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에 세워진 기념관
재판기록과 항일 전투당시의 기록이 전시 돼있는 기념관 정문 현판
김좌진 장군 흉상
독립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들
청산리 전투를 형상화...
백야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에 대한 일본 재판소의 판결문과 무오독립선언서
사관훈련소와 독립군 무기고
청산리 전투지역의 원경과 청산리 전투에 대한 신문보도
대한독립군단 취지서와 김좌진에 대한 활동 보고내용
신민부 본부와 신민부 활동내용의 보도
김좌진 장군의 동상과 애국시 어록비
김좌진 생가와 스승에게 보낸 안부편지
"청산리" 전투현장 그림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생가지 대문
대문 밖에 지어저있는 측간, 농기구를 넣어둔 헛간, 마구간
사랑체의 기둥에는 17세에 가노(家奴)들에게 종의신분을 없에주고 농지를 나눠줬다는 글귀가 있다.
전면 8칸 측면 3칸의 겹집으로 제일 좌측이 부억,방2칸 대청 그리고 건너방과 툇마루
본채의 미루에 걸터앉아서...
본채의 건너방
본채의 안방
본채의 부억과 가마솥
부억마루와 시렁
부억문앞에 놓인 절구
부억 옆모퉁이의 장독대
본체건물의 뒷뜰
마당 한켠에 있는 우물
사랑체 뒷벽에 걸려있는 멍석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성역화사업에 대한 기록
백야장군의 묘역
영정이 모셔저있는 백야사(白冶祠)
장군의 묘소
사당에 모셔저있는 장군의 영정
백여장군의 마지막 유언
백야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선사 두분 모두 홍성이 고향이시다.
이름 : 김좌진
출생 : 1889 년 11월 24일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
본관 : 안동
호 백야(白冶)
별칭 자 명여(明汝)
가족정보 : 슬하에 4남
직업 : 독립운동가
소속 :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경력 : 1925년에 영안에서 신민부를 조직, 군사집행위원장
1929년 길림성 연변 한족 총연합회 주석
1930년 중국 길림성 영안현 중동 자택에서 고려 공산당청년의 흉탄에 서거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세상살이의 흐름에 눈떠 14세 때 집안의 하인들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었으며, 17세 때에는 집에다 '호명학교'를 세웠다.
홍주 의병의 총수였던 유학자 김복한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해 국민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일제의 독립군 토벌작전에 맞서 독립군 전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고 1925년 북만주 독립군단을 정비해 신민부와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양성에 힘썼다. 1929년에는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처하고 무장투쟁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수용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 독립운동
1918년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에 입교하고.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라할수있는 무오독립 선언서의 대표 39명중 한명으로 서명하였다.1920년 9월 제1회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켰다.
그러나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10여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약3천명을 죽거나 다치게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신비한 전술과 전략으로 기적과도 같은 대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집결한 10여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여기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 신민부 창설
1925년 3월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사위원장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