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4-1)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4-1. 화산 서악묘(華山 西嶽廟)
어젯밤 화음현에서 숙박을 하고 조반을 마치자마자 서악묘로 향한다. 서악묘(西嶽廟)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의 화산에 있는 도교사원(道敎寺院)으로 가뭄과 홍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화산신(華山神)을 기리기 위해 BC 134년인 한무제(漢武帝) 때 건립된 사당이다. 처음에는 화산의 산기슭에 지어져 집령관(集靈觀)이라 불리다가 북위(北魏) 때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명칭도 서악묘로 바뀌었다.
<화음현-뒤로 서악인 화산이 보임>
당현종(唐玄宗)은 화산을 금천왕(金天王)으로 봉한 뒤로 서악금천왕묘(西岳金天王廟)라고 불렀으며, 명·청 시대에는 서악묘 또는 속칭 화악묘(華岳廟)라고도 불렀다. 부지면적이 약 14만 3천㎡에 이르며,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좌우 대칭으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49년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성벽과 전각 등 주요 건물을 보수하거나 재건축하였으며, 1986년 전국중점문물보호지(全國重點文物保護址)로 지정되었다.
<서악묘 입구>
남쪽으로 화산을 바라보는 서악묘는 여섯 공간이 각자 다양한 모양을 자랑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첫 번째 공간은 서악묘의 입구인 오봉루(五鳳樓)에서 시작된다. 이 공간에는 목조 패루(牌樓)와 오지기와의 조벽, 호령문(灝靈門), 돌난간에 둘러싸인 바둑판 같은 기반가(棋盤街), 돌사자, 쇠솟대 등이 있다. 조벽(照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을 바로 볼 수 없게끔 벽을 설치한 것을 말한다.
<서악묘 배치도>
두 번째 공간은 오봉루 뒤쪽의 정원(庭園)이다. 과거 이곳에는 다양한 서체를 자랑하는 시대별 돌비석들이 즐비했으나, 지금은 <당현종어제서악화산명비(唐玄宗御製西嶽華山銘碑)>만 남아 있다. 이 비는 당현종(唐玄宗)이 ‘하늘을 섬기며 신에게 예를 표하고 나라를 다스려 안민(安民)을 위하는 대망’이란 내용으로 친히 글을 직접 썼다고 한다. 당현종은 재위 기간에 태평성대를 누렸으나 말년에 도교와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많이 그르쳤다.
<당현종어제서악화산명비(唐玄宗御製西嶽華山銘碑)>
영성문(欞星門)에서 금성문(金城門)까지의 정원이 세 번째 공간이다. 이 곳에는 영성문과 명나라때의 석비루(石碑樓), 금성문 등이 있다. 영성문은 키 높은 건물에 반짝이는 오지기와를 얹고 처마에 정교한 조각으로 아홉 마리 용을 새겼다. 영성문은 중국 문묘에 세우는 건축물의 하나로 여기서 欞星(영성)이란 글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창살을 가늘게 해서 만든 창’이라는 뜻이지만, 이곳에서는 ‘황제가 문묘에 제사할 때 받드는 별’로 높은 학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성문 전경>
<영성문 편액액>
尊嚴峻極 天威咫尺(존엄준극 천위지척)이라는 편액이 걸린 패방은 명나라 때인 1573∼1620년 사이에 지었다. 돌로 된 대들보와 돌기둥, 돌벽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사자가 새겨져 있다. 패방의 가운데에 있는 존엄준극 천위지척(尊嚴峻極 天威咫尺)의 의미는 “존엄하고 대단히 높은 천자의 위엄이 가까이 있다.” 는 뜻 같다.
<패방>
패루(牌樓)의 정면에는 용(龍)이 조각되고 후면에는 여덟 선인이 장수(長壽)를 경축하는 그림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밖에 구슬을 가지고 노는 용 두 마리와 공을 굴리는 사자, 태양을 향하는 봉황,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 등 온갖 명화가 다양한 조각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중국의 신선들이 이곳에서 노니는 것 같다. 맨 위에는 황제가 건립했다는 표시로 ‘칙건(勅建)’이란 글씨가 세로로 걸려 있다.
