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서는 전번 글(퇴계와 정암 조광조①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질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에 이어서 정암 조광조의 눈부신 실천행위가 퇴계의 사상에 어떻게 개념으로 형상화되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저는 앞에서 퇴계가 정암 조광조의 일대기(행장)을 써서 그의 뜻을 기렸다는 것과, 스러져 가는 조선의 정신을 횃불처럼 다시 일으킨 사람으로서 정암을 우리 나라 道學(실천유학)의 최고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는 것과 퇴계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토로하여 정암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았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滉이 스스로 생각하니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퇴계의 理發說(理의 운동성 인정함)이 바로 정암 조광조의 그 불꽃같은 혁명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역시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암 조광조의 실천행위가 가지는 의미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사실 일찍이 중국에는 주돈이(1016∼1073), 소옹(1011∼1077), 장재(1020∼1077), 정호(1032∼1085), 정이(1033∼1107) 등을 비롯해서 기라성 같은 성리학자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상을 현실에다 화끈하게 실천으로 옮겨 본 사람들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중국의 정치구조상 조선에 비해 지식인들의 참여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인 지 모릅니다. 그것은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 완벽히 체계화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와 함께 "만세(萬世)의 종사(宗師)"로 추앙 받기도 했던 주희(1130∼1200)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학이란 본질적으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처럼 실천철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의 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유학정신에 통달한 주희에게 왜 그러한 포부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정치현실은 주희에게 우호적이지 못하였습니다. 주희의 관직생활은 순조롭지 못하였고(중앙정계에 몸담은 기간이 40여 일에 불과), 말년에는 자신의 사상이 僞學(거짓학문)이라는 탄핵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시대현실의 아웃사이더로서 교육과 학술 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중국의 대가들도 구현하지 못한 이 성리학 정신을 현실에다 과감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 사람들이 놀랍게도 조선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하여 "기묘8인"으로 일컬어지는 30대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기묘사림들 이었습니다(기묘8인 : 조광조 38세, 김식 38세, 김정 36세, 박훈 35세, 윤자임 32세, 김구 32세, 박세희 29세, 기준 28세).
오늘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기묘사림들의 실천에 대해 그들의 "급진성"과 "실패" 자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현대판 훈구파들(친일파공신, 육법당공신, 상도동공신, 동교동공신 등)에 의해 일관되게 장악되어 온 우리의 슬픈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무엇보다 훈구파 타도를 외쳤던 이 정암 조광조를, 현대판 훈구파들과 그들에 기생하고 있던 관변학자들, 소심한 제도권 학자들이 제대로 부각시킬 리 만무한 것이지요.
어쨌든 생각컨대 불과 3,4년 기묘사람들은 시대의 중심에 섰을 뿐이지만 우리 나라 5천년 역사를 통털어 볼 때 "세상을 한 번 멋지게 확 바꾸어 보자"고 나선 가장 순수하면서도 폭발적이고 화끈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집단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정점에서(위훈삭제의 성공직 후) 갑자기 곤두박칠치고만 비애를 간직한 기묘사림들 이었지만 그들의 이념은 구호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현실 속에 이념의 본지에 충실하게 많은 부분 실천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일단 주목해야 합니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①기묘사림들은 연산군의 학정에 대한 반성에서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활동을 활성화하여 임금의 전제적 정치 전단을 통제하고자 했으며,
②현량과의 실시를 통해 혁명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모순된 시대현실에 눈을 감고 음풍농월하는 할랑한 지식인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③소격서의 폐지 등을 통해서는 이념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한편, 몽롱한 언어로 시대현실을 호도하는 세력을 경계하고자 하였고
④향약의 실시와 소학보급 운동을 통해서 중앙의 훈구대신들과 연결된 지역토호들의 발호를 억제하면서 향촌사회 곳곳에 바람직한 공동체적 질서가 자리잡기를 기도하였다.
⑤또한 내수사 장리의 폐지, 한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집중의 완화, 방납의 폐단시정 등 민생분야에 대해서도 주요정책을 내세웠다. (고봉 기대승의 숙부로서 기묘 8인들 중 가장 젊고 선명한 의식을 가졌던 복재 기준은 보다 급진적인 균전제 실시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정치·사회·경제 그리고 정신질서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변화를 지향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목표하는 바는 성리학의 이상사회인 하늘과 국가와 인간이 하나되는 조화로운 공동체 질서로서의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실현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 대동사회를 지향하는 지극한 정치) 이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그들의 개혁에 대해 보인 민중들의 반응입니다. 민중들은 기묘사림들의 행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백성들은 정암 조광조가 시정에 나타나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이 오신다"고 할 정도로 열렬히 환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퇴계의 지적처럼) 이론적으로는 미숙했으나, 중국의 대가들을 뺨칠 정도의 엄청난 혁명적 실천을 감행하였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펴낸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도 보면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지향하는 이들의 혁명적 실천이 중국의 대가들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 유학의 정치사상에 있어서는 대동사회의 실현에 대한 의욕이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나타났다. 조광조에게서 비롯된 지치주의(至治主義) 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의 지치주의 운동의 내용은 천리(天理)가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정치적 실천에 의하여 당시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어 직접 요순시대의 대동사회를 눈앞에 출현시키려 한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에 두고 있다."
<이기동, "대동세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6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351쪽>
자 이렇게 볼 때, 어둡고 황량한 시대 현실 속에서 정암 조광조와 기묘사림들로 표상되는 빛나는 정신의 실천, 과연 이것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퇴계의 고민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퇴계가 준거하고 있는 주희의 이론으로는 그들의 혁명적 실천을 보다 선명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희의 시스템 내에서 理는 중심개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살아있는 힘으로서 파악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단순히 氣위에 올라타고 있는 소극적인 理개념으로 어찌 그들의 폭발적인 실천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퇴계는 정암 조광조의 실천행위를 理자체의 발현이라고 보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퇴계는 마침내 주희의 구도를 뒤틀어 과감하게 理에다 생명력을 불어넣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바로 "理發而氣隨之"로 나타났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퇴계의 理發說을 정암 조광조의 혁명적 실천과 연결시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퇴계학의 대가 중의 한 분인 서울대 금장태 교수 역시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처럼 저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할 것입니다.
"퇴계의 互發說이 지닌 이원론적 입장을 그 시대의 사회의식과도 연결될 수 있다. 곧 퇴계 자신은 사악하고 탐욕적인 집권세력에 의해 의로운 선비들이 참혹하게 희생되는 士禍가 거듭되는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分開說은 인간심성에서 善의 근원을 惡의 근원과 분별하여 대립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대적 인식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義와 利를 분별하고 군자와 소인을 숯과 얼음처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대립시켰던 정암 조광조의 이념과 연관되는 것으로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출판부, 1998), 169쪽>
이럴게 본다면 퇴계의 理發說은 한 마디로 혁명성을 담지하고 있는 이론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가 관념적이고 보수적인 헤겔을 물구나무 세움으로써 혁명이론을 도출해 내었듯이, 퇴계는 주희의 무기력한 理개념에 운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주자학을 혁명이론화 하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전후 최대의 지성이라고 하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일본을 뒤흔든 책이라고 하는 "일본 정치사상사연구"에서 말하기를 주자학은 치밀한 정합성과 완성된 <
첫댓글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