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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6)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③ 원동 가야진사→ 양산(물금)
2020년 11월 09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재(再) 출행
* [오늘의 여정] ▶ 삼랑진역→ 경부선 굴다리→ 송지시장→ 삼랑진성당→ 낙동강역(경전선)→ 낙동강 제방길 바이크로드→ 직선의 제방길→ 수변공원(생태문화공원)→ (처자교 유적지)→ 굴다리(경부선)→ 작원관지(깐촌-한남문-의령탑)→ 천태산 시루봉 절벽→ (작원잔도)→ 수변공원→ 양산(원동 중리마을 굴다리)→ 수변공원→ 가야진사공원→ 원동천 하구(굴다리-원동)→ (원동 순매원 전망대)→ 작은 굴다리(하얀집팬션)→ 서륭공원→ 화제천 하구(김정한 수라도 문학비)→ 원동취수장→ 황산베랑길→ 물금취수장→ (경파대)→ (용화사 / 임경대)→ 양산시 물금 황산공원→ 굴다리→ 물금 서부마을→ 물금역(블리스호텔)
가야진사 공원
‘태극기에 대한 사색’을 마치고, 다시 길 위에 섰다. 원근법의 소실점이 아득한 직선(直線)의 바이크로드, 멀고 먼 길이 눈앞에 이어진다. 강안이 보이지 않는, 너른 수변공원이다. 가을이 깊어 갈빛으로 변한 잔디밭과 산책로 등 광활한 공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맑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길을 걷는다. 12시 40분, 가야진사 공원에 도착했다.
‘가야진사공원’는 양산시는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 너른 수변공원에 조성된 테마공원이다. 최근에 준공했다. 4만1천147㎡ 터에 매화정원과 가야진용신 상징관문, 용신설화 테마광장, 용의 언덕, 전통놀이마당, 챌린지 코스(어린이 놀이터), 강변길(산책길), 파크골프장, 이동식 전시관 등을 조성했다. 2017년 1월부터 시작한 이 사업에 총 28억원이 투입됐다.
낙동강 용신설화와 가야진사 제례의식, 원동면 대표 특산물이자 관광자원인 매화를 주제로 해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시설물을 설치했다. 옛 가야진사의 생생한 모습과 용신설화에 대한 역사체험 등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우선, 진입로에 들어서면 용신을 상징하는 '가야진용신 상징관문'이 눈에 띈다. 이어 용신제 설화와 제례의식을 표현한 '용신설화 테마광장'을 만날 수 있고, 광장 맞은편 '용의 언덕'에는 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들어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원동지역 대표축제인 원동매화축제를 즐길 정원도 조성해 자연이 숨 쉬는 공간으로 꾸몄다. 이 밖에 전통놀이마당, 챌린지 코스(어린이 놀이터), 강변길(산책길), 파크골프장, 이동식 전시관 등 체육ㆍ문화시설을 확충했다.
가야진사(伽倻津祠)
가야진사는 김해시 상동면과 양산시 원동면 경계의 낙동강 동쪽에 있다. 원래는 저기 양산시 원동면 낙동강 나루터 용당리의 비석골에 있었으나 196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나루터신[津神]을 모시고 있는 제당으로, 신라가 가야(伽倻)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진사(伽倻津祠)’는 삼한시절부터 국왕의 이름으로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를 지내는 곳이다. 사당이 있는 이 나루는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곳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촉(香燭)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올려 장병의 무운장구를 빌었다. 제관이 된 양산군수의 권한은 막강했는데, 인근 지방 수령이 봉로로 뽑혔을 때 군수의 명으로 향로에 불을 많이 담으면 손이 타더라도 땅에 놓지 못했다. 만약 향로를 땅에 놓으면 역적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양산지역 사람들은 이 사당의 창건연대가 신라초기이며, 신라가 가야와 백제를 방비하고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린 곳으로 알고 있다.
1983년 경남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됐고, 해마다 5월이면 경남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가 열리고 있다. 삼국시대 당시 국가 제례가 치러지던 4대강 제례지역 가운데 현재 전승되는 곳은 가야진사가 유일하다.
강변의 사방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안에 야외 석단(石壇)이 있고, 이어서 사방(四方)을 담으로 둘러친 외삼문(外三門) 안에 재실인 용산재(龍山齋)가 있다. 그리고 다시 담으로 둘러친 내삼문(內三門) 안에 가야진사(伽倻津祠)가 있다. 용신을 모신 가야진사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측면에서 볼 때 지붕 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대문채를 비롯한 모든 건물이 다 맞배지붕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제향을 모시는 건물은 거의 이 장중한 맞배지붕이다. … 내부로 들어서면 제(祭)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상이 있고, 그 위에 머리가 셋인 용(龍)을 그려 놓은 그림이 놓여 있다. 현재의 사당은 조선 태종 6년(1406)에 세운 것으로 전하며, 옛 건축물로서 민속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여름철 가뭄이 극심할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가야진사의 전설(傳說)
가야진은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변 용당 앞 용소에 있는 나루터였고 황산진은 물금면 서부리 황산역과 임경대 부근에 있었던 나루터였다. 가야진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없다. 삼한 또는 사국시대의 설화가 전해 오면서 조선 성종 이전부터 가야진에는 장터가 있었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주막이 있었고 가야 즉 지금의 김해 상동으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가야진(伽倻津)이다.
여기 가야진사에 모셔진 진신(津神)은 용신(龍神)이다. 김해 상동면 여차리 용산 밑을 흐르는 물은 낙동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한다. 여기에 용신(龍神)에 대한 설화가 있다.
옛날 양산고을(양주도독부) 사또가 경산감사에게 전령을 시켜 서찰을 보내고자 하였다. 전령은 사또의 서찰을 가지고 경산으로 가든 중, 해가 저물어 당시 용당 장터 주막에서 숙소를 정하고 잠을 청했다. … 전령의 꿈에 구렁이가 나타나 “나는 *황산강(낙동강) 용소(龍沼)에 사는 청룡인데 남편인 황룡이 내일 정오에 첩인 청룡을 데리고 승천 할 것인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첫눈에 보이는 물건을 구입하였다가 배를 타고 용소에 들어 와 남편인 황룡과 첩인 청룡이 나타나면 첩룡인 청룡을 죽여주소.”하고는 사라졌다. ☞ ‘황산강’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가락국 건국과 함께 동쪽 국경지대를 황산강이라고 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온다.
