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 13,1-23)
But some seed fell on rich soil, and produced fruit,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전한 뒤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가르친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으며,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앞으로 계시될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속량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이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하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세상 걱정이나 자신의 안락, 재물의 유혹에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결실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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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비극과 의지를 노래하다가 옥사한 시인 이육사의 명시 ‘광야’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시인이기도 한 교사가 오랫동안 어린 학생들과 함께한 문학 수업 시간에 느낀 것을 전하는 책을 읽었는데, 이 시구에 관하여 토론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며 문득 이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 시를 가르치며 일제 암흑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이육사 시인의 고귀한 삶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그는 이육사 시인에 대하여 ‘스스로의 삶을 씨앗으로 뿌린 이’였고, 자신의 삶 자체를 뒤에 올 이들을 위한 헌신이자 투신으로서 마흔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도 이렇게 씨앗을 뿌릴 수 있겠니?” 이에 대한 한 학생의 솔직한 반응이 흥미 있는 토론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됩니다. “대뜸 은수가 ‘저는 안 뿌릴 거예요.’ 한다. 툭 던지듯 목소리도 컸다. 그 도발적인 대답에 내 마음이 출렁했다. 씨앗을 ‘못’ 뿌리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안’ 뿌리겠다고? 그것을 이리 당당하게 말한단 말이지? ‘씨앗을 안 뿌리겠다는 말은 용기가 없어서 못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이네?’ ‘내가 열매를 다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뿌려요?’ ‘흠, 그래? 그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열매들은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 아이는 순간 멈칫한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아이들은 다행히 이어지는 토론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 올바른 일, 가치 있는 일의 씨를 뿌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삶인지를 조금씩 발견하고 인정해 갑니다. 교사인 저자도 아이들과 가진 이 대화 뒤 이러한 확신을 더해 갑니다. 조향미 시인의 『시인의 교실』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옥한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새로이 깨닫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인이 그러했듯 다른 이들과 앞날을 위하여 묵묵히 ‘씨 뿌리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서공석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비유하여 즐겨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농부가 밭에 씨 뿌리는 일에 비유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 비유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 자신은 과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가를 반성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지만, 당신 스스로는 실패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뿌렸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무위(無爲)로 끝난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은 그들이 독립된 종교집단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실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일에는 유대교 회당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언행에 차차 나타났고,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당국이었고, 그분의 제자들을 내어 쫓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들은 안식일 다음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이라 부르며 함께 모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에 대해 합께 회상하고, 그분이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초라한 집회였지만, 오늘 주일 미사의 기원(紀元)입니다. 그들에게는 건물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그들 중 주거(住居) 공간을 여유 있게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서로 섬기며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집회에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한 바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발전하여 오늘 미사의 말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식사가 형식을 갖추어 오늘의 성찬전례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미사전례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제물봉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메시지가 담긴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불행히도, 율법과 제물봉헌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철칙으로 삼아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잣대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구실로 사람을 단죄하고, 사제들은 제물봉헌을 빌미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단죄하게 하는 명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가 4,19) 일이었습니다. 신앙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 자기 한 사람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 사로잡힌 이, 눈먼 이, 억눌린 이들”(4,18)을 위해 은혜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시기에 그분이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실천을 합니다. 그 실천으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루가 6, 21-21)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잔치는 베풀어진 것을 참석한 모든 이가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자리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과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신앙은 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강요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를 잃은 양들과 같이 측은한 군중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9,36). 인간의 슬기로움은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고, 기를 꺾어놓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슬기롭고 똑똑하여 쟁취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셨다.”(마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은혜로운 삶의 공간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돌아가셨듯이, 초기 신앙공동체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들이 뿌리는 말씀의 씨는 좋은 땅을 만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바울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로마 4,18)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권위도, 허세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은혜로움을 스스로 실천하여 자기 삶의 현실로 만듭니다.
