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삼국시대)
375년,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 30년, 근구수왕 원년)
375년의 한반도. 백제의 전성기.
476년, 고구려의 전성기.(장수왕 64년)
476년의 한반도. 고구려의 전성기.
576년, 신라의 전성기.(진흥대왕 37년, 진지대왕 원년)
576년의 한반도. 신라의 전성기
고조선 시대 | 단군조선 (기원전 2333년~기원전 194년) |
| 진(辰) (기원전 4세기 ~기원전 2세기) |
위만조선 (기원전 194년 ~기원전 108년) |
삼국 시대 |
| (~3 세기) | (~5 세기) | (~6 세기) | 신라 (기원전 57년~ ) | 가야 (42년~ 562년) | 백제(기원전 18년 ~6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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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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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668년) | | | |
대한민국의 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紀元前(기원전) 1세기부터 中央集權的(중앙집권적) 國家(국가)로 發展(발전)한 新羅(신라),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의 三國(삼국)과 그 版圖(판도)에 影響(영향)을 끼친 伽倻(가야) 聯盟(연맹)을 包含(포함)한 4개 國家(국가)가 韓半島(한반도)와 滿洲(만주) 一帶(일대)에 세워지면서부터 7世紀(세기)에 新羅(신라)에 의해 統一(통일)되기까지의 時代(시대)를 가리킨다. 三國時代(삼국시대)의 前半(전반)은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가 主導(주도)했으나 眞興王(진흥왕) 以後(이후) 國力(국력)이 莫强(막강)해진 新羅(신라)가 三國時代(삼국시대) 後期(후기)를 主導(주도)했고, 最終的(최종적)으로 삼국 統一(통일)을 이루며 統一(통일) 新羅(신라) 時代(시대)를 열었다. 各國(각국)의 全盛期(전성기)로 評價(평가)되 時期(시기)는 百濟(백제) 4世紀(세기), 高句麗(고구려) 5世紀(세기), 新羅(신라) 6세기 순이다.
伽倻(가야)=古代(고대) 部族(부족) 國家(국가)時代(시대), 42년에 洛東江(낙동강) 下流(하류) 地域(지역)에서 12部族(부족)의 聯盟體(연맹체)가 統合(통합)된 나라를 통틀어 이르던 말는
일부 史學者(사학자)들은 實質的(실질적)으로 三國(삼국)이 正立(정립)되어 三國(삼국) 時代(시대)가 展開(전개)된 것은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의 紀元(기원)인 夫餘(부여)가 滅亡(멸망)하고(494년), 또, 伽倻(가야)가 滅亡(멸망)한 562년 이후부터 新羅(신라)가 百濟(백제)를 征服(정복)한 660년까지 약 100년 동안의 기간 뿐이므로 五國時代(오국시대), 四國時代(사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라는 用語(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目次(목차)
1 역사
1.1 삼국 시대의 배경과 원삼국 시대
1.2 삼국의 성립
1.2.1 고구려
1.2.2 신라와 가야
1.2.3 백제
1.3 삼국의 발전
1.4 신라의 삼국통일
2 고구려
3 신라
4 가야
5 백제
6 역사적 기록
7 삼국의 정치 구조
7.1 부체제의 구조
7.2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체제
8 정치와 사회
8.1 초기
8.2 중기
8.3 후기
9 삼국의 동맹관계 변화
9.1 4세기 후반
9.2 5세기 초반
9.3 5세기 후반
9.4 6세기
9.5 7세기
10 경제
11 삼국의 문화 발달
11.1 불교와 도교의 수용
12 삼국에서 기원한 성씨
13 관련 항목
14 각주
歷史(역사)
三國時代(삼국시대)의 背景(배경)과 元三國(원삼국) 時代(시대)
原三國時代(원삼국시대)= 韓國(한국) 古代史(고대사)에서, 先史(선사) 無文(무문) 土器(토기) 時代(시대)에서부터 新羅(신라)에 이르는 時期(시기).
민무늬토기 시대(無文土器時代, Mumun pottery period)는 韓半島(한반도)의 고고학적(考古學的 : 1.遺跡(유적)이나 遺物(유물)을 통해 옛 人類(인류)의 生活(생활)과 文化(문화)를 硏究(연구)하는 學問(학문)에 根據(근거)한 것)인 時代區分(시대구분)이다. 靑銅器(청동기) 時代(시대)에 該當(해당)하는 紀元前(기원전) 1500년부터 紀元前(기원전) 300년경에 이른다. 이 時代(시대)의 典型的(전형적)인 土器(토기)가 表面(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特徵(특징)으로 인해 민무늬 土器(토기) 文化(문화)라고 命名(명명)되었다.
紀元前(기원전) 108년 왕검성(王儉城)을 陷落(함락)시키고 古朝鮮(고조선)을 滅亡(멸망)시킨 漢(한)나라는 옛 古朝鮮(고조선) 地域(지역)에 네 개의 群(군)을 設置(설치)했다. 漢四郡(한사군)(樂浪郡(낙랑군), 臨屯郡(임둔군), 眞番群(진번군), 玄菟郡(현도군)의 支配(지배) 時期(시기)에 古朝鮮(고조선) 社會(사회)의 旣存(기존) 上級(상급) 統合(통합)組織(조직)은 解體(해체)되었다. 中國系(중국계) 住民(주민)들은 郡縣(군현) 內(내)의 主要(주요) 地點(지점)에 設置(설치)된 土城(토성)에 주로 居住(거주)하면서 支配(지배) 族屬(족속)으로 君臨(군림)하였고, 古朝鮮(고조선)인은 村落(촌락) 單位(단위)로 郡縣(군현) 조직에 隷屬(예속)되었다. 또한 8조의 法禁(법금)이 갑자기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古朝鮮(고조선) 사회의 傳統的(전통적)인 社會秩序(사회질서)와 文化(문화)에 큰 混亂(혼란)이 일어났다. 經濟的(경제적)으로도 郡縣(군현)의 公的(공적)인 收取(수취) 외에 漢(한)나라인들에 의한 收奪的(수탈적)인 商去來(상거래)가 盛行(성행)하였다.
이러한 結果(결과)를 强要(강요)한 漢郡縣(한군현)의 支配(지배)에 대한 抵抗(저항)이 곧이어 일어났고, 그 結果(결과) 2개 郡(군)이 廢止(폐지)되고 1개 郡(군)이 縮小(축소)되는 變動(변동)이 잇따랐다.
한사군(漢四郡, 紀元前(기원전) 108년 ~ 314년) 또는 한군현(漢郡縣)은 紀元前(기원전) 108년 前漢(전한) 武帝(무제)가 衛滿朝鮮(위만조선)을 滅亡(멸망)시킨 뒤 그 領土(영토)를 統治(통치)하기 위해 設置(설치)한 樂浪郡(낙랑군)·眞番群(진번군)·臨屯郡(임둔군)·玄菟郡(현도군)의 4群(군)과 그 屬縣(속현)을 말한다. 近代(근대)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사군(四郡)이라 불렀고, 現代(현대) 韓國(한국)史學界(사학계)에서는 漢郡縣(한군현), 동방변군 등으로 指稱(지칭)하기도 한다. 漢四郡(한사군)의 位置(위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大韓民國(대한민국),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日本(일본)의 學界(학계)가 서로 다른 意見(의견)을 提示(제시)하고 있다.
전한(前漢: 紀元前(기원전) 202년~紀元後(기원후) 8년)은 고조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진(秦)에 이어서 中國(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首都(수도)는 長安(장안)이었는데 그 位置(위치)가 후에 세워진 後漢(후한)의 首都(수도) 洛陽(낙양=中國(중국) 허난 성(허난성(하남성, 중국어: 河南省, 병음: Hénán Shěng) 북쪽에 있는 都市(도시)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紀元前(기원전) 156년 7월 30일 ~ 紀元前(기원전) 87년 3월 29일)은 前漢(전한)의 제7대 皇帝(황제:재위 紀元前(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다. 兒名(아명)은 체(彘), 字(자)는 통(通)이다. 열한 번째 경제의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所生(소생)이다. 그는 儒學(유학)을 바탕으로 國家(국가)를 다스렸으며, 海外(해외) 遠征(원정)을 통해 匈奴(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南越(남월), 衛滿朝鮮(위만조선)을 滅亡(멸망)시켜 遼東(요동)지역에 漢四郡(한사군)을 設置(설치)했으며, 漢族(한족) 歷史上(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前漢(전한)의 全盛期(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진시황제(秦始皇帝 = 中國(중국) 秦(진) 나라의 제1대 황제:중국진(秦) 나라의 제1대황제(BC259~BC210, 재위BC247~BC210). 이름은 정(政)이며, 紀元前(기원전) 221년에 天下(천하)를 統一(통일)하고 自稱(자칭) 시황제(始皇帝)로 君臨(군림)하였다. 군현제(郡縣制)에 의한 中央集權(중앙집권)을 確立(확립)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思想(사상)을 統制(통제)하는 한편 度量衡(도량형)과 貨幣(화폐)를 統一(통일)시켰다. 아방궁(阿房宮)과 萬里長城(만리장성)을 築造(축조)하는 등 威勢(위세)를떨쳤다.)·唐(당) 太宗(태종)·영락제(永樂帝:中國(중국) 明(명)나라의 제3대 皇帝(황제)·강희제(康熙帝 :中國(중국) 淸(청)나라의 제4대 皇帝(황제)와 더불어 中國(중국)의 가장 위대한 皇帝(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 동방변군 설의 變遷(변천)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사학사적인 고찰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둡니다. 유사역사가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이라는 것을 종종 들고 나오는데, 사실상 그런 설은 우리나라 史學界(사학계)에 등장한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유사역사가들의 프로파간다입니다. 그럼 한 번 살펴보시죠.
1. 이병도(李丙燾,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989년 8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였던 전직 정치가이며,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호(號)는 두계(斗溪, 杜溪)이다.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1976)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기전 108년에 조선의 수도 왕검성(평양)이 함락되자, 한제국은 조선을 말살하고 자국의 군현제를 실시하여 사상史上에 저명한 동방4군을 설치하였다. (중략) 현도군의 최초의 위치를 압록강의 상류지역과 동가 유역에 비정하는 나의 신설은...(하략)
보다시피 이병도는 동방변군을 한반도 안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동방변군 중 하나인 현도군을 한반도 이북에 설정하고 있으니까. 그럼 한반도 안에 동방변군이 모두 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는가? 있다.
2. 조선시대 유학자
홍만종과 홍명한은 각각 현도군이 함흥, 함북 영흥에 있다고 비정했다. 동방변군 모두를 한반도 안으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비판하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것은 이들의 주장 밖에 없다.