전령은 아침에 일어나 밤에 꿈속에 나타난 구렁이의 부탁을 생각하면서 밖을 보았다. 첫 눈에 보이는 물건이 낫이었다. 낫을 구입한 전령은 정오가 가까워져 배를 타고 용소에 들어 가 기다리니 황룡과 청룡이 나타나 승천의 용트림을 하는지라, 그런데 청룡을 죽인다는 것이 그만 황룡을 죽여 버렸다. …
그때 본처인 청룡이 나타 나 전령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첩룡인 청룡을 죽여야 하는데 남편인 황룡을 죽였으니 나와 함께 용궁으로 가야한다.”면서 그 전령을 데리고 용소(龍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부터 배가 뒤집히는 등 알 수 없는 재앙(災殃)이 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하서면 소재지였던 용당 장터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당을 세우고 용 세 마리와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냈다. 가야진사는 1938년도에 천태산 기슭으로 옮겼다가 1966년도에 현재의 용당리 용소 앞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의 용당 장터에서 살던 사람들이 옮겨간 곳이 현재의 원동면 원리마을이다.
이만도불망비(李晩燾不忘碑)
가야진사를 둘러싸고 있는 외삼문 담장 가장자리에 빛바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의 형태는 지대석 위에 비문과 전각형의 비석머리를 올린 기본형이다. 읽어보니, ‘행군수이후만도영세불망비(行郡守李侯晩燾永世不忘碑)’이다. 아! ‘이만도’라면 퇴계(退溪)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구한말 독립지사(獨立志士)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이 아닌가. 해설을 읽어보니 내 예측이 적중했다. 해설판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만도 불망비, 1880년(고종17년) — 이 비석은 조선 후기 양산부사를 지낸 이만도의 선정을 기리고자 세웠다. …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876년 양산부사를 지내면서 구휼미(救恤米)를 풀어 많은 백성들을 구해 칭송이 자자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순국(殉國)의 독립지사 향산 이만도
이만도(李晩燾)는 1842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에서 아버지 복제(復齊) 이휘준(李彙濬)과 어머니 야성(冶城)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11대손이며, 조부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은 순조 11년(18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고, 부친인 이휘준도 철종 7년(185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명망 높은 관리였다. 이만도는 일찍부터 부친과 족형인 이만각(李晩慤)에게서 퇴계학을 전수받았고, 18살 때 봉화 유곡의 안동 권씨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 권승하(權承夏)는 아우인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와 함께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저명한 학자였기에, 이만도는 이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집의 등을 거쳤다. 1876년에는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자 사간원 집의로서 대사간(大司諫) 이재경(李在敬), 사간(司諫) 신석구(愼錫九), 장령(掌令) 오인영(吳麟泳)과 함께 최익현을 추국해 죄를 캐물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성균관 사성, 홍문관 응교 등 여러 관직을 지낸 이만도는 양산군수로서 세금 징수를 너그럽게 하고 물난리를 만나 곤경에 처했던 백성을 도와 칭송을 자자했다. 이 공(功)으로 그는 홍문관 수찬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 및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월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아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고향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이만도는 "신하된 몸으로 천고에 없는 변을 당했는데도 의거를 일으켜 복수하지도 못하고, 상례(喪禮)를 치를 여지조차 없으니"라고 개탄했다. 게다가 그해 11월 17일 일제가 단발령(斷髮令)을 발표하자, 그도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895년 11월 29일 안동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 이인화(李仁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장이 되었고, 이중린은 선봉장, 이인화는 유격장을 맡았다.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과 대신들을 강압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에 이만도는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아! 저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권중현(權重顯), 이완용(李完用) 등 5적이 저들과 더불어 5조(條)의 계약을 정하고 성명(聖明)을 협박하여 마침내 조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5적은 대대로 벼슬하여 국가와 좋고 나쁨을 함께 한 신하로서 교묘히 위기를 틈타 협박을 자행하였으니, 그 마음을 따져 보건대 도리어 원수보다 더 흉악합니다. (중략)’
그러나 아무런 비답을 받지 못하자, 이만도는 크게 실망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통곡했다.
1910년 9월 4일, 이만도는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과 권재훈(權載勳)으로부터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다가 이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가 원수 앞에서 목숨을 끊고 묘당에서 피를토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태연히 눕고 밥을 먹으며 숨을 쉴 수 있겠느냐?”(향산 청구일기) 9월 17일, 그는 단식을 시작했다. 이만도는 10월 10일 단식 24일만에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의 유해는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만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대를 이은 독립운동 *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李中業, 1863~1921)은 을미의병에 가담했고, 아버지가 순국한 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가담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서명을 받아내는데 힘을 보탰으며, 1920년 중국에 독립 청원을 하기 위해 장남 이동흠을 봉화 사동에 머물던 권상익에게 보내 청원서 작성을 부탁해 초안을 받아낸 후 중국으로 가지고 가려 했다. 그러나 1921년 7월 23일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중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만도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부인인 김락(金洛, 1862~1929) 은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 이동흠(李棟欽)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으며,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눈을 모두 실명하고 11년간 고통 속에서 살다가 1929년 2월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중업, 김락 부부의 아들이자 이만도의 손자인 이동흠(李棟欽. 1881~1967)은 1917년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아우 이종흠(李棕欽, 1900~1976)과 함께 중국에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6년 또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고향에 은거했다가 1967년 9월 1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동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아우 이종흠 역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1986년 3월 1일에는 한 집안 3대의 독립유공을 기려 3대(三代)독립운동가문으로 지정 받았다.
[경북북부보훈지청] 2018년 10월 이 달의 현충시설 향산 고택 (향산 이만도 선생 생가) 선정
경북북부보훈지청(지청장 김상출)은 10월 이달의 현충시설로 향산고택(경북 안동시 퇴계로 297-6)을 선정했다. 향산고택은 순국으로 일제에 저항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생가이자 3대의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자부심이 깃든 독립운동 현충시설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09년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독립지사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을 추모하며 —
가야진사 앞에서 향산 이만도 선생의 불망비 앞에서 숙연히 추모를 올렸다. 청명한 하늘은 무심히 눈이 시리게 맑고, 돌아보면 수심 깊은 낙동강 물결은 가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찰랑이고 있었다. 이렇듯 세상은 화사한 햇살 아래 멀쩡하게 평화로운 풍경이다. 격동기의 한 시대를 살다가 고절한 선비는 ‘시대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스스로 한 몸에 안고 의연히 목숨을 다하셨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 임금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의 소식을 듣고 홀로 동해의 외진 곳에서 굶주리다 돌아가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절명(絶命)시(詩)를 써놓고 자결하신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 등 — 청렬한 의기(義氣)와 뜨거운 충정(忠情)으로 시대의 고난을 자신의 책임과 자괴감으로 안고 신명을 다한 분들이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니 숙연히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무능한 정권은 멀쩡한 나라를 망가뜨리고 온갖 불온한 정치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다. 더러운 탐욕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권력의 모습이 부끄럽고 역겹다. 향산 선생이 처한 상황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스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가야진사에서 당곡마을 굴다리까지
너른 수변공원은 ‘가야진사’ 주제 공원이다. 경내 주위를 둘러보고 낙동강 나루의 강안을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바이크로드의 주로에 들어섰다. 길목에 이정표가 있다. 원동의 ‘원리마을까지 2.4km’, 원동역 강안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천태사 4.0km’, 천태산에서 내려오는 신곡천(1022도로)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태사(천태정사)가 있다.