신앙은 그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말과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일하실 것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비옥한 땅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55, 10-11)는 말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야 만다.’ 예수님 안에 보였던 말씀과 실천을 우리가 뿌리면, 그것은 무위로 끝나지 않고,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
있어야 할 자리 -서강진 신부-
지난 가을 하늘공원에 부임하고 추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겨우내 메마르고 얼어있던 이곳에 봄이 오고 파릇파릇 돋는 싹을 보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특히 봄을 맞이하며 묘지를 둘러싸고 만개한 벚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환상적이었습니다.“그래서 이곳이 하늘공원이구나!”하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감동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묘지 위로 쑥쑥 솟아나는 잡초는 저의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늘공원에서는 그동안 받지 않던 매장묘 관리비를 작년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가족들의 요구는 분명해졌고 그것은 바로 벌초였습니다.“이게 뭡니까? 관리비까지 받으면서 왜 우리 묘는 벌초하지 않았어요?”불만에 찬 항의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벌초해야 합니다.“그래! 이제부터 풀과의 전쟁이다.”
5월 부터 4명의 직원들과 함께 5만 평의 묘지를 누비며 풀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초기의 무게와 진동으로 손이 떨려 숟가락조차도 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얼굴은 검게 그을러 가면서 점차 익숙해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의 땀보다는 자연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며 오늘도 부쩍부쩍 자라는 잡초를 벱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들의 적(?)인 잡초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일 잡초에서 핀 이 꽃들이 묘지가 아니라 산이나 들에서 피었더라면, 사람들이 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좋아들 할 텐데.’
그렇습니다. 오늘도 베어지는 잡초의 꽃들은 산과 들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들꽃들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이나 똑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당신의 온갖 정성을 쏟아 우리를 창조하셨고 사랑을 주셨으며 소중히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하더라도 묘지에 피어있다면 베어 버려야 할 잡초꽃이듯, 우리들은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모든 이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를 은혜롭게 생각하고 감사드리고 있는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지. 그렇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것, 더 나아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감사드리고 찬미드릴 수 있을 때, 좋은 땅이며 바로 우리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지금 비록 자신의 처지가 힘들다 하더라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파이팅!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원주민들은 곡식과 음식 창고를 약탈하는 야생 원숭이를 잡는 독창적인 기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원주민들은 빈 코코넛 껍질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을 만듭니다. 그리고 코코넛 안에는 미끼로 쌀을 집어넣고 그 코코넛을 땅에 묶어 두지요. 원숭이는 냄새를 맡고 이 코코넛 안의 쌀을 집기 위해 손을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쌀을 잡은 주먹 때문에 구멍 밖으로 손을 꺼낼 수가 없지요. 당연히 도망가기 위해서는 쌀을 놓아야 하는데, 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덫에 갇히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인간들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놓아주지 못해서 거기에 갇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항하면 할수록 몸만 아프고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도, 세상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 때문에 차마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들을 한두 번은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얼마나 힘들어 했었는지를……. 때로는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안심이 되고 편안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재물에 대한 소유도 어느 정도까지만 행복을 가져다 줄 뿐, 그 뒤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어떤 신문 기사에서 본 것이 기억납니다. 행복은 재물에 대한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며, 씨가 떨어진 장소가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떠한지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길’은 세상의 것은 모두 알지만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는, 이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길은 온갖 사람의 발아래 밟히기 때문에 단단하고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꽉 막힌 자들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자신의 신앙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이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공경은 얄팍하고 뿌리가 없습니다. ‘가시덤불’은 재물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재물에 대한 관심사들로 인해 주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은 주님의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참 신앙인의 마음인 것이지요. 좋은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같이 필요 없는 곳에도 당신의 기쁜 소식을 뿌리십니다. 좋은 땅만 선택하면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을 내 마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상처는 낫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J. 레이)
진정한 존중이란?
미국 서부에 있는 어떤 여고 농구팀이 장애인 학교 농구팀이랑 게임을 했는데 100대 0으로 이겼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너무 가혹했다는 이유로 코치가 해고되었지요(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틀 후에 한 신문에서 코치를 인터뷰했습니다. 코치가 답하길, “상대를 존중했기에 최선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장애인 팀이라고 봐주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자칫하면 배려가 아니라 값싼 동정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00대 0은 너무한 것 아닐까요? 이것이 과연 진정한 존중일까요? 저는 판단이 잘 되지 않네요…….