3. 이기백(李基百, 1931년 10월 20일[1] ~ 2019년 12월 1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을 지낸 정치가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호는 석관(石寬)이며 세종특별자치시 출생이다. 전두환 前 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이며, 제5공화국에서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평화의 댐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전직 군장성 모임인 성우회 회원과 한나라당 특임고문으로 활동하며 군사 현안에 대해 보수주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1986, 개정중판)에서 이병도와 같은 입장을 보인다. 즉 초기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 동가 지방에 있었다고 말한다. 역시 한사군 한반도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4. 이종욱(李鍾郁, 1945년 4월 12일 ~ 2006년 5월 22일)은 세계 보건 기구 사무총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의학자이며 국제 기관 단체인이다.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의학사 학위 취득하였으며, 서울대 대학원 산업공학과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미국 하와이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의학석사 학위(전염병학)를 받았다
이종욱의 견해 역시 이병도-이기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치 비정 문제를 떠나서 이들은 아직 동방변군을 변군이라는 성격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콜로니"라는 고대 식민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5. 김한규
김한규(金漢奎, 일본식 이름: 金子漢奎, 1877년 9월 20일 ~ 1950년 10월 5일)는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관은 김해이다.
여기에 대해서 김한규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군"에 대한 정의를 통해 기존의 "식민지" 개념과는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특히 김한규는 한반도 서북부 역시 "요동"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동방변군이 요동에 설치되었다"라고 주장한다.
5. 간단한 結論(결론)
보다시피 한반도 한사군 설이라는 것은 조선 후기 유학자 일부에서 나온 이야기로 이미 정약용에 의해서 부인당했고 이후 한국사 연구에 (내가 아는 한) 등장한 적이 없다. 따라서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더 이상 허수아비 치기를 하지말고 분명한 논거에 기인하여 이야기하기 바란다. (물론 분명한 논거에 기인하는 순간 이미 유사역사학이 아니게 되겠지만...)
사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병도의 지리비정에 대한 시비"가 정확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한반도 한사군>이라고 프로파간다하는 것이 훨씬 자극적이어서 선동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죠. 슈타인호프님이 정공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들이 그런 것을 구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상당히 의문입니다.
정확한 용어의 사용은 중요합니다. 유사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주장을 "이해"해 주는 순간 그들의 놀음에 말려들어간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古朝鮮(고조선) 사회의 중심부였던 韓半島(한반도) 서북 지방에 설치된 樂浪郡(낙랑군)은 점차 지배 영역이 축소되긴 했지만 紀元後(기원후) 4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3세기 초에는 樂浪郡(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帶方郡(대방군)이 설치되었다. 樂浪郡(낙랑군) 관할에 있었던 조선현(朝鮮縣), 즉 平壤(평양) 지역은 비단 韓半島(한반도) 서북부의 文化(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韓半島(한반도) 남부와 日本(일본) 열도 지역의 주민과 中國(중국) 사이의 무역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지역에는 相當數(상당수)의 中國系(중국계) 住民(주민)이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이들이 남긴 무덤들에선 漢(한)나라에서 반입된 고급품과 樂浪郡(낙랑군) 현지에서 생산한 물품들이 出土(출토)되어 당시 번성한 樂浪郡(낙랑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높은 수준의 문물은 토성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中國系(중국계) 주민들과 樂浪郡(낙랑군)의 지배 조직의 말단에 편입된 일부 古朝鮮系(고조선계)의 수장층에 한정되어 보급되었으며, 다수의 古朝鮮(고조선)인의 생활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런 漢(한)나라의 郡縣(군현)들과 그 세력의 원천인 漢(한)나라는 郡縣(군현)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던 濊(예)·貊(맥)·한민족 사회의 정치적인 성장을 압박하는 외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한편 한나라 군현을 통해 유입되는 선진문물은 토착사회의 변화를 자극하였다.
예맥족(濊貊族)=예(濊)와 맥(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貊(맥)은 종족 명칭이고, 예는 지역 또는 강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맥족의 아홉 갈래(九貊) 중의 하나를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하였다.미지나(三品彰英)는 선진(先秦)문헌에 보이는 맥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예는 진대(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한대(漢代)에 범칭되는 예는 고구려·부여·동예를 포괄하는 민족명이라고 보았다. 예맥이라는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과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맥을 결합시킨 편의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예족 내의 특정한 부족명이라 하였다. 곧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한 계통의 실체라 하였다.윤무병(尹武炳)은 예맥이라는 명칭은『사기(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한대 이후의 예와 (예)맥은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어졌던 실체였다고 보았다.한편,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을 예맥과 한(韓)의 양계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이종설(異種說)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했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계통이고, 맥족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족계통으로 파악하였다.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어졌다.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은 원래 중국의 산시성·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는데, 서기전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은 이어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으로 왔다가 고조선에 쫓겨 요동군(遼東郡)에 예속하게 된 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고,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서기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고 주장하였다.이렇듯 백가쟁명 식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더라도 다른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예맥 내부의 여러 집단 중에 우세한 집단이 등장하여 주변 세력을 병합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예맥이 고조선(古朝鮮)을 구성하는 종족집단을 이루었고, 한반도 중남부에 거주했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 형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한편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예·맥·예맥이 많이 주목되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현재로서는 정설이 없다.
高句麗(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제시되었다. 어느 하나로 단정지을 수는 없고 고구려 종족은 지역에 따라 대수맥(大水貊)·소수맥(小水貊) 등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인다.기원전 3∼2세기 요동(遼東)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주조철부(鑄造鐵斧) 등 초기 철기문화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했다. 이들은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석묘(積石墓)를 축조하면서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전통을 수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농경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아가 인구의 증가와 사회분화를 촉진시켜 혼강(渾江)과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에서 점차 새로운 정치체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태동시켰다. 고구려 발흥지인 혼강과 독로강(禿魯江) 유역을 포괄한 압록상 중류 유역에 거주하던 주민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족이라고 불렀다.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 온 일부 예족이 이에 융합되었다. 이어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인근의 여러 족속들이 흡수되어 고구려가 확대되었다.고구려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성과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예맥계 종족이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두만강·대동강·요하·송화강 유역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가면서 이들 주민들을 高句麗(고구려) 국가지배구조 내로 편입시켰다. 고구려는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전략거점화하고,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통합시키는 정책을 수행해나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예맥(濊貊)]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漢(한)나라 郡縣(군현)의 세력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진 문물을 수용하면서, 濊(예)·貊(맥)·漢民族(한민족) 사회에서 삼한(馬韓(마한), 弁韓(변한), 辰韓(진한:辰韓은 紀元前(기원전) 1세기 경부터 紀元後(기원후) 3세기 무렵 韓半島(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로서 古代(고대) 韓半島(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辰)을 繼承(계승)한 部族(부족) 國家(국가)이다.), 高句麗(고구려), 沃沮(옥저), 東濊(동예), 夫餘(부여) 등 여러 國家(국가)들이 차례로 登場(등장)하였다. 이 國家(국가)들이 오랜 기간에 걸친 상호 통합의 과정을 거쳐,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 등의 國家(국가)로 正立(정립)하게 되었다.
三國(삼국)의 成立(성립)
高句麗(고구려)
漢族(한족)과의 鬪爭(투쟁) 課程(과정) 속에서 점차 勢力(세력)을 확대한 高句麗(고구려)는 瑠璃王(유리왕) 때에 이르러 前漢(전한)의 뒤를 이어 일어난 신나라와 충돌할 정도로 그 勢力(세력)이 成長(성장)하였다. 이어 太祖王(태조왕) 때부터는 강력한 대외 발전을 꾀하여 沃沮(옥저)를 복속시키고 遼東郡(요동군)과 玄菟郡(현도군)을 자주 공격하였다. 또 高句麗(고구려)는 遼河(요하)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公孫氏(공손씨)를 逐出(축출)하고, 中國(중국)이 三國(삼국)의 대치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魏(위)나라를 攻擊(공격)하는 등 征服(정복) 國家(국가)로서의 面貌(면모)를 誇示(과시)하며 集權(집권) 體制(체제)를 가다듬었다.
유리명왕(瑠璃明王, BC 38 - 18)은 高句麗(고구려)의 2대 王(왕)이다.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 57)은 新羅(신라)의 3대 王(왕)이다.
위(衛,? ~ 紀元前(기원전) 209)는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국이다.
위(魏, 기원전 403 ~ 기원전 225)는 전국 시대의 왕조이다.
위(魏, 220 ~ 265)는 삼국 시대 조조가 기반을 닦고 조비가 세운 나라다.
위(魏) 또는 북위(北魏, 386 ~ 534)는 남북조 시대의 왕조다.
이후 故國川王(고국천왕) 대에 이르러 乙巴素(을파소) 등의 有能(유능)한 大臣(대신)이 등장하고, 賑貸法(진대법) 등을 통해 내정의 안정을 꾀하였지만, 故國川王(고국천왕) 사후에 高發岐(고발기)를 비롯한 故國川王(고국천왕)의 형제들 간에 일어난 싸움으로 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拔奇(발기)의 亂(난)에서 高發岐(고발기)를 진압하고 왕이 된 山上王(산상왕)에 이어 東川王(동천왕)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다시 대륙과의 관계를 다양하게 전개, 魏(위)나라에는 能動的(능동적)으로 대처하고 新羅(신라)를 지속적으로 侵犯(침범)하였다.
고발기(高發岐,? ~ 197년)는 高句麗(고구려) 新大王(신대왕)의 아들이다. 同生(동생) 山上王(산상왕)이 不當(부당)하게 王位(왕위)를 잇자 反撥(반발)하여 後漢(후한)의 遼東(요동) 太守(태수) 공손탁(공손도(公孫度,? ~ 204년) 또는 공손탁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승제(升濟)이며 유주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사람이다. 이름인 度는 도나 탁으로 읽히며 어릴 적 이름은 공손표(公孫豹)였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 동북방 변방의 태수로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의 도움을 받아 亂(난)을 일으켰으나 敗(패)하고 自殺(자살)하였다. 漢字(한자)가 다른 발기(拔奇)는 보통 同一人(동일인)으로 본다.
산상왕(山上王?~227년, 在位(재위) 197년~227년)은 高句麗(고구려)의 제10대 國王(국왕)이다. 新大王(신대왕)의 아들이자 故國川王(고국천왕)의 同生(동생)으로 諱(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다른 이름으로 위궁(位宮)이 記錄(기록)되어 있으며 中國(중국)의 북사(北史:中國(중국) 唐(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자는 하령(遐齡)으로 감숙성 농서 상주 사람이다. 기거랑, 숭문관 학사를 거치면서, 唐太宗(당태종) 때부터 『수서』 본기와 열전 및 10지 그리고 『오대사지』, 『진서』의 편수에 가담하였다. 어사대, 주부, 겸수국사 등에 올라 당태종과 당고종시기 사료 정리에 참여하였다. 643년에는 『북사』와 『남사』를 각각 편수해 659년에 完城(완성)하였다.)가 지은 正史(정사)인 二十五史(이십오사)의 하나)
에도 位宮(위궁)은 그의 이름이라 한다. 《三國志(삼국지)》 등의 中國(중국)의 다른 記錄(기록)에 의하면 位宮(위궁)은 山上王(산상왕)이 아닌 東川王(동천왕)의 이름이라 한다.