천태산 신불암고개(삼랑진-양산의 경계)를 넘어온 1022번 도로는 천태사 일주문 앞에서 신곡천과 함께 내려오다가, 신곡천은 원동천을 만나 낙동강에 유입되고. 1022 도로는 원동교(원동천)를 건너 토곡산 산록의 원동(면) 마을을 지난다.
당곡마을(1.5km) 로 들어가는 굴다리 입구에 이정표가 있다. ‘↓삼랑진 5.6km ↑양산 10.2km’, 이제 길은 경부선 철로를 따라 이어진다. 직선의 바이크로드 너른 길 주위에는 눈부신 억새꽃이 하늘거린다. 고개를 들어보면 길의 정면에는 토곡산이 솟아 있다.
원동천, 경부선 원동역 부근
오후 1시 15분, 원동천 하구의 다리를 지났다. 때마침 완강한 콘크리트 다리(철로) 위에는 무궁화열차가 차바퀴의 쇳소리를 쏟아내며 질주하고 있었다. 조금 내려오면 원동으로 들어가는 굴다리가 있다.
원동역은 대한제국에서 경부선이 부설되었던 직후부터 영업을 개시한 유서 깊은 역이다. 경부선 원동역에서 삼랑진역이나 물금역 간의 역간 거리는 상당히 멀다. 원동역에서 삼랑진역은 9.1㎞, 물금역과는 9.2㎞이다. 오늘의 낙동강 여정도 이와 비슷하다. 낙동강 바이크로드가 경부선 철도와 거의 나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동역 역사는 1988년 완공한 것으로, 현재는 화물열차나 고속열차는 서지 않고 여객 열차만 정차한다, 아담한 역사가 아름답다.
원동면 지역은 양산시내와 부산광역시와의 거리가 매우 가깝지만 남쪽으로는 낙동강, 동쪽으로는 토곡산과 오봉산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어 도로 교통이 매우 불편한 지역이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철도가 지역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이 지역은 낙동강을 철도가 휘감으며 달려가느 경치가 무척 좋은 곳이다. 원동역 위에 있는 1022번 도로의 토곡산 산록에 조성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원동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순매원이 있다. 봄이 되면 매화꽃이 활짝 피어서 장관을 이룬다. 이 때는 매화꽃과 낙동강변의 기찻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들도 많이 찾아온다. …
양산시 원동면 일대 영포마을을 비롯해, 쌍포·내포·함포·어영마을 등에 매화밭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영포리 영포마을은 마을 전체가 거의 매화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년 남짓 된 2만 그루의 매화가 봄이면 향기를 뿜어낸다. 개인 농원인 ‘순매원’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까닭에 매화밭과 강, 철길이 어우러진 멋진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위에는 사진을 찍고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다.
원동역 아래 강안의 벤치
오후 1시 30분, 원동역 아래, 바이크로드의 낙동강변에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배낭을 풀고 벤치에 앉아 아침 삼랑진에서 준비한 김밥과 우유로, 햇살을 반찬 삼아 간단하게 점심 요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머나 먼 바이크로드
이어지는 길은 좌측은 경부선 철로의 콘크리트 옹벽이고 오른쪽은 가드레일이 시설된 짙푸른 낙동강변이다. 강안에는 간간이 왕버들나무가 초록빛을 지닌 채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쑥 고개를 내민 억새가 눈부시고 … 길은 시퍼런 대나무 숲길을 지나고 다시 억새꽃이 즐비한 둔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너른 강변의 둔치는 경부선 철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고 낙동강 강안도 보이지 않았다. 좌우는 하얀 억새와 빛바랜 잡초들이 채우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의 주로가 뻗어가는 길, 그 정면에 산봉이 점점 다가온다. 양산 물금의 오봉산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서룡수변공원
오후 2시 37분, 서룡수변공원에 도착했다. 너른 둔치의 길목에 이정표가 있다. ‘↓가야진사 6.1km↑양산, 물금 4.3km' 여기서 굴다리로 나가서 1022번 도로와 연결되는 뻘동길로 나가면 화제마을이다. 지난 11월 3일 벗들과 카니발을 타고 지나다가 굴다리를 통해 들어와 본 적이 있는 공원이다.
서룡수변공원은 양산시 원동면 서룡리에 있다. 지난 3일 원동의 전망대(순매원)에서 낙동강 풍경을 조망하고 토곡산 고개를 넘고, 산굽이를 돌아서 경부선 철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에서 … 오른쪽 경부선 철로 굴다리를 지나 이곳 서룡수변공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서룡수변공원’은 양산의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의 길목으로 자전거 수리점, 자전거 임대, 바이커들을 위한 편의점(Chef Truck) 등이 있는 곳이다.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잠깐 들렀던 때의 분위기와은 사뭇 다르다. 그때는 벗들과 차를 타고 공원에 들어와 낙동강 강바람을 쐬고 지나갔었다면 오늘은 나 홀로 걸어서 지나가는 길목, 멀고 먼 노정이다. 상당한 피로감으로 느끼면서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길이다. 너른 수변공원이 오늘은 좀 황량한 느낌이 들기도 하여 그대로 걷기를 계속했다.
수변공원 둔치의 중간으로 난 바이크로드, 양산 물금의 뒷산인 오봉산을 정면에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길은 바이크로드 3차로로 널찍하게 이어져 간다. 길가에 이정표가 서 있다. ‘↑낙동강 하구둑 33km ↓안동댐 352km’ 길의 가장자리에는 가을색의 풀들과 간간이 빛바랜 나무들이 서 있다. 계속 가도 그런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김정한의 「수라도(修羅道)」 문학비
오후 3시, 화제천 하구에 이르렀다. 화제천은 양산의 토곡산-선암산-오봉산 사이의 산곡의 물이 원동면 화제리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화제천 하구에 크고 작은 반원으로 디자인한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의 「수라도(修羅道)」 문학비가 맑은 가을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수라도(修羅道)」(1969년)는 일제강점기에서 광복과 6·25에 이르는 격변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낙동강 하류 어느 시골양반 집안(허 진사댁)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으로 한 집안의 역사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김정한의 대표작이다. ‘수라도’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의 준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地獄)의 하나이다. 제목이 상징하듯 우리 민족의 근대사가 아귀다툼의 고통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특히 주인공 ‘가야부인’의 삶이 아수라의 역정이다. 소설 속의 ‘황산베리끝’은 원동취수장에서 물금취수장에 이르는 약 2km의 험난한 구간으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가 아귀다툼이라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인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은 내용 자체가 전쟁과 증오, 파괴가 그치지 않는 어둠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민족의식과 근대적 합리주의를 통해 아수라와 같은 시대적 혼란을 헤쳐가는 이야기 중심에 서 있는 ‘가야부인’은 유교와 불교의 조화,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는 인간애, 남녀평등의 실천 등 ‘한국문학이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형상의 하나’로 평가 받는다.
