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석시모음 5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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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월
허호석
언뜻, 또 하나 간다
세월의 가지 끝에 남아있는 잎새
29. 30. 31 헤아릴 겨를도 없이
공과금 쪽지처럼 어김없이 계산은 끝난다
세월은 12월 말 출구에서
나이테 통행증을 교부하며
가는 게 누구인데, 세월을 탓하지마라 한다
모든 것들이 가는 줄도 모르게 멀어져 간다
만남은 이별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다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고
옷깃에 묻은 얼룩은 무엇이던가
지울까 말까 한 번쯤 뒤돌아보는
아직 이별이 삭지 않은 나는 강물이어라
여보야 우리 딱 좋은 만남인 것을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음이니
동행하는 구불길인들 어디라도 외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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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랑잎
허호석
사한 밤 가랑잎들이
저 혼자씩은 너무 외로워
달빛에 몸을 부빈다
이따금 찬바람이 흐트러놓는
자리가 괴로워 돌아 눕는 잠뜻
바람이 스치면 후루룩 낙개를 펴보는 새
그리움의 불씨 하나씩 간직하고
먼 하늘 밖 바람의 둘레를 떠돌아
햇살로 내려 앉는 철새 철새
어느 기억의 땅
뉘 창가를 별빛으로 스쳐
가슴 가슴에
부활을 기약하는 불씨 불씨로 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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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변
허호석
강 언덕 풀잎에 나란히 누우면
살며시 내 곁에 눕는 물소리
꿈결인 양 옛 생각의 이랑을 넘치네
구름아 강물아 무슨 말 못하여 머뭇거리나
꿈결인 양 옛 생각의 이랑을 넘치네
아직도 하지 못한 말 가슴에 있네
오는 듯 가는 뉘 발소리 있어 뒤돌아본 길
메밀밭 빈 하늘만 강물에 뜨누나
그리운 사람이 올 듯 강 건너 산로롱이 피는 꽃구름
강물에 구름에 물으면 그렇게 그렇게 살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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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울
허호석
꼭 나만 따라 하는 동생처럼
얄밉기도 하지만
나를 닮은 동그란 거울
거울은 나의 사진관
쑥쑥 자라는 내 모습도
솔솔 재미있는 생각도
거울은 꼭 그대로 찍어내니까요
거울을 닦으면
내 마음도 맑게 닦여요
창가에 덜어둔
나의 하늘까지도 닦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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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 나무
허호석
가을이 깊어 갈수록
나무들은 생각이 깊어진다
생각이 깊어 갈수록
나무들은 시를 쓴다
지웠다 하면서 빈 나뭇가지에
어찌 쓸쓸한 하늘을 걸어 놓는가
잊었다 하면서 주소도 없는 허공에
어찌 옛 생각이 물든 시를 띄우는가
모두가 더나간 빈 뜰에
수북수북 쌓아놓는 쓸쓸한 시
보내고 남는 마음 어쩌라고
억새꽃 산모퉁이에 빈 하늘을 걸어 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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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개 고개를 넘어
허호석
잘 되어 돌아오겠다며 넘던 고개
타향살이 고향 그리운 보릿고개였지
빈 까치집 받들고 서 있는 미류나무 먼 하늘
언제 돌아올까 손사래를 나누었던 성황당 고개였다.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보내고 남던 고개
옛님이 그리운 바위고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는 아리랑 고개였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세월 나그네 발길
이런저런 넘어야 할 인생 고개 고개인 것을
너 때문이야
그 꽃이 이미 마음밭에 피어 있기 때문이다
강변 은모래 밭에
물새가 종종종 시 한줄 찍어 놓은
그 곁에 나의 발자국을 나란히 놓은 건
너 때문이야
낯선 들꽃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도
신발코 앞에 던져진 잎새 하나에도
발이 채이는 건
너 때문이야
언제까지 처마 끝에 걸어둔 그리움은
나의 시 속에 아프게 묻었다
세월의 바람에 흩뿌린 시는 산에 들에 피고 지고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다.
