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숲 / 정병근
여름 숲 속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 땅이 꿈틀거리고
욕망의 촉수들이 뿜어내는
바람 한 점 없는 초록 비린내가
후각의 퇴로를 빽빽이 차단해온다
음모를 들킨 숲의 마수에
나는 잡혔다
숲은 이미 내 얼굴을 알아버렸고
누가 나를 수소문해야 할텐데
숲은 깔깔거리며
나의 온몸에 초록 피를 주사한다
쏟아지는 초록의 잠
거짓말이야,
하고 말해보지만
내 입은 이미 초록의 경전을 달달 외우고 있다
나는 초록의 밀사가 되어 숲을 빠져나온다
여태 내 눈은, 붉음을 초록으로만 보는
지독한 색맹이었음을 알겠다
핏줄을 타고 한 몸 가득 번져오는
이 새빨간 초록
흡사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잘 짜여진 세계, 말끔히 조직된 사회는 다름 아닌 음모와 마수로 가득한 폭력의 세계이다. 그 속에는 붉음을 초록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느 날 시인은 초록 숲의 정체를 깨달았으나, 안다는 것은 고통과 절망을 수반하는 일. 자신도 모르게 붉음을 초록으로 인식하고 살아온 삶은 후회가 되고, 시인은 초록으로 가장한 붉은 숲과 같은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절규한다. 세계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진실들이 숨겨져 있다. 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투적인 생각을 뒤집는다.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무심결에 ‘그렇다’라고 동의하던, 우리의 생각에 반성을 촉구한다.
서상민 시인
첫댓글 핏줄을 타고 한 몸 가득 번져오는 이 새빨간 초록을 저는 오늘 모담산 자락에서 정병근시인이 되어봅니다. 고수는 이렇게 시를 멋지게 쓰는군요! 좋은 시 수혈하고 갑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혁명가에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