동양왕 동천왕(東襄王 東川王, 209년 ~ 248년, 在位(재위):227년 ~ 248년)은 高句麗(고구려)의 제11대 國王(국왕)이다. 일명 동양왕(東襄王)이다. 산상왕(山上王)의 아들로 諱(휘)는 우위거(憂位居)다. 일설에는 위궁(位宮)도 그의 이름이라 한다. 兒名(아명)은 교체(郊彘)이며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出身(출신)의 소후(小后)이다.
위(魏, 220년 ~ 265년)는 後漢(후한)이 멸망한 후 三國(삼국) 中國(중국)을 分割(분할)하여 지배했던 세 나라 중 가장 强大(강대)했던 나라였다.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後漢(후한)이 黃巾賊(황건적)의 亂(난)과 동탁(동탁(董卓,? ~ 192년 5월 22일(음력 4월 23일))은 中國(중국) 後漢(후한) 末(말)의 武將(무장), 政治家(정치가)이다. 字(자)는 중영(仲穎)이며 양주(凉州) 농서군(隴西郡은 中國(중국)의 옛 郡(군)이다. 이름은 농판(隴阪), 농산(隴山)의 서쪽이라는 뜻이다.)임조현(臨洮縣) 사람이다. 邊方(변방)에서 武功(무공)을 쌓았다. 靈帝(영제:한 효령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고손자이다. 할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숙(劉淑), 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이며, 어머니는 후한 환제의 5촌 조카인 동태후이다. 재위 중의 잇따른 재해와 소규모 반란, 그리고 황건의 난 등으로 그의 사후,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고, 이는 삼국 시대로 이어진다.) 死後(사후) 十常侍(십상시)의 亂(난) 등 政治的(정치적) 混亂(혼란)을 틈타 政權(정권)을 잡았다. 소제를 폐하고 부패·살인·약탈·도굴·방화·축재 등 온갖 폭정을 휘둘렀다. 관리들의 대규모 무장 항명사태인 반동탁 聯合軍(연합군)과 각종 암살 시도가 있었고 결국 왕윤·여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대표적인 악인으로 두루 회자되었다.)의 반란을 거치며 사실 상 통치력을 상실하면서 中國(중국)은 수많은 군웅들이 사생결단을 펼치는 거대한 전장으로 전락한다. 이 중 전략과 용병술이 뛰어났던 조조(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무장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다. 사후 위가 건국된 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위나라의 초대 황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지만 실질적으로 위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조비의 아버지 조조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를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민간인과 포로를 무자비하게 학살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명분을 확보하였다.
이후 최강의 숙적이었던 원소를 상대로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며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단 천하통일을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하려던 야심은 적벽대전에서 실패하면서 물거품으로 끝났고 천하의 정세는 삼분 천하로 흘러가게 된다.
조조 사후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 조비는 이름만 남아있던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의 문을 닫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을 거치면서 군부의 실세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5년의 짧은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이러한 정복전쟁 결과 高句麗(고구려)는 막대한 토지와 인간을 점유하였고, 王室(왕실)을 고정하고 부자상속을 확립하였으며, 또 5부를 개편하는 등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여 4세기에는 律令制(율령제)가 갖추어진 古代(고대) 國家(국가)로서 發展(발전)하였다.
율령격식(律令格式)은 중국에서 수·당대에 완성한 국가적 성문법 체계이다.
율(律)은 형법, 령(令)은 공사 제반의 제도에 관한 규정, 격(格)은 율령을 수정 증보한 명령, 곧 칙령(勅令)의 편집, 식(式)은 율령의 시행 세칙이다. 흔히 율령 국가 또는 율령 반포와 같이 율령으로 쓰는 때가 많다.
高句麗(고구려)에서는 小獸林王(소수림왕) 3년(373년)에 율령이 반포되었으며, 新羅(신라)에서는 法興王(법흥왕) 7년(520년)에 반포되었다. 新羅(신라)는 국력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뒤 여러 차례 율령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三國(삼국) 統一(통일)을 완성한 文武王(문무왕) 때에는 新羅(신라)의 律令格式(율령격식)이 完成(완성)되었다. 이 律令(율령) 제도의 完備(완비)로 統一(통일)新羅(신라)의 官僚(관료) 體系(체계)는 整備(정비)되었던 것이다.
中國(중국)의 가장 오래된 事典(사전)인 이아(爾雅)는 中國(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의어 事典(사전)이자 言語(언어) 解釋(해석) 事典(사전)이다. 儒敎(유교)에서는 주공 제작설이 있지만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 이후에 행해진 古典(고전)의 의미 解釋(해석)을 한초의 학자가 정리 보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訓詁學(훈고학)의 책이다. 《한서》 〈예문지〉에는 3권 20편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現行(현행) 書籍(서적)은 19편이다.
漢(한)·唐(당)의 고문학이나 淸(청)의 考證學(고증학)에서 매우 중시되어 이후 13경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唐代(당대)에는 개성석경(開成石經)에도 새겨졌다. 》는 률(律)을 상・법(常・法), 령(令)을 고(告)라 한다. 律(률)은 恒久的(항구적)인 法律(법률)이고, 令(령)은 君主(군주)가 그때 그때 내리는 명령이다. 律(률)은 法律(법률)과 같은 의미로, 法律(법률)이 現代的(현대적) 의미의 法(법)과 命令(명령)의 두 가지를 모아놓은 것이라는 사상과는 다른 개념이다. 中國(중국)에서는 刑法(형법)에 해당하는 부분이 먼저 발전하여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에는 各國(각국)에서 活潑(활발)하게 刑律(형률)이 만들어졌다. 律(율)은 戰國時代(전국시대)에 法家(법가)에 의해 整備(정비)되어, 상앙의 주장으로 秦(진)나라의 國家(국가) 體制(체제)의 根幹(근간)이 되었다. 이 律(률)은 刑罰(형벌)을 重視(중시)하고는 있으나, 민정(民政)에 관한 것도 포함한다. 이애 대하여, 令(령)은 單行法(단행법)으로서 잡다한 範圍(범위)를 아우른 것으로서 後代(후대)의 律令制度(율령제도)에 있어서 격(格)에 該當(해당)하는 것이었다.
律(률)과 令(령)의 관계가 변화하여 刑法(형법)과 민정관계의 제반 법이라는 분야의 차이로 變遷(변천)된 契機(계기)는 漢(한)나라 때의 일이다.
지금의 慶州(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斯盧國(사로국:사로국은 진한 사로국(斯盧國)과 마한 사로국(駟盧國)이 있다.)
은 中國(중국)의 金屬(금속) 文化(문화)와 접촉할 機會(기회)가 적어서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보다 社會(사회) 發展(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東部(동부) 海岸(해안)에서 定着(정착)해 온 昔氏(석씨:석(石, 昔)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와 聯合(연합)하여 聯盟體(연맹체)를 이루어 갔다.
그리하여 脫解尼師今(탈해이사금: 紀元前(기원전) 19년?~80년, 在位(재위):57년~80년)은 新羅(신라)의 제4대 尼師今(이사금:泥斯今은 新羅(신라)에서 君主(군주)를 뜻했던 稱號(칭호) 중 하나로, 新羅(신라) 제3대 王(왕)인 유리 이사금부터 18대 실성 이사금까지 사용된 명칭이다. '이사금'이라는 표현은 現代(현대) 韓國語(한국어)의 '임금'이라는 表現(표현)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諱(휘)는 탈해(脫解)이다.
脫解尼師今(탈해이사금) 때는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6촌을 개편하여 6부의 행정 구역으로 하였다. 이 시대에는 部族長(부족장)의 칭호도 군장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거서간’에서 무당 또는 제사장을 의미하는 ‘차차웅(次次雄)’으로, 그리고 다시 부족장 권한의 ‘繼承者(계승자)’라는 의미의 ‘이사금(尼師今)’으로 변했다. 그 후 味鄒王(미추왕)의 즉위를 기점으로 金閼智(김알지)의 후손 金氏(김씨)가 王位(왕위)를 차지하였다.
한편 금속문화의 전파가 늦었던 弁韓(변한)의 여러 部族(부족) 國家(국가)들도 3세기 이후에는 伽倻(가야)라는 연맹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百濟(백제)
百濟(백제)의 경우 馬韓(마한) 50여 부족 중 十濟國(십제국)에서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高句麗(고구려)에서 逃走(도주)한 溫祚(온조) 집단이 처음에 정착한 곳은 彌鄒忽(미추홀)과 慰禮城(위례성)이었고, 沸流(비류:비류(沸流, 생몰년 미상)는 우태(優台)의 長男(장남) 혹은 高句麗(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次男(차남)으로, 온조왕(溫祚王)의 兄(형)이다. 彌鄒忽國(미추홀국)의 初代(초대) 王(왕)이기도 하다.)가 自殺(자살)하면서 慰禮(위례)로 합쳐졌다. 古朝鮮(고조선) 滅亡(멸망) 후부터 파상적으로 피난해 온 集團(집단)들은 目支國(목지국) 支配權(지배권) 내의 여러 勢力(세력)을 점차 解體(해체)해 갔다. 그리하여 多婁王(다루왕)·肖古王(초고왕)의 재위 기간을 거치는 동안 土着(토착) 部族(부족) 勢力(세력)을 結合(결합)하면서 점차 馬韓(마한)의 여러 部族(부족)과 摩擦(마찰)을 일으켰다.
樂浪(낙랑)·帶方(대방)의 침략을 받은 漢江(한강) 流域(유역)의 部族(부족) 國家(국가)들은 이에 對抗(대항)하기 위하여, 보다 큰 聯盟體(연맹체)가 요구되자 百濟(백제)를 盟主(맹주)로 공고히 團結(단결)함으로써 百濟(백제)는 部族國家(부족국가)로 成長(성장)할 수 있었다.
三國(삼국)의 發展(발전)
大陸(대륙)에서 후한(後漢)이 亡(망)하고 위(魏)·촉(蜀)·오(吳)의 세 나라가 角逐(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半島(반도)에 대한 影響力(영향력)이 점차 감소되고 있던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三國(삼국)은 政治的(정치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중 하나는 古代(고대) 國家(국가)로의 발돋움을 위한 체제 정비이고, 다른 하나는 征服(정복) 國家(국가)로의 變貌(변모)다.
