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상세정보
정정엽,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심은록 (SimEunlog MetaLab.연구원, 미술비평가)
“너는 난(蘭)을 쳐라, 나는 파(蔥총)를 친다!”(이하 ‘난ㆍ파’)1)
정정엽 작가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라면, 그의 호기로운 상기 언급이 제격이다. 물론 그의 CV는 길고 묵직하다. 약술하면, 이화여대 졸업 후, 1985년 <두렁>에 가입하면서 미술 밖에서 미술에 질문을 던지며 사회적 참여를 실천하고, 여성미술연구회를 통해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관심을 지속해 왔다. 수십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초대받고, 2018년 제4회 고암미술상과 2020년 양성평등문화인상, 2022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서구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문화예술이 발전했다. 동양에서는 그나마 ‘음양陰陽’의 조화를 중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원론을 다시 끄집어 내려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인 생물학적 유전자(GENE)는 어쩔 수 없더라도, 문화적 진화의 유전자인 밈(MEME)은 수정될 수 있기에, 편견의 눈꺼풀을 벗겨 내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 여름, 정정엽 작가의 혁명적인 ‘씨’(seed)가 파종 될 밭이 갤러리 밈(MEME)이다.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展(2023.6.21~8.18)에서는 확장된 관점, 타자의 시각을 요청한다. ‘난’(사군자, 산수화; 陽)을 치기 위한 ‘준법’이 있듯이, 작가는 ‘파’(채소; 陰)를 치기 위한 서양화적 준법을 발견했다. ‘난ㆍ파’, 이 한 문장은 그의 예술미학, 과정, 동양화 미술사뿐만 아니라 현대 서양 미술사까지 총체적으로 그 상황을 반영한다.
콩: 점, 생명의 씨앗
정정엽의 작업은 다양하고 다른 주제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미학적 줄기가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초기 작업부터 그는 전통미술에 근거를 두고 이를 사회적, 현대적, 생태학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그의 초기 목판화에서도, 민중미술 판화의 일반적인 기법으로 여겨질 수 있는데, 판화 기법을 보면 모티브를 감싸는 선이 민화의 마감선과 같다. 그래서 때로는 재현된 형태에서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콩류 연작은 그의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1995)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림 속 자루에 담겼던 콩들을 꺼내는 “미련한 결심”을 한다. “한 알 한 알이 일용한 양식이며 씨앗”인데, “덩어리로 그리면 씨앗의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루에 담긴 무더기 콩처럼, ‘영원성’이나 ‘무한’과 같은 거대 담론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작가는 ‘선’과 관련된 준법을 채소에서 찾았듯이, ‘점’ 역시 가히 ‘두점준’ (豆點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만의 준법을 다음과 같이 구축한다.
그는 안료 묻은 붓으로 캔버스에 찍고, 오일로 닦아내면서, 문질러서 번지듯이 그리며 입체감을 준다. 덧칠을 하며 마지막에 흰 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일로 닦아내면서(지우면서) 여백을 집어 넣는다. 흰 색으로 꽉 찬 빛이 아니라, 캔버스 여백이 드러나, 생명과 담화를 넣을 수 있는 작지만 여유 있는 공간이다. 그가 말하듯이, 콩은 “움직이는 점이기도 해서, 모든 것을 표현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알 한 알은 확실한 구상이지만, 캔버스 위로 펼쳐질 때는 추상 혹은 반추상작품이 되기도 하며, 구상과 추상이 동시에 실현된다. 때로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며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한 음향을 전달한다. 콩들이 하늘로 올라가 달이나 수많은 별들이 되기도 한다(<달의 흔적>, <3만개의 별> 연작 등). <잃어버린 마을>은 신비로움과 아련함을 살린 녹색톤 콩들이 모이고 펼쳐진다. 마치 하늘의 오로라처럼 펼쳐지는 ‘콩들’에게 이처럼 신비하고 아련하며 때로는 대담한 색의 존재를 작가의 작품을 통해 알게 된다. 얼마나 다양한 색이 가능한지는 그의 <축제>나 <축포> 연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초창기 목판화에서 제거되었던 민화의 오방색이 마침내 여기서 등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오방색이나 서구의 개념적인 색과는 달리, 노란 콩, 검은 콩, 녹두, 완두, 붉은 팥, 등 콩에서 기원된다. 그래서 작가는 콩류가 “이 땅의 빛깔과 모든 색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색이라기 보다는 먹어서 살이 되고 피가 되며, 우리의 신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색이다. 또한 ‘콩’은 ‘점’이면서 ‘씨앗’이다. ‘씨앗’의 중요 의미는 그 안에 생명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벌레>, 낯설고 친숙한
정정엽 작가는 생 광목천에 사생하듯, 안성 미산리에서 만난 80여 마리의 벌레들을 재현했다. 그의 표현대로, “낯설고 친숙하다”. 처음에는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징그럽고 겁나는 벌레에게, 2011년부터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는 “벌레마다 기기묘묘하며 대체불가한 독특한 모양과 움직임”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신비로움을 화폭에 담는다. 그가 얼마나 가까이 벌레에게 다가갔는지는 그의 그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벌레 안에서 “지상의 모든 형상”을 보기도 한다. 우리 인식의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저주받은 미물이 아니라 신기하고 아름다우며 품위도 있는 모습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벌레들 뒤로 푸른 밤하늘의 밝은 별들이 반짝인다. 남극 근처에 있는 ’파리 자리 Musca’는 1930년 '국제천문연맹(IAU)이 정한 88개 별자리(constellation) 중 유일한 곤충자리이다. 관람객들은 작품 속에서 각각의 벌레에 그들의 별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작가는 전시 제목에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라는 양의적인 성격을 수여한 것일까?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작가의 ‘타자’ 역시 바뀌는데, ‘민중’에서 ‘여성’(타자, 陰의 ‘준법’ 포함)으로, 그리고 이제 가장 시급한 ‘벌레’(기후, 생태계의 타자)로 관점이 이동된다. 이들은 모두 위대하게 태어났으나, 모욕과 망신을 당해 왔다. 그리고 다시 시대적 관점의 변화 등으로 조금씩 복귀가 되나, 그들 스스로 위대함과 존엄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붓을 통해 이를 재현한다. 위대한 생명의 담지자들, 망신을 당해 왔으나, 다시 그 존엄성과 초월성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작가는 그동안 모욕과 망신을 당해온 모든 타자들의 고귀함과 생명의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 지면의 한계가 없다면, 필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벌레’와 ‘콩류’ 작가들을 비교하고 싶었다. 더욱이 기후나 생태 재난을 목전에 두었기에 쉽게 찾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만큼 우리의 시각이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작업은 WEB3.0 시대에 신체성을 상기시키고, 기후재난 시대에 벌레에 대한 관점을 전환시키고 있다.