사람을 죽이는 말과 사람을 살리는 말씀
-인영균신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방송매체와 사회관계망서비스로 대표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생긴 언어의 범람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페이스북과 트윗을 하지만 수없이 올라오는 엄청난 말들로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말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쏟아냅니다. 또 이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기 말처럼 가장해 쏟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말을 못해 병이 든 사람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남의 것을 옮겨다 올립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말과 말씀은 같은 소리이지만 같지 않습니다. 말은 사라져버리지만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만 듣는 사람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말들 속에서 보석처럼 숨어 있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들의 홍수 속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정녕 자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깨닫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만 말은 사람은 죽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우리 가슴 속에 새기고 생명을 선사하는 말씀의 전파자가 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말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말씀이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태오13,3) -김대열신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오늘의 복음으로 읽혀집니다. 이 비유에 관한 설명은 친절하게도 예수님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됩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즉, 뿌리를 내려보지도 못하고 없어진 씨, 싹은 났지만 이내 말라버린 씨,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만 씨, 그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씨.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이 비유를 통해서 얻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길 위,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과 의지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복음이 관심 있게 들립니까? 그렇지 않다면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다. 복음이 관심 있게는 들리는데 내 삶에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은 돌밭입니다. 복음에 감동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은 있는데, 십자가는 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은 가시덤불입니다. 복음에 감동했고 결단을 내렸고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그 마음은 좋은 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의 땅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두 번째의 돌밭이나 세 번째의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에 속한다고 속상해 하실 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각도로 생각해봅시다. 이 네 가지의 땅은 어느 누구든 예외 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속에 있는 네 가지의 움직임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입니다. 때로는 척박하고 메마른 마음, 때로는 돌밭 같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 때로는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도 유혹이 정신 없이 밀려들어 넘어지고 마는 마음, 때로는 비옥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마음. 이 모두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이라는 여정 안에서 모두가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선 인내하시며 우리를 좋은 땅으로 들어오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상처 속에서 황폐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이 무성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느님께서 주신 그 비옥한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땅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 한 톨 허투루 뿌리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처음부터 엉터리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버려진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해야 하며,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20130130)
초보 농사꾼의 추억
-양승국신부-
애기 수사님들과 같이 지인들의 땅을 빌려 한 5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웃기는지 모릅니다. 밭이랑을 수십 개 만들고 나서 밭이랑 한가운데다가 호박 모종을 심었다가 지나가는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습니다. 고추모종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줘야 하는데, 그 지지대 값을 아낀다고 부러진 야구방망이, 우산대 같은 걸 쭉 세워놓으니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두 박스나 사서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을 해보니 총 수확량이 두 박스였습니다.
농사 이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는 하나하나 겸손하게 이웃 농부 할아버지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제가 깨우친 바로는 농사에서 가장 기본이자 키포인트는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토양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엄청 신경을 쓰십니다. 일찌감치 밭 여기저기 겨우내 묵혀둔 퇴비를 왕창 뿌리더군요. 날씨가 조금 풀리면 퇴비와 함께 땅을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비닐이며 돌들을 골라냅니다. 갖은 정성을 기울인 좋은 토양과 적당한 일조량과 강수량이 합쳐져야 그해 가을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 각자의 마음도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이란 씨앗이 그 좋은 토양 위에 뿌려져 왕성히 성장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전해도 완고하고 닫힌 마음으로 인해 도무지 말씀의 씨가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길바닥이나 돌밭과도 같습니다. 영혼의 귀가 닫힌 사람이라 절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발아되고 성장하는 과정이 얼마나 더딘지 모릅니다. 그의 내면은 가시덤불로 가득합니다. 갖은 의혹, 불신을 걷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이해, 수용, 적극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하느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의 삶 전체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흐뭇한 미소 지을 ‘좋은 토양’을 우리 내면에 일구어야겠습니다. 매일 하느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
-이수철신부-
말씀 묵상 중 떠오른 루가복음 다음 율법교사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ㄴ).
