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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15: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15:3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15:36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였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15:37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15:38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15: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15:40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15:41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15:42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왔다.
15:43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15:44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15:45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주었다.
15:46 요셉은 삼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15: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 주해
1. 산헤드린의 사형선고 후 조롱과 폭행을 당하신 예수님은(14:65) 빌라도의 십자가형 선고 후에도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다.
1) 로마 군병들은 이미 최대치의 몸의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가한 후에 가장 끔찍한 십자가형에 처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끌고 나간다.
2) 채찍질로 인하여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과 같이 가게 한다.
2.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기 위한 고난의 길임을 미리 말씀하셨다(막 10:33-34, 막 10:45).
1)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지옥의 형벌만이 아니라,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의 나음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다(사 53:4-5).
2) 예수님을 향한 최후의 조롱, 최후의 유혹은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계속된다.
3) 사단은 지나가는 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 충동질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를 구원하라”며 조롱하고 미혹한다.
4)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끝까지 십자가에 달리셔서 심판의 잔을 다 마신다.
3. 예수님은 오전 9시(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낮 12시(제 육시)부터 오후 3시(제 구시)까지 줄곧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1) 이 어둠은 십자가로 세상에 대한 심판이 집행됨을 말하며 아모스의 예언을 성취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암 8:9).
2) 죄를 담당하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 태양이 가장 밝고 뜨거워야 할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한다.
- 예수님은 빛이시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빛의 대표인 태양이 빛을 잃었다.
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을 하셨는데,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부르짖음만이 기록되어 있다.
막 15: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1) 이는 시편 22:1 “하나님께 버림받는 의인”의 탄원을 아람어로 외친 말씀이다.
2) 창세전부터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그의 품속에 계시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있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5. 반면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실존으로 태어나 살아간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처지가 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단 한 번 아버지와 분리된다.
2) 히브리서는 그가 아버지와 분리됨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히 2:9).
6. 영원에서의 예수님은 물론이고, 성육신, 소년가장 시절, 공생애 시절, 채찍질과 십자가의 고통, 가혹한 조롱과 멸시에도 예수님은 아버지 품속에서 잠잠하셨다.
1)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사 53:7).
2) 영원부터 영원까지 예수님은 단 두 번, 놀라시며 탄식하셨다.
3)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잔을 마시기로 하신 겟세마네와 그 잔을 마신 후 아버지와의 분리의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이다.
7. “어찌하여 버리셨냐”라는 부르짖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1) 죄와 분리가 일상인 사람은 완전한 사랑, 연합, 하나됨으로 거하시는 삼위하나님의 분리를 이해할 수 없다.
2) 죄와 미움, 분리, 갈등이 일상인 사람도 친밀했던 관계가 분리되면 마음이 아프다.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수년간 힘들어하기도 하고 병에 걸리기도 한다.
3) 하물며 죄를 모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아버지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분리되고 심판을 받는 고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4) 그 고통의 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조차 감당할 수 없어 극심한 공포와 불안과 괴로움을 주었고, 잠잠하던 예수님으로 하여금 크게 소리 지를 수밖에 없게 하였다.
8.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의 고통을 통하여 또 하나의 고통을 예측할 수 있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주기 위하여 창조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통이다.
2)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되자 두려워하여 숨었다.
- 아담과 하와 편에서도 하나님과의 분리가 고통과 정죄와 수치심을 유발한 것이다.
3) 그런데 분리의 고통은 사랑하는 만큼, 더 사랑하는 자가 더 크게 느낀다.
- 아담과 하와를 깊이 사랑하신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어 숨어버린 그들로 인하여 얼마나 아파하시며 고통스러우셨을까?
9.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와 분리되는 탕자의 고통과 아버지의 고통의 크기는 다르다.
1) 더 사랑하는 자가 더 아파하기 때문에 탕자의 고통과 아버지의 고통은 비교할 수 없다.
2) 이런 분리의 고통은 아담의 타락 때만이 아니다.
3)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하나님을 떠날 때, 성도도 영적인, 정신적인 고통이 있다.