韓國(한국)의 古代(고대) 國家(국가) 체제 정비는 部族(부족) 國家(국가) 체제의 약화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部族長(부족장)의 권한이 강대한 상태에서는 지방 분권적인 사회 조직이 유지될 뿐 강력한 王權(왕권)이 존재할 수 없었다. 部族(부족) 聯盟(연맹) 사회의 우두머리라 할 部族(부족) 연맹장으로서의 왕도 각 部族長(부족장)의 統治權(통치권)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專制(전제) 王權(왕권)의 행사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왕권의 세습이나 王權(왕권)의 父子(부자)相續(상속)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었고, 다만 選擧(선거)로써 왕좌(王座)가 변동되었다. 夫餘(부여)에서 가뭄과 장마의 책임을 王(왕)에게 돌려 왕을 폐위하거나 죽인 사례나 高句麗(고구려)의 오부(五部) 사이에서 왕권의 이동이 있었던 사실, 新羅(신라)의 세 姓(성)朴(박)·昔(석)·金(김)이 王位(왕위)를 번갈아 이어받았던 것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部族(부족) 聯盟長(연맹장)의 세력은 점차 증대되고 部族長(부족장)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地方(지방)의 部族長(부족장)을 中央(중앙)으로 끌어올려 적당한 地位(지위)를 주어 貴族(귀족)으로 編制(편제)시켰다. 新羅(신라)의 골품제에서 나타난 진골을 비롯한 각 두품이나 17개의 官等(관등), 또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에서의 관등의 성립 등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單純(단순)한 部族(부족) 聯盟(연맹)의 君長(군장)이었던 王(왕)은 종래의 部族長(부족장)이 選出(선출)하던 연약한 王權(왕권)의 所有者(소유자)에서 父子(부자) 相續(상속)이 가능한 절대적인 君主(군주)로 君臨(군림)할 수 있었다.
또 하나, 古代(고대) 王權(왕권)의 構築(구축)과 고대 국가 체제의 정비에는 제도적인 면에 앞서서 사상 통일이 요청되었다. 과거의 지방 분권적이고 부족적인 사상 체계를 고대 국가적인 사상 체계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고차원적인 이념과 윤리 강령이 필요하였다. 韓國(한국)의 고대에서 高句麗(고구려) (372년), 百濟(백제) (384년), 新羅(신라) (527년)가 각각 佛敎(불교)를 수입, 혹은 공인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는 것은 불교가 고대 국가 체제의 정비에서 관념 체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高句麗(고구려)에서 古代(고대) 국가 체제를 정비한 小獸林王(소수림왕)과 故國壤王(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廣開土王(광개토왕)과 長壽王(장수왕)이 遼東(요동)에서 漢江(한강) 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과 新羅(신라)에서 佛敎(불교)를 공인한 法興王(법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眞興王(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탈환한 것 등, 이러한 삼국의 정복 군주의 등장은 대륙으로의 진출 뿐만이 아니라 삼국의 판도 또한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高句麗(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은 북으로 滿洲(만주) 일대를 공략하여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百濟(백제)와의 대결에서 크게 이겼으며, 百濟(백제)와 결탁하고 있던 倭(왜)의 勢力(세력)을 꺾기도 하였다. 뒤이은 長壽王(장수왕)도 영토 확장에 노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長壽王(장수왕)은 首都(수도)를 平壤(평양)으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平壤(평양) 遷都(천도) 등 일련의 남진 정책으로 高句麗(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新羅(신라)·百濟(백제) 간의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고, 120여 년간의 羅濟(나제) 同盟(동맹) 유지는 三國(삼국)의 歷史(역사)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한 新羅(신라)로 하여금 자체의 역량을 배양하여 후일 三國(삼국) 統一(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新羅(신라)가 자체 정비를 서둘러 정복 체제를 갖춘 것은 法興大王(법흥대왕)대를 거쳐서 眞興大王(진흥대왕)대에 이르러서이며, 당시에는 高句麗(고구려)가 廣開土王(광개토왕)과 長壽王(장수왕)의 양 대에 걸친 정복 전쟁으로 많은 힘을 소모한 때였다. 新羅(신라)는 百濟(백제)와 同盟(동맹)하여 高句麗(고구려)의 치하에 있던 漢江(한강) 유역을 빼앗고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江原道(강원도)와 咸鏡南道(함경남도) 일대까지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나제 동맹을 깨고 百濟(백제)가 정복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도로 빼앗아 버렸다. 나제 동맹을 깨고 백제가 가지고 있던 한강 유역까지 탈취한 新羅(신라)는 漢江(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서해안을 통한 唐(당)나라 등 中國(중국) 王朝(왕조)들과의 접촉,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의 국경을 차단하는 것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았고, 내부로는 佛敎(불교)를 공인하고 花郞(화랑)을 양성함으로써 三國(삼국) 統一(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新羅(신라)의 法興大王(법흥대왕)·眞興大王(진흥대왕)의 양 대에 걸친 伽倻(가야) 정복은 新羅(신라)의 洛東江(낙동강) 서부 진출 정책이 성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新羅(신라)·百濟(백제) 및 倭(왜)의 세력 角逐場(각축장)이었던 伽倻(가야)가 新羅(신라)에 정복됨으로써, 倭(왜)와 百濟(백제) 勢力(세력)이 이곳에서 축출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과의 대결에서 新羅(신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新羅(신라)가 韓半島(한반도)의 새로운 强國(강국)으로 성장하여 勢力圈(세력권) 형성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韓半島(한반도)는 과거의 高句麗(고구려)와 新羅(신라)·百濟(백제)의 대립이 아니라 新羅(신라) 對(대)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의 대립 양상으로 정세가 크게 변했고, 이러한 외교 관계에 中國(중국)과 日本(일본)이 가담하여 동아시아의 형세는 隋(수)·唐(당) - 新羅(신라)의 東西(동서) 세력과 突厥(돌궐) - 高句麗(고구려) - 百濟(백제) 倭(왜)의 南北(남북) 勢力(세력)으로 兩分(양분)시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문화적 사실은 佛敎(불교)와 儒敎(유교)의 도입이다. 佛敎(불교)는 古代(고대) 國家(국가)의 思想(사상) 統一(통일)에 기여하였다는 것과 또 대규모 征服(정복) 戰爭(전쟁)에서 높은 사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또 儒敎(유교)는 古代(고대) 國家(국가)의 집권적인 王權(왕권)에 효율적인 제도의 운용과 그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韓半島(한반도)에 소(Bos taurus)를 活用(활용)한 우경법(牛耕法)이 도입되어 韓半島(한반도)의 세 나라는 효율적인 양식(糧食)의 증대가 용이해졌고, 우경법은 삼국 시대 이후에도 韓半島(한반도)의 농사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新羅(신라)의 三國統一(삼국통일)
韓半島(한반도)에서 政治的(정치적)·文化的(문화적)으로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치는 기간은 커다란 변화와 발전을 본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政治的(정치적)으로는 新羅(신라)의 三國(삼국) 統一(통일)이 있었고, 文化的(문화적)으로는 佛敎(불교)文化(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新羅(신라)의 통일에 앞서 三國(삼국)은 서로 政治的(정치적)·軍事的(군사적)으로 갈등이 있었고, 그 위에 中國(중국) 大陸(대륙)에서는 수세기 이래 다시 천하를 통일한 隋(수)나라가 대두하여 韓半島(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러나 高句麗(고구려)는 잘 싸워 이를 물리쳤고, 사비(泗批)로 遷都(천도)한 백제도 고지(故地) 회복에 힘써 한때 큰 뜻을 펴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안으로 불교를 통한 정신적 통일을 꾀하는 한편, 화랑 제도를 발전시켜 군사적 일면을 담당케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수에 대신하여 일어난 唐(당)과의 연합으로 먼저 백제를 쳤으며(660년), 다음으로 高句麗(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년).
당시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는 서로 연합해야만 新羅(신라)에 맞설 수 있었고, 지리적 위치 또한 新羅(신라)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新羅(신라)가 이들을 征服(정복)하기 직전, 高句麗(고구려)는 수차에 걸친 隋(수)·唐(당)의 침략을 받았고, 百濟(백제)는 軍事(군사)를 총동원하여 新羅(신라)에게 빼앗긴 옛 영토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句麗(고구려)는 권력층의 세력 분쟁과 민심 이반으로 國力(국력)이 크게 약해졌고, 百濟(백제)는 義慈王(의자왕)의 失政(실정)과 貴族(귀족)간의 權力(권력) 爭奪戰(쟁탈전)으로 결국 民心(민심)이 이반되었다.
新羅(신라)가 이들을 정복하여, 드디어 한민족의 統一(통일)을 가져왔으나 唐(당)과의 연합 세력에 의한 軍事的(군사적) 승리 뒤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뒤따랐다. 唐(당)은 당대로 百濟(백제)의 고지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었고, 高句麗(고구려)의 고지에는 9도독부(九都督部)를 두었으며, 이를 다시 42주(州)로 나누었다. 이것은 唐(당)이 두 나라의 영토를 자기의 속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었고, 新羅(신라)는 이러한 唐(당)의 계획을 분쇄해야 했다. 이 투쟁은 文武大王(문무대왕) 16년(676년) 高句麗(고구려)가 亡(망)한 지 8년이 지나서야 成功(성공)하여 新羅(신라)는 대체로 大同江(대동강)과 元山灣(원산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영토를 차지했고, 唐(당)은 평양에 설치, 新羅(신라)까지도 포함하여 지배하려 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撤去(철거)하게 되었다.
羅唐(나당) 戰爭(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新羅(신라)는 韓半島(한반도) 최초로 統一(통일) 王國(왕국)을 이뤄내었다.高句麗(고구려)
Seal of Silla(新羅(신라)의 印章(인장)
이 부분의 본문은 高句麗(고구려)입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연가7년명 金銅(금동)여래입상(如來立像) (국보 119호)
무용총(舞踊塚,) 狩獵圖(수렵도).
무용총(舞踊塚, JYM458)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다. 고분 내부의 오른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 벽에는 검은색 말을 탄 사람과 무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서 무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인하여 이 고분은 무용총이라고 명명되었다.[1]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에 포함되어 있다. 무용총은 1935년 5월 만주국 안동 도호부의 학교 감독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만주 지배 기간 동안 이케우치 히로시와 우메하라 스에지를 포함한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12기의 고구려 고분 중의 하나이다.