그래, 다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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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집
허호석
담 너머
바지랑대로 떠받친 하늘에
깃발로 걸린 구름 한 장
담을 넘는 그 하늘이 그리 고울까
오가며
까치발로 보일라
머뭇거리던 골목길
불빛 바알갛게 드리워진 창문
그녀는 지금 밤늦도록 시를 쓰는가
발자국 소리 날까
안그런 척 감추어둔 속내
난 지금 무엇에 얽매어 있는가
꿈에 그리다만
골목길 그림 이야기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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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 풀 언덕
허호석
흰 구름이 누워 있는 하늘언덕
수수한 풀꽃들이 반짝이며
파란 하늘을 열어놓은 풀언덕
누가 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
너와 나를 그려놓았는가
누가 이 아름다운 동산에
우리들의 만남을 꾸며 놓았는가
태초에 예정된 인연이라
우린 뉘 못 다한 사랑의 환생이었나
우린 뉘 애절한 인연의 밑그림이었나
아름다운 옛 그림 속엔
세월의 바람에 흩뿌린 나의 쓸쓸한 시들이
언덕에 풀꽃으로 피고 지고
하늘에 올라 그리움의 별이 되었다
아름다운 만남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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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리운 산하
허호석
금강 상류 햇살의 첫 동네 강마을
그 날의 삶처럼 구불구불한 논두렁 밭 두렁 길
어허, 가난도 좋았던 옛 생각 그리운 산하여
하얀 물소리가 징검다리 건너뛰며 놀던 강변
그 여울물소리에 누원 하늘을 펼쳐보았던 모래밭도
바짓가랑이 마를날 없이 내달리던 들판
새참자리 불러주던 손짓도 정겨원지
아! 영원히 물에 잠긴 고향, 망향정에 오르면
여지저기 찔레꽃으로 피었던 첫사랑의 추억도
더 넓은 하늘 날고파 보내고 남던 고개
그 하는 받든 까치집은 새날은 망부석이었다.
용담호 물에 묻고 가슴에 묻고 12,600
실향민들이여! 옛 생각 외로운 나그네인들
고향 처마 끝에 걸어두었던 고향하늘만은 영원하리니
그리운 산하 청산을 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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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리운 山河
허호석
햇살의 첫 동네 하늘 아래 마이산골
고향은 추억이 있어 그립다 했던가
모래밭에 물길을 내어놓고
고무신짝으로 송사리 노는 하늘을 담아내며
여울 물소리에 누워 꿈을 키웠던 강변이 그렇고
바짓가랭이 마를 날 없이 구름을 몰던 들판이 그렇고
이빨 빠진 사발에 호박죽을 넘겨주던 울타리도 정겨웠지
처마끝 하늘을 동구 밖 미루나무 까치집에 걸어두고
잘 되어 돌아오겠다며 비워 둔 고향집
건강하세요. 건강해라 빌었던 어머니의 보름달도 그렇다.
우리의 태(胎)를 묻고
조상의 뼈를 묻은 영혼의 당
용담호 호수에 고이는 물빛보다 더 고운 게
우리들의 가슴가슴마다 흐르는 얽히 설킨 情이더라
끊을 수 없는 고향의 끈을 추스려
손에 손잡고 우리의 뿌리를 가꾸리라
마이산과 용담호가 펼치는 하늘만은 영원하리니
우리 돌아갈 그리운 山河 청산을 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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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집
허호석
담 너머 바지랑대로 떠받친 하늘에
깃발로 걸린 구름 한 장
담을 넘는 그 하늘이 그리 고울까
오가며
까치발로 보일라
머뭇거리던 골목길
불빛 바알갛게 드리워진 창문
그녀는 지금 밤늦도록 시를 쓰는가
발자국 소리 날까
안그런 척 감추어둔 속내
난 지금 무엇에 얽매어 있는가
꿈에 그리다 만
골목길 그림 이야기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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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길
허호석
높은 곳은 돌아서 넘고
낮은 곳은 고요히 넘쳐
채우고 비우고 비우고 채워
물처럼 하늘을 열어가리
옹달샘의 작은 하늘로도
온 골짜기를 채우듯
가는 길 가슴 가슴마다
우물 하나씩 심어
못다한 그리움이듯
달과 별을 담으리
들꽃에 가는 길 물으면
잊은 듯 그렇게 그렇게 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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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길에서
허호석
세상에 원래 길은 없었다.
가고 가면 그에 길이 되었다.
이정표 없는 휘어진 길인들
소나무처럼 구불구불한 낭만의 멋이
내 삶의 길이 되었다.
세월의 바람 속을 돌고 돌다 마주친 하늘
그대 어디로 가는가 엄중히 묻는다.
