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속이다’
--‘속 내용이 알쏭달쏭하고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서유석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에서
일년은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섯번째 계절은 내마음 쉴곳이요, 가면가고 오면오는 무심한 나의 마음, 이리저리 갈팡질팡 내마음 나도 몰라요
학교를 졸업하고 발을 디딘 사회 일년생, 눈은 깜짝 입은 벌렁 어리어리 둥저리, 학교공부 십년공부에, 생각나는 건 노래가사라, 십년공부 나무아비타불의 공염불이요
어이구 성님 사촌성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에고 얘야 말도마라 내 말좀 들어봐요, 고추당추 맵다더니 시집살이 더 매워요, 시집살이 삼년만에 붓꽃같은 이 내 손이, 오리발이 되어지고요, 삼단같은 머리채는 숯밤송이 되었구나, 꼴이 말이 아니외다
어느 조용하던 마을에, 아무도 모르던 날에, 당신과 또한 내가 세상에 태어났네, 이십여년 후에 결혼해서 아기낳고요,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 갈거라네
아침에 일어나서요, 아홉시에 출근하고요, 다섯시에 퇴근하면 월급을 탄데요, 얄팍한 월급봉투에 외상값 제하고 나면, 또 기다려지는 다음달의 월급날
(후렴) 라쿰타라라라라 라쿰타라라라라 라쿰타라라라라 세상은 요지경
최민희의 ‘시론’ ‘젊은이들이여,······’에서
······요지경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웃게 된다.······기쁜 웃음,흐뭇한 웃음,겸연쩍은 웃음,호탕한 웃음,요절복통할 정도로 강한 웃음··· 요지경이 만들어 준 웃음은 어떤 웃음일까?······세상이 신기하다는 것,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 너무 변화무쌍하다는 것······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세상은 요지경인가요?”
--‘어떤 자세,마음,사고방식으로 대하고 사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자신이 아는 만큼,행동하는 만큼 얻어지고 잃고 변화무쌍합니다.복잡한 세상이지만 정리해서 보면 간단합니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옥석을 가려······’
신신애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에서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야야 야들아 내말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살면 칠팔십살 화살같이 속히 간다. 정신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벙글 싱글벙글 도련님 세상 방실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상투 비틀어지고 할멈씨도 도망갔네 하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ꁾ요지경 세상을 요지경(瑤池鏡)으로 보듯,······ 시시콜콜한 다음 글들을 ······.ꁼ
-경 1- 죽지는 않았으나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세요!” 그는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게 웬 일인가? 누웠던 곳은 어느 동네 뒤쪽, 눈밭이었다. 얼굴이 시리고, 하늘을 쳐다보니 보름 무렵의 달이 중천에 걸려 있으니 더욱 어리둥절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발목까지 풍풍 빠진 눈밭에서 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소리치며 그를 흔들어 깨운 청년은, 자기는 북에서 월남해서 이 동네에 살고 있으며, 이웃 동네에서 놀다 집에 가는 길에, 평소에는 잡아들지 않았던 이 길에서 검은 물체가 있어서 접근해 보니 놀랍게도 사람인지라, 무서운 김에도 깨웠고, 얼굴은 많이 씻긴 상처이고, 동네는 그가 사는 집의 정 반대 쪽이며, 지금은 한밤중이라고 그가 묻는 말에 답해주었다.그는 청년이 몹시 걱정스러워 하며 부추기는 것을 굳이 뿌리치며, 자기가 사는 곳과 신분과 여기에 이른 경위를 대략 말해주고, 초저녁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면서 넘던 고갯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여, 신년축하연에서 삶은 돼지고기에 소주를 거나하게 마신 뒤, 친구 집안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낮시간을 보내고나서, 친구집에서 저녁밥을 먹으면서까지 술을 마신 탓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면서, 걸음걸이를 보니 걱정없겠다는 친구의 말을 뒤로 하고, 집에 간다고 간 것이 무슨 영문인지 집에 가는 방향의 반대 쪽으로 한마을 넘어 간 뒤에 눈위에서 잤으나 옷을 따스하게 입었기 때문에 동사는 면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기도했다.
그가 세들어 사는 단칸방에는 그의 아내가 아침에 직장에 나가 밤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어린 자식들을 잠재우고, 기다리다 지쳐서 전등불이 켜진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수치심과 후회와 떳떳하지 못한 생각들이 소용돌이쳐 죽고싶은 생각이 워럭 치밀었다. 그러나 막상 죽으려고 작정하고 보니 죽을 방법도 쉽지 않고 죽고난 뒤의 일을 상상하니 ······ 참으로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로 밤을 보냈다.