將軍塚(장군총)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이곳은 현재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정책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高句麗(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韓半島(한반도) 북부와 滿洲(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高句麗(고구려)는 기원전 37년 朱蒙(주몽)이 이끄는 夫餘(부여)족의 한 갈래가 鴨綠江(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流域(유역)에 建國(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재위 :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초대 태왕이다.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다.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본래의 성은 해(解)였다가 건국 후 고(高)로 고쳤다, 휘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등에는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부여(扶餘,夫餘, 기원전 3세기 ~ 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계 부여족(夫餘族)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494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194년에 멸망한 후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다. 동명왕(東明王)이 세운 부여(夫餘),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解夫婁)가 세운 동부여(東夫餘), 그리고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百濟)가 부여족 계열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 · 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 · 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3]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4]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부여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7]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숙신)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다.[8] 또한, 위(魏)의 고구려 정벌에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은 부여를 재흥케 하였다. 그러나 진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졌다. 285년(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高句麗(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太祖王(태조왕) 대에 들어서 高句麗(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太祖王(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玄菟郡(현도군)은 압박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국양왕 고국천왕(國壤王 故國川王, ?~197년, 재위:179년~197년)은 고구려의 제9대 국왕이다. 신대왕의 둘째아들로 휘는 남무(南武)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다른 이름으로 이이모(伊夷模)가 기록되었다. 제8대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신대왕이 죽은 뒤 형인 고발기를 제치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美川王(미천왕:호양왕 미천왕(好壤王 美川王,? ~ 331년, 재위 : 300년 ~ 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국왕이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등이 전해진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樂浪郡(낙랑군)과 帶方郡(대방군)을 정복하여 韓半島(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古朝鮮(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故國原王(고국원왕)때 百濟(백제)와 전연(전연(前燕: 337~370)은 남북조시대선비족(鮮卑族) 모용황(慕容皝)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연(燕)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5개나 되기 때문에, 제일 첫 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의 攻擊(공격)으로 일시적인 國家的(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小獸林王(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高句麗(고구려)는 태학(太學)을 設立(설립)하고 佛敎(불교)를 國家的(국가적)으로 公認(공인)하였으며, 律令(율령)을 制定(제정)함으로써 中央集權(중앙집권)國家(국가)를 完成(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整備(정비)하였다.
5세기, 高句麗(고구려)는 全盛期(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廣開土王(광개토왕)은 百濟(백제)의 首都(수도)인 한성(漢城)을 侵攻(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臨津江(임진강)과 漢江(한강)까지 확장시켰고, 新羅(신라)의 奈勿王(내물왕)을 援助(원조)하여 倭寇(왜구)를 擊退(격퇴)하였다. 또한 北(북)으로 後燕(후연)을 쳐서 遼東(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遼西(요서) 地方(지방)의 일부까지 進出(진출)하였다. 廣開土王(광개토왕)은 숙신(숙신(중국어: 肃慎Sùshèn)은 주대(周代)에 中國(중국)의 東北(동북) 地方(지방)에 살던 北狄(북적)을 일컫던 말이다. 식신(息慎), 직신(稷慎), 주신(朱申)이라고도 불렸다. 女眞語(여진어)를 차음(借音)한 글자다. 女眞語(여진어)로 jušen 주션이라고 發音(발음)한다.)과 東扶餘(동부여)를 服屬(복속)시켜 滿洲(만주)와 韓半島(한반도)에서 優越(우월)한 位置(위치)를 確保(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長壽王(장수왕)은 中國(중국)의 南北朝(남북조)와 通交(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民族(민족)과도 通交(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中國(중국)을 牽制(견제)하였다. 427년 南下(남하)政策(정책)의 일환으로 首都(수도)를 平壤(평양)으로 遷都(천도)하여 中央(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整備(정비)하였다. 475년 高句麗(고구려)는 百濟(백제)의 漢城(한성)을 侵攻(침공)하여 陷落(함락)하고 개로왕(개로왕(蓋鹵王, ? ~ 475년 9월)은 百濟(백제)의 제21대 國王(국왕:재위: 455년~475년)이다. 근개루왕(近蓋婁王), 개도왕(蓋圖王)으로도 불린다.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登場(등장)하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稱號(칭호)도 있다.
그와 後代(후대) 王(왕)의 家系(가계)에 대해서는 異說(이설)이 存在(존재)하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나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文周王(문주왕)과 곤지(昆支:三國時代(삼국시대) 百濟(백제) 제11대 比流王(비류왕)의 아들인 王子(왕자).比流王(비류왕)의 아들이며, 蓋鹵王(개로왕)과 文周王(문주왕)의 아우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와 이 역사서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근거로 東城王(동성왕)과 武寧王(무령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說(설)도 있다. 蓋鹵王(개로왕) 卽位(즉위) 때 王權(왕권) 講和(강화)에 貢獻(공헌)해 458년(개로왕 4) 유송(劉宋)이 王族(왕족)을 포함한 11명의 貴族(귀족) 중 최고위인 征虜將軍(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을 除授(제수)하였다.좌현왕의 직책과 군군(軍君)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그는 조정의 병권을 장악한 세력가였다. 461년 高句麗(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倭(왜)와 共同(공동) 대처하기 위한 軍事(군사) 協約(협약) 관계로 日本(일본)에 건너간 이후, 가와치[河內]·지카쓰아스카[近飛鳥] 지역을 開拓(개척)해 根據地(근거지)로 삼았다.『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실린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조[河內飛鳥戶造]의 선조와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조신사[河內飛鳥戶造神社]의 제신(祭神)이 곤지인 점이나, 倭(왜)에서 여러 명의 子女(자녀)가 태어났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곤지를 先祖(선조)로 하는 후예 씨족들이 지금의 가와치 아스카군[河內安宿郡] 일대에서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이는 百濟人(백제인)이 日本(일본)에 건너가 만든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이 주종을 이루는 가와치평야 古墳群(고분군)의 분포에서도 입증이 된다. 곤지는 日本(일본)에서 구축한 세력 기반과 대외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착실히 쌓아 갔다. 이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훗날 곤지계인 東城王(동성왕)이나 武寧王(무령왕)이 王位(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그런데 475년에 백제는 高句麗軍(고구려군)의 侵攻(침공)을 받아 漢城(한성)이 陷落(함락)되고 都邑(도읍)을 熊津(웅진):‘공주2’의 옛 이름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百濟(백제)가 滅亡(멸망)한 뒤, 지금의 夫餘(부여) 地方(지방)에 中國(중국) 唐(당)나라가 設置(설치)한 오 도독부의 하나)으로 옮기는 국가적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곤지는 급히 귀국해 내신좌평에 임명되어 왕권의 회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웅진 초기 王權(왕권)의 약화와 정국의 불안정에 편승해 왕위를 넘보던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가 그의 아들이라 하지만, 후에 사라진 백제신찬을 인용했다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의하면 문주왕과 곤지는 모두 그의 이복 동생이라 한다.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위례성 일대에서 전투 도중 고구려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을 죽여 故國原王(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이때 百濟(백제)는 首都(수도)를 熊津(웅진)으로 옮겼고, 함께 攻擊(공격)당한 新羅(신라)는 죽령(竹嶺) 以北(이북)의 땅을 잃었다.
6世紀(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外患(외환)에 시달리던 高句麗(고구려)는 國力(국력)이 크게 衰弱(쇠약)해졌다. 新羅(신라)의 眞興王(진흥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高句麗(고구려)에게서 빼앗은 漢江(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咸鏡道(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進出(진출)해 高句麗(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中國(중국)에 새로 들어선 隋(수)나라는 高句麗(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侵攻(침공)하였다. 高句麗(고구려)-隋(수) 戰爭(전쟁)에서 高句麗(고구려)는 612년 乙支文德(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薩水大捷은 제2차 여수 전쟁을 高句麗(고구려)의 勝利(승리)로 장식한 薩水(살수)에서의 戰鬪(전투)이다. 高句麗(고구려)의 首都(수도) 平壤(평양)을 직공했던 隋(수)나라의 別動隊(별동대)가 薩水(살수)에서 江(강)을 건너 돌아오던 중 乙支文德(을지문덕)의 襲擊(습격)을 받아 潰滅(궤멸)했다. 龜州大捷(귀주대첩), 幸州大捷(행주대첩), 閑山島大捷(한산도대첩)과 함께 韓民族(한민족) 4大捷(대첩)의 하나로 불린다.)과 같은 重要(중요)한 戰鬪(전투)에서 勝利(승리)함으로써 隋(수)나라의 侵攻(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戰爭(전쟁)은 隋(수)나라의 滅亡(멸망)의 要因(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中國(중국)을 統一(통일)한 唐(당)나라의 太宗(태종)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高句麗(고구려)를 侵入(침입)하여 遼東省(요동성) 등을 陷落(함락)시키는 成果(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安市城(안시성:三國時代(삼국시대), 高句麗(고구려)와 唐(당)나라의 境界(경계)에 있던 城(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인 평양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新羅(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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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신라)의 石窟庵(석굴암)
신라(新羅)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국호 신라에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 경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한강 이북의 일부와 한강 이남 전역을 차지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669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니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백제, 고구려 멸망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신라의 왕은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다.
伽倻(가야)
金冠(금관)과 裝身具(장신구)들.
뿔모양 盞(잔). 실크로드((Silk Road(緋緞路, 비단로)를
통해 페르시아(Persia) 文化(문화)의 影響(영향)을 받았다.
비단길(緋緞路, 비단로)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땅 혹은 바다을 통한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동(東), 서(西)라 함은 중국과 서양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1] 이는 비단길이라는 언어의 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비단길은 투르크 민족 등 북방 기마민족들이 중국까지 개척한 길이다. 비단길 개척으로 장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실크로드를 경영한 주 민족들 또한 중국이 아닌 북방 유목 민족들이다. 그 이전 매우 오래전부터 투르크 민족 등 북방 기마 민족들은 실크로드를 중국까지 개척하였고 이것을 이용해 중국을 정복하거나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공물들을 북방 기마민족들에게 바치게 되었다.