다투어 질주하는 자들의 먼지를 털어가며
높은 곳은 돌아서 낮은 곳은 고요히
비움으로 채워
정의로운 사람의 길을 열어 가나이다.
구비마다 생각도 구불어지지만
손 잡아주는 님 있으므로 어디라도 외로울까
풀꽃인들 하늘 있으니 부러울 게 없다.
내가 만든 나의 길을 사랑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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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길을 가며
허호석
세상에 원래 길은 없었다.
여러 사람이 다니면 그게 길이 되었다.
구불길인 들 높은 곳은 돌아서 넘고
낮은 곳은 고요히 비우고 채워
물같이 하늘을 열어가리
들꽃을 만나면 구름 얘기하고
물소리를 만나면 함께 쉬어 가며
인연은 돌에 새기고 미련을 물에 띄워
구비마다 이야기도 구불구불 풀어놓으리
어디쯤 보일 듯 아름다운 길이 있으랴
난 지금 이정표 없는 길을 가고 있는가
한 고비 두 고비 이야기 있는 구불길이
우리 삶의 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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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은 저도
허호석
꽃은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듯
나는 나를 버려야 새로워지는가
폼나는 자랑으로 피는 꽃보다
꽃 진 자리처럼 어떻게 사느냐가
나의 길이 구불 길인들
구비마다 비우고 채워 하늘을 열어가리
나누고 나눔은 사랑의 빚 갚음이라
다 주고도 잃은 건 없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게 있으랴
못 다한 미련은 그리움을 남기 듯
꽃은 저도 봄은 지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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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꿈에
허호석
“마당쇠 이놈
마당은 쓸지 않고 웬 낮잠만 자는 거냐?
내 이놈을…….
“잠깐, 잠깐만요. 꿈을 꾸었는데요. 통쾌했어요.
꿈 얘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깐놈 꿈 얘기 들어보나 마나 하지만
그래 그 꿈 얘기 한 번 들어보자”
마당쇠가 갑자기 놀부님을
업어치기로 내꼰졌다
“아니, 이놈이 나를 내쳐 내 이놈을…….”
“꿈에요. 꿈에 그랬다니까요”
“응! 꿈에……. 아이고 허리야…….”
“마당쇠야, 그 꿈 얘기 더 듣고 싶지 않다
그 꿈 얘기 그만, 그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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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비
허호석
들판 구름 사이
반짝 반짝이는
하늘이 띄워보낸 엽서
뉘 못다한 영혼으로 피어난 꽃잎
무슨 비밀 간직하고
팔랑팔랑 허공을 건너 오는가
맺힌 사연의 책장을 넘기듯
깜박깜박 하늘을 접었다 폈다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에 얽혀
철렁 거릴 때
들판이 흔들린다
하늘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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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낙서
허호석
나의 글은
마음에 끄적여 두었던
낙서로부터 비롯 된다.
무심코 끄적인 낙서
마음의 텃밭에 가꾸는 생각들
찬찬히 들여다보면
쓰고 쓰고 덮어 쓴 세? 글? 자
무슨 미련 두고 두고
아무데나 끄적여지는 낙서
바닷가 은모래밭에
새들의 발자국은 나의 낙서가 되고
바람이 왔다간 창가에
후두둑 떨어진 별은 나의 시가 되고
창공을 건너는 구름이나
낙엽의 반짝거림은 나의 꿈이 되고
바람도 바다도 지우지 못해
내 낙서 근방에 와서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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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남해에 띄운 엽서
허호석
못다 함을 참아내는 출렁임인가.
유배되어 떠내려간 그리운 섬 하나
어느 해역을 떠도는가
푸른 물결로 내 안에 출렁이다
파도로 부서지는 사람아
수평선 그 허공에 걸린 그리움은
은빛 날개로 너의 해안을 떠돈다
네가 스쳐간 빈자리에
무슨 말 부어놓고
오는 듯 오는 듯 멀어지는 파도야
남해 건너 모래밭에 쓰는 너의 낙서가
내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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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南海에 띄운 엽서
허호석
못다함을 참아내는 출렁임인가.
유배되어 떠내려간 그리운 섬 하나
어느 해역을 떠도는가.
푸른물결로 내 안에 출렁이다.
파도로 부서지는 사람아
수평선 그 허공에 걸린 그리움은
은빛 날개로 너의 해안을 떠돈다.