이튿날, 그는 안날에 받아넣은 월급(‘식구들의 밥통인데.’)이 호주머니에 없음을 알고, 자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여러 가지 정황을 알아보는 등, 또 한차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늦게나마 술김에 아내에게 돈을 이미 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씻을 수 없는 흠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사십 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일을 조금씩은 이야기한다지만 ······.’
‘그는 무슨 생각을 많이 할까?’
‘그는 어떤 생활을 할까?’
-경 2- 늙마에야
그는 요즈음 새로 철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혼자서도 싱글벙글하면서 자꾸 흐뭇한 표정을 보인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마냥 즐겁기만한 듯한 인상을 준다. 칠순을 넘긴 이제야 지난날의 자기 행적을 되새기면서 늘그막에나마 망상일지언정 젊은 꿈을 꿈이 아니겠는가?
스물넷에 한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와 은은한 사랑으로 혼인하여 아들 딸 낳고 살아오는 중 시집살이를 비롯한 아내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는커녕 살림살이 돌아가는 사정이며 아내의 고충을 거의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남들은 혹 그들 부부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사실 속내는 그러지 못했음을 그는 후회하고 있다.
그의 아호(雅號)는 ‘임산(林山)’이다.저명한 한학자였던 그의 장인이 “산(山)이 참 좋은 것이다. 그리고 임(林)은 송림(松林)을 비롯하여 ······ .” 호에 관한 많은 풀이를 들려주면서 지어준 호이다. 대저 숲은 산에 이루어지고 산은 숲이 없으면 본연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산과 숲을 아울러 생각함이 당연하고 아름다움이라 본다. 이제 ‘林山’에는 장인이 밝히지 않았던, 당신의 딸과 사위의 인생을 이상적으로 그려보고 소원한 바를 ‘호(號)’로 표현한 것이라는 추측을 더욱더욱 굳혀가며 그 뜻을 실현하려고 희망에 찬 노력을 한다. 그의 아내 이름의 소림(小林)에서 임(林)을 가져다 산(山) 앞에 붙여 소림의 ‘산’이 되라는 기원이었을 거라고.
요즈음 그는 ‘전업주부’의 역할에서 벗어나 통상적인 노부부 생활에서의 남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2 년 전에 그의 아내가 한쪽 다리를 절단에 가까운 대수술을 받은 때부터 하는 일이 달라졌다. 이 불의의 우환은 앞을 시원하게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의 불안마저 드리워 절망의 늪으로 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부는 우려하는 탈이 없이 나아지리라는 쪽으로 기대하면서 투병과 간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내는 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휠체어가 아니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어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화장실 일을 볼 수 있는 생활을 한 달 반 동안 한 뒤,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발을 하고 있다.
때문에, 꽤 오랜 날 아내의 말에 따라 취사에 이르기까지 주부 고유의 역할까지 해냈다.거기에 아내의 발과 다리는 붓고 저려서 자꾸 주물러야 하는데 본인은 다리를 굽힐 수 가 없어서 그가 수시로 주물러야하는 등 거들 일이 많았다. 따라서 그의 집밖의 활동은 제약을 받아 약정한 모임에 거의 참여할 수 없었고 가사에 더욱 충실해야만 했다.
아내의 신체적 조건에 따라 실내생활 양식이 달라졌다. 다리를 구부릴 수 없기에 낮은 바닥에 앉고 눕기와 거기에서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침실에는 침대가 새로 필요했고 거실의 소파도 바꾸어야 했다. 그의 생활 형편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병원과 가구점에 지불할 금액이 일천만 원에 이르러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이 서둘러 알아보고 절차를 밟아 지불하고 들여 놓을 것은 이용하기 편하게까지 해주어서 고마움과 보람을 느꼈다.
