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종환시인과 독자에게
이번 우리시 여름자연학교캠프는 나에게 다시없는 많은 가르침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에겐 처음 대하는 우리시 여름학교캠프이기에 더욱 새롭고 기억에 오래 남는 시간이었다.
직장에 얽매어 여유가 없는 관계로 가까스로 참가한 나는, 너무 많은 배움의 기회여서 어려운 시간을 쪼갠 만큼이나 참석하길 잘했다는 감탄을 연발하게 했다.
모두 중요한 명 강의였지만 손으로 꼽으라면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도종환시인의 “감동 깊은 시 어떻게 쓸 것인가“다.
도종환시인은 혼란한 군부시국에 저항하여 정의의 왜침으로 투옥당하고 해직교사로서 참담함과 두 살배기 아이와 4개월 된 아이를 두고 암으로 꺼져가는 아내의 고통과 가족의 삶의 방황을 잡아준 것은 시가 버팀목이었다 한다.
현재 신병으로 산속에서 요양하는 그는 “고두미 마을” “내가 사랑하는 당신” “울타리 꽃“ ”당신은 누구십니까”등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대표 시는 “접시꽃당신”일 것이다.
하지만 도종환시인은 접시꽃당신을 출간하고 독자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한다.
접시꽃당신의 정체성과 재혼한 현실의 삶이 부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특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시인들이 도종환시인의 문제점을 토론하였다. 시의 정체성과 시인의 삶이 달라도 되는 것인가? 라는 토론이었다.
많은 시인들은 시와 다른 삶이라도 개인가정사인데 그리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어느 시인은 이런 언급도 하였다
"가수나 정치 소설가는 약속을 못 지켜도 시인은 수기나 철학을 남긴 시심만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시는 실천해야 진솔한 시가 되는구나 하고 말이다. 본인도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실천하는 시를 써야겠다며 스스로 약속을 하였고 그에 걸 맞는 시까지 써놓았는데, 이렇게 시를 실천하고 있는 시인이 있었다니 내심 반가웠고, 또한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도종환시인의 시를 읽어보지 못한 나는 어떤 내용이 문제인지 반문하지 못한 채 머리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실천에 시를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도종환시인은 독자들의 오해로 많은 정신적 고통을 당했고 그 질책에 그저 죄송하다며 머리만 숙였다 한다.
왜 사람들은 당사자 삶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과거의 이면만을 먼저 따지는 걸까.
그는 아내와 결혼하여 2년 만에 사별하고 7년간 홀로 살았다 한다. 사실 본인이 사내라서가 아니라 아이가 있는 남자는 홀로 살수 없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예전에야 여자가 재가를 하면 남에게 멸시받는 도덕관 때문에 여성들이 재가를 쉽게 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여자도 어린아이를 돌보며 홀로 생활하기란 남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식이 있는 부모로서 사별이나 이혼하고 홀로 어린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란 것을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너무나 잘 이해하리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종환시인은 이런 고통의 삶을 7년 동안 참아왔다. 헌데 이런 사람에게 어찌 시 삶을 살지 않았다 질책할 수 있는가.
사람의 삶을 먼저 이해하기보다 질책을 먼저 하는 옹졸한 독자들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본인은 도종환시인과 세미나 때나 캠프화이어의 자리에서 마주보며 대화할 기회도 있었지만, 술잔하나 인사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행여 도종환시인이 어떤 시를 읽었는가 묻는다면 도종환시인이 독자에게 사과한 것처럼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접시꽃당신을 감상하고 보니 도종환시인이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책을 대하지 못한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도종환시인의 몇 편의 시를 감상하며 지금 문인들이 본인이 쓴 글을 출판하면서 작품대로 지키며 사는 문인이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 가기도 했다.
그런 면을 볼 때 도종환시인은 7년이란 세월은 시를 실천하는 삶이었다.
나는 자식이 있는 아비로서 아내 없이 단 1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헌데 접시꽃당신의 정체성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와의 약속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7년이란 긴 세월에 약속을 지켰으니 도종환시인은 시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하여 나는 시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반성과 각오를 다시하게 되었고, 도종환시인이 시와 같이 실천했던 삶에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문인이 있기에 우리 문학은 성숙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었으니 나에게 이보다 더 큰 배움의 재산이 어디 있는가.
하여 도종환시인은 나에게 각오와 감동, 성숙, 그리고 팁으로 재산을 넘겨준 시인이다.
헌데 문인이 문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해, 반성, 감동, 성숙을 입으로만 해서 되겠는가. 입으로만 반성하는 감동과 성숙이라면 동정이나 인기몰이의 중독된 가식이다.
만약 도종환시인이 인기몰이에 있는 사람을 마주할 때 관심을 갖지 못한다면 인기몰이에 있던 사람은 또다시 미워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대의 고통스런 삶을 얼마나 두둔했는데,
내가 그대의 외로운 삶을 얼마나 동정했는데,
내가 너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큰 감동을 받은 척 얼마나 많은 표현했는데,
어찌 네가 나를 외면할 수 있어?
이렇게 자신의 알량한 배려에 얼마나 많은 미움을 쏟아 내겠는가.
문인이 문인을 대할 때는 인기 몰이에 치우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식은 인기가 아니면 허약한 존재를 동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인에게 동정은 비참한 최후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삶을 불상함으로 동냥을 주는 것이니, 문인에게 있어 이보다 한심스럽고 거지같은 삶이 어디 있는가.
같은 문인으로서 내면을이해하고 독자나 동료의 미움을 풀어주는 솔직한 벗이 되어야 하거늘, 어찌 마음에 있지도 않은 가식으로 문인을 추켜세운다는 말인가.