그런데 여기 원동면 화제리는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의 주무대이다. 작품에는 이곳의 여러 지명들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실제명이면서 마을의 배치와 거리감까지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소설 속의 ‘토교마을’은 화제천 하구에 있는 태고나루터를 말한다. ‘오봉 선생댁’은 ‘명언마을’에 위치하며, ‘대밭각단’은 죽전마을, ‘미륵당’은 용화사, ‘냉거랑 다리’는 화제교이며. ‘태고나루터’는 토교마을 근처에 있었다. 작품 속의 공간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 일대는 요산 소설 중 가장 명확하게 현존하는 문학의 현장이다.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
김정한(金廷漢)이 지은 중편소설. 1969년 6월 『월간문학 月刊文學』8호에 발표되었고, 1975년 삼중당에서 간행한 같은 제목의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가야 부인이라는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허씨 문중의 가계와 오봉산 밑 촌락의 변화를 통하여 한국 근대사의 변천을 보여준 작품이다.
가야 부인의 임종자리에서 외손녀인 분이는 과거를 회상한다. 가야 부인은 국권상실 다음해 유교가문인 허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왜놈이 주는 ‘합방은사금’이라는 것을 안 받고 밉게 보이다가 시할아버지는 서간도로 떠나고 시아버지 ‘오봉 선생’(여기 오봉산 밑에 살면서 붙여진 별호)은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만주 땅을 헤맸지만 가산만 탕진한다.
3·1만세사건이 일어나 시숙인 ‘밀양 양반’을 잃은 후 서생인 남편 ‘명호 양반’을 대신해서 온갖 집안살림을 도맡아온 가야 부인은 십여 년의 세월 끝에 집안으로부터 가모(家母)의 대접을 받기에 이른다.
완고한 유교집안에서 금지된 절 나들이를 시어머니와 손아래 밀양 동서를 보내기도 하는 가야 부인은 우연히 산기슭에 묻힌 돌미륵을 발견하게 된 일을 계기로 집안 살림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도모한다.
죽은 고명딸의 사위가 돌미륵을 모실 미륵당을 지어주고, 오봉 선생은 고등계의 어거지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출옥 후 누운 채 칠십 노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광복은 되었어도 명호 양반이나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은 출세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등계 경부로 있던 참봉집 맏아들도 피신해 있다가 경찰간부가 되더니 국회의원으로 뽑힌다. 가야 부인은 멀리 포성이 울려오자 막내아들의 이름을 불러보며 최후를 기다린다.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주인공 가야 부인의 삶의 역정이 ‘수라도’로 표상된다. 실제로 작품의 내용 자체가 전쟁·증오·파괴가 그치지 않는 어둠의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가야 부인의 임종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결국 인물의 일대기를 염두에 두면서도 전기적(傳奇的) 성격보다는 시대와 사회를 구상적으로 그려낸다는 포괄적인 연대기적(年代記的)형식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기 위하여 일제에 대한 항쟁을 그려내면서도, 전통적인 의식의 기반을 이루었던 유교와 불교의 갈등을 함께 그려내었고 또한 평민들의 삶의 의지를 중시하였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갈등이 여주인공인 가야 부인을 중심으로 극복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일면이다. 수난의 역사를 걸머지고 살아온 가야 부인은 부처의 인격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가야 부인의 신심에 의하여 모든 고난은 승화된 역사의 차원으로 고양된다.
더구나, 이러한 정신이 외손녀인 분이에게 이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는 점은 가야 부인의 이야기가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기억이며 이야기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며,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작가 김정한(金廷漢)
김정한(1908~19986)은 경상남도 동래(東萊)(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다가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 다음해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1928년 졸업 후, 울산 대현보통학교(大峴普通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1930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한편 『조선시단』에 「구제사업(救濟事業)」이란 단편을 기고하였다가 작품 제목만 살리고 내용은 전문이 삭제를 당하였다.
1932년에 귀국, 양산(梁山)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 1933년 남해보통학교(南海普通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農民文學)에 투신하게 되었다. 1933년 10월 남해공립보통학교의 교사가 된 그는 농민 계층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는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던 소작 농민들이 힘을 합쳐 쟁의에 돌입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 문체에 담은 「사하촌(寺下村)」을 써낸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이 작품이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필명으로 응모한 「사하촌」이 신문에는 본명으로 발표되는데, 그는 이로 말미암아 한바탕 회오리에 휩싸인다. 소설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범어사(梵語寺) 중들이 크게 반발하고, 장학관으로부터는 왜 농민을 선동하는 작품을 썼느냐고 힐책을 받는다. 그는 이 무렵 고향에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테러를 당해 두 달 동안이나 치료를 받는다.
이어 소설 「옥심이」·「항진기(抗進記)」·「기로(岐路)」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그 일에 관여하였다가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경찰에 피검되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붓을 꺾었다.
광복 후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이후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5·16 직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과 칼럼을 집필하는 한편 1967년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부산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다시 부산
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1974년 정년퇴직하였고, 그 뒤 1987년 민족문학학회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1966년 단편소설 「모래톱이야기」 발표를 계기로 중앙문단에 복귀하고, 이후 5년 동안 낙동강변의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암담한 일제치하와 그 이후 핍박당하는 농촌현실을 폭로하는 소설을 썼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고, 1971년 「산거족(山居族)」으로 제3회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특히 문제작으로 평가된 「수라도」는 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 진사(許進士)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한민족의 수난사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름 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킨 작가의 문제작의 하나로 꼽힌다.
한편 그의 대표작으로 1971년 창작집 『인간단지(人間團地)』를 발간하여 높이 평판되었다. 1990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단편 「인간단지」는 반인간적·반사회적·반민족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저항의 압권이란 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나환자 수용소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 원장의 비인도적인 처사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우 노인 일행은 정치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공화국 ‘인간단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필생의 소원을 이룬 듯 하였으나 나병환자들과는 이웃할 수 없다는 이웃 부락민들의 습격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복지사회를 모색해 본 민중의지의 강한 외침이라 할 것이다.