그는 환자를 간호하고 치료하는 일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심리적인 현상을 잘 알아차려서 좋은 방향으로 스스로 마음을 쓰도록 도와주는 일인 것을 아내의 간병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겪은 일들의 속사정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단다. 매우 극단적이고도 기막히는 속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요사이, 그는 어떻게 하면 그의 아내와 늘 즐겁게 살 것인가에 고심한다. 고심한다고 무슨 유별스러운 좋은 수가 생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만날 궁리하던 차에 우연히, 버스터미널의 그림 전시 판매장에서 그의 마음을 서서히 이끄는 한 그림을 발견하였다. 그 그림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을 간지럽혔다. 그것은 실로 그에게는 어떤 영감을 주는 듯한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림은 손바닥으로 덮으면 다 가려지는 작은 유화였다. 그림을 샀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였다. 꽃 네 송이, 나비 두 마리, 남녀 어린이 둘 뿐이다.ꀰ(왼쪽 그림은 그가 산 그림을 본따 그린 것임) 그런데 그것이 어찌 그의 마음을 질기게 끌었을까? 그는 그림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상상하였다.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던가?’ ‘앞의 남자는 누구라하고 뒤의 여자는 누구라했으면 좋겠는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놀이를 한다고 할까?’ ‘얼마나 즐거울까?’ ‘꽃과 나비에 어떤 뜻을 붙이면 좋겠는가?’ ‘······.’ ‘······.’ ······등, 관련된 것들을 한없이 더듬으며 생각나는 것들마다 그럴듯한 좋은 뜻을 붙였다.
그는 그 그림을 그의 부부가 만날 함께 쓰는 침대 머리맡에 걸었다. 그는 아내와 매양 함께, 그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새 그의 부부가 아기자기 사는 일을 은밀히 하고 있다.
-경 3- 위아래 사촌
그가 헤아려 보니 당시 그의 아내도 환갑을 앞둔 그들 부부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십 여년이 되었다. 새 입주자들이었기에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친근하려는 분위기였다. 그의 집 위층에 초등학생 이하(지금은 고,대생)의 자녀 삼남매를 둔 젊은 부부가 먼저 입주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윗집의 애들 엄마는 아랫집의 그들 부부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만나는 인사말에 덧붙이는 일이 한동안 잦았다. 아이들이 철없어서 뛰고,싸우고,장난치고,······ 시끄러워 정신이 산란하고 생활에 방해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대저, 이런 일로 더러 속상하고, 쫓아 다니면서 행동을 억제할 것을 강요하는 등의 일로 비우호적이거나 적대시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기에, 그들은 좀 불안했다. 그러나 우려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윗집 애들 아빠가 20ℓ 들이 물통에 생수를 가득 담아서 그 무거운 것을 아랫집 노부부에게 가지고 왔다. 며칠 뒤에도 또 몇 날 며칠, 노부부가 그 때마다 그 힘든 일을 만류했으나 자기들의 물을 받아 올 때 함께 운반한 것이라면서 일 년 쯤 계속했었다. 애들 아빠의 근무지가 약수터 근처여서 그리 했었는데 전근 되면서 못하게 됐다고 했다. 물통이 다 차도록 물을 받는 시간도 많이 썼을 것이고 그 무거운 물을 차에 옮겨 싣고 집에 와서는 주차장에서 집으로 들어 나르는 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이라도 이런 일은 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애들 엄마는 어지간한 정도를 훨씬 넘다 싶은 선심을 노부부에게 쓰고 있다. 평소 김치를 비롯한 새로 생긴 반찬, 소소한 생활 용품, 색다른 음식이나 물품 등을 선사했으며 명절을 맞으면 작정하고 애써 골라 산 물건을 선사한다. 이에 노부부는 답례랍시고 한다지만 그저 마지못해 시늉만 하는 것 같고 그나마 아예 답례도 못할 때가 많다. 아래층 노부부는 위층 젊은 부부를 항상 매우 고맙게 여긴다. 그 두 집의 주부들은 그야말로 세대차가 크지만 만나면 서로 서슴없이 말하고 살림살이, 교육, 가정사, 주부생활, ······ 등, 은밀히 감추어야 할 일까지도 터놓고 말하고 더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해결책을 궁리하기도 한단다.
