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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믿음의 깊은 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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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깊은 눈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 말씀이 설마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일까
의심도 하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송구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고,
의심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잘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너무도 교만하시기에 우리처럼 깔보신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처럼 교만하시고 우리처럼 깔보시는 분이시라면
그런 분을 우리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그런 분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실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동족이라고 더 사랑하고 이방인이라고 덜 사랑하는 분이
절대로 아니고 모든 족속을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그래서 동족 의식이나 민족주의는 아예 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신 것인지,
분명 숨겨진 좋은 의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숨겨진 의도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중에서도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려는 것일 겁니다.
이방인도 이런데 너희는 더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도전 말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스라엘 동족은 주님을 죽이는데 오히려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미리 아시고 도전하셨습니다.
당신이 동족 주의자인 거처럼 이방인인 자기를 무시하셔도
이 여인은 당신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사실 여인이 그것도 이방 여인이 유대 남자를 찾아온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여인에게 주님은 유대 남자가 아닙니다.
겉모습은 유대 남자지만 그것을 초월하시는 분,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하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신 분임을
믿음으로 이미 안 것이고 믿음의 깊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의 깊은 눈.
저는 이것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눈 속의 풀을 보고 얼음 밑의 고기를 보듯
겉모습과 겉 행동 속의 본질을 보는 깊은 눈
그것이 믿음의 눈이고,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의 앎입니다.
주님께서 이방 여인에게서처럼 우리를 거칠게 다루셔도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을 보는,
그런 믿음의 깊은 눈을 우리도 이방 여인처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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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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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배가 부른 사람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고,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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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겸손이 최고의 덕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덕의 어머니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참 멋진 말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지혜로운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과 권력 그리고 오래 사는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재물과 건강까지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아이 어머니라고 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정 그렇다면 아이를 둘로 갈라서 나누어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진짜 엄마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아이를 포기한 엄마에게 아기를 주었습니다. 진짜 엄마는 죽은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벌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왕자였을 때입니다. 다윗 왕은 대장장이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지에 어려움에 처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성공했을 때에는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새겨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대장장이는 무슨 말을 넣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대장자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장장이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글을 반지에 새겨서 다윗 왕에게 주었습니다. 다윗 왕은 크게 만족하며 반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왔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하였습니다. 솔로몬을 축복하며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과 멀어졌습니다. 교만함이 솔로몬의 지혜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꾀에 스스로 속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솔로몬도 교만 함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뽐내며 기도하는 바리사이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거만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많은 헌금을 했던 바리사이의 봉헌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작은 헌금을 했던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는 잔치에 초대 받으면 제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집주인이 와서 너희를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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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주님 앞에 와 청합니다. 그녀의 딸이 마귀의 손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느 때와 다르게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것도 강아지를 비유로 이야기하시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사람을 다른 미물에 비유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다고 말씀하시고 또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께서는 이방인인 여인의 청을 모질게 거절하셨을까요? 정말로 마귀의 손에서 풀어주지 않으시려고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시험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시험을 그 여인은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그 정면 돌파는 참으로 멋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여인의 대답에 감동하십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얼마나 멋진 겸손입니까.
사실 페니키아 여인은 어느 집의 여종이나 다른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임에도 유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출입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 사람들을 뚫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신분이 어느 정도 높았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겸손으로 은총과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도 페니키아 여인의 겸손으로 기도하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페니키아 여인의 겸손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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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의 시간은 다릅니다.
각 사람의 시간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한 시간 만에 이루는 것을
누군가는 하루가 걸립니다.
누군가에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누군가는 일주일 만에 해결합니다.
그러니 기다려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대가 빠른 사람들 쪽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보다 더 빠른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 역시 기다림을 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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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세기 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마다 순회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마단에 불이 난 것입니다. 곡마단의 광대는 분장을 지우지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광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광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제는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광대는 진짜 불이 났다면서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광대가 정말로 연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곡마단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불이 번져서 마을까지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워낙 거짓이 많아서인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에서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믿음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며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정확한 답을 위한다는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인간이 정확한 진리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욱더 주님 뜻에 집중하면서 그분 안에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만든 힘든 삶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딸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에 심한 모욕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랑의 딸에게서 마귀가 쫓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믿지 못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라면서 비판을 받던 이방인 여성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굳은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디게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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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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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정주 영성과 믿음의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
잠깨어 일어나 집무실을 문을 여니 은은한 봄향기가 온몸에 젖어들었습니다. 어제 제 75회 생일을 맞이하여 선물받은 안개꽃과 후리지아꽃이 잘 어울리는 꽃꽂이에서 나는 봄향기 였습니다. 즉시 꽃말을 찾아봤습니다.