비단길은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들을 전달하는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역사학, 교류사, 그리고 중앙아시아사에서 비단길 연구가 가지는 입지는 크다.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서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되게 된다. 비단길은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범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이다. 중국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중국과 서역(현 신강지역)을 연결하던 무역의 길.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이로인해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실크로드'라는 단어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2]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연구하던 중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자이덴슈트라쎄(Seiden Straße)', 즉 '비단길'로 명명하면서 사용되었다. 이 실크로드라는 말은 동서방 간의 교역로 중 스텝지대의 '초원길'과 인도양을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을 제외한 사막과 오아시스 일대의 도시들을 거치는 교역 경로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교역로가 확대되면서 다소 부적절해졌지만 유라시아의 원거리 무역과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이고 관용적인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부른다. 양측 기점은 동양 쪽은 동아시아와 서양 쪽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 가운데의 주요 경유지. 한반도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되는 물품의 소비국 중 하나로, 지금도 당시의 이런저런 수입품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투르판의 고창국 고성 유적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10,000년 전후 빙하기가 끝난 후 문명이 발생하고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겨난 몇 갈래의 교통로로서 지금까지 문명 간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근대 이전까지 기능한 동서문명 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의 유목국가들에게는 부와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서아시아의 국가들에게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16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대서양 바다를 통한 대양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줄어들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길이 완전히 "쇠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서구 중심적 옛 사관에서는 내륙 실크로드가 교역루트로서 아예 몰락했다고 단언하기도 했지만, 이쪽도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퍼센트가 줄어들었을 뿐 16세기 이후에도 이들 유라시아 내륙교역로의 무역랑의 절대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티무르 제국과 제국 붕괴 이후의 코칸드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러시아,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엮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로서 전성기를 지내며 번성하였다. 근대 실크로드를 장악한 러시아는 이곳에서의 모피무역을 비롯한 각종 교역에서 얻은 자본을 통하여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와 러시아의 주요 열강 등극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 이후 동서양 주요 무역의 전체 파이가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애당초 철도가 다니는 현대조차도 육상수송은 해운수송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리고 근대에는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해 여러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었으나 냉전시대 철의 장막으로 공산권 내부의 교통로 역할로 그 입지가 줄어드는 안습한 운명이었다. 냉전이 끝난 21세기에는 옛 실크로드를 달리는 철도의 유용함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여전히 대량 수송에 적합한 해운이 물류의 중심이지만 해운이 대체할 수 없는 철도수송의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크게 동서교역로는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의 3대 간선과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라는 5대 지선으로 나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분이 생긴 것은 19세기 즈음에 서구 제국주의의 근대적인 팽창 과정에서 실크로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에 더욱 심해졌는데 80년대의 일본이나 한국의 경제 성장과 맞물려 실크로드 교역로 연구 자체가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향을 보였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이 실크로드 범위에 일본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일본을 포함시키면 중간에 있는 한반도도 당연히 무역의 한 축으로 포함되는 것이 정상인데,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를 경유지로 전락시키거나 아예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일본이 자주 보이는 역사 왜곡의 일환이다.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에만 가봐도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만 글라스, 유리공예 등 서역 상품과 금속 기술을 볼 수 있다. 만약 일본의 주장대로 한반도가 실크로드 교역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면 신라의 금속 기술을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했다는 것이 된다. 한국 학계에서도 만주-초원 루트와 중국 루트를 건너 신라와 발해, 고려까지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보고 연구되는 편이다.
가장 먼저 개척된 곳은 초원길로서 흑해, 아랄해, 카스피해 일대에서 살던 스키타이인들이 개척했는데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며 선사 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오아시스로가 개척되기 전부터 초기 문명 전파의 주요 통로로 기능했었다. 몽골 고비 사막 부근에서 흉노가 성장하면서 광활한 초원지대가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초원길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 초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선우에게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통행증이 없다면 이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하므로 신체적, 경제적인 한계가 굉장히 많이 따랐다. 그러나 흉노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비단이 헐값 혹은 공짜로 흉노에 유입된다. 흉노는 이 비단을 그대로 서부 지역에 전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오아시스로는 파미르 고원 서쪽의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왕조 시기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개척되기 시작했고, 파미르 고원의 동쪽인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 장건이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됨으로써 착공하고 흉노와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나타나는데 이렇게 파미르 고원의 양편의 교역로가 연결되게 된다. 통상 실크로드라고 하면 이것을 지칭한다. 이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로마 등등과 동아시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4], 로마의 유리가 서로 전해졌다.[5] 또한 단 한 번뿐이지만 로마 제국의 사자가 한나라까지 오기도 했다. 중국의 교역로는 장안에서 돈황을 거쳐 천산 산맥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이것도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나눠진다. 이러한 구분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자연적인 한계가 강한 곳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초반에는 천산 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을 천산남로로 칭했는데, 인근 도시국가들이 물 부족과 사막화로 쇠퇴하고 북방 민족이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천산 산맥 북쪽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산북로라고 한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제지 기술과 차, 도자기, 비단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서쪽의 이슬람 제국(압바스 왕조)이 팽창하자 당시 튀르크족들이 지배하고 있던 탈라스 강 쪽으로 군대를 보내다 압바스 왕조에 대패한다. 군 이때 이슬람에 잡힌 포로 중에 제지공이 있어서, 제지술이 이슬람과 유럽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보통 이 사막길의 종점은 위에서 말한 장안으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게 중국 청두에서는 이 종점을 장안을 거쳐서 청두로 연장시킨다고 한다. 완전히 억지는 아니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게, 실크로드의 어원이 되는 중국 비단 중에서도 청두를 비롯한 쓰촨성 비단의 양과 질이 특히 고대부터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사막로인 카스-호탄-뤄창-돈황으로 이어지는 길에 한나라 때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름처럼 매우 험한 길이다.
바닷길은 1세기경에 개척되었고 인도양으로 향하는 이 길을 통해 본격적으로 원거리 무역이 성행했다. 이로써 당대 로마는 동방의 물건을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중국 남부로 추정되는 지역에까지 교류를 확대했다. 해상 수송은 대량수송의 장점이 있어 도자기와 향료, 차 등이 주로 오갔다. 따라서 비단이 오고간 육지의 비단길에 빗대 이 길은 '향료길', '도자기길'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도시 페트라와도 연관이 있는데 페트라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2500㎞ 향료길을 잇는 관문이기도 했다. 고대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던 페트라는 AD 2세기 로마에 함락된 이후 동서무역로의 중심이 비단길로 옮겨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바닷길은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 이후 대항해시대 항로에 포함되었다.
방송 매체의 영향으로 실크로드하면 비단 장수들이 낙타 타고 한가하게 사막을 건너는 모습이 연상될 수 있겠지만, 사실 비단 교역로는 사람 살기 힘든 동네였다. 특히 오아시스 주변으로 발달한 도시들은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줄어들면 그와 함께 급격하게 쇠퇴하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모래 폭풍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모래 더미에 폭삭 파묻히는 경우도 있었다(…). 초원길과 사막길의 개척 시기에 격차가 있는 것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자체가 당대의 현지 언어로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이란 뜻이다.) 게다가 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도적 떼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는 순간엔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한마디로 비단 장수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막길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비슷한 길로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을 연결하던 차마고도가 있다.
한국인이 읽어볼 만한 개설적인 내용은 정수일 박사의 책과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좀더 심층적으로 이슬람의 동점 이전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7개의 도시>,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수잔 홧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 서양인들의 실크로드 탐험사에 대해서는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영상물로는 NHK의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있으며, 중국 CCTV와 합작 제작하여 장안에서 로마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당시는 중국이 덩샤오핑 체제하에서 갓 개혁개방을 시작하던 때라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OST를 뉴에이지 음악가인 기타로가 담당하였고 '메인 테마'와 '캐러밴의 쉼터' 등이 유명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훗날인 1984년 KBS에서도 수입 방영되었다. KBS 방영 버전 제1편(유튜브)
2005년 실크로드 제작 25주년을 기념하여 리부트판인 '신 실크로드'가 제작되었으며, 이 때는 NHK와 CCTV뿐만 아니라 KBS도 공동제작에 참여하고 LG그룹이 제작을 후원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도 영상미와 음악이 뛰어난데 OST 담당은 요요마. 요요마 특유의 중후한 첼로와 서역의 이색적인 음률이 잘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 실크로드 KBS 방영 버전 제4편(유튜브) 신 실크로드 KBS 방영 버전 제10편(유튜브)[8]원래 시리즈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방송장비와 촬영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당시에 비하며 대단히 수려한 영상미를 뽑아낸다.러시아 제국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 및 투르키스탄 각지에 철도를 건설하고, 이후 소련 시절에 일률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회간접자본이 설치, 개선되면서, 그 결과 오늘날에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 같은 경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인프라, 경제, 문화 교류 정책을 추진중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아프리카 공략도 포함되어 있다.
2014년에는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라는 이름으로 실크로드상의 33개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 참조.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구시가지 레기스탄의 모습.
사마르칸트에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벽화가 유명하다.
우즈베키스탄 히바의 이찬 칼라의 전경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산자르 영묘
(Sanjar Mausoleum)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고대 성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 근교의 교하 고성(交河故城, Jiaohe ruins)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의 고창 고성(Gaochang Ruins)
中國(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분의 유적
8. 동명의 게임
- 조이맥스사의 온라인 게임 - 실크로드를 무대로 중국과 유럽의 캐릭터들을 선택해서 플레이하는 온라인게임이다.
- 위메이드 엔터테이먼트의 모바일 게임 - 위미 브랜드로 서비스 중이고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형식의 게임이다.
9. 여담
-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실크로드가 '(동음이의)'를 처리하여 별도의 동음이의어 문서가 존재하며, 실크로드의 본 문서는 비단길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나무위키는 정반대로 비단길이 동음이의어 문서로 이미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5세기에는 훈족이 캅카스 지역의 교역망을 점령했으며, 6세기에는 소그드인이 튀르크족에 동화되었다. 여담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이 사람의 조카다. 물론 일본 얘기는 대충 빼고 한반도의 역할에 집중하는 편. 간혹 일본에 문물을 '전해줬다'는 식으로 넣어주기도 한다.[4] 로마에서 막연하게 중국 일대를 비단이 나는 나라라는 뜻의 세레스라고 부르는 것의 연원이 되었다. 이 유리는 신라와 가야에까지 전해져서, 현재 많은 신라 고분에서 서역산 유리가 발굴되었으며 특히 황남대총에선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다. 상태가 온전한 유리공예품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가야 지역의 경우도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 로만글라스 유리잔이 출토되었다.[6] 삼국지에서 촉한이 조위보다 나라가 훨씬 작음에도 대충 3국 구도로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쓰촨의 특산물 비단(촉금, 蜀錦) 무역 수익이 있었다.[7] 쓰촨성에서 히말라야 산맥 남부를 돌아서 인도로 직행하는 육로 무역도 가능하긴 했으나 지형이 험하고 현지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교역 규모와 수익이 적었다. 쓰촨성-윈난성-미얀마-아삼-벵골 루트는 13세기 원나라 시기가 되어서야 윈난성에 무슬림(후이족)이 정착하고 아삼 지역이 인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8] 사카이 마사토가 일본에서 장안으로 유학하여 관리까지 지내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세이 신세이의 재연배우로 나온다. 관련 사항은 비단길 문서를 참고할 것. 비단길도 실크로드 둘 다 똑같은 표현.
伽倻(가야) 土器(토기).
金該(김해) 대성동에서 發掘(발술)된 防牌(방패) 裝身具(장신구).