네가 스쳐간 빈 자리에
무슨 말 부어놓고
오는 듯 오는 듯 멀어지는 파도야
모래밭에 쓰는 너의 낙서가
내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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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눈 오는 날
허호석
언뜻 눈이 내린다.
하늘의 은혜로운 축복을
산은 어깨로 받고 나무들은 팔로 받는다
몽당비도 헌신짝도
하늘의 따스한 말씀을 받들며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른 풀잎이나 작은 가지도 그 겨드랑이에
아늑한 생각들을 들여놓는다
동구 밖 미루나무에 걸어두었던 하늘에
먼 기억의 고향 눈이듯
잊을 뻔 했던 옛 생각이 피어 날린다
그리운 사람이 올 듯
눈 오는 동구 밖이
자꾸 내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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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눈꽃
허호석
저 눈밭에
하늘 과수원
눈꽃이 화안하다.
밤사이
하늘의
은혜로운 말씀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저 하늘 밭에
은하의 별빛
막 눈을 뜬 햇살이
무너지게 열렸다.
아침 종속에서
쏟아지는 해
그 해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하늘을 가고 있다.
천국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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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보라
허호석
무수히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하늘 가득 피어나는 촛불의 Ep
깨끗해야 한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순백의 말, 말, 말을 허공에 던지며
들판을 건너오는 함성
하늘의 경이로움이 군무로 펼쳐진다.
빈 나뭇가지엔 하얀 솜옷을 입혀주고
벗겨진 산의 어깨나. 들판은 덮고 덮어
맨살의 상처를 치유한다.
혼탁은 무리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
오염된 구석구석, 세상 지저분한 것들은
모두 묻어버려야 한다며
몰려오는 눈보라의 아우성
검게 물든 날을 정화하여 눈부신 새날을
열어가고자 하는 외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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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눈오는날
허호석
언뜻 눈이 내린다
하늘의 은혜로운 축복을
산은 어깨로 받고 나무들은 팔로 받는다
몽당비도 헌신짝도
하늘의 다스한 말씀을 받들며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른 풀잎이나 작은 가지도 그 겨드랑이에
아늑한 생각들을 들여 놓는다
동구 밖 미루나무에 걸어두었던 하늘에
먼 기억의 고향 눈이듯
잊을 뻔했던 예 생각이 피어 날린다
그리운 사람이 올 듯
눈오는 동구 밖이
자꾸 내다 보인다
☆★☆★☆★☆★☆★☆★☆★☆★☆★☆★☆★☆★
《25》
동행
허호석
내일이 있으므로 오늘이 있는 거지
잡초 우거진 돌밭길인들
구불 길과 동행하는 낭만의 멋이
내 삶의 길이 되었다
새소리 물소리 너도 나도 따라 나서는
풀꽃들, 말 대신 글로써 말을 걸었다
도는 구비마다 감자 같은 사람도
구불 길처럼 구불어진 사람도
새참자리 불러주는 손짓도 정겨웠다
먼 길도 꿈결 같이 이제 강가에 이르렀으니
물결 한 겹으로도 지워질 모래 발자국만
구부구부 손 잡아주던 님이여!
젖은 눈으로도 웃어 보이는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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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둥지
허호석
산새 둥지 처럼
문패도 울타리도 없지만
들어서면 아늑한 보금자리
비좁고 허술해도
몸을 비벼댈 수 있는
우리만의 안식처인 걸
세월의 가지가지
들치는 비바람
등으로 막아내는
사랑의 둥지
처마끝 하늘에
우리의 소망 걸어 놓았지
물소리와 햇살이 드는 뜰에
심은 상치잎이 푸릇푸릇
이만하면 부러울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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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들풀
허호석
누가 이름한번 불러주지 않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스치는 옷깃에 향기를 남긴다
하늘에 몸과 마음을 씻으며
한 송이 꽃 피워낼 작은 소망 하나
처마끝 하늘에 걸어두고
바짓가랭이 마를 날 없이
척박한 들판에 뿌리 내린 들풀
꺽는 비바람에도
밟는 흙발에도
풋풋한 향기를 남기는 민초民草들
어찌, 어찌 잡초라 이르는가
휩쓰는 바람에 뿌리채 뽑힐라
세상에 말을 걸고자
우우우 일어서는 들풀, 들풀등
☆★☆★☆★☆★☆★☆★☆★☆★☆★☆★☆★☆★
《28》
마이산 연가
허호석
마이산아 마이산아
하늘에 오르던
그 사연 못 다한
사랑의 전설이 되었다
애절한 염원은
천지탑을 이루고
하늘을 우러르는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여
구구구 산비둘기
구구구 산비둘기
하늘 층계 오른다 아 ~
하늘가는 길이
여기 있는 것을
여기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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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말 걸기
동시 ∼ 허호석
나무야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네가 받아 주었지
눈도 비도
바람에 날리는 별도 받아내는 나무
날던 새도 솟구친 공도 연도
떨어지는 것들 모두 받아내려고
하늘 향해 항상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나무에게
나는 종이 비행기를 날려 말을 걸었다
나무는 말 대신
빨간 엽서와 열매를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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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바닷가에서
허호석
설레임으로 다가온 파도가
여기까지라는 경계를 넘지 못하는 건
이미 헤어짐이 예약되었기 때문이다.