안개꽃은 죽음,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 간절한 기쁨, 기대, 밝은 마음, 약속, 슬픔등 꽃말을 지니고 있고, 후리지아는 순백, 결백, 천진난만, 기대, 우정, 감사등의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꽃같은 영혼으로 살라는 깨우침을 주는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말들입니다. 26년전 동양난(東洋蘭)을 선물받고 써드린 “난(蘭)같은 당신”이란 답시도 생각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蘭)같은 당신입니다”-1998.3.31
어제 제 생일은 뜻하지 않게 참 행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수도원 봉사왔던 꽃같이 향기로운 네분 자매들은 축하케이크 선물에 축하노래에 이어 제 자작시(自作詩)들을 돌아가며 읽으니 얼마나 꽃처럼 향기로웠던 시간이었던지요! 대표 자매님의 감사의 메시지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 모두에게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끔씩 모여 신부님 시낭독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한복판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고고한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치과의사 형제님으로부터 향기 그윽한 꽃꽂이 택배 선물을 받았고 즉시 19년전의 “어느 치과 예찬”이란 시도 보내드렸습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풀냄새가 난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쉴 틈이 별로 없는 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이다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예술가이고 세속 안에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이다”-2005.3.
놀랍습니다. 19년이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서 정주하면서, 위 시처럼 한결같이 변질됨이 없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치과 서비스업에 전념하면서,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살아가는 제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입니다. 또 알게 된지 1년 채 못되지만 수도원과 저를 끔찍이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평생 간직하고픈 수필집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제, 등짐을 내려놓다.-전국 가톨릭 성지순례완주, 그 발걸음 에세이”
표지 제목에 이어 안에는 저에게 보낸 글이었습니다.
“고마우신 분, 하늘만큼 존경하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순례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한 웃음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드리며, 2024.1.20., 저자 박온화(朴溫花) 루시아-
뒷 표지의 이해인 수녀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단아한 추천글도 일부 나눕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너무나 성실하고 단단하게
인내로운 신앙인의 본을 보여주는
박온화 작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글을 통해
우리에게도 영적갈망이 은은하고 새롭게 피어오르는
참 기쁨을 맛볼수 있으니 거듭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위해 목숨바친 순교성인들을
더 깊이 더 고맙게 기억하면서
기도의 하얀 꽃 한송이 바치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 계시듯 성인들도 언제 어디서나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윗분들은 물론이고 제 주변에는 하늘의 별처럼, 땅의 꽃처럼,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정주영성과 믿음을 살아가는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성인같은 분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60대 초반에 병사한 약 55년전 제 고향 충남 예산의 옆동네 홍성 출신의 교대시절 절친이었던 분의 교대부국 동산에 세워진 돌판 묘비명 “한결같이”란 친필 글자도 문득 생각납니다. “한결같이” 절친의 삶의 모토였던 듯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온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이 내내 회한(悔恨)으로 남아있습니다.
강론 서두가 길었습니다. 얼마전 “1.책 더 많이 보고 싶어서, 2.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 했는데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3.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습니다. 어느 고승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 유언을 남겼다는데, 저는 하루하루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고, 공부할 것 가득 안고 강론을 씁니다. 다산 어록의 오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탐내기보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재물보다 풍성한 만족을 준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정주영성과 믿음을,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참사람의 성인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한결같은 믿음과 독서의 솔로몬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다윗과 솔로몬에게 적용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솔로몬은 한결같지 못했고 날로 변질 부패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의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다음 솔로몬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 못하였다.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르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 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솔로몬은 700명 아내와 300명의 첩을 두었다 하니, 그 변질 부패인생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면 얼마나 부패 변질되고 망가지고 무너질 수 있는 지 보여줍니다. 이래서 광야인생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하느님을 떠나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잘못 미치면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종교도 국적도 남녀노소도 보지 않고 믿음만 보십니다. 주님은 한결같이 당신 중심의 정주영성과 믿음에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챙기십니다. 바로 그 좋은 예가 복음의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과 인내의 정주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그녀의 믿음에 감동한 주님의 치유의 응답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참으로 주님의 불퇴전(不退轉)의 여전사(女戰士),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한 믿음, 인내의 믿음, 탄력좋은 백절불굴의 믿음,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 목숨을 건 믿음입니다. 솔로몬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하는 탄력좋은 믿음으로,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으로 살 때 영적승리의 삶이요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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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참자유이고 싶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내 밖에서
나 아닌 것이
나를
더럽힐 수 없으니
나는 자유다
내 안에서
나마저
나를
더럽힐 수 없어야
나는 참자유다
나는
간절히
자유 너머
참자유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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