洛東江(낙동강) 流域(유역)에서 發見(발견)된 鐵製(철제) 鬪具(투구).
伽倻(가야) 金冠(금관).
伽倻(가야) 兵士(병사)가 武裝(무장)한 모습을 再現(재현)한 모습.
이 部分(부분)의 本文(본문)은 伽倻(가야)입니다.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구야(狗耶)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대부분 동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 신라, 서쪽으로 백제를 접하고 있었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된다.
百濟(백제)
이 部分(부분)의 本文(본문)은 百濟(백제)입니다.
<梁職貢圖(양직공도)>에 나오는 百濟(백제)使臣(사신)의 모습.
梁職貢圖(양직공도)
중국 양나라 원제(元帝) 재위 연간 소역이 백제사신의 행차를 그린 문서.백제사신도.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왜국조(倭國條)의 기록에 해당하는 부분은 후대에 왜국과 탕창국(宕昌國)에 대한 기록이 합쳐져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3국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백제국사(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행 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衽)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사신도에 따르는 기록은 백제가 중국과 통교한 내용이 전체의 3분의 1로서,『양서(梁書)』의 기록과 구성·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첫째, “진(晋)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遼東)·낙랑(樂浪)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遼西晋平縣)을 차지하였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라는 기사이다. 종래에는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는 구절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를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낙랑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그러나 이 기록은『양서』백제전과 『송서(宋書)』백제전에 똑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요서지역은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희소하였던 까닭에 전연(前燕)·전진(前秦)·후연(後燕)·북위(北魏) 등이 군사적 대치를 하던 경우라도 중심지를 제외하면 전면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최근에는 백제가 진나라 말에 일시 요서지방을 점령하였다고 보거나, 요서지방에 백제의 무역 전진기지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 백제가 웅진 시대에 22담로(擔魯)에 자제(子弟)·종족(宗族)을 파견하였다는 기사로서, 이는 백제의 지방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셋째,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己汶), 하침라(下枕羅) 9개의 국가를 열거하고 있다.이는『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려 있다.반파는 고령(古靈)의 대가야(大加耶)이며, 탁국은 대구인 달구벌(達句伐)로 비정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백제의 진출로와 관련하여 내륙지역인 대구 경산보다는 탁순국(卓淳國)인 창녕으로 비정하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라는 합천(陜川)으로 추정되며, 전라는 만약 ‘앞라’로 읽을 수 있다면 안라(安羅) 즉 아라가야(阿羅加耶)인 함안의 세력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마련은 모루(牟婁)와 마찬가지로 광양(光陽) 혹은 장흥(長興)지역, 기문은 남원(南原)을 중심지로 하고 그 북방 임실(任實)까지 포함한 일대를 말하며, 지미는『진서(晉書)』장화전(張華傳)에 나오는 신미국(新彌國)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하침라는 제주도 또는 강진(康津)으로 보기도 한다.즉, 9소국 중 반파·탁·다라·전라 등은 가야의 제소국(諸小國)을 의미하며, 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은 영산강과 섬진강 일원에 산재한 여러 소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직공도가 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라이다. 만일 사라가 신라(新羅)라면 신라가 당시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는 말이 되는데, 현재의 역사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에 의존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고구려 세력권에서 이탈한 이후에는 백제에 의존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는 실제와 상관없이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신라를 대국의 사신으로 따라온 소국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9소국 중 기문과 탐라 정도는 백제에 부용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나머지 소국들의 경우 백제문화의 영향은 받았으나 그 세력권으로 들어와 부용화한 지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9국이 백제를 부용했다는 것은 백제국 사신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고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양직공도에서 나타나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나라임을 강조하여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국가에 대한 영토확장 내지 영향력 확대의 야심을 드러내고 우월의식 특히 신라와의 대항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당시 무령왕(武寧王)은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 및 가야 접경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였고, 더욱 확대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양직공도의 백제국사도(百濟國使圖)는 6세기 초 웅진(熊津) 시대의 백제사(百濟史) 연구,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중국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한편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왕회도’(폭 238.1㎝, 높이 28.1㎝)는 양직공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그림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현재 당나라 때의 화가 염립본(?∼673)이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이라는 견해와 당 태종(太宗) 때 중국에 온 주변 23개국의 사신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사신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고 채색하였기 때문에, 양직공도와 더불어 당시 3국의 복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양직공도(梁職貢圖)]
百濟(백제)의 王冠(왕관) 裝飾(장식)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 溫祚(온조)에 의해 하남 慰禮城(위례성)에 건국되었다. 三國志(삼국지)에는 百濟(백제)가 馬韓(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百濟(백제)는 3세기 경 忠淸道(충청도), 全羅道(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高句麗(고구려)와 中國(중국) 郡縣(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近肖古王(근초고왕) 때는 馬韓(마한) 대부분을 병합하여 全羅道(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영토로 하였으며 북쪽으로 高句麗(고구려)의 平壤(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방, 일본의 규슈 등에 진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등 수난을 맞았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百濟(백제)는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660년에 新羅(신라)와 唐(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百濟(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歷史的(역사적) 記錄(기록)
기원전 57년 신라가 소백산맥 남동쪽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압록강 유역에 세워졌다. 기원전 18년 백제는 고구려 추모성왕의 아들 온조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웠으며 가야는 낙동강 중하류 유역에서 수로가 세웠다.
주변국들로는 夫餘(부여), 沃沮(옥저), 東濊(동예), 于山國(우산국), 耽羅國(탐라국) 등이 있었다.
新羅(신라)는 唐(당)과 연합하여 660년 百濟(백제)를, 668년에는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시킴으로써 삼국 시대는 끝나고, 얼마 후 渤海(발해)와 新羅(신라)로 이루어진 南北國(남북국)時代(시대)가 왔다.
이때를 기술한 歷史書(역사서)로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三國遺事(삼국유사), 三國史節要(삼국사절요)가 있다.
三國(삼국)의 政治(정치) 構造(구조)~부체제의 構造(구조)
三國(삼국) 모두 聯盟體(연맹체)로서 출발한 初期(초기)의 政治(정치)組織(조직)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5部(부), 또는 6部(부)의 부들이다. 高句麗(고구려)에는 桂婁部(계루부)를 비롯하여 消奴部(소노부).絶奴部(절노부).順奴部(순노부)灌奴部(관노부)등이 있어 政治(정치)의 求心點(구심점)이 되었다. 처음에 高句麗(고구려)의 王(왕)은 消奴部(소노부)에서 나왔으나 나중에는 桂婁部(계루부)에서 王(왕)이 나왔고, 絶奴部(절노부)는 代代(대대)로 王室(왕실)과 結婚(결혼)하여 王妃(왕비)를 輩出(배출)한 王妃(왕비)족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百濟(백제)의 경우에도 中部(중부)와 前(전)·後(후)·左(좌)·右(우)의 이름이 붙는 5部(부)가 있었고, 新羅(신라)는 斯盧國(사로국)의 母體(모체)인 6村(촌)이 6부로 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部(부)에 관한 기록은≪三國志(삼감국지)≫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을 비롯하여≪三國史記(삼국사기)≫나≪三國遺事(삼국유사)≫의 初期(초기) 記錄(기록)에서부터 보이는데, 처음부터 이들이 부란 명칭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高句麗(고구려)에서는「那(나)」또는「奴(노)」라는 용어가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아, 원래는 貫那·椽那·絶奴 등으로 불리던 것이 후대에 중국식 용어인 部가 첨가되어 관나부·연나부·절노부 등으로 된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那」또는「奴」는「내」곧 냇가나 계곡의 어떤 집단이란 뜻으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경우에 중고기의 금석문에서 부의 명칭을 흔히「啄」·「沙啄」또는「喙」·「沙喙」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啄」과「喙」는「」또는「梁」으로도 쓰이고 있다. 이 글자들은 아마「돌」또는「」이나「벌」또는「」로 읽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돌」이나「」은 도랑(小川)의 뜻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도랑의 고어가「돌」또는「」로 다리(橋)나 뚝(堰)의 뜻도 가지고 있었으며, 한자로는 흔히「梁」을 사용하였다. 이「양」이「돌」로 읽혀졌음은「울돌목」을「鳴梁」이라고 쓴 것에서 알 수 있다.
훼는 새의 부리를 뜻하는 글자인데, 이는 古所夫里·古良夫里의 夫里나 신라의 徐羅伐·比子伐의 伐과 같은 것으로「벌」또는「」로 읽혔을 것이고 들(野)을 뜻한다. 즉 훼 또는 啄·涿·梁이란 글자는 어떤 집단이 도랑이나 들을 끼고 있었던 데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6부 명칭 가운데는 이러한 梁이 붙지 않는 漢祇部 등이 있으나 안압지 출토 비편에「漢只伐部」라고 되어 있어 원래는 어떤 들(伐)의 집단이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6부는 어떤 川邊의 집단 또는 들(野)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6부의 명칭이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곧 혈연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지역별로 형성된 단위 집단으로서의 부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집단이 나중에 중국식 명칭을 차용하여 한자로서 자신들을 표현하는 단계에 가서 部라는 용어를 채용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 명칭도 한자식의 두 글자로 된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삼국시대의 部란 용어는 그 적용 범위가 중앙정치의 핵심인 5부나 6부에 한정되었다. 신라의 경우 사로국을 형성한 경주 부근의 지역 집단만을 부라 호칭하였고,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이러한 용어를 쓰지 않았다. 경주분지 이외의 지역의 소국들도 초기의 발전과정은 사로국과 매우 유사하였을 것이고, 이들 중에는 4∼5세기경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여 상당한 규모로 성장한 소국들도 많이 있었으나, 이들 소국들을 구성한 집단에 대해서는 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들 部集團이 여타의 부족집단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음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치적 처우에 있어서 이들 부집단의 구성원과 여타의 지방민 사이에는 일정한 차별이 있었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문무왕 14년(674)에 外位制가 소멸하기 이전에는 京位는 6部人들에게만 수여되었으며 외위는 지방민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통일전쟁이 치열해지는 중고기 말에는 김유신의 집안이나 竹竹의 예에서와 같이 지방민에게도 경위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통일 전까지는 원칙적으로 6부인에 한해 경위가 수여되었다. 이는 6부인과 지방민이 그 소속 집단의 성격이 상이하였음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이 6부가 바로 신라 건국의 주체집단이었던 연맹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국의 주체세력이었던 이들은 지배집단으로서의 배타성을 가지고 여타의 지방민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들 6부는 경우에 따라 상호 견제하고 경쟁하기도 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지배자 집단으로서의 강한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신라의 6부는 단지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부가 각자의 정치적인 세력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의 일이다.