못다한 말 등에 지고
등 보일까 봐 뒷걸음질로
가도 가도 못 가는 발자국을 남긴다.
폐선 된 빈배에 무슨 말 부어놓고
오는 듯 멀어지는 파도는 지
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멀리 보이는 게 아름답다지만
그리움의 몸살은
너의 해안에
하얀 깃발로 내걸고
나 지금 옛 그대로
여기 서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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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보름달
허호석
그런 둥그런 하늘의 얼굴
그 누가 밤하늘에 저리도 환한
하늘의 손거울을 걸어 놓았는가
그대가 창을 열어 하늘을 보았을 때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거든
갑순이 갑돌이가 보았던 그런 달을
내 가슴에서 꺼내어
내가 거기 걸어두었음을 알리오.
안 그런 척 머뭇거렸던 미련은 먼 곳에
언제까지 허공에 걸어둘 하늘의 손거울
그대의 창가에 걸어두고 싶은 나의 손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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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봄날은 간다
허호석
꽃으로 지붕을 만든 벚꽃터널
꽃눈이 날리는 벚꽃 길을 걸어가면
꽃보다 더 활짝 피는 그리움
우리 서로 짝이 될까 꽃이 될까
꿈처럼 걷던 옛 이야기 길
그리움은 폴폴 꽃잎으로 흩날리네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밑그림 속에
우리들의 흔적은 그렇게
영혼의 꽃으로 피고 지고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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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봄바람
허호석
그냥, 가만히 있질 못한다
지나가다
옷깃을 슬쩍 들춰보는
장난꾸러기
버려진 휴지 쪽을
휙휙 담 너머로 던지고 가는
개구쟁이
맨발로 산과 들을 쏘다니다
보리밭을 장치는
말썽꾸러기
풀물 밴 옷자락 펄렁펄렁
아유! 못 말려
언제나 철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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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비가 오는가
허호석
어렴풋 꿈결인 양 새벽 빗소리
불빛 새던 창가에
살며시 찾아온 뉘 발소린가
들릴 듯 발소리를 낮추어
내 곁에 나란히 눕는 새벽 빗소리
꿈길로 찾아오는 아련한 사람아
나의 빈 뜨락을 적시는 정겨움이여
돌돌돌 어릿한 물소리
꿈의 이랑에 넘치네
홍건히 그리움의 이랑에 넘치네
☆★☆★☆★☆★☆★☆★☆★☆★☆★☆★☆★☆★
《35》
산 벚꽃
허호석
참하게 살아온 산들이
어둠을 촛불로 밝히다
피지 못한 채 산화한
4월의 영령들을 불러모아
이산 저산 꽃으로 부활하는
축제의 봉화가 올랐다
아픔 없이 피고 지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세상이 정의로워야 한다며, 불의에 항거했던
그날의 함성이 꽃으로 피어난다
민주의 화신(花神)은 산바람을 타고
꽃불 꽃불로 번져 산 아래까지 내려와
마을에는 벚꽃보다 더 환한 세상을
내겐 벚꽃보다 더 활짝 피는 해방을
산마다 폭죽으로 피어나는 하늘공원
아! 숨이 차도록 아름다운 꽃세상.
☆★☆★☆★☆★☆★☆★☆★☆★☆★☆★☆★☆★
《36》
산열매
허호석
말갛게 익어가는 산열매 속엔
맑은 물소리가 알알이 박혀 있다.
