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빨간마후라',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등 작가주의와 대중적 상업성의 경계를 넘나드며 주옥같은 한국영화의 계보를 이어왔던 고 신상옥 감독의 영결식이 15일 공군 군악대의 장엄한 장송곡 속에서 거행되었다. 고인의 부인이자 배우인 최은희 여사와 후배 영화인들은 군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현재는 공군의 군가로 불리우고 있는 '빨간 마후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감독은 2년전부터 지병으로 통원치료를 받아오다 보름전 건강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중 지난 11일 타계했다.
영화처럼 살다간 이 시대의 감독, 신상옥
△ 한국영화사의 '대부' 故신상옥 감독
고 신상옥 감독은 사극에서 로맨스, 심지어 1960년대에도 SF와 액션영화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드며 작가주의와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했던 감독으로 유명하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획기적 발상과 창작력은 그를 196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에 서게 했고 심지어 혹자는 당시 한국영화에 있어 ‘신상옥이 만든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구분지어 영화계보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신상옥 감독이 60년대 한국영화의 영화산업과 제작 등에 있어 산업 전반은 물론, 정치적 측면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 영화의 대부로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계의 ‘거목’으로 살다간 고 신상옥 감독은 1978년 북한공작원에 의해 납북, 북한에서 <신필름>의 제작자로 <불가사리>, <소금>등 북한 예술영화를 만들다 1986년에 부인인 최은희 여사와 탈출하는등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몸소 체험하며 영화같은 삶을 살다간 극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빨간 마후라'와 공군과의 추억
△ 신상옥 감독의 대표작 영화 '빨간 마후라'
고 신상옥 감독은 생전에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썼다. “영화 <빨간 마후라>를 제작하며 대한민국의 전투조종사들의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는 생전에 그의 말처럼, 언제나 변함없는 신감독의 스카프와 선글라스는 그의 대표작 <빨간 마후라> 속 공군과의 추억과 로망을 회상하는 오마쥬의 의미는 아닐까?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EBS에서 방영해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빨간 마후라>’의 기억이 새롭다. 공군에 몸담고 있기 때문인지 영화 <빨간 마후라>는 필자에게 그저 흘러간 옛 영화로 보여지지 않았다. 영화가 개봉된 1964년은 전쟁의 상흔이 교과서의 한 구절로 남겨진 시절이 아니다. 불과 한국전쟁이 종전된 후 10 여년후다.
그 시절 공군의 면모를 듬뿍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때문에 하나의 ‘실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개봉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42년전. 56년 공군역사에서 어찌 보면 영화 <빨간 마후라>는 대한민국 공군역사의 초창기 모습을 다양한 연출과 스토리로 담아낸 하나의 ‘역사실록’ 임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공군 → 빨간마후라 → 헌신과 희생의 공군’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으니 영화 <빨간 마후라>는 대한민국 공군에 있어 하나의 ‘기록’이자 성공적인 ‘브랜드’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고 신상옥 감독의 시대를 앞선 연출력과 기획이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F-86 제트기의 공중전 장면과, 미니어처를 활용한 교각 폭격 장면 등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군 장교로 등장했던 영화배우 신영균씨는 이 작품으로 아시아ㆍ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신감독은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더욱이 당시의 한국 문화산업에서는 기념비적인 성과로 볼 수 있는 영화수출의 쾌거도 이루어냈다.
뿐만 아니라 영화 <빨간 마후라>는 놀라운 수치 기록 또한 보유하고 있다. 당시 영화제작에는 통상 편당 3만 자 내외의 영화필름이 쓰여졌는데 신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10만자가 넘는 필름을 썼다고 한다.(영화제작중 필름이 모자라 암시장에서 구해왔다는 후문도 있다.) 또한 영화는 서울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자그마치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특별시의 인구가 250여 만명임을 감안하면 기록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 영화 <빨간 마후라>의 장면들. 자료사진은 흑백으로 남아있지만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총천연색 필름. 즉 컬러필름으로 제작된 영화다.
못다한 필생의 역작 <징기스칸>, 하늘에서 계속하시길 고 신상옥 감독은 지난 달까지도 북한인권영화 <꽃제비>(가제)의 탈고를 마치고 촬영준비를 하는 한편, 지난 25년간 다듬어 왔다는 필생의 역작 <징기스칸>을 준비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를 따라 영화감독이 된 장남 신정균(46)씨는 “입버릇처럼 ‘죽을 때까지 현역’이라 하셨던 분이다. 앞으로도 계속 작품활동을 하실 생각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유언도 없었다”라고 했다. 오롯이 남은 평생의 영화처럼 고 신감독의 머리 속에는 마지막까지도 작품구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 공군 군악대가 함께 한 고 신상옥 감독의 영결식. 장엄한 반주와 함께 참가자들은 <빨간 마후라>를 부르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6.70년대 서울운동장에서는 지금처럼 ‘오~필승 코리아’와 같은 응원곡이 없어 그 대신에 신 감독의 영화 제목이자 공군의 군가로 불리고 있는 <빨간 마후라>가 응원곡으로 불려졌다.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올림픽과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와 같은 큰 경기에서 공군을 위한 노래가 응원곡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공군에 몸을 담은 공군인으로서 가슴 뭉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빨간 마후라는 한국전쟁중 당시 최전방 기지인 강릉기지 제10전투비행전대 조종사들이 빨간 마후라를 처음 두르고 적 상공으로 출격하면서 다른 기지 조종사들에게 퍼지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강릉기지는 ‘빨간 마후라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로 빨간 마후라는 공군에 있어 뜨거운 정열과 불굴의 정신, 필승의 신념을 상징하는 공군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정열과 불굴의 정신이라… 거기에 필승의 신념까지.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 않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 붉은 악마들이 저마다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흘러간 대한민국의 응원곡 ‘빨간 마후라’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 응원곡이니 ‘하늘’을 ‘한국’으로 개사해서. 그러고 보니 어느덧 입에서 흥얼거리게 되는 빨간 마후라. 오늘은 군역사 자료실을 방문해 고 신상옥 감독의 역작 <빨간 마후라>를 다시 한번 감상해 보고 싶다. 기사제공 = 공군뉴스레터 / 공군본부 최세진 중위
첫댓글 초등학교때 우리고향 영산포 극장에 전교생 단체로 봤지!!그떄 일원짜리 풀빵에 생각난다 아`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