1) 이 글에서 출처 없는 인용문은 정정엽 작가와 심은록의 인터뷰(2022.12.3)와 그의 “작업일지”(2023.4.25)에서 인용 됐다.
정정엽 작가
정정엽은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후 24회의 개인전과 함께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두렁’,‘여성미술연구회’,‘입김’등에서 활동하며 예술적 실천을 병행하였다. 1995년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을 열었으며, 1998년 두 번째 전시에서 붉은 팥과 곡식 작업을 처음 선보인 이후 다양한 변주로 확장 시켜오고 있다. 《지워지다》(아르코미술관,2006), 《벌레》(갤러리 스케이프, 2016), 《조용한 소란》(서울식물원, 2021)등의 전시를 통해 인간과 공존하는 동식물에 대한 위기의식을 보여주었다. <집사람>시리즈와 <얼굴풍경>, <최초의 만찬> <걷는 달> 과 같은 작업으로 꾸준히 동시대 여성들의 삶과 인물에 대한 탐색을 하고 있다. 2018 부드러운 권력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12 아시아 여성 미술제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2002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 (광주)등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2023 갤러리밈에서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개인전을 통해 그간의 작업들을 다룰 예정이다. 위대한 출판물로 『한국현대미술선 002 정정엽』(헥사곤, 2018)과 『나의 작업실 변천사』(헥사곤, 2018)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경기도미술관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34회 이중섭미술상 2022, 양성평등문화상(문화체육관광부 )2020, 제4회 고암미술상 2018을 수상했다.
갤러리밈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22 34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이후 첫 개인전이다.
정정엽 (1962년~)
Jung Jung yeob 鄭 貞 葉
1985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23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갤러리밈, 서울)
2022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아트조선 스페이스, 서울)
물어보는 노동 (전태일기념관, 서울)
여자는 길을 좋아한다 (동양장B1, 대전)
물구나무 팥 (봉산문화회관, 대구)
2021 걷는 달 (아트센터 화이트 블록, 헤이리 경기)
조용한 소란 (서울식물원, 서울)
2019 최초의 만찬–고암미술상수상기념전( 이응노의 집, 홍성)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별 (조은숙 갤러리, 서울)
2018 나의 작업실 변천사 (이상원미술관, 춘천)
2017 콩 그리고 위대한 촛불 (트렁크 갤러리, 서울)
아무데서나 발생하는 별 (갤러리 노리, 제주)
49개의 거울 (스페이스몸 미술관, 청주)
2016 벌레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2014 길을 찾는 그림, 길들여지지 않는 삶 (길담서원, 서울)
2011 off bean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2009 얼굴 풍경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 부천)
red bean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2006 지워지다 (아르코미술관, 서울)
멸종 (비나리미술관, 봉화)
2002 정정엽 개인전 (서호갤러리, 서울/서호미술관, 경기)
2001 낯선 생명, 그 생명의 두께 (신세계 갤러리, 인천)
2000 봇물 (인사미술공간, 서울)
1998 정정엽 개인전 (금호미술관, 서울)
1995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 (이십일세기화랑, 서울)
주요기획전
2023 기억의 파수, 경계의 호위-제주 4.3전 (예술공간 이아, 제주)
2022 누구의 이야기 (부산현대미술관)
2021 약속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아시아 문화예술의 전당 광주)
2020 그림 그리다 (경기도미술관, 안산), 야만의 꿈-핵몽4 (예술지구p, 부산)
2019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한국국립현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핵몽3-위장된 초록 (에무갤러리)
2012 아시아 여성 미술제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2008 The Offering Table: Activist Women from Korea (밀스 컬리지 뮤지움,미국)
2002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 (광주)
작품소장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르코 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등
수상: 2022 34회 이중섭미술상, 2020 양성평등문화인상, 2018 제4회 고암미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