그 물소리 하나 똑 따서
입에 넣으면
아! 새콤한 산의 향기
말갛게 익어가는 산열매 속엔
맑은 햇살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 햇살 하나 똑 따서
입에 넣으면 아
사르르 녹는 빨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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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새벽 비
허호석
비가 오는가
어렴풋 꿈결인양 새벽 빗소리
불빛 새던 창가에
살며시 찾아온 뉘 발소린가
들릴 듯 발소리를 낮추어
내 곁에 나란히 눕는 새벽 빗소리
꿈길로 찾아오는 아련한 사람아
나의 빈 뜨락을 적시는 정겨움이여
돌돌돌 어릿한 물소리
꿈의 이랑을 넘치네
흥건히 그리움의 이랑을 넘치네.
☆★☆★☆★☆★☆★☆★☆★☆★☆★☆★☆★☆★
《38》
새벽비
허호석
비가 오는가
어렴풋 꿈결인양 새벽 빗소리
불빛 새던 창가에
살며시 찾아온 뉘 발소린가
들릴 듯 발소리를 낯추어
내 곁에 나란히 눕는 새벽 빗소리
꿈길로 찾아오는 아련한 사람아
나의 빈 뜨락을 적시는 정겨움이여
돌돌돌 어릿한 물소리
꿈의 이랑을 넘치네
흥건히 그리움의 이랑을 넘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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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새소리
허호석
풀잎들이
내 소리로 푸르러진다.
이슬이
내 소리로 더욱 맑아진다.
내 고운 빛깔의 시는
산에서 들에서
꽃으로 피고 지고
내 소리로
열매들이 물이 들고
새콤한 맛이든다.
내 소리로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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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아름다운 구속
허호석
떠가는 섬에
배 한 척 묶여 있다
무인도에 정박한 그 배는
비어 있는 섬을
어찌 떠나지 못하는가
상륙할 수 없는 아름다운 구속
난 뉘 해안에 정박하여
환상의 영역인 듯 무인도의 변방을
헤어나지 못하는가
세월의 바람에 흩뿌린 나의 시들은
들판에 풀꽃으로 피고 지고
하늘에 올라 그리움의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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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아버지
허호석
척박한 삶을 등에 지고
가장의 멍에를 등에 지고,
자갈밭에서 새날을 일구시던 아버지
산처럼 늘 그 자리에 계시며,
세상만사 헛기침 몇 번으로 날리셨습니다.
처마 끝에 새 하늘을 걸어두고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을 갈아엎던 이랑은
거룩한 주름살로 남았습니다.
가난을 지고도 평생을 하루같이
청청한 소나무로 하늘을 받드신 아버지
그런 것들 다 속으로 삭이시며
잠 삶의 근본을 묵묵히 행하시던 뜻 받드오다.
그에 미치지 못함을 어찌 합니까
나를 닮지 말라시던 아버지
투박한 손으로 미열을 짚어내시던
그 흙손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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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침 아이들
허호석
거미줄은
아침 이슬
아기바람
새소리까지 모두 걸었습니다
거미는 몇 번이나
하늘을 내다봅니다
처마 끝 새 하늘이 걸렸습니다
부신 해가 철렁 걸렸습니다
발자국 소리도
지껄임 소리도
아이들은
하늘을 도르르 말아
해를 가져갔습니다
거미는 구멍 난 하늘을 다시 깁고
온 마을은 햇살의 나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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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어머니
허호석
스치우는 바람에 마음 긁히시며
풀잎처럼 하늘밭에 사셨습니다
자갈밭에서 호밋날에 찍혀나온 하늘조각을
개여울 물소리에 씻으시며
저녁놀 언듯 돋는 별에도
호미등처럼 굽은 허리 펴실날 없으시던 어머니
초근목피 가난도 함께 나누시며
천 가지 만 가지 행하심을
산밭에 흙손으로 심으셨던 말씀은
가슴가슴마다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업고 걸리며 푸른 하늘을 이어 나르신 어머니
가지가지 이는 바람 가슴에 묻던 그 깊은 뜻
어렴풋 이제야 헤아리니 어찌합니까
아! 이제는 건너산 하늘밭에
하얀 찔레꽃으로 피실 어머니
어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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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엄마가 기르는 해
허호석
엄마의 눈은 사랑의 옹달샘
엄마는 그 옹달샘에 동동동 해를 기른다
엄마의 품안에 단풍잎처럼
사르르 사르르 자고 깨는 해
아직은 날개죽지가 파르스름한 해
어느날 둥지를 떠나 날려보낼
그 파란 하늘을
엄마는 날마다 한 장씩
처마 끝에 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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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여기까지야
허호석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끈은
만들 수도 볼 수도 없는 느낌의 끈이다.
