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전정하다
박철영
그대 이룬 생의 빌미가 된 꽃
초입부터 단숨에 잘라내는 무지는
가위의 날카로운 칼날 탓은 아니다
살기 위해 그래야만 된다고
다짐했던 약속마저몇 번의 웃자란 가지처럼
꽃을 피운 계절이 죄가 되었다
긴 겨울 시린 눈꽃 닮고 싶던 꿈을
매몰차게 외면해야 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가 죄다
해동하기 시작한 나른한 봄처럼
기지개를 펴고 나온 농부가
환장하도록 만개한 꽃을
잘라 내야 하는 것은 숙명
상처 낸 자리가 클수록 씨알 굵은 매실이 달리듯
오로지 세상은 화사한 꽃보다
먹고살아야 하는 절박함이 클 뿐이다
꽃피는 내내 그늘처럼 찾아오는
한 해의 생을 가늠해 보아도
농부의 허기는 잘라낼 수 없다
시집『꽃을 전정하다』2019. 시산맥제23차 감성기획시선
몸으로 쓰는 글
박철영
몸으로 쓰는 글은 흙에다 써야 한다
흙에 쓰는 글은 진실이란 말이 필요 없다
내 아버지 어머니도 흙에다 글을 썼다
흙에다 글을 쓸 때는 필기구가 필요 없다
흘린 땀이 필기구다
가슴 아픈 글을 쓸 필요도 없다
가슴 아프게 하면 흙이 슬플 것 같아
말은 흙에다 하지 않고 하늘을 보며 했다
나는 지금도 흙에다 글을 쓴다
흙에다 쓴 글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지우개가 필요 없는 글을 읽어 본다
내가 쓴 글이 잘못 쓴 것은 아닌가
살피고 또 살피며 나를 들여다본다
잘못 쓴 글을 볼 땐
흙에다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일은 앞으로 적지 않겠다고
흙은 지나온 과거를 탓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시집『꽃을 전정하다』2019. 시산맥제23차 감성기획시선
박철영 시인
1961년 전북 남원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2002년「현대시문학」 등단
2016년「인간과 문학」평론 등단
시집『비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월선리의 달』『꽃을 전정하다』
산문집『식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