약 일년 전 어느 날 아래층 앞쪽 베란다를 지나는 하수관의 물이 새고 있었다. 그는 느닷없는 일이고 조금 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예상이 안 되고, 자칫 위층에 지나친 걱정거리를 주게 될까 봐 망설였으나, 서너 시간이 지난 뒤에 전화를 통해 이상 유무를 살펴 보라고 했더니 위층 중학생이 이상 없다 하여 그가 직접 올라가 살펴 봤더니 중학생은 이전에 내실 화장실 하수가 샌 일이 있었기에 거기를 봤었고 물은 앞 베란다의 세탁기에 연결하는 수도꼭지의 연결호스가 빠져서 많은 물이 오랫동안 흘렀던 것이다. 아마 그달 수도 사용료를 꽤 더 많이 납부했을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않아서 그의 화장실 천정에 물이 새어 뚝뚝 떨어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으나 떨어지지 않고 샌 부근에 번졌다 말라지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위층에 알렸더니 애엄마가 와서 살펴 보고 난 뒤, 공사의뢰를 했는데 공사비가 약 15만 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물이 새는 원인을 살펴 보기로 하고, 자세히 보니 실리콘으로 물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되어 공사약속을 취소하고 그가 직접, 마침 사용중이던 시리콘을 써서 쉽게 물막이에 성공하였다. 하마터면 심히 속상할 뻔했는데, 돈은 안들고 정은 더 두터워졌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
그는 혼자서 싱글벙글 웃었다. (‘이웃 사촌’ 아닌 ‘위아래 사촌’이라고.)
-경 4-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그는 너무 억울하여 몸부림 칠 지경이었다. 막연하나 장차 무엇인가 될 것도 같은 청운의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 그의 집은 기어들고 기어나는 토담집이라, 집 뒤 감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을 덕을 만들어 놓고, 그날도 더위와 가깝함을 피하여 책을 읽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의 아버지가 장대로 xxx을 쑤시면서 “야. 이놈아, 거기서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어서 일 안할 것이냐?”하면서 마구 쑤셔대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집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매우 가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한동네 친척 집에서 머슴살이로, 어머니는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일제말에 중학교 진학을 엄두도 못낼 처지였으나, 8‧15 해방 덕분으로 어렵사리 왕복 사십리 길의 읍내 중학교에 통학할 수 있게 되었다. 도보 통학하면서 왕복하는 길거리에서, 밤에 거의 자지 않고 공부했다. 시간이 아까워 더러 읍내에서 방을 얻어 여럿이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늘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으며 걸음걸이는 휘청거렸다. 영양 부족 탓도 있었으리라.
그는 명작 소설을 비롯한 양서를 빌려 탐독했으며 수학 문제를 즐겨 풀었고 영어 단어는 사전을 외울 작정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시부렁거리며 익혔다. 그리하여 수많은 단어를 익혔고 영문 해석의 실력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흐르는 누런 코를 훌쩍 훌쩍 들이마시는 유별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 중 더러, 어릴 적에 코를 많이 흘리는 사람은 재주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를 은근히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어린 나이(동기생 중 가장 어렸음)에 오직 공부할 욕심으로(애석하게도 밤잠도 못 자면서까지 ‘짚가마니’를 짜 팔아서 학비를 대던 형이 갑자기 실명했다.) 무작정 상경하였으나 길이 잡히지 않아서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돈을 벌어 모아 대학에 진학하려고 구두닦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돈이 모아지기커녕 생계도 서지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미군의 구두를 닦을 때 미군과 대화하면서 ‘아, 그래. 바로 이거야. 미군과 이야기하면서 회화를 익히면 써먹을 때가 있겠구나.’ 하고 당장 구두 닦을 장소를 미군 부대 앞으로 옮겼다.
이제 새로운 일이, 어려우나 희망이 보이는 일이 시작되었다. 구두약이 묻은 얼굴이 땀범벅이 된 것도 모르고 신나게 구두를 닦으면서 그의 머릿속에 든 풍부한 영어 문장과 단어를 부지런히 멋대로 구사하여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수련을 쌓았다. 그러다 그의 회화 실력을 알아 주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걱정할 일이 없어졌고 장래를 설계할 겨를도 생겼다.
그는 미군 부대의 계급도 군번도 없는 잡역부에서, 마침내 제대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 장교가 되었다. 새우잠을 자고, 얻어 먹고, ······ 천대 받던 일이 모두가 그가 그 자리에 오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좋은 추억이 되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미군과 한국군의 중요하고 긴박한 회담이 있을 때 특별 비행기 편으로 그를 모셔다(?) 회담에 임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옛날을 회상하면서 자손들의 일을 생각한다.
-경 5- “가서 밥이나 먹고 와.”
그는 남의 덕을 많이 보고 사는 편도 아니며, 행여 덕이라도 볼까? 하는 요행도 바라지 않고 살았다. 그는 열 살 때 부친 사망으로 호주가 되었으며, 누나가 그 이듬해 시집 간 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세 동생과 생활했다. 그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자기 처지를 모르는 ‘미친 놈’이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먼 도시의 고등학교 까지 마치도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했으나 지금도 지니고 있는 그의 본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지금도 자기 힘만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면서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나 스스로 넉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간다.
