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6
9월27일[성 빈체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연중 제2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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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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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ixMasXovu8?si=iHBQyD13scXXSq6R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장호 베네딕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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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뜻밖의 선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노숙인들이나 이방인들 난민들 만나실 때 마다 단골로 쓰시는 멘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 역시 가난한 이민자 가족 출신입니다."
사실 교황님의 부모님과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절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떠났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교황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에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민족 역사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난 전쟁 직후 국내에서는 워낙 먹고 살길이 막막해 반강제적으로 머나먼 타국으로 이주를 떠나곤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더 비참했습니다. 바빌론의 침공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성전과 도시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습니다. 지도층 인사들과 똑똑한 청년들은 원치도 않은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선물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대제국 바빌로니아가 또 다른 강대국 페르시아에게 패한 것입니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칙령을 반포하여 유다인들을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키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은총이요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했는데,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이 하루하루 오욕과 좌절 속에 살았는데, 하느님께서는 뜻밖에도 페르시아 왕을 통해 귀향이라는 선물을 손에 쥐어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분께서는 언젠가 뜻밖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게 웬 횡재냐?’며 큰 감동과 기쁨 속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상황은 또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국의 모습은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 있었습니다. 그 휘황찬란하던 성전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산산조각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 앞장섰고 큰 기여를 했던 에즈라의 태도와 기도는 참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참회의 표시로 단식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입고 다니는 옷은 낡고 찢어졌는데, 이것 역시 진정한 참회의 표시였습니다. 거기다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펼쳐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을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혹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입니다. 남의 탓을 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에즈라처럼 겸손하고 절실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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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LNJM8F9W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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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사장님은 단골손님의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당연히 은총과 진리를 주시며 파견하십니다. 은총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이고 진리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이때 가난을 강조하십니다. 가난이란 은총과 진리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육체적 욕망, 그리고 교만이 끼어들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느 집이든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집에만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또 받아들이는 이들이 없다면 먼지를 털어버리고 가차 없이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음식점의 사장님이 ‘단골손님’을 잡으려고 노력하되 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집착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떤 장사든 충성심 높은 단골손님을 얼마나 잡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달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위대한 쇼맨’(2017)은 특이한 사람들을 모아서 서커스단을 만들었던 P.T. 바넘의 이야기를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넘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고객의 집으로 가서 고객의 딸인 채리티를 만납니다. 바넘은 자신의 딸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채리티의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으면서도 채리티와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 바넘은 사회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채리티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습니다.
바넘은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사무직을 잃고 은행을 속여 대출받아 박물관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박물관에 오지 않습니다. 바넘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수염이 나는 여자, 어린이처럼 보이는 어른 난장이, 다른 사람의 두 배가 되는 키가 큰 사람 등을 섭외해 기상천외한 공연을 시작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사회에서 숨어 살던 이들도 세상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바넘을 돕습니다.
그런데 바넘은 가난한 첫 마음을 잃습니다. 단골손님들은 여전히 중하류 층이었고 좋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여전히 자신은 돈 많은 하류층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상류층이 좋아할 만한 가수를 만납니다. 영국 여왕에게 초대받았다가 유럽의 유명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를 섭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미국 투어를 시작합니다. 상류층들은 환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중에 그는 단골들을 잃게 되고 심지어 극장에 불이 납니다. 이용당하고 버려졌다고 느끼는 단원들은 화가 많이 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니 린드와 바넘은 스캔들이 나고 그 소식은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재정적 파탄과 가족 및 공연자들로부터의 소외에 직면한 바넘은 그제야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한때 당연하게 여겼던 서커스 가족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고, 그들의 승인과 존경이 상류사회의 공허한 찬사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천막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 단골을 모읍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사장은 단골손님을 잃습니다. 도움도 마다합니다. 백종원 대표가 예산에 국밥 거리 조성을 도와줄 때 지나치게 위생 관념에 초점을 맞춰 상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위생관리가 첫째이고 그다음은 진심과 솔직함입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오랜 장사 습관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 대표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그곳에서 떼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단골이 아닌 한 번 와서 음식을 먹고 가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어제 쓰던 음식을 오늘 내오고 국밥의 양을 늘리기 위해 물을 타기도 하였습니다. 장사꾼이 단골손님에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산시장을 살렸습니다. 예산이 고향이기 때문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자 백 대표는 가게를 일제히 닫게 합니다. 한 달 동안 고쳐야 할 것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당장 이익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개점하니 더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그러자 건물주들과 상인들의 마음이 해이해집니다.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높이고 상인들은 가격을 인상하며 늦게 문을 열기도 하며 불친절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또 단기 이익에 취해버린 것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지금 반짝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라고. 지금 사람이 많이 올 때 단골을 잡아놓지 않으면 결국 망하고 만다고. 자신이 다른 곳에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될 때 분명 예산시장은 다시 내려앉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제나 수도자, 선교사들이 장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당이라는 가게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불러 모으는 방법도 고안해야 하고 사람들이 많이 올 때 그들을 단골손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제의 인기로 사람들을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 사제가 떠나면 원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누가 오던 그 가게는 단골손님으로 유지되게 해야 합니다. 단골손님을 만들려고 하는데 강론 때 신자들을 야단치는 사장이 어디 있겠으며 고해소에서 소리 지르는 사장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신자들이 올 것이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쩌면 단골손님과 계속 가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파는 세일즈맨일 뿐입니다.