- 그러나 우리와 연합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고통은 더욱 크다.
4) 사랑의 하나님이 유일하게 감당하지 못하여 하는 것, 가장 아파하는 것은 분리의 고통일 것이다.
10. 예수님이 숨지기 전에 큰 소리를 지르신 것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이다(눅 23:46).
1) 예수님은 아버지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버지께 나아가는 ‘파레시아’의 본이 되신다(히 7:25).
2)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다.
-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난 사건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절정이며 믿는 자를 하늘 성소로 들어가게 하는 새로운 산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11.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부장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1)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며 조롱한 줄 알았는데,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믿는 자들이 생기고, 믿는 자들이 도리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
2) 백부장은 로마 군병 중에 속해 있었다. 그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에 이른다.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1:1)”로 시작된 마가복음은 그의 죽음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백부장을 통해 마무리된다.
12. 백부장의 신앙고백에 이어서, 여전히 예수님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믿음이 증거된다.
1)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 예루살렘까지 따라온 여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그 죽음의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지켜보고 있다.
2) 그녀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지만 한 번도 섬김을 받으려 하거나, ‘누가 크냐’고 다투지 않았다. 죽음의 자리까지 따르며 장례와 부활의 증인들이 된다.
13.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지켜 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
1) 그는 명망 있는 공회원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지만 예수님이 부당한 재판과 멸시를 당하는 동안 예수님을 변호하며 나서지 못하였다.
2) 베드로조차 3번이나 부인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본 요셉,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증거를 본 요셉은 담대히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 담대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한다.
4)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그래서 성경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갔다”고 한다.
14. 십자가형은 며칠씩 십자가에 달려서 천천히 고통을 당하면서 죽기 때문에, 빌라도는 벌써 죽었는가를 이상히 여긴다.
1)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요셉에게 그의 시체를 내어준다.
2) 요셉은 가는 베를 사 와서 시체를 내려 그것으로 감쌌다.
3) 당시 장례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행하며, 죽은 자를 씻고 가는 베로 싼다. 기후 탓으로 죽은 날 매장하며, 바위들과 굴들이 매장지로 사용되었다. 매장 후 사흘 동안 시체를 살피면서 애곡하였다.
15. 마 27:57에는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소개한다.
1) 그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안에 시체를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다.
2) 이 무덤은 자신을 위해 미리 만들어 둔 무덤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요셉은 자신을 장사할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한다.
3)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를 명예롭게 치름으로 장사복음의 성취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4) 세여인 중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마리아가 안식일이 지나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확인한다(16:1).
- 이 여인들도 예수님의 장사됨, 즉 장사복음에 참여하고자 한다.
16. 요셉과 여인들은 아직 장사복음을 잘 모른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성전을 지으시고, 신자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장사복음을 잘 모른다.
1) 그러나 예수님의 장사됨을 위하여 믿음의 행위와 사랑을 드린 이들이 장사복음을 알고 난 후, 얼마나 감격했을까?
2) 이들은 치병과 축사를 행하시는 하나님, 다윗 같은 메시야로 추앙받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자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시체를 모시고 장사한다.
3) 가장 귀한 섬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은 ‘시체로 있는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다.
4) 그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얻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장사에 참여한다. 이 귀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길 원한다.
17. 아리마대 요셉은 목숨을 걸고, 정치적 생명을 걸고 ‘시체를 달라’고 당돌히 요구한다.
1)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요청하고 간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고 축사를 받고, 위로를 얻고, 생명을 주는 말씀을 받았다.
2) 성경에 나오는 대로만 보면 요셉이 요청한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전부다.
3) 아들을 버리셔야 했던 하늘 아버지가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들의 시체를 달라’고 하며 ‘아들의 시체’를 사랑으로 장례를 치르는 자들일 것이다.
4) “시체를 달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장사됨을 섬긴 그의 겸손한 믿음이 너무 귀하다.