율법교사의 물음의 동기는 불순했지만 질문은 옳았습니다.
옛 구도자들이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것 역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왜소해진 사람들입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많은 사람을 왜소한 속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여 청년이든 장년이든 많은 이들이 하느님 비전을,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합니다.
참으로 평생 추구할 비전이자 영원한 화두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런 비전의 뚜렷한 목적의식과 함께가는 정신력이요 삶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오늘 복음 말씀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을 요약한 저녁 성무일도 시 다음 '성모의 노래 후렴'에서 오늘 강론의 틀을 찾았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니,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첫째,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니십시오.
모든 수행의 목표가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을 때 눈도 마음도 열립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깨어 눈도, 귀도 열려 있었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보는 눈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순전히 은총입니다.
진정 청해야 할 은총은 볼 수 있는 눈이요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 주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빛나는 비전도 계시됩니다.
바로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활짝 열린 눈에 계시되는 이런 '영광의 자유'의 비전 있어,
언제 어디서나 낙관적 긍정적 삶입니다.
현세의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초연한 자유를 누립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다음 주님의 말씀 중, 비와 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새삼 물은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최고의 덕을 상징하는 물이요, 세상에 물의 덕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화장실에서, 세탁할 때, 샤워할 때, 청소할 때, 음식을 만들 때,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등,
물의 고마움은 끝이 없습니다.
물같이 사는 이가 정말 최고의 덕인입니다.
다양한 쓰임이지만 물의 본질은 변치 않습니다.
바로 영혼에 이런 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혼의 양식이자 생명수가, 영혼을 깨끗이 정화해 주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말씀의 은총으로 영혼을 샤워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비유의 전반부의 주인공,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농부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다."(요한15,1)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요.
하느님은 농부의 원조이십니다.
농부를 천대함은 하느님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천대하는 나라치고 잘 된 나라는 없습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있는 이들이 농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삶의 모범입니다.
땅을, 밭을 탓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합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삶의 비밀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런저런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충실했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결과,
우리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는 성공의 풍작 인생입니다.
넷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비유의 해설에서 주인공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은총이 좋고, 주님이 말씀의 씨를 뿌려도 땅이 척박하면 말씀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응답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십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 땅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까?
돌 밭같은 마음입니까?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까?
혹은 좋은 땅같은 마음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 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누구나 원하는바 이런 좋은 땅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 마음 땅에 좌절하지 않고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땅으로 변모시켜 결국은 풍부한 수확을 주십니다.
얼마 전 읽은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4,14).
우리가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모욕적인 상황도 지극한 인내의 겸손으로 잘 견뎌낼 때,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땅을 좋게 변모시켜 주심을 믿습니다.
요즘 깨닫는 바가 '먹기-읽기-걷기-살기'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건성으로 먹는 이는 건성으로 읽고 건성으로 걷고, 결국은 건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지하게 먹는 이는 진지하게 읽고 진지하게 걸으니 그 삶 또한 진지합니다.
'깨어 바르게' 먹고, 읽고, 걷고, 살기의 수행에 항구할 때 더불어 마음 땅도 비옥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깨달음과 직결되며 깨달음과 더불어 좋은 땅으로 변모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마음 땅'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정화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이요 성체입니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자주 모시어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이해를 가지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지 마라’ 하고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창세기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딱딱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하며 상처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고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궂은 일을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요.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 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는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 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네 손을 펴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며 죄 많은 여인에게 ‘네 죄를 묻지 않겠다.’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하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이고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긴 여름동안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가을의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에는 한 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 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데 배부를 수 있습니까? 공부를 안 하는데 성적이 좋아집니까? 우리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거두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열매를 기다리고, 노력하지 않고 행복해 지려 한다면 뻔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말씀에는 아주 깡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신부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서를 수여 받는데 그때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시죠?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가끔 익사하는 오리가 있답니다. 오리는 날개 바로 밑에서 특별한 방수기름이 분비되는데 이것을 온 몸에 발라야 물에 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오리는 게을러서 이 일을 하지 않아 물속에 들어갔다가 깃털이 물에 빨려 들어가 가라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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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