물론 안 사겠다면 그 사람은 억지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단골손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코로나와 같은 위기를 다시 맞아도 크게 흔들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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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야훼이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 그때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또 묻습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숫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야훼이레’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두 ‘야훼이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파랗게 빛나는 지구라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80세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에게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광야를 건너는 ‘이정표’입니다. 판관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판관들은 이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었습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불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야훼이레’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던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서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물자와 사람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페르시아의 왕들은 ‘야훼이레’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야훼이레는 나자렛에 살던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우리들 또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야훼이레’입니다. 돌아보면 제게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가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가 32년 동안 사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야훼이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함께 지내는 동료사제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펜데믹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교우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었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직원들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홍보를 다닐 수 있었고, 신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야훼이레’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의 눈으로 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야훼이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야훼이레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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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1-6: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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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1-6)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선교활동 지침’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이 지켜야 할 ‘신앙생활 지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으로 신앙과 복음을 증언하는 선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여벌옷 등은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으니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아니면 가져가면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없어도 괜찮은 것’과 ‘있으면 안 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가지고 갈 필요가 없는 것과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것도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명령’이기 때문에,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다.’, 또는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것들이니 가지고 가지 마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가져가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뜻인가?” 예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악한 일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와 보호를 믿지 못하고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악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런 것들은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시니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다.”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시니 가져가면 안 된다.”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만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것들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고, 주시는 것들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혹시라도, “뭐가 이렇게 까다롭고 엄격하냐?”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이란, 또 신앙생활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섬기는 자리에는 아버지 하느님만 계셔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오직 그것만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뒤의 12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이 말씀에서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자들이 하는 일이다.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마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라.”가 “노동하지 마라.”는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지시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물론 ‘복음 선포 활동’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노동’은 아닌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선교활동이 생계를 위한 노동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위한 일’이고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넓은 뜻으로, 선교사를 신앙인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가르침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보살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도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여기서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을 ‘복음을 전하면서도’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걱정스러운 소식’이나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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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이 전하는 열두 제자 파견 이야기는, 그에 앞선 이야기들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8,1-18 참조)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셔서는 어떤 이에게 들린 마귀 떼를 쫓아내셨고(8,26-39 참조),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오셔서는 하혈하는 부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8,40-56 참조) 하느님 나라 선포와 구마, 그리고 치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세 가지 활동은 오늘 복음에서 고스란히 열두 제자가 펼치게 될 활동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이 파견되는 목적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처럼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일을 떠넘기듯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파견하시기 전에 그에 맞는 능력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일절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그 무엇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 여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심지어 입고 먹고 자는 의식주마저도,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여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이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머물게 된 곳보다 더 좋고 쾌적한 장소를 찾아다니지 말아야 함은 그 또한 하느님께서 마련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접과 환대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하라고 파견된 제자들은, 그분께서 일하신 방식대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교 여정을 온전히 아버지께 의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도 선교에 필요한 능력은 물론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제반 사항 모두를 하느님께 받는다는 마음으로, 그분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투신하여 살 자신이 없는 나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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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짐이 많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등등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갔다가 꺼내지도 않고 도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우리의 여행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 것에 애착을 보이면 이룰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짐일 뿐입니다. 결코 제자들이 잘나서 예수님께 뽑혔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은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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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있어서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왕권,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일과 육적인 문제해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하시면서 한눈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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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이야 식복사 자매님이 계셔서 요리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식사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 요리를 했을 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요리책을 따라 했을 뿐인데도 맛이 훌륭했고, 또 남이 해주는 밥만 먹다가 제가 하는 밥도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식사 후의 설거지가 귀찮기는 했지만, 이 역시 깔끔하게 정리 정돈을 한 뒤에는 기분이 좋아져서 괜찮았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요리에 취미를 붙이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요리할 때 쓰라면서 미국제 채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새로운 도구를 얼른 사용해보고 싶은 마음에 감자볶음을 만들기 위해 감자를 이 채칼로 썰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사고가 생겼습니다. 저의 실수로 감자를 잡고 있던 엄지손가락이 이 채칼에 썰린 것입니다. 곧바로 헝겊으로 손을 움켜잡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이때까지 부엌은 재미와 만족감을 주는 곳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곳도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우리는 이 세상이 자기에게 좋은 것, 편안한 것만을 주는 곳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좋은 것, 편안한 것이 자기에게 어려움과 힘듦을 줄 수 있는 것도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무조건 기쁨과 행복만 주어질까요?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좀 더 현명해지면서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다음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아니, 전교 여행을 하면서 꼭 필요해 보이는 것들은 전혀 주시지 않습니다. 그 부족한 것을 주시지 않음을 당신이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느님 나라의 선포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주시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은 모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철저한 가난 속에서 유일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평화’ 뿐이었습니다.