그 후 1977년 작품집 『사밧재』와 장편소설 「삼별초」, 그리고 수상집 『낙동강의 파수군』 등이 출간되었다. 197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4년 심산(心山)상 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내가 가진 소신을 버리지 말고, 나 보다 낮은 곳을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마라” —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이 수상집 「사람답게 살아라」에서 남긴 말이다. 부산 금정구 생가에 위치한 요산문학관을 들어서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글귀다.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
길목에 빛바랜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강한 햇빛과 비바람을 맞은 한문비석이다. 「梁山花濟石橋碑」(양산화제석교비)라는 제목을 가로로 쓰고 그 아래 비문은 세로로 쓰여 있다.
화제리 토교마을
화제석교비는 1739년(영조 17년)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 양산 화제천에 있던 다리로, 원래는 토교(土橋)였던 다리를 석교(石橋)로 고쳐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여 만든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에는 화제천을 건너기 위한 토교가 잦은 수해로 반복하여 무너지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큰 돌을 모아 홍예석교(무지개다리)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비석에는 다리의 이름과 위치, 다리를 세우게 된 내력과 당시 감독한 관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다리가 영남대로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교통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제천 하구, 천변의 굴다리를 통해 화제리로 들어갈 수 있다. 낙동강물이 시퍼렇게 하구의 안쪽까지 들어가 넘실거린다. 그 안쪽에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의 배경인 토교마을이 있다. 역사(歷史)가 사실의 기록이라면 소설(小說)은 그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시대의 실상과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문학(文學)이다. 작가 김정한(金廷漢)의 소설은 한국근대사의 질곡과 그 속에 고통하고 갈등하는 인간의 삶의 실상을 아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면서 중앙문단에서 남다르게 주목을 받은 우뚝한 문제적 작가이다. 특히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그의 일련의 소설은 격변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농민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시대의 아픔을 그려낸 휴머니스트이다.
새로 건설 중인 낙동강 교량
화제천 하구를 지나면, 원동취수장이 있고 바이크로드 좌측은 경부선 철로의 콘크리트 옹벽이고 우측 은 예의 낙동강 강안의 가드레일이 설치된 직선의 주로이다. 직선의 자전거 길이다. 그런데 낙동강 시퍼런 호수 위에 콘크리트 다리를 건설하는 중이었다. 지형적으로 볼 때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매리에서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를 연결하는 교량이다. 화제리에서 굴곡이 심한 토곡산을 넘는 1022번 도로를 양산 물금~원동까지 경부선과 나란히 달리는 직선화 도로를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는 다리인 것 같았다. 강을 건너오는 다리는 거의 80%의 공정이 끝난 상태에서 그대로 멈추어 있다.
황산베랑길
이어지는 길은 직벽의 콘크리드 옹벽 위로 철로가 지나가고 바이크로드는 낙동강 강위에 수상 테크 다리를 가설하여 놓았다. 이른바 황산강 베랑길이 현재적으로 재생한 시설이다. 옛날의 벼랑길은 가파른 절벽 아래 경부선 철로가 가설되면서 사라지고 그 아래에는 공간적이 여유가 없어 수상의 테크 다리를 놓아 자전거 종주길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행정안전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낙동강 종주 자전거 길 20선에 선정된 길이다. 대구의 강정보 위쪽에 가설된 수상 테크 다리와 같은 풍경이다. 발아래는 수심이 깊은 낙동강 검푸른 물결이 몸을 뒤채고 있다. 그리고 아득하게 열린 낙동강의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 길이다.
‘황산강’은 낙동강의 삼국시대 명칭이며 ‘베랑’은 벼랑의 지역 방언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황산잔도’ 구간으로서 주민들의 왕래가 잦은 길이다. 1900년대 초 경부선 철길에 편입되었으며 길이 완전히 닫혀버렸으나 2011년 행정안전부 ‘친환경생활공간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2년까지 2년에 걸쳐 조성하였으며 전체 2km 구간 중 1km는 수상에 테크 다리를 놓아 ‘낙동강 자전거종주길’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황산베랑길이 다시 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근에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겼다는 ‘임경대(臨鏡臺)’, 조선 고종 때의 선비 정임교가 이름 붙인 ‘경파대(鏡波臺)’, 보물491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용화사(龍華寺)’,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가 이 구간 내 위치하며 ‘황산강 베랑길’은 근대에 들어와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의 주요배경이 되기도 하는 등 많은 역사·문화 자료를 지니고 있다.
영남대로
원동취수장에서 부산시상수도본부가 만든 물 문화전시관에 이르는 수상의 바이크로드는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기차가 다닌다. 달리는 기차와 시퍼런 낙동강 사이에서 걸으면 맑은 햇살, 시원한 강바람이 시야를 환하게 열어준다. 데크형 교량을 통해 강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한강 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던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부에 이르는, 조선시대 9대 간선로 가운데 하나이며 960여 리에 달하는 길에 29개 주요 지선이 이어져 있었다. 옛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다녔으며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걸었고, 보부상들이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지나던 벼랑길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서울로 향해 진격하였던 길이기도 하다. 여기 ‘황산강 베랑길(황산잔도)’은 문경의 ‘토끼비리’, 삼랑진의 ‘작원비리’와 함께 영남대로 3대 잔도 중 하나로, 시퍼런 낙동강물을 아래에 두고 깎아지른 절벽 위를 걸어야 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어, 일반인들에게는 공포의 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잘 정비된 수상테크 길을 조성하여 지금은 자전거길과 보행로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불망비
수상 바이크로드 테크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강안에 비석(碑石) 하나 있다. ‘행동래부사정현덕영세불망비(行東萊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이다. 비석에 대한 해설이 테크 잔도의 가드레일에 게시되어 있다. 강변의 풀더미 속에 서 있는 비석이다. 이 불망비는 1871년(고종8년)에 조성하였으며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현덕(1810~1883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동래부사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경파대(鏡波臺)
베랑길의 중간 지점에는 시인 묵객이 노닐었다는 경파대 바위가 자리한다. 조선시대 선비 매촌(梅村) 정임교(丁壬敎)가 스스로 주인이라 자처했다는 바위다. 경파대(鏡波臺)는 조선 고종 때 정임교(丁壬敎)가 향토의 선비들과 함께 시를 읊던 장소로 양산 앞을 흘러가는 황산강(낙동강) 강변에 있는 암벽이다. 암벽 뒷면은 넓고 평펑하고 앞에는 낙동강의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나주 정씨 정임교(丁壬敎)는 이황(李滉)의 문인인 고암(顧庵) 정윤희(丁胤禧, 1531~1589]의 후손이며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연일현감 겸 진주진관병바절제도위를 역임했는데, 양산향교에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을 짓는데 도움을 주어 유학의 크게 일으키고자 하였다.
