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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고등학교 때의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정말 반가웠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나 봐. 그래서 네게 전화했어.”라고 합니다.
사실 큰 병에 걸리면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가 죄책감까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뿐입니다.”
병에 걸린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식습관이 잘못되어서, 성당에 안 나가서 등의 이유를 말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 역시 자기 삶을 받아들일 때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곧바로 책임을 지우는 속 좁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 주시는 분이며,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 쫓아낸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진영에서 예언하는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에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면서 말리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은 철저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릴 정도로, 또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더 철저히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절대로 돼지랑 씨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둘 다 진흙탕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돼지는 그렇게 되는 걸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찰리 멍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건전한 비판과 깊은 혜안이 담긴 대안을
이야기하며 소통할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교회 <영적 쇄신>과 <영적 정화>의 시작입니다.
더욱더 피폐해져 가고 자정능력을 잃어가는
우리 교회를 바로 세우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회의 자정능력은
교회가 얼마나 겸손한가에 달려 있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가난한 이들을 품는 교회인지
가난한 이들을 배척하는 교회인지를 보면 됩니다.
그게 교회의 건강함을 식별하는 척도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11,25-29
그 무렵 25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