이 선포는 지금을 사는 우리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세상의 지위도 아니고, 나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평화를 들고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좋고 편안한 것만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딱 한 가지, 평화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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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떠날 채비>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길 떠날 채비>
어제 그러하듯
오늘도
오늘 그러하듯
내일도
내 주님께서
보내시는 길을
떠날 채비를 합니다
내 주님께서
몸소 챙겨주신
살리는 힘과 권한을
정성스레 품은
밝은 웃음과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손길과
담대한 발걸음으로
길에서 만나는
고운 벗님들에게
내 주님의
믿음 희망 사랑
아낌없이 나누리라
가벼이 낮춘
몸과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설렘 가득한 길을
떠날 채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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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전인적이고 통합적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공관복음 공통으로 주님께서는 중간에 열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마귀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이제 가르침 받은 대로 그리고 본대로 가서 하라고 당신 없이 파견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차피 주님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예행연습 삼아 또는 선교 체험 삼아 파견하시는 것인데 오늘 파견에서 주님의 선교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입니다.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를 나눠서 볼 수도 있지만 같이 보는 것이 주님의 통합적인 치유와 선교 방식을 이해하는 데 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선교 방식은 전인적이고 통합적입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만 하고 질병 치유에는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한때 저는 성령 쇄신 운동하는 분들이 그 기도회에서 치유행위를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보다 치유에 더 마음이 가 있고 그것을 자랑까지 한다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문제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통합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고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치유의 능력이 없기에 제 주변의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만 해드리고 있는데 치유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게도 주셨음에 틀림이 없는 그 능력을 제 믿음이 부족하여 받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 이렇게 얘기하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질병 치유도 통합적이고 전인적입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령 퇴치는 병으로 치면 마귀 병의 치유입니다. 요즘 제게는 질병과 관련하여 확신이 있고 이것을 몇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질병에는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이 있는데 이 영혼의 병이 가장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병이고,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이 병부터 치유해야 한다고.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병 치유에만 관심이 있고, 요즘은 그래도 마음의 병이나 정신의 병까지 관심을 두는 분들이 있는데 자신과 관련해서든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든 영적인 상태까지 관심을 둬야 하는데, 악령 퇴치의 권한과 힘을 오늘 주님께서 주신 것은 이런 뜻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악령 퇴치를 할 수 없더라도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영혼 상태까지 살피며 그를 위해 전인적이고 통합적으로 사랑하고 기도해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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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신자의 삶>
- 회개의 삶, 무소유의 삶, 복음선포의 삶 -
"주여, 당신 자비가 하늘까지 이르고,
진실하심이 구름까지 닿나이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6;6.10)
추석 연휴를 앞두고 어제는 매월 4째주 화요일 예수성심자매회 월례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후 미사에는 모두 한부부와 함께 9명이 참석했습니다. 2005년 수도원이 큰 위기를 겪으며 수도원을 아꼈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모임으로 올 해 18년째이며 어제 참석한 분들은 대부분 10년을 훨씬 넘었습니다. 시작됐을 때는 저뿐만 아니라 젊었던 얼굴인데 세월의 흐름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무엇보다 자매님들의 한결같은 충실하고 성실한 삶에 감동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노화의 여정”이 아닌 “성화의 여정”을,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닌 여물어 가는 여정을 살고 계신 참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오후 3-4시, 계절로 하면 가을 인생에 걸친 대부분의 자매들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이어지는 대림시기, 이제 남은 것은 충실한 기도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강론 때도 참 많이 강조하는 기도생활입니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국내 정치 상황에, 나라 걱정에 기도로 시작되는 하루입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 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요셉 수도원 만세!”