경파대는 황산강 연안의 한 암벽에 ‘鏡波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절경지다. 양산시 원동면에 있는 임경대에서 수백 보 아래에 있는 물금읍 물금리 낙동강 변에 있다. 정임교는 말년에 양산에 살면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놀면서 즐겼던 임경대(臨鏡臺)를 간간이 올랐다가, 우연히 임경대 수백 걸음 아래쪽에 위치한 한 암벽을 차지하고 ‘鏡波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파대’는 당나라 시(詩) 「채련곡(採蓮曲)」에 “거울 같은 물, 바람이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鏡水無風也自波)”고 한 눈앞의 경치를 떠올려서 붙인 것이다. 정임교는 스스로 ‘경파대 주인’이라 하고 「경파대기(鏡波臺記)」를 지었다. 그리고 임경대에 노닐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을 떠올리며 그 감흥을 칠언절구로 읊었다.
占石爲臺號鏡波 점석위대호경파 자리 잡은 돌을 대(臺)로 삼아 경파대라 이름하고
孤雲臺下一臺加 고운대하일대가 고운(孤雲)의 임경대 아래 또 하나의 대를 지었네.
詩仙去後遺餘地 시선거후유여지 시선(詩仙)이 떠난 뒤에도 뛰어난 경치를 남겨두었으니
企待遊人歲月多 기대유인세월다 여기서 노닐 사람 기다리며 많은 세월 흘렀네.
경파대는 강물과 접해 있는 깎아지른 듯한 자연 암벽 누대로, 암벽 윗면은 넓고 평평하다. 황산강과 바로 접해 있는 암벽에 ‘경파대(鏡波臺)’라는 새긴 글자가 남아 있다.
최치원의 「황산강임경대(黃山江臨鏡臺)」에 영향을 받았던 다른 시들이 최치원과 임경대를 노래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음에 반해, 「경파대 제영(鏡波臺題詠)」은 임경대에 노닐면서 그 아래에 있는 바위를 새로이 경파대라 이름 짓고 정임교 자신을 최치원에 빗대고 있다는 점에서 최치원이 보여준 시적인 정취를 적극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물문화회관-양산물금 취수장
오후 3시 45분, ‘물문화전시관’을 지났다. 황산강 바이크로드 수상 테크가 끝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물문화회관을 지나 물금취수장 앞을 지났다. 양산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별도로 만든 취수장이다.
물문화회관에서 경부선 철로 넘어 오봉산 산록에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용화사나 임경대로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물금에서 원동으로 가는 1022번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오봉산 기슭의 도로에서 낙동강 강안 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물문화회관이 있는 강안의 바이크로드에서도 들어가는 작은 굴다리가 있다. 김정한의 수라도에서도 나오는 용화사에는 보물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양산시 물금 오봉산
오봉산은 물금의 진산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와 원동면 화제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이며, 낙동강 연안의 제1봉(533m)에서 화제고개 남쪽의 제5봉(449m)까지 5개의 봉우리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오봉산의 남쪽은 양산천을 낀 ‘물금들’이고 그 건너편 동쪽에는 장군봉-금정산(고당봉) 산줄기가 높이 솟아 있다. 남동쪽 물금들은 부산의 배후 신도시로 개발되어 새로운 고층 아파트군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다.
오봉산의 서쪽은 낙동강과 접하고 있으며, 강 건너 김해시 영역에는 낙남정맥의 끝자락인 동신어산이 무겁게 포진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화제평야와 접해 있으며, 오봉산~작은 오봉산~화제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등산로이다.
제1봉 중턱에는 고운 최치원의 유상지인 임경대(臨鏡臺) 유적이 있으며, 주위의 낙동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테크 전망대가 시설되어 있다. 2001년 7월에 개봉된, 전지현이 열연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양산 용화사석조여래좌상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梁山 龍華寺 石造如來坐像)은 경상남도 양산시 용화사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의 불상이다. 원래는 낙동강 건너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던 것을 조선시대 말에 부근의 강변으로 옮겼으며, 1947년 2월에 법당(용화사)을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당당한 어깨, 양감 있는 가슴, 팔다리의 표현에는 입체감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으나 손이나 목 등 세부표현에서는 형식화된 면이 엿보인다. 얼굴은 네모지고 튀어나온 이마로 인해 힘이 있으나 가늘게 뜬 눈, 작은 코와 입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시대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왼쪽 어깨만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의 표현 역시 간략하게 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불꽃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 윗부분에는 작은 부처 1구와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에 비천상이 새겨진 경우는 매우 드문 예로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의 광배와 동일한 형식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연꽃무늬와 비천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으며 8각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중기의 불상 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부에서는 이상적인 면이 사라지고 형식화되어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용화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보살상(石造菩薩像)과 석주(石柱) 등이 봉안되어 있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91호 용화사석조여래좌상(龍華寺石造如來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양산을 대표하는 명승 8대(八臺)
양산은 산수(山水)가 어우러진 절경이 많다. 강안의 절벽에는 절경이 많고 그 바위 위에는 시인 풍류객이 정자를 지어 노닐었다. 저 남강의 상류 함양에 수많은 누대가 그렇게 조성되었다. ‘물 가까이 있는 누대가 먼저 달을 보는 법이며, 양지를 향해 뻗은 꽃나무가 먼저 봄을 맞게 되는 것이다.’(近水樓臺先得月 向陽花木早逢春)「석시현문40」라는 말이 있다. 대(臺)는 일반적으로 물 가까이에 지은 바위나 누대(樓臺)를 말한다.
대표적인 대(臺)는 경남 거창의 「수승대(搜勝臺)」이다. 퇴계(退溪)와의 사연이 얽혀 있는 곳이다. 명승 53호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이기도 하다. 수승대 바위에는 퇴계의 시를 비롯하여, 당대 시인 묵객들의 시가 바위 곳곳에 새겨져 지난날의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양산에도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적인 전통이 살아있는 바위[臺]가 많다. 대(臺)라 이름 붙인 곳은 15곳이 넘지만, 역사적인 의미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면서, 양산을 대표할만한 명승으로 8대(臺)가 있다. 낙동강 연안의 임경대(臨鏡臺)와 경파대(鏡波臺)를 비롯하여 강학대(講學臺), 반룡대(盤龍臺), 두연대(斗淵臺), 복룡대(伏龍臺), 원효대(元曉臺), 반산대(盤汕臺)가 그것이다.
임경대(臨鏡臺)
임경대는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정자다. 고운대(孤雲臺)라고 하는데, 황산강(현 낙동강의 옛 이름) 서쪽 절벽 위에 있다. 벽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관찰하기 어렵고, 시(詩)만 전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이곳 오봉산 기슭 바위에 올라 낙동강을 내려다보면서 낙동강 강물이 거울처럼 맑은 데 감탄하여 그 바위를 임경대라 칭하고 칠언절구를 남겼다. 임경대는 오봉산 제1봉의 7부 능선에 있는 바위 봉우리로 낙동강과 건너편의 산, 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산천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명소 중의 하나다.
