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2023년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곧 3년차로 넘어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재와 내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느낌이다. 모든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기습 미사일 공격→러시아의 대규모 보복 공습→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공격→유엔 안보리 설전 순으로 진행되는 '장기전'의 민낯 사이클이다.
러-우크라 양측의 숨은 의도는 분명하다. 반격 작전의 실패로 궁지로 몰린 우크라이나 측은 기습 공격에 의한 인상적인 성과로 대국민 사기 고양과 서방의 추가 군사 지원을 노리고, 러시아 측은 대규모 보복 공격으로 "기습 결과에 좋아하지 마라, 더 엄청난 보복과 위험이 당신을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29일, 30일 양일간의 러-우크라 공방전도 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있다. 양측이 폭격·공습을 주고 받기 전에,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26일 영국제 '스톰 섀도' 장거리 미사일을 동원해 러시아의 흑해 함대 기지를 타격했다. 정박중이던 러시아의 대형 상륙함 '노보체르카스크'호가 파손됐다.
러시아군은 이틀 뒤인 28일 밤~29일 새벽 우크라이나 전역에 순차적으로 드론-탄도미사일-공대지 미사일 공격을 가해 수도 키예프(키이우) 등 주요 대도시에서 39명이 숨지고 159명이 부상하는 최대 규모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러시아군이 드론 36대와 탄도및 공대지 미사일 122기로 타격을 가한 곳은 키예프와 하르코프(하르키우), 오데사, 드네프르, 자포로제(자포리자), 르보프(르비우) 등 주요 대도시가 모두 포함됐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나중에 "거의 120개의 도시와 마을이 피해를 받았고, 수백개의 민간 시설이 파괴됐다"며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규탄했다.
러시아의 대규모 우크라이나 폭격 상황도. 로켓(미사일) 122기중 87기 요격, 드론 36대중 27대 파괴이라는 붉은 글씨가 보이고, 아래 지도에는 지대공 탄도 미사일과 폭격기를 이용한 공대지 미사일 발사 정황이 담겨 있다/출처:스트라나.ua
이튿날(30일), 우크라이나군도 접경 도시인 러시아 벨고로드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현지에서는 14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108명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제타루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미하일 무라시코 장관 등 보건부와 비상사태부 주요 인력을 현장에 급파했고,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이 체코산 RM-70 '뱀파이어' 다연장로켓과 사용이 금지된 집속탄 형태의 '올하'(Ольха) 미사일 2발을 벨고로드 시내에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벨고로드에 대한 테러 공격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논의 대상이 될 것"이라며 "러시아는 안보리 회의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앞서 서방측은 29일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한 목소리로 러시아의 민간시설 공습을 규탄한 바 있다. 러시아의 안보리 소집 요구는 이에 대응하는 차원이라고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다연장 로켓 공격을 받은 벨고로드/영상 캡처
◇ 지난 겨울 공습과 다른 점은?
미콜라 올레슈추크 우크라이나 공군 사령관은 텔레그램을 통해 "이번 공습이 러시아가 작년 2월 침공한 이래 최대 규모"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공군 측에 따르면 앞선 최대 규모 공습은 러시아가 미사일 96발을 발사했던 2022년 11월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언론의 평가는 다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 "러시아의 최대 규모 공습은 2022년 10월 10일 이뤄졌다"며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200발 이상의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지적했다. 이 공습은 (우크라이나 군정보기관 측에 의한) 크림대교 폭파 '사보타주'가 발생한 지 불과 이틀 후에 단행됐다. 크렘린도 이를 공식적으로 크림대교에 대한 '보복 공격'이라고 했다.
이번 대규모 공습의 원인은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대형 상륙함 '노보체르카스크'호에 대한 우크라이나측의 장거리 미사일 공격이다. 우크라이나 공군과 정보기관(SBU)은 파손된 '노보체르카스크'호 사진과 관련 영상들을 즉각 공개하며,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러시아 흑해함대 상륙함 노보체르카스크호가 불타고있다/텔레그램 영상 캡처
이번 러시아 보복 공습이 지난해 10월과 다른 점은 타격 목표물이다. 지난해에는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반 시설이 주 타격 목표였으나, 이번에는 예상을 깨고 창고와 방산업체들이 주 타킷이었다고 스트라나.ua는 분석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자전 및 드론 전문가 세르게이 베스크레스트노프는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우리 방위산업체들을 추적하고 있다"며 "업체 직원들 중에도 러시아 정보원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군사 장비 완제품을 보관한 창고가 파괴돼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사 결과, 이 기업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한 노인이 10달러를 받고 (타격)해야 할 시점을 (러시아 측에) 알려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측 피해 상황/텔레그램 캡처
러시아의 공습은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에서 드론과 탄약, 군사장비를 생산하고, 장갑 차량 수리 능력을 확충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라고 스트라나.ua는 파악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측은 최근 군사 장비의 자체 생산 계획및 규모를 숨기지 않았다.
데니스 슈미갈 우크라이나 총리는 30일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자체 무기, 장비, 탄약, 드론 생산을 대폭 늘렸다"며 "이제 방위 산업 분야에는 500개 이상의 업체와 30만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29일) 우크라이나가 무기 생산을 위한 군사 공업 단지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잘루즈니 군총참모장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가 자체 군사 장비 생산량을 계속 늘려나갈 것이기 때문에 무기 부족 문제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이 가까운 시일 내에 추가 방공 시스템으로 주요 방위 산업 단지를 최대한 보호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치열한 안보리 설전
우크라이나는 29일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는 오늘 민간 기반시설은 물론, 주거용 건물도 공격했다고 러시아측을 비난했다. 피해 지역을 보면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러시아측의 반박은 한결같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군사 관련 시설들을 꼭 집어내 공격한다는 것.
이날 유엔 안보리에 참석한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군사 기반 시설만 공격했으며, 우크라이나 방공 시스템이 민간인 피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방의 군사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군사력은 이미 '붕괴 직전'에 와 있다"며 "우크라이나는 전선을 유지할 자원이 고갈되고, 곧 '최악의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버라 우드워드 주유엔 영국대사는 이를 “거짓말과 허위정보의 흐름”이라고 비판했다.
유엔안보리에서 발언하는 네벤자 러시아 대사/유엔 영상 캡처
나토(NATO) 가입국인 폴란드에도 러시아 미사일이 날아왔다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러시아 측은 지난해 11월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대공미사일이 국경을 넘어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러시아 본토 벨고로드를 타격당한 러시아는 즉각 안보리 긴급 소집을 요구하며 반격에 나섰다.
드미트리 폴랸스키 주유엔 러시아 부대사는 30일 안보리 회의에는 체코 대사의 참석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벨고로드 공격에는 체코산 뱀파이어 다연장 로켓이 사용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러시아 본토에 대한 포격 배후에는 "선동하는 영국이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유럽 국가(체코)는 벨고로드의 피해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