<패루(牌樓)>
서악묘의 본전인 호령전은 네 번째 공간에 있다. 왕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답도(踏道)를 따라가면 68개의 기둥과 9개의 대들보에 받들려 있는 호령전이다. 호령전(灝靈殿)은 방 일곱 칸 너비에 방 다섯 칸 깊이를 자랑하는 서악묘 최대의 건물이다. 건물 외곽에 복도를 둔 호령전은 첩첩한 두공(枓栱)을 자랑하면서 돌로 쌓은 높은 단위에 올라앉아 있다. 단에는 단을 오르내리는 계단 다섯 개가 조성되어 있고 천정에는 학(鶴)이 그려져 있다.
<호령전(灝靈殿)>
<답도(踏道)>
호령전 뒤에 있는 침궁이 있다. 침궁(寢宮)은 이곳에 찾아오는 왕이 머무르는 공간 같다. 우선 중앙의 의자에는 검은 바탕에 황금색 의자와 등받이에 그려져 있고, 특히 벽에는 붉은 바탕에 발가락이 5개인 황금색 오룡(五龍)이 호위하고 있는데, 용의 얼굴이 마치 2002년 서울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깃발인 ‘치우천왕’과 비슷한 화상을 하고 있다. 그 옆의 침상에는 용과 봉황이 그려져 있다.
<침궁>
<황상>
<침전>
다섯 번째 공간에는 어서방 등 건물이 있다. 입구에 명(明)나라 만력제(萬曆帝) 재위 기간에 지은 석패루(石牌樓)에는 ‘소호지도(少皞之都)’라는 글씨가 중앙에 박혀 있다. 서악 화산신(西嶽 華山神)인 소호의 공간이라는 뜻 같다. 소호(少昊 또는 少皞)는 청양씨(青陽氏), 금천씨(金天氏), 궁상씨(窮桑氏), 운양씨(雲陽氏), 주선(朱宣) 등으로도 불린다. 소호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아들이었고, 궁상에서 태어나 동이(東夷)의 수령이었다고 전해 내려오며, 오제(五帝)에 포함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고 한다.
<석패루(石牌樓)-소호지도(少皞之都)>
어서방(御書房)은 황제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장소다. 이중지붕에 오지기와를 얹은 어서방은 누각(樓閣)식으로 된 목조건물이다. 청나라 때인 1773년에 신축한 이 건물에는 건륭제(乾隆帝) 친필로 된 악련령주(岳蓮靈澍)라는 글씨가 편액처럼 박혀 있다. 서악묘는 화산신을 모시면서 제시 지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더운 여름에는 이곳을 황제들이 여름 피서(避暑) 궁전으로 이용한 곳이라고 한다.
<어서방(御書房)>
마지막 여서 번째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욕수지부(蓐收之府)’석패루다. 이 석패루도 명(明)나라 만력제(萬曆帝) 재위 기간에 지은 것으로 4개의 기둥과 3개의 칸에 3층짜리 청석패루(靑石牌樓)이다. 이곳은 화산신인 서호의 아들이자 소호의 보좌신으로 전해지는 김보(金補)의 공간이다. 참고로 소호금천씨는 한국과 중국의 김씨(金氏)들의 조상으로 많이 언급된다. 특히 한국의 성씨인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언급한 기록들이 있다고 한다.
<석패루 - 욕수지부(蓐收之府)>
마지막 여섯 번째 공간에는 만수각과 유악방(遊岳坊) 등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서악묘의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위치한 만수각(萬壽閣)은 3층으로 된 누각(樓閣)이다. 1층에는 왕의 자리가 중앙에 자리잡고 붉은 바탕에 황금색으로 ‘수복(壽福)’이란 글씨가 좌우 양쪽으로 쓰여있고, 계단을 따라 2층에 오르면 김보 등 소호 자손들의 상(像)이 있다. 누각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황하(黃河)강이 보여 망하루(望河樓)로도 부른다.
<만수각>(萬壽閣)>
<만수각>(萬壽閣) 1층>
서악묘에는 푸른 소나무 등 수목들이 무성한 정원에 다양한 건물과 비석들이 산재하고 건물들에는 유명한 그림과 서예(書藝) 등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다. 방생지(放生池) 표지석 옆에는 무성불행 무신불립(无誠不行 无信不立)이란 입간판이 있다. 이는 ‘성의가 없으면 나아갈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존립할 수 없다.’는 뜻 같다. 이곳에서는 불교와 도교, 음양오행설, 민속 등 다양한 내용을 집대성한 제사 의식과 등불 놀이 등 행사들이 상시 거행된다고 한다.
<방생지(放生池)와 무성불행 무신불립(无誠不行 无信不立)>
<서악묘와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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