물금에서 1022번 도로를 원동면 화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왼편에 육각의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정자는 양산시에서 관광객들의 쉼터로 만든 것이다. 임경대는 이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최치원(崔致遠)[857~?]의 문집인 『고운집(孤雲集)』 권1과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 권19에 「황산강 임경대(黃山江 臨鏡臺)」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임경대(臨鏡臺)는 황산강(黃山江: 낙동강의 옛 이름)가에 있으며, 최치원이 노닐면서 「임경대 제영(臨鏡臺題詠)」을 지었다고 하여 최공대(崔公臺)라고도 불린다.
煙巒簇簇水溶溶 연만촉촉수용용 내 낀 봉우리는 우뚝우뚝, 강물은 출렁출렁
鏡裏人家對碧峯 경리인가대벽봉 거울 속의 인가는 푸른 봉우리를 마주했네
何處孤帆飽風去 하처고범포풍거 외로운 돛배는 바람을 싣고 어디로 가는고
瞥然飛鳥杳無蹤 별연비조묘무종 별안간에 새의 자취 아득도 하구나
시 전체가 주위의 풍광을 읊고 있으나, 외로운 돛배와 새를 통해 최치원의 심경을 내비치고 있다. 최치원이 「임경대 제영」을 읊은 이후 수많은 시인이 임경대를 제재로 하여 시를 읊었으며, 임경대는 최치원의 시에 힘입어 향기로운 묵 냄새가 넘치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 김극기는 최치원의 시에 운을 따서 시를 지었고, 조선시대 김순룡, 안효필 등도 임경대에 대해 칠언율시를 남기고 있다.
현대판 황산잔도인 동강 푸른 물 위를 걷는 강안의 절벽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하릴없이 가슴에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게 1km의 테크 다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파대(鏡波臺)에 대한 안내판이 가드레일에 게시되어 있다. 강안의 절벽 위에 경파대가 있는 자리이다.
황산공원
오후 4시 양산신도시 취수장을 지나, 양산시 물금읍 수변공원인 황산공원에 도착했다. 물금읍의 황산공원은 물금역이 있는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사이의 광활한 둔치에 조성된 수변공원이다. 문화체육공원으로 문주광장, 중부광장, 서부광장이 있고 주차장도 있다. 야구장도 있고, 유적공원도 있고, 생태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공원의 대부분이 너른 잔디를 이루고 있지만 군데군데 나무가 서 있고 여기저기 억새군락지를 조성하여 오늘 따라 눈부신 억새꽃이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봄에는 유채꽃단지, 영산홍단지, 군데군데 야생화 꽃밭에 조성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거기 황산공원에는 낙동강종주 바이크로드가 직선의 주로로 지나가기도 하지만 여러 갈래의 산책코스가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이 강바람 산책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동강 강안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코스는 아주 일품이다. 맑고 푸른 낙동강물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황산공원 나루에는 선착장 등 여러 가지 수상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있어 부산-양산의 시민들이 애용하는 공원이다.
물금 앞의 낙동강을 고려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이라 하였는데, 그 까닭은 이 강이 황산(黃山) 앞을 흐르는 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황산(黃山)이라는 것이 현대 양산신도시의 서쪽 오봉산(五峰山)이라고도 전한다. 낙동강 북안의 현재 오봉산 기슭 물금에 구리의 원료가 생산되었는데 그곳의 색깔이 누런 색을 띄었기에 오봉산을 옛날에는 황산(黃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황산공원 낙동강 강가에서
오늘 하루, 삼랑진에서 물금까지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가을해는 아직도 강 건너 산을 넘어가지 않고 있다. 낙동강 강안의 황산나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낙동강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1300리가 넘는 길고 긴 낙동강 강물은 수많은 지천과 지류를 받아들여 유유하게 흘러서 내려 왔다. 그리고 이제 곧 바다로의 진입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30km 아래에 을숙도―낙동강하구둑이 있다. 그래서 황산공원 앞 낙동강은 호수처럼 고여서 은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채련곡(採蓮曲)」읊은 “거울 같은 물, 바람이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鏡水無風也自波)”고 한 강물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의 수많은 산곡(山谷)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이 여기 황산강에 이르러 이제 하나의 장엄한 낙동강을 이루었다. 영남의 깊은 산곡 여러 곳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갈래로 흘러오다가 한 몸이 된 물이다. 낮은 데로 임하는 물의 미덕이 이렇게 한마음 한 몸이 되어 대지의 푸른 강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갈래갈래 찢기고 너와 내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우리 인간사를 생각하면 가슴은 안쓰럽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잔잔한 물결이 되어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강물의 미덕, 사무사(思無邪)의 참다운 인간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금 서부마을과 환취정 이야기
오후 5시, 황산공원 제방에서 굴다리(경부선)를 지나 물금읍 서부마을에 진입했다. 굴다리 옆 가장자에 안내판이 있다. 물금읍 서부마을은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 영남대로 황산역(黃山驛)이 있던 곳으로 사람들의 관청과 장터가 있어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유서 깊은 곳이란다. 철로가 생기기 전 옛날에는 황산베랑길로 가는 영남대로의 시발점이고 지금은 낙동강종주 자전거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옛날 영남대로 황산역의 부속 건물로 환취정(環翠亭)이 있었는데 일명 이요당(二樂堂)이라고 했다. 이요(二樂)는 두 가지를 즐긴다는 뜻으로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인자(仁者)는 물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에 근거한 말이다. 경자년(현종 원년, 1660년)에 창건하였으며, 양산에 도임안 관리가 이곳 황강가의 정자에 ‘環翠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당시의 절경과 정사(亭舍)의 기원을 담은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역참이었던 황산역(黃山驛)은 1857년에 낙동강 범람으로 물에 잠기자 현재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439번지 일대로 옮겨 1895년에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40여 년 간 존속했다고 한다. 황산역은 현재 물금읍 서부리 690번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황산역의 부속건물인 환취정도 이야기로만 전할 뿐이다.
물금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최초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1747년(영조 23) 권만(權萬) 군수의 '봉산혁파장계'(封山革罷狀啓)로 양산의 서쪽은 황산강구 소위 물금진이요 위로는 10리에 달하는 돌사다리 길이 있다고 하였다. 1786년 '양산군읍지(전)' 면리에 서면(西面) 자연마을 중 '勿古味里 黃山里'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양산(梁山)의 서부마을—물금역
서부마을 굴다리 앞에서 한적한 거리(옛날의 물금장터길)를 걸어서 0.4km 내려와 물금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그늘을 드리운 사각정 쉼터가 있다.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 안도감에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의 끈도 풀었다. 오늘도 참 노고가 많은 다리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맑고 공기를 맑았다.
