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스스로 푸르고 구름은 스스로 희다
이튿날 아침 함께 부여를 답사했던 박 선생이
지금 대전에 계시면 동학사에 가지 않겠느냐고 전화했다. 우리는 점심 때 만나기로 했다. 오전 시간이 남아 인근 서대전 시민공원에 갔다. 어차피
동행이 있으면 충분히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좀 걸어두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공원에는 많은 남녀들이 도보길 트랙을 돌고 있었다. 내 앞에
서너 명의 여자 '로마병정'들이 지나간다. 내가 한국에 와서 신기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여자들의 산책길 복장이다. 얼굴이 그슬리는 것을
막으려고 챙넓은 모자에 선그래스는 기본이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꼭 로마병정 같은 모습이다. 이런 패션은 한국에서 처음
본다. 나는 미국에서도 여러지방 해변가와 많은 산책길을 걸었는데 햇볕이 뜨겁기로 유명한 남가주나 텍사스에서도 인종을 막론하고 이렇게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서양에서는 여자들의 적당히 그슬린 얼굴이 건강미가 돋보여 돈들여 선텐한다.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건너오는 유해 미세먼지가
심해서 그렇다고 한다. 내가 여행할 때도 기상대에서 매일 미세먼지 예보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요즘은 남자들도 마스크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들의 경우 황사때문만은 아닌 것같다. 이래저래 한국에는 유별난 것이 많다.
나는 두시간 정도 걷고 박 선생을
만나 점심식사 후 동학사로 향했다. 동학사 입구는 먹자골목처럼 음식점으로 복잡하다. 동학사는 724년 신라 성덕왕 때 청량사로 창건된 후 고려
태조 때 동학사로 개명했다. 나는 동학사 역사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다. 즉 조선조에 들어와 고려 유신 길재(吉再)가 이곳에 단을 쌓고 태조
왕건을 비롯해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건국초기 전왕조에 대해 살벌했던 분위기로 볼 때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길재가 죽은 후에도 고려 유신 유방택이 정몽주, 이색, 길재 등 고려 충신들의 초혼제를 지냈다. 또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다음에는 생육신이라 불리는 김시습(金時習)이 몇몇 동지들과 사육신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쌓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듬 해 세조가 직접 동학사에 내려와 이를 확인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단종과 정순왕후, 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과 사육신 등
왕위 찬탈과정에서 자신이 죽인 280여 명단을 비단에 써주어 초혼제를 부탁하고 초혼각(招魂閣)을 짓게한 것이다. 세조는 토지와 사액 현판을
하사하고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는 그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찬탈한 후 악몽에 시달리다 불교에 심취했다는 속설을 뒷바침해
준다. 이후 동학사는 1728년 충청도의 신영천 난으로 불타 80년 간 폐허가 된다. 그후 조정에서는 중단된 제사를 재개하기 위해 10여 칸
사옥과 혼록봉장각을 짓게 했고 전답 등 거액 시주가 답지해 다시 면모를 갖춘다. 이후 1864년 만화스님이 낡은 건물을 헐고 40여 칸
건물과 초혼각를 신축했다. 이때 경허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하여 선풍(禪風)을 일으켜 동학사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동학사는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60년 대부터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금 동학사는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로 승가대힉과 대학원, 실상선원 등 교육기관으로
비구니를 양성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위한 불교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동학사에는 대웅전, 삼성각, 동림당, 조사전, 숙모전, 육화당, 염화실,
강설전, 범종각 건물과 관음암 등 6개 부속암자들이 있다. 그러나 절의 문화재는 그동안 많은 전란으로 소실돼 현재 삼성각과 삼층석탑만 충남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이날 비가 부슬부슬내려 우리는 절입구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 차를 카페에 세워두고 일주문을 지나 절에 들어섰다. 이번 조국 여행 중 나는 수 많은 명승사찰을
찾았는데 동학사 계곡만큼은 군계일학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동학사 계곡은 거대하지도 작지도 않다. 그러나 녹음이
우거진 숲길에 콸콸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는 피곤한 나그네 몸에 금방 활기가 돌아오게 했다. 또한 절에 오르는 2킬로 남짓한 숲길에는 온갖
꽃들이 조화를 이루며 진한 꽃내음을 풍겼다. 모르긴해도 여름 한낮 녹음방초 아래 개울물에 발 담그고 수박이라도 깨어 먹는다면 신선노름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나는 동학사에 가지 않겠느냐고 부추긴 박 선생께 감사했다. 그분 권유가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동학사로 오르는
길에는 관음암, 길상암, 문수암, 미타암, 귀명암, 상원암 등 부속 암자들이 줄지어 있는데 암자들의 규모가 웬만한 절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동학사는 여승들의 절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동학사에 있는 한시 한 수가 나의 눈을 잡아끈다. 내용이 간단하고 쉬워 얼른
메모했다. 마치 방랑여행을 하는 나를 두고 지은 시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심치 못하니 이를 어찌하랴.
靑山白雲 (푸른산 흰구름)
山自無心碧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 / 雲自無心白 (구름은 스스로 무심히 희구나) /
其中一上人 (그 가운데 한사람) / 亦是無心客 (역시 무심한 나그네로세)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평양을 수복하고 의령에서 왜병을 격파해 수행자의 신분으로 나라를 지켰던 사명대사의
무심시(無心詩)라고 한다. 나는 이 시를 대하면서 얼른 '청산도 절로절로'라는 옛시가 연상되었다. 조선 현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는 "청산도 절로절로 / 녹수도 절로절로 / 산 절로 수 절로 / 산수 간에 나도 절로 /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 늙기도
절로절로"이다. 김인후가 사명대사보다는 30년 앞선 세대이다. 한 분은 유교 성리학자이고 다른 한 분은 스님이다. 그런데도 두 분이 시에서
표현하는 사상은 요즘같으면 뒷사람이 표절했다고 할만큼 똑같다. 태고로부터 산은 저절로 푸르렀고 구름도 스스로 희고 검다. 무심이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해 사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들에 피는 백합도 하늘에 나는 새도 누가 먹이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간다. 나도 지난 세월 돌이키면 그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둥바둥 살아왔다. 그날그날 열심히 일하면서 내일 일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대로 맡겨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조국 한국도 수려한 산수를 그대로 두지 못하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망상으로 마구 파헤치고 부수는 것을
본다. 인간이 무슨 능력으로 자연을 정복하겠는가. 다만 잘 가꾸어 고맙게 이용하면 된다. 우리는 절에서 나와 산길따라 2킬로 쯤 더 걸었다.
정말 오래 머물고 싶은 절이다. 다만 스님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어 조금은 아쉬웠다.
(2014.7.19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