우린, 말 대신 그 당김으로 만난 짝이었지만
필연이 될 수 없는 우리는 친구였다.
감을 수 없어 늘일 수밖에 없는
이 질긴 탄력
어려운 말 대신 생각의 얼레를
풀어보고 되감아보아도
사랑에 연습은 없다는 거
타다가 사그라지는 이야긴들
아픔의 깊이만큼 우리 잊지 말아요
가까이도 멀리도 아니게
이대로 멈춰 있기를…….
우리는 여기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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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연못
허호석
물매암이가
수편잎 쟁반으로
접시돌리기를 한다.
뒤뚱 뒤뚱거리는 연못
물방개가
연못을 빙글 빙글
접시돌리기를 한다.
뒤뚱 뒤뚱거리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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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왜 머뭇거리나
허호석
머무는 곳마다
물처럼 채우고 비우고
다 주고도 잃은 건 없다
돌아보면 한순간의 바람인 걸
옛 생각의 길섶마다
너의 해안을 떠돌던
빛 바랜 세월의 잎새들이 날린다
사랑할 때 떠나라 했다
내 그림자 하나
강물에 떨어뜨리고
구름이듯
산을 넘으면
그만인 걸
아!
나 여기
왜 머뭇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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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외딴집
허호석
산새 둥지처럼
산기슭에 그림 같이 집 한 채
계곡의; 맑은 물소리보다 더 맑은 집
누가 살고 있을까
꿈을 꾸는 오막살이
집 앞개울에
징검다리 몇 개 놓아두었다
맑은 물소리 나와 놀게
물소리와 햇살이 오순도순 사는 집
물소리가 집 비우면 햇살이 집을 보고
햇살이 집 비우면 물소리가 집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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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용담호
허호석
마이산은 우리의 기상이요 용담호는 우리의 가슴이라
백제의 옛터전 그 파란 하늘을 거느리니
선택받은 섭리의 천지天地용담호여
녹수청산 용트림으로 금강을 의젓하게 거느렸다
굽이굽이 조롱박처럼 젓줄을 물려 갈한 목축이리니
청청수맥은 흘러흘러 만인의 생명수가 되리라
서해로 열리는 풍요의 들판을 넉넉하게 거느렸다
배미배미 기름진 땅 저 들녘을 적시니
세세만년 흘러흘러 호남풍요의 웅지를 열어가리
아, 이 땅의 생명을 다스리는 용담호 천지여
우리들 가슴가슴 처마에도 용담호 그 파란 하늘을
채우고 비우고 채워 물같이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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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은혜 아니면
허호석
세상에 원래 길이 있었으니
오직 하나님 말씀 가운데로 내주신
한 길 구원의 이정표를 찾아가나이다.
가는 길 구불 길인들 높은 곳은 진리로 넘고
낮은 곳은 말씀으로 넘어 가는 길
성령의 불빛을 밝혀 주소서
은혜 아니면, 은혜 아니면……
이름 모를 풀꽃인들 하늘 향해 피어 있으니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바르게 걷도록
주여 붙잡아 주소서
겉과 속잉 위장된 손톱 및 온갖 허물
때는은 이 참회하는 마음에 밑줄을 그어주소서
하얀 성령의 눈을 내려
헌신짝도 몽당비도 손잡아 주시듯
주여! 얼룩진 영혼을 새롭게 하소서.
은혜 아니면, 은혜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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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봐요 마이산이 하는 말 들리나요
허호석
마이산이 제 이름 공통분모는 부부산(夫婦山)
天上天下 영원한 사랑의 화신(花神)이니
제 이름을 부부산이라 부르라 한다
신성한 산 이라면서
어찌 흙발로 내 머리끝까지 오르 내리는가?
내 몸에 쇠말뚝을 박아논 아픔을 아느뇨?