그는 마흔 다섯 살이 되도록 가족(모,처,네 자녀)이 함께 살 자기 소유의 집이 없었다. 1천만 원 정도면 작은 한옥은 살 수 있었는데 가진 것은 6백만 원 정도였다. 이 때 다행히 정부에서 무주택자에게 주택자금으로 5백만 원 씩 대출해 줄 수 있다는 통보가 있었는데, 정해진 기간 내에 소정 서류를 구비하여 조건을 갖춘 두 사람의 보증인과 함께 지정한 은행에 가서 수속을 이행하여 대출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직장 동료에게 보증인이 되어 수고할 것을 부탁하면 좋겠구나 싶어 들어 줄 만한 사람들에게 부탁했으나 뜻밖에도 여러 가지 그럴 듯한 핑계를 대어 거절하므로 칠십 여 명의 동료 중에서 한 사람의 보증인도 내세울 수 없는 허망함과 인심의 야속함에 몹시 언짢아 했다. 저리로 2 년 거치 후 5 년 월부 분할상환의 좋은 조건이고 그로서는 그 기회를 놓치면 주택 구입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가슴 조였다. 이젠 직장 밖에서 보증인을 꼭 내세워야만 했다. 집을 기어이 사야하는 절박한 사태인 것이다.
그는 정해진 마감일 바로 안날에야 고향 친구를 찾아 가서 보증 서 줄 것을 쾌히 승낙 받았고, 또 한 사람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인척 관계인 어른이 자기는 주민등록 관계로 보증을 설 수 없다고(그가 추측하기는 핑계인 듯했으나) 다른 사람을 내세워 주었다. 이튼날 약속한 시각에 인척 어른이 내세운 보증인이 나오지 않아 영문을 알아 봤더니 먼 곳으로 출타했다고 했다. 보증인 될 것을 사실상 취소하여 거절한 것이다. 오전 중이라 남은 시간은 좀 있었으나 사태로 보아 매우 급박했고, 그는 절망하면서 허둥지둥 몇 군데 전화연락을 했으나 모두가 그럴듯하게 핑계를 대어 거절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문득 뇌리를 스치는 변호사인 친구를 찾아가 만나기를 서둘렀다. 변호사 사무실이 은행과 가까우니까 ‘만나야 할 사람만 있으면······.’ 하고.
사무실에 들어서니 친구(그의 중학교 동기생,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에 울렁울렁한 것을 짓누르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 줄 몰라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 집 좀 사 줘.”
“무슨 집?”
“나, 돈 좀 빌려 줘.”
“얼마나?”
“오백만 원”
“에끼, 이 사람.”
친구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친구와 마주 앉아
“사실은,······.”
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것을 다 듣고 난 친구는 선뜻 응낙하지는 않고, 점심을 먹었냐고 묻더니 “가서 밥이나 먹고 와.”한 것이었다. 그는 시원찮았으나 승낙한 것으로 알고 밖으로 나갔다. 앞서 보증인으로 온 고향 친구가 점심을 같이 하면서, “사실은, 남의 보증 섰다가 집이 차압 당한 일이 있어서 절대로 보증 다시는 안 설려고 했는데···.”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제야 많은 것을 두루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보증, 친구, 우정, 인심, 동료, 신뢰, ······ 등 세상만사를 전에 없던 철든 눈으로 볼 수 있기를 자신에게 기대하면서.
점심후 다시 그가 사무실에 갔을 때 마침 친구가 들어섰다.
“자네 때문에 손가락에 인주 묻혔네. 인감 내느라고.” 하면서 화장지로 손가락을 닦았다. 인감증명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들은 이야긴데, 자기 자형이 보증을 서 달랬더니 할 수 없다고 타인을 소개해 줘 많이 섭섭했는데, 알고 보니 보증을 안 서려고 인감을 내지 않고 지내더란다.
그는 두 친구의 남다른 도움으로 집을 샀고, 그로 인해 지금 자손들이 드나들기 옹색하지 않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보답을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그대로 지내고 있다.
첫댓글 신신애가 요지경을 부르고 메니저에게 사기 당한 사건이 있었죠. 참, 요지겨~ㅇ이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