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주, 부활주일)
* 시작 기도
주님...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는 미국 Sight & Sound Theater에서 부활절 기념으로 특별상영한 ‘JESUS’ 뮤지컬을 유튜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못 박히시는 장면에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는 한 번도 생각을 못했었는데 주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고뇌에 찬 모습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되신 우리 주님을 사탄이 끊임없이 조롱하고 야유를 퍼붓는 것으로 인하여 견뎌하지 못하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단말마의 비명,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도 같았습니다.
내가 저기에 있어야 할 자인데 우리 주님이 대신 지셨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결코 감정이나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 새 생명을 주셨으니 이 종이 그 생명으로 남은 날을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부활주일인 오늘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이 새 생명으로 일어나는 부활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눅 24:1-12
제목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과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나의 묵상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예수님을 둔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를 위하여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러 돌아가서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
이제 그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왔다.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근심이 가득하였다.
그 때 찬란한 빛이 나는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었다.
여자들은 이들 천사들을 보고 놀라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에 천사가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자를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열한 사도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과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님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하였다.
이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그 일을 알렸다.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이 허탄하게 들려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다.
그는 그렇게 되어진 일을 보고 놀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부활은 맨 먼저 천사들에 의해서 하늘의 증거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천사는 여자들에게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상기시켰다.
천사들의 증거 곧 하늘의 증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확증한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뜻이 천사들의 증거를 통해서 확증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서 타율(他律)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 곧 신율(神律)에 의한 죽음이다.
(행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이에 여자들은 천사들의 선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가서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도들은 그 말을 허탄하게 여겨서 믿지 않았다.
허탄하다는 말은 얼토당토않게 여긴다는 말이며 말도 안 되는 넌센스처럼 들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고 천사들이 선포하였으며 여자들이 증거한 부활의 복음을 믿지 못하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도 부활의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은 넌센스일 뿐, 베드로 역시 빈 무덤을 보았지만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라도 자기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사도들 역시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열어주시는 ‘마음’은 지각이나 이성을 말하며 이는 헬라어로 ‘누스’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나타난 사건이다.
(엡 1:19-20)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나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주셔서 그 지각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지각 이성)의 눈을 밝히사
사람의 지각은 한계가 있어서 그 이상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각은 초월적이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초월적 이성 곧 지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지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부활이 내게 현재적으로 경험될 때 진짜 기쁨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와 장사 그리고 부활 복음은 결코 지식이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내게 경험되게 될 뿐 아니라 그 복음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의식이나 부활절 칸타타와 같은 기념행사로 기념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부활이 가져오는 효력을 현재로 누리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이러한 행사 위주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왔던 자이다.
그런 나의 행위는 부활의 의미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자였음을 고백한다.
1년에 한 번 맞이하는 부활절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새 생명의 부활로 날마다 맞이하는 부활이어야 한다.
적어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이 부활이 우리에게 날마다 경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상황적이나 관계적 무덤에 처해 있다면 그 무덤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무덤이 나만의 무덤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된 무덤 곧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말씀으로 날마다 교제할 때 그 자리에 새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 것은 반드시 나와 비슷한 또래와만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도 못하는 갓난 손주와도 교제가 가능하다.
서로 보고 눈짓을 하며 웃는 것만으로도 교제하는 것이다.
갓난 손주의 그런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는 좋아서 껌뻑 죽는다.
이만큼 크고 거창한 교제가 어디 있는가?
무덤 그 자체는 어둡고 음습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무덤과 연합할 때 그 무덤은 더 이상 음습하고 어두운 장소가 아니라 성소가 된다.
그 때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 열어주신 마음의 눈을 통하여 무덤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이 피어나고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광야로 도망했던 다윗은 자신의 무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광야를 성소로 삼아 주님을 찬양하지 않았는가?
(시 63:2-3)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2천 년 전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실제로 무덤에 누워계시는 시간이다.
주님은 그 무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수용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때가 되었을 때 아들은 부활하셨다.
오늘 나 역시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사도들조차 주님의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을 허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말도 안 되는 넌센스라고 여긴 그들에게 새 몸 곧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으며 또한 새 소명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안에서는 여전히 육신의 정욕이 불타오릅니다.
그로 인하여 주님의 부활을 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육신의 한계, 이성의 한계로만 재단(裁斷) 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나의 지각이 아니라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지각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평강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무덤과 같은 내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워지기 원합니다.
다윗에게 광야가 성소로 바뀐 것처럼 무덤이라는 나의 마음이 평화의 전인 주의 성소로 바꾸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