내 몸에 손때를 묻히지 말라 한다
살아도 어떻게 사느냐를 엄중히 묻는다
멀리서 가까이서 옷길을 여미고
무거움을 내려 놓으면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마이산은 바라보는 산이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명산이 되었다
하늘이 이땅에 창조한 자연그대로
후손에게 남겨줄 의무뿐이니
나를 팔아 돈벌이 제물로 삼지 말라 한다
이봐요, 마이산이 하는 말 들리나요?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을수 있는
귀청소를 하라 한다. 마음을 닦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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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장독대
허호석
척박한 우리 삶을 주물럭거려
질 항아리를 빚어낸 흙손이
우리의 참 손이었다
그 투박한 흙손으로
민족의 혈맥을 짚어내고
우리 삶의 미열까지도 짚어내었다
불가마 속에서 영혼의 혼불에
재생의 몸을 사룬 항아리
먼 기억의 토담가 조선의 달도
풀벌레 소리도 찰랑찰랑 띄우더라
햇살도 세월도 익어가는 장독대
처마 끝에 걸어놓은 저 하늘도 달빛도
삭히더라, 우리의 가슴가슴도 삭히더라
돌담가 장독대에 엎드린 여인의 등뒤로
내리는 하늘이여, 눈발이여
그 아늑한 정경을 품더라
하늘을 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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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저녁 눈
허호석
저녁 굴뚝에서
함박눈이 퐁퐁 솟았다.
그 눈발에서
보글 보글 끊는
된장찌개 내음이 났다.
저녁 굴뚝에서
하얀 옥수수수 튀김이
풀풀 풍겨 나왔다.
그 눈발에서
고소한 내음이 났다.
저녁 눈은 그렇게
굴뚝에서 분수처럼 솟아
마음을 함박 함박 덮었다.
함박에 그득한 쌀이 되고
함박만큼 넉넉한 복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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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지나가는 사람들도
허호석
지나가는 사람들도 괜히
아니!
저 개잘량이 바짓가랑이 좀 봐
털털한 게
꼭지 아빠 닮았다니까
어쩜 …….
모르는 사람들도 괜히
아니!
저 살살살 눈웃음치는 것 좀 봐
생글생글 웃는 게 꼭지 엄마 닮았으니까
어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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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찔레 꽃
허호석
옛 생각 잊을까봐 꽃 피우고
잊으라 꽃 지우는가
꽃은 꽃을 지우면서 아픈 자국을 남기듯
이룰 수 없는 연정은
아름다운 상처를 남긴다
청 보리밭 언덕길에 새겨진 동화가
사랑의 밑그림이 될 줄이야….
만남은 헤어짐이 예약되어 있었던 것
멀리 보이는 게 아름답듯이
멀리 있는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것
언제까지 피고 질 사람아
제목 없는 이야기를 나눠 가진
우리는 누구였나
꽃은 져도
봄은 지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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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참회
허호석
버리고 비우고 버린 빈자리에
어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채워져
그림자처럼 동행을 유혹하는 어지럼중에
나는 머뭇거리는 강물이었다.
마음밭 잡초를 솎아내지 못한 그날의 흔적
지우고 닦아도 흐릿한 자국으로 남아있는 얼룩
겉과 속이 다른 은밀한 죄 어찌합니까
안 그런척 위장된 차림을 내보이진 않았는가.
빗물에 고인 하늘조각에도 발이 채인다
하나님이시여!
지우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후회
참회하는 아음 새롭게 손잡아주소서
버리고 비운 자리에 한 점 부끄러움 남지 않게
티 없는 하늘을 갈아 끼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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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항아리
허호석
척박한 우리 삶을 주물럭거려
질항아리를 빚어낸 흙손이
우리의 참 손이었다
그 투박한 흙손으로
민족의 혈맥을 짚어내고
우리 삶의 미열까지도 짚어내었다
불가마 속에서 영혼의 혼불에
再生의 몸을 사룬 항아리
먼 기억의 토담가 조선의 달도
풀벌레 소리도 찰랑찰랑 띄우더라
햇살도 세월도 익어 가는 장독대
처마 끝에 걸어놓은 저 하늘도 달빛도
삭히더라, 우리의 가슴 가슴도 삭히더라
돌담 가 장독대에 엎드린 여인의 등뒤로
내리는 하늘이여, 눈발이여
그 아늑한 정경을 품더라
하늘을 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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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풀꽃
동시 ∼ 호호석
이름 알아주지 않아도
여기 피어 있습니다
스치며 눈길 주지 않아도
여기 피어 있습니다
풀숲에 묻혀 보이지 않아도
여기 피어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꽃인 걸
하늘을 열어 놓고
여기 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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