양산은 북쪽으로는 오봉산(五峰山, 황산(黃山), 취서산(鷲捿山, 영축산) 등이 솟아있고 남쪽으로는 낙동정맥 금정산, 천성산 줄기가 뻗어 있는 분지이다. 영축산에서 발원한 양산천(梁山川)이 양산시 한 가운데를 흘러 황산공원 아래 호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특히 양산시 물금읍 서부 마을에서 산중허리를 가로지르는 1022번 지방도를 통해 원동면 화제마을로 이어지는데 화제리 경계에서 물금리를 내려다보면 절경이 펼쳐진다. 서쪽으로 임경대(臨鏡臺) 밑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가촌, 신기 마을과 접하고 남으로는 황산들 앞에 증산(甑山)이 거북처럼 나즈막히 웅크리고 있다. 서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강변의 풍경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그 옆으로 낙동강(洛東江, 황산강)이 김해 대동면 및 상동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물금나루터, 부산 취수장, 용화사, 경파대를 거쳐 남해로 흘러 들어간다.
물금
물금에 관한 최초의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신라 탈해왕 21년(77년)의 '황산진(黃山津)'이다. 현 물금의 낙동강 연안지역이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 남쪽 변방의 낙동강 하류와 남해가 수많은 맞닿은 군사적인 요충지요 무역항으로서 가야와 왜구를 방어하는 최전방지대였다. 특히 가야와는 탈해왕 21년(77)부터 법흥왕 19년(532) 가야가 투항해 오기까지 약 450년간을 황산강(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수천 수만의 군사가 동원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후 가야가 점차 국력이 쇠약해져 신라를 넘보지 못할 정도가 되자 소지왕 9년(487)무렵 신라는 황산지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부터 황산진(黃山津)은 황산역(黃山驛)으로 대치되고 황산진의 기능은 2km 거리에 있는 구물금지역의 물금진(勿禁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물금진 지역은 현재 구물금(舊勿禁) 지역의 부산시 취수장 북쪽 산기슭 용화사(龍華寺) 일원의 낙동 강변이었다. 물금지역의 옛 성촌지역은 두 곳으로 볼 수 있다. 한 곳은 현 물금 동 서부 지역으로 황산진을 중심으로 발전한 황산리 지역이며, 또 다른 한 곳은 현 구물금 지역으로 물금진을 중심으로 발전한 물금리 지역이다. 이후 황산역은 고려, 조선을 거쳐 교통의 중신지로 성세를 유지하다 1857년 (철종 8년)의 수환(水患)으로 상북면 위천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또 물금진 지역은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현 물금쪽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
〈국립지리원〉의 연구에 의하면 물금(勿禁)은 본래 물고미(勿古味)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옛부터 낙동강(洛東江)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어 물금진(勿禁津)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물금이라는 이름은 옛날 신라와 가락국(김해)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때 두 나라의 관리들이 상주하면서 왕래하는 사람과 물품을 조사, 검문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관리들의 검색이 심하여 강을 건너는 두 나라 사람들이 매우 불편한 까닭에 불만이 많았으므로 양국 대표가 모여서 의논하기를 '이 지역만은 서로 금하지 말자' 는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곳은 서로 금(禁)하지 않고[勿]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였으므로 ‘물금(勿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물금의 유래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 일대가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홍수 피해를 많이 입는 곳이므로 수해(水害)가 없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물을 금한다'고 하여 '물금[水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 까닭은 우리나라 지명들의 상당수가 소리를 적은 이두(吏讀) 표기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금의 가야와 신라
지금 신도시지역인 물금은 일제강점기 초기, 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과 낙동강, 양산천 물이 혼재되는 저습지였다. 무엇보다도 신라 초기에 국가가 정비되기 전에는 변방인 양산이 가야가 세력을 확보하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정확한 기록이 없고 가야가 세력이 왕성했던 시기인 2세기에서 5세기 사이 300여 년간은 물금 용당에 이르는 낙동강(황산강) 일대에 가야 영향력이 미쳤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인제대 이영식 교수(역사고고학과)는 532년 가야 멸망 전까지 물금과 용당 일대가 신라와 가야의 치열한 전쟁터였는데 신라 진입 교통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물금광산 쟁탈 목적이 전쟁 주된 원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사도 그 역사의 유적이다. 이곳은 옛날 황산진(黃山津) 이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신라 탈해왕 때 아찬 길문(吉門)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이르러 가야국(伽倻國) 군대 1천명을 죽여 크게 무찔렀던 곳이다.
서기 532년 신라 23대 법흥왕은 군사를 이끌고 이곳 황산진(黃山津)에서 금관가야 구형왕(仇衡王)과 전투를 벌였는데, 전세가 불리하게 된 구형왕(仇衡王)이 투항을 하면서 ‘나라를 넘겨줄 테니 단 한 사람의 백성도 죽이지 말라’는 간청을 했다. 이렇게 금관가야는 멸망하게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은 가족을 데리고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중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生)을 마감했다. (지금도 산청군에는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돌무덤이 있다. ☞ 구형왕릉에 대해서는 본고 「1300리 낙동강 종주 이야기(49) 산청2」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렇게 가야 구형왕의 투항(投降)으로 신라(新羅)는 이곳 낙동강 황산진(黃山津)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금, 다시 그리운 누님을 생각하며
오늘은 삼랑진역을 출발하여 낙동강 물길을 따라 물금역까지 종주 거리만 25km를 걸었다. 양산의 물금은 누님 오남희 여사가 여생을 보내시고 ― 지금은 양산시 신불산공원묘원에 잠들어 계신다. 그리고 누님 슬하의 자식 4형제가 자리 잡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더욱 정감이 가고 각별한 곳이다 누님 생전에는 경부선을 타고 내려와 이곳 물금역을 드나들었다. 특히 2014년이던가. 누님이 건강하실 때 내가 내려온다는 전갈을 받고 셋째 아들 석이를 동반하여 물금역 개찰구 바깥까지 나와 건너편 플랫홈, 열차에 내린 나를 손을 흔들면 마중 나온 적도 있었다. 아! 이제 그 누님은 영원한 그리움이 되었다.
물금역 앞에 있는 블리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양산에 사는 조카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여 조용히 쉬기로 했다. 내일은 물금역을 출발하여 부산시 영역에 진입 북구의 구포를 경유하여, 사상과 사하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부산 낙동강하구둑까지 걷는다. 공식적으로 낙동강 종주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설레는 밤이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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