데 할말이 없습니다
우유도 500ml이고 시리얼과 햄버거가 보기 좋습니다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야외 혹한기 훈련
74년1월에 전방 28사단에 전입하여 2 월달에 어유지리작전지역인 00산 일대에서 4박5일간 모든 부대원
들이 참여하는 야외혹한기훈련을 하는데 얼은땅을 1m정도 파고서 낙엽을 깔고 A형텐트를 치고 방한대책
없는 상태에서 취식과 훈련을 하는데 실제 전쟁에 대비하여 하는 훈련이라고 하는데 너무도 힘들었다
그당시에 훈련중 어떤경우에라도 불을 때면은 안되는데 그래도 병사들이 텐트안에서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야간에 텐트안에서 라면을 끓여서 소주를 한잔 하는맛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즐거움
이였는데 그때에는 병사들도 야간에는 너무 추었기에 암묵적으로 소주는 허용했던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유격이 힘드냐 혹한기가 힘드냐 말이 많을 정도로 혹한기 훈련 또한 유격 훈련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군대 힘든 훈련의 꽃에 속한다. 혹한기는 12월 ~ 2월 추운 겨울철 4박5일 야외에서 하는
훈련으로 훈련이 진행될 수록 발과 손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빈번히 동상 환자도 나타난다
특히나 텐트에서 취침 후 잠에서 깨어났을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혹한기 훈련중에 야외 교육훈련을 하는 모습이다
혹한기 훈련은 겨울에 4박 5일 기간으로 진행되는 훈련입니다. 12월부터 2월 사이에 실시하며 '생애 최저
체감 온도'를 경험할 수 있는 '야외 숙영' 훈련이 포함되어 있어 혹독하기로 아주 유명합니다. 겨울 작전
에서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전투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이와 같은
훈련을 매년 실시하는데 인간한계에 도전하기에 고통은 말로 표현할수 없다.
우리 군대시절인 70년대에는 침낭이란 말조차 없었고 그저 모포만 뒤집어쓰고 잠을 자야만 했다
겨울철의 내무반의 유일한 난로인 페치카( pechka)
70년대 군대에서는 페치카는 본래 방안의 벽에 돌이나 벽돌 따위를 붙여서 만든 러시아풍의 난로 를
뜻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군대막사는 40명이 한곳에서 자는 내무반의 유일한 보온대책 있는데 겨울에는
당번이 있어서 교육, 훈련,보초를 면제시켜주고 불이 안꺼지게 했는데 불이 꺼져서 동태가 되기도 하고
고참들의 간식인 반합라면을 끓여대기에 당번들은 고생이 아주 많았다
페치카의 뜻은 방안
이사진은 60년대 페치카라고 생각한는데
우리때는 이런 것은 보지 못햇다
옛날 군대에서는 이런 벽난로를 두고 난방을 하다보니 빼당(빼치카 당번)이라는
보직이 존재하였고 분탄을 개고 재를 치우는 일은 상병들이 주로 맡아왔는데 이들을 빼당
부사수(보조빼당)라 했으며 이 빼당 부사수 중 한명이 다음해 겨울...빼당 자리를 이어받는게
관례처럼 이어져왔다. 권력의 승계...즉... 빼당 부사수의 군기는 내무반 온도와 비례했다.
# 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군 내무반 현대화 이후...현재 페치카를 때는 내무반은 없다고 한다.
병사들의 겨울철 빨래와 일상생활
겨울철에 취사장에는 난로를 설치했고 세면장과 식기세척장에는 비닐을 하였으나 겨울추위를 피해
갈수는 없었으며 목욕도 자기가 알아서 세면장에서 대충했던 것으로 기억하며 세탁은 흐르는 시냇물에서
휴일날 알아서 세탁을 했는데 지금은 모든부대에 세탁기가 설치되였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면장 온수는 아예 없고 파이프에 새끼를 동파 방지용으로 감아놓았다.
여기서 빨래와 매일 먹었던 플라스틱 식판을 딱았다
1975년으로 기억하는데 과거 일제의 잔재인 폭력과 구타를 없애자는 취지로 얼차려라는 제도를 공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