역시 종전처럼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 주모경후 만세육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루 생활중에도 답답할 때면 화살기도를 바치듯 만세육창을 합니다. 어제 모임에 참석했던 자매님들께도 참으로 강조했던 늘 깨어 있는 삶,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마지막 6번째는 “우리가정 만세!”넣어 기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 둘을 꼽으라면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이요,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의 일에 전념할 때의 순수한 모습일 것입니다. 아마 이의 전형적 모범이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 기념일이나 축일 때 마다 꼭 살피는 생몰연대를 통해 새삼스런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성인들 역시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며 이보다 분명한 사실은 없습니다.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가난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공부후 20세 젊은 나이로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 이후 성인의 생애는 거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집중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달은 성인은 고통받는 이들의 구호사업에도 헌신하였으며, 1633년 애덕부인회를 설립하였으며 병자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돌볼 목적으로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여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악을 초대 원장으로 임명합니다. 바로 이 수도회가 오늘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입니다.
빈센트 성인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라고 가르쳤고, 이것이 존경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이유이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갈 때는 겸손과 소박과 사랑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빈센트 성인의 삶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봅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1660년 선종했으니 79세 장수한 편입니다.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 시성되었고, 1885년 레오13세 교황은 그를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빈첸시오 드 폴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가 서로 연대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니 성인은 떠났어도 영원히 살아 있어 그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심의 성인이요 누구보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구제에 온힘을 다했던 참 멋지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람, 성인이었습니다. 누구보다 공직을 맡은 지도자들의 기도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한 작금의 시절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고 회개하는 지도자는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멋지고 아름다운 신자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첫째, 회개의 삶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즈라의 기도입니다. 에즈라의 회개의 기도가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얼마나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한, 아름답고 멋진 에즈라의 삶인지요!
진정성 가득한 회개의 기도를 통해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긴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기도합니다. 바로 유다인들의 전통적 기도자세입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그러나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정녕 저희는 주님의 종입니다.”
구구절절, 회개와 감사가 가득한 기도입니다. 이런 회개의 감사의 기도가 참으로 사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듭니다.
둘째, 무소유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가 그 모범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고, 하느님 나라 선포와 병자들을 고쳐 주라며 보내시며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물론 회개를 통해 참으로 그 영혼 겸손하고 가난해졌을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에 머물러라.”
철저히 무소유의존재냐 소유냐, 참으로 소유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리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비웠기에 하느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셋째,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회개의 삶도, 무소유의 삶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회개의 삶도 무소유의 삶도 복음 선포를 목적으로 합니다. 참으로 보람있고 행복한 삶이, 텅빈 존재의 충만한 삶이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마지막 복음 말씀이 복음 선포의 삶을 요약합니다. 복음 선포와 저절로 뒤따르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꼭 세상에 파견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삶을 살면 됩니다. 우리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환대를 통한 복음 선포의 삶을 삽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신자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부단한 회개의 삶, 탐욕에서 자유로운 무소유의 삶, 복음 선포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환히 드러내는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다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가 이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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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9,3)
<(1}사도들의 파견!>
오늘 복음(루카 9,1-6)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그들에게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다음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견되어지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의 생각으로도 과연 이 말씀이 맞는가?
길을 떠날 때나 여행을 떠날 때, 이것 저것 세밀하게 챙기고 준비하는 우리들이지 않은가?
복음 선포를 위해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육신을 위한 어떤 준비보다, 내적인 준비가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이신 하느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만 의존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은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주보 축일을 맞이한 성 빈첸시오 드 폴 수도회 가족과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러 자선 단체들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일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임마누엘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떠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는 말씀 안에 머물면, 빈첸시오 성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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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복음 9장 3절)
<(2}제자들의 파견!>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그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두 가지 파견목적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부여된 두 가지 일은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니 내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복음 9장 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면서 전도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는 '무소유의 삶', 이에 대한 역설인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나의 성령의 충만함이 너에게로 전해질 때 너의 아픔까지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에즈라기의 말씀'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이라고 불리는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해방)'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즈라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깊이 고백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라 예언서 9장 6절)
우리도 에즈라처럼 하느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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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LWNUEzwG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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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 6)
어디에서나
복음은
복음으로
아름답다.
복음은 뜨겁고
사랑은 아프다.
사랑의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상처에서
복음이
선포된다.
아픔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된다.
아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상처로 삶을
치유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를
받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성 비오 사제의
오상은 상처를
품는 사랑이었다.
상처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주님과 함께
피 흘리며
상처를 품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상처가 있고
치유가 있다.
복음은
주님께 우리의
상처를 보여
드리는 것이다.
복음은
상처에
감사하는
것이다.
상처로 복음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상처였다.
살아있기에
상처와 치유가
있다.
상처가
있는 곳에
복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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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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