◈ 나의 묵상
교만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나에게도 분리의 고통은 크다.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죄와 분리 가운데 살아도 분리는 고통스럽다. 분리는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나의 분리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아들이 아버지께 분리되신다. 죄된 나와의 연합이 곧 아버지로부터의 분리가 됨에도 나를 품으신 그 손을 놓지 않으신다. 극심한 공포와 불안과 슬픔과 괴로움에도, 크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고통에도 나를 품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신다. 나를 버리고 아버지와 연합됨이 마땅함에도 끝까지 죄된 나를 품고 사랑하셨다. 사랑스러운 내가 아니라, 복종하는 내가 아니라, 죄가 되어 원수가 된 나를 끝까지 품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신다. 그러시고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하여 배신하고 도망하는 나를 용납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는 자기주장이 전혀 없으시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죽었는데, 네가 어떻게 이렇게 교만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너를 주장할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 100%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 주님은 자격 없는 나를 계속해서 십자가 사랑으로 초대하시고, 그 옳으신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배신하는 나의 완악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나를 위해서도 성소 휘장을 찢어 둘이 되게 하셨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의 찢긴 몸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찢긴 몸을 회개 없이, 가난한 마음 없이 통과하려는 어리석음을 본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휘장 사이로 열어 놓은 새로운 산 길로 아버지 품에 거한다.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됨으로 생명 길을 열어 놓으셨다. 주님은 나도 세상과 분리되고 죄와 분리되어 주님과 연합되라고 하신다. 죄, 교만, 자아와 분리되지 않고 예수님과 연합되려니 모순이 생긴다. 나는 작은 분리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여, 주님과의 연합으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런 나에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을 장사지낸 요셉과 여인들을 보라고 하신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시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요셉을 보라고 하신다. 어떤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그저 주님께 사랑과 신실함을 지킨다. 예수님의 장사됨, 장사복음이 너무나 귀한 복음인데, 예수님을 무덤 안에 안치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그들이 너무 귀하고 존귀하다. 축사와 치병을 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시체가 되신 예수님을 닦고, 세마포로 감싸고, 안치하는 그들이 너무나 존귀하다. 나도 그들과 함께 아무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싶지만, 주님의 장사됨에 연합되지 못하는 나의 비참함을 본다. “시체를 달라”고 하는 요셉의 믿음, “시체를 달라”고 하는 요셉의 마음이 너무 귀하다. 모두가 다윗 같은 메시야,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좌우편을 요구할 때, 요셉은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다.
나는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것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체를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요셉이 “시체를 달라”고 하는 당돌한 요청이 나의 탐심과 욕망과 교만을 드러낸다.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유일한 요청은 “시체를 달라”다. 치유도 축사도 영생도 문제해결도 소원성취도 아닌 “시체를 달라”고 하였다. 나는 시체를 구한 적이 없고, 무덤을 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내 꼬라지를 알고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판단하고 주장하는 교만을 내려 놓지 못한다.
아, 어찌하지 못하는 내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포갠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이 자아를 못 박고 장사지낸다. 온전히 무덤에 거함으로 ‘시체를 달라’는 마음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됨에 연합되는 그 믿음을 구한다. 심판을 받아들이며, 심판의 말씀을 받아 먹기 원한다. 나의 무덤에 찾아오신 그리스도, 그분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다.
◈ 묵상 기도
십자가 복음은 주로 악독한 자들에 의해 성취되어져 가는데, 장사복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통하여 성취됨을 봅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랑이지만 인간의 악취가 풍기는데, 장사복음에는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겸손의 향기가 납니다. 주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요셉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아들의 시체를 씻고, 감싸고, 사랑으로 모시는 그 모습을 기특해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늘 나에게 유익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러기에 장사복음에 참여하지 못하고, 장사복음이 주는 은혜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제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무에 달려 죽었음에도 낙심하거자 도망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섬기는 그 믿음을 주시옵소서. 무덤에 거하시는 주님과 함께 거하며, 나로 인하여 심판받으신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하여 주십시오.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복종하는 생명임을 알게 하소서. 부활의 능력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무덤에서 잠잠히 기도하게 하시고, 무덤에 거하는 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고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오늘 대청소에도 화목함이 있고, 마음의 누룩까지 제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