이제 문인은 서로 진정으로 반성하고 문인으로서 정체성을 바로 찾아 성숙한 문인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도종환시인의 작품을 읽기 전부터 아니 본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시를 기록하였다.
실천 하는 사람
씨앗을 낳아 실천하지 않음은
씨팔 놈이요
씨앗을 노래하며 실천하지 않음은
씨팔 자식이거늘
약속을 남발하고 실천하지 않음은
씨앗도 되지못할 좆도 아니다
이 시는 약 7년 동안 쓴 (벽이 문)소설에 담은 본인의 졸 시이다.
그러니까 2008년 2월 출판사 문학 동네에 응모한 글이니 이 시를 쓴 것은 약 3년이 조금 부족한 듯하다.
본인이 이런 시를 남긴 것은 시를 삶처럼 살기위한 각오로 적었다.
물론 이런 시를 남김에는 내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나 다름없다.
실수로, 피하지 못할 사연으로, 욕심으로, 시 삶을 위반한다면 나는 독자들을 우롱한 대가로 엄청난 보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여 이시는 본인 스스로가 지켜야할 양심의 법률이나 다름없다.
나의 이런 양심으로 살펴볼 때 도종환시인의 “접시꽃 당신”은 내게 있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지 글의 쓰레기인지 가려볼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비록 타인이고 남의 가정사이지만 본인의 양심 안에서 존경할 분인지 아니면 외면할 사람인지 까지도 가려야 했다.
내가 진정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도종환시인의 작품을 두둔한다면 나는 명성과 인기몰이에 내 양심을 팔아먹는 꼴이니 내 스스로도 못 마땅한 삶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도종환시인의 삶과 작품을 냉정히 살펴보니 비록 “접시꽃당신”의 시심처럼 약속은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나는, 도종환시인을 시를 실천하는 시인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만약 도종환시인이 “접시꽃당신”의 작품을 내놓고 사별이 아닌 이혼을 했다면, 비록 시 삶을 7년 동안 살았다 해도, 이혼문제를 냉정히 살폈을 것이다.
이혼문제에 있어 도종환시인의 잘못도 인정된다면 비록 독자에게 아무리 인기가 많고 좋은 작품이라도 접시꽃당신은 쓰레기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종환시인은 이혼이 아닌 사별이다. 이혼이라도 아내의 잘못으로 피하지 못할 선택이라면 이해하고 용기를 주어야하는 삶이거늘, 사별로 두 살배기와 4개월 된 아이를 키우며 7년 동안 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독설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오히려 도종환시인에게 7년 동안 참고 견뎌온 세월의 무모함을 탓하고 싶다. 아무리 시 삶도 좋고 사회의 약속도 좋지만, 가정의 화목도 지켜야할 의무가 있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게는 어쩌면 큰 피해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나친 사랑은 누군가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물론, 도종환시인은 아내를 사랑하여 잊지 못한 만큼 7년 동안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고자 많은 고통을 감수했고, 자식의 뒷바라지를 훌륭히 이겨냈기에 지금의 자리에서 떳떳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없는 빈자리는 어미 없는 자식에게는 곧 고통임을 현실과 다른 삶을 먼저 따지는 사람들이 이해하여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사람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도 중요하기에 도종환시인의 재혼은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도종환시인님에게*
당신의 그간의 그 고통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이젠 아내를 고이 보내십시오. 지금의 아내를 사별로 보낸 아내만큼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아내도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내는 떠났습니다.
당신의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머물러 있던 영혼마저 순리를 찾아 떠났습니다.
이젠 “접시꽃 당신”을 문단이라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마음으로 써보셨으면 합니다.
지금보다 성숙한 문단을 위해 시 삶을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접시꽃 당신을 문단이라 생각하고 감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시 삶의 입체감이 옥수수 잎에 소복이 쌓입니다.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 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 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부족한글 끝까지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강용환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역시 현실은 과거형 아닌 현재 진행형이기에...
김은주님의 답글을 대하고 저의글을 살펴보니 다소 부족한 글의 표현도 보이는 군요. 과거와 현재의 미스가...... ^^
가슴 울렁이며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오래전에 도종환시인의 재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에는 약간의 <시와 시인의 삶의 괴리>에서 당황하였으나 그 날 도종환시인의 강의를 듣고난 이후로는 저도 그 괴리에서 해방되었답니다.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그 사람을 알게모르게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였을까요. 하여 혼자 속으로 반성하였습니다. 사실 도종환시인에 대해서 잘 몰랐었고 그 삶에 대해서 이해할 기회도 없었으니 그저 유명한 시인의 시와 삶으로만 본 탓이지요.대개 자기와 친분이 있으면 이해하고 용납하기 쉽지만 자기와 친분이 없으면 자기 눈에 보여지는대로 판단하는게 일반적인 사람들이니까요.
수기 시는 현실성의 표현이 가장중요하리라 봅니다. 물론, 그때 그 심정에서는 충분히 헤쳐나가리라 생각되어 적은 글이니 그 가치가 높겠지만 새로이 겪는 현실은 과거에 겪은 자신의 각오와 다른 이면이 많으니까요. 하여 부족했던 감성 또는 과했던 감성을 다시 고쳐나가는 것 그것이 성숙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모든 삶에는 완벽이란 없으니 사회에 가정에 피해가 없는 일이라면 자신의 깨달음에 성숙함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아무리 시심이라도 잘못을 보고 고쳐나가지 않으면 사회가 가정이 피해를 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