삼국은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성립하였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는 상당 기간 상호 깊은 교섭이 없이 발전해 나갔다. 그에 따라 삼국의 정치 조직에는 각각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이함이 상당히 존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삼국 초기의 정치 조직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한 일정한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부체제(部體制)가 그것이다.
고구려의 5부, 신라의 6부, 백제의 부여·고구려계 이주민 집단으로 구성된 부 등은 원래 부족이나 소국의 성격을 지닌 단위 정치체였다. 이들은 삼국 성립기에 연맹체를 형성하여 삼국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 삼국이 팽창해 나감에 따라 여타 피정복 지역의 지배층 일부가 이들 부의 주민으로 편입되었다.
삼국 초기 각부는 중앙 정부에게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권 등은 빼앗겼으나, 부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3세기 전반까지도 고구려에서는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 및 지역 수호신 등에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은 이 같은 점을 말해준다. 또한 부 내부에도 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일정하게 자치권을 행사하는, ‘부내부(部內部)’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하위 집단이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연나부(椽那部) 내에 그러한 집단이 네 개 존재하였고, 신라의 한지부(韓岐部) 내에서도 그러한 집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각부의 주민은 귀족에서 빈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삼국의 국가 구조 내에서 볼 때 여타 피복속 지역의 주민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였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점이 상대적으로 늦게까지 남아 있어서, 삼국 후기까지도 관등제의 운영에서 원칙적으로 6부의 민(民)에게는 경위(京位)가 주어졌고, 지방민에게는 외위(外位)만 주어졌다. 중앙 관직과 지방관의 자리는 경위를 지닌 자만이 임명되었다.
한편 삼국 초기에 흡수된 피정복 지역의 주민은 병합될 당시의 소국 또는 읍락 단위로 각각 중앙 정부에 복속되었다. 이들은 자치를 행하며 중앙 정부에 공납을 하고 군사적으로 협력하였다. 각각의 읍과 촌락이 삼국의 통치 구조 내에서 차지하던 위치가 그에 예속된 정도는 다양한 양상을 띠었는데, 복속될 당시의 상황과 세력 정도에 따라 일부는 5부나 6부의 동맹 세력으로, 다른 일부는 집단 예민으로 편제되었다. 피정복민을 집단별로 예속시킨 것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까지 촌락의 공동체적인 유제가 잔존하여 사회의 기층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삼국 초기 통치 구조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적인 여러 집단을 누층적(累層的)으로 통합하여 지배·예속 관계화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6부가 중앙 집단이 되고 복속된 지역의 읍과 촌락들이 그에 예속되어 있으며, 각부는 다시 중앙 왕실에 복속된 형태였다.
당시 각부의 귀족들은 자신의 관원을 두었으며 상당한 자치력을 지닌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그러한 귀족 가운데 대표적으로 유력한 존재였다. 그런 만큼 왕국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각부에 대한 통합력과 국가의 동원력을 최대화하는 데는, 각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가 중요한 권능을 지녔다. 때로는 이 귀족회의에서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일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회의는 그 뒤 왕권의 강대화에 따라 그 권능이 약화되었으나, 삼국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中央(중앙) 集權的(집권적) 領域(영역) 國家(국가) 體制(체제)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는 삼국이 성장해 감에 따라 변모하였다. 삼국 초기의 대내적인 정치정세는 부의 자치력과 왕실의 통제력, 중앙 정부의 집권력과 복속된 각 지역 집단의 자치력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것은 점차 왕권과 중앙 집권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는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과 그 효율성의 개선, 수리 시설의 확충, 우경의 보급 등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정복 전쟁으로 말미암은 사회분화의 진전으로, 각 집단의 자치력을 뒷받침하던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지역 간 발전의 불균등성이 완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은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일원적인 지배질서로 전환해 나가기 위해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직 체계를 확충해 갔다.
삼국 초기 각부는 자체의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위계의 왕실 관원보다 하위에 놓였다. 그래서 각부가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상하 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각부의 자치력이 소멸되어 감에 따라 각부의 관원은 왕권하의 일원적인 관등체계에 흡수되었다. 각부의 귀족도 이 관등제에 따라 편제되었다. 그 완성된 체계가 고구려의 14등 관등제, 백제의 16등 관등제, 신라의 17등 관등제였다.
나아가 관료조직이 확충되고 관직 체계가 분화되어 갔다. 그 중 백제는 6좌평제(六佐平制)와 22관부(二十二官部)가 있어 세련된 면모를 보였으며, 신라에서는 6세기 초 이후 병부(兵部)를 위시한 각종 관서가 만들어졌다. 이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따라 일정한 규제를 받았다. 출신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등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고, 동일한 관직일지라도 신분에 따라 취임할 수 있는 관등에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는 그 두드러진 예로서, 진골(眞骨) 귀족이 주요 관서의 장을 독점하여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한 삼국은 피정복 지역의 주요 거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크고 작은 성(城)을 단위로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 집권화를 도모해나갔다. 몇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된 행정촌이 기본적인 말단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다시 수개의 행정촌의 묶인 상위 행정단위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지방 행정 제도의 정비는 곧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중앙 정부가 장악해 감을 의미한다. 중앙 정부는 지배영역 내의 주민들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기존의 각 읍과 촌락의 장들은 이제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존재로서 지방 지배 조직의 말단에 예속되었다. 이는 중앙의 부(部)에서 더 빨리 진행되었다. 부는 삼국 중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선 수도의 행정 구획 단위로 변하였고, 동시에 부에 적(籍)을 둔 귀족의 편제단위로서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도 6세기가 지나면서 이와 같이 바뀌어갔다.
한편 중앙 집권적인 영역 국가 체제가 되에 따라, 강화된 국가권력을 매개로 지역 간의 연계성이 깊어졌고,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각국의 영역 내에 포함된 여러 종족 집단 간의 상호융합이 진전되었다. 예컨대 토기의 경우를 보면, 삼국 초기에는 영토 내의 여러 지역에서 각기 개성적인 면을 지닌 토기가 생산되었는데, 삼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각국 영역 내의 토기는 질과 양식에서 일정하게 균질화되어 가는 면을 보였다. 특히 신라 토기의 경우 이러한 면이 현저하였다.
이는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匠人) 및 그 생산품의 수급(需給)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무덤 양식에서도 굴식 돌방무덤이 일반화되어 갔다. 또한 불교의 수용에 따라, 각 집단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신앙과 의식(儀式)이 보편성을 지닌 종교의 호수(湖水)로 귀합되어 갔다. 나아가 삼국간의 교류와 주민 이주, 전쟁과 영역 변동 등에 따라 삼국 주민의 존재 양태도 동질화되어 갔다. 삼국 후기에는 삼국 주민의 풍속·의복·문물이 같았음을 당시 중국인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政治(정치)와 社會(사회)
삼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한 전제왕권 또는 귀족정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태조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에서 발전하여 3세기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화 되었으며, 귀족회의는 각각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이다.
初期(초기)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의 사회 발전은 각각 그 시기와 양상을 달리한다. 삼국은 아직 국가로서의 체제를 완비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점차 부족 연맹체적인 사회를 넘어서 고대국가의 체제로 변모해 갔다. 부족 연맹체의 사회에서 각 부족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나, 지배층이 형성되고 왕권이 점차 세습화되자 부족 세력은 왕권에 흡수되었다.
또한 대륙과의 빈번한 접촉과 충돌을 통해서 한(漢)의 정치 조직 형태를 받아들여 족적(族的) 기반 위에서 새로운 지배 체제를 구축해 갔다.
특히 대륙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高句麗(고구려)는 일찍이 그 사회 체제를 갖추어 갔다. 즉, 1세기 초 고구려는 왕호(王號)를 칭할 정도로 발전하고, 부족을 일종의 전사단적(戰士團的)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太祖王(태조왕) 때쯤에는 연맹 세력의 확대에 따라 계루부의 족장이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 세력은 잔존하면서 왕권을 견제, 제한하였다.
고구려의 사회 구조는 수차의 대외적인 정복 전쟁 과정에서 점차 중앙집권 체제로 개편되었고, 그 후 4세기에 이르러서는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체제와 신분 체제를 갖추었다. 이러한 추이(趨移)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4년에는 진대법(賑貸法)이 실시되어, 일종의 구휼 기관 성격을 띠기도 한다.
한편 백제의 사회는 원래 마한의 여러 부족의 족제 조직(族制組織)이 통합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남하한 부여족에 의하여 지배권이 확립되고 왕권이 세습 강화되어 가서, 그 전통적인 사회의 유대가 견고하지 못하였다. 백제는 도리어 북부의 한의 군현이나 고구려의 압력과 영향을 받는 가운데 지배 기구도 갖추어졌으며, 그 영역의 편제에 있어서 토착 사회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은 원래 이 지역의 부족 세력과는 관계없는 유이민(流移民)의 세력에서 유래되었으며, 왕권을 유지하는 세력은 흔히 8대 성씨로 대표되는 귀족이었다. 그러나 고이왕 때부터는 6좌평(六佐平)을 두어 직무를 분장케 하여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관등은 16등급으로 분화·발전되었다.
新羅(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여섯 씨족의 기반에서 점차 부족 연맹을 형성하였다.
그 始祖(시조) 說話(설화)가 복잡하고 朴(박)·昔(석)·金(김) 3성(姓) 시조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신라 사회는 다원적(多元的)인 사회였으며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씨족 기반인 6촌이 부족 연맹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6부로 개편되고, 세력의 확대에 따라 족장의 칭호도 점차 변하였으며 그 세력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변화는 원시사회의 유풍을 존속시키면서 이에 새로운 형태를 가미해 간 듯하다.
한편 가야 사회에 대해서는 사료가 거의 없어서 가야가 어떠한 사회 형태를 유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부족 연맹체 사회와 거의 흡사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른 한편 한국 고대 사회의 여명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사회에는 원시 공동체적인 요소가 점차 해체되고 족장 세력을 중심으로 토지의 사유화가 나타났으며, 신분 체제도 점차 정비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수취 체제는 고대 사회로의 전이(轉移) 과정 속에서 강조되었으리라 생각된다.
中期(중기)
三國(삼국)은 모두 여러 차례의 진통을 겪으면서 부족 연맹체적인 사회 조직을 청산하고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갔다. 부족 연맹체의 맹주는 전제적인 왕권으로 전환·강화되어 왕권의 확립,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이루어지고, 율령격식(律令格式)이 반포되어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원래의 대소 부족장은 그들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료 조직 속에 흡수되어 귀족화의 길을 밟게 되었다.
고구려의 귀족 제도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수상인 대대로에 임명될 수 있고, 또 이를 선거할 수 있는 일정한 신분층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밑으로 여러 신분층이 갈려지고, 다른 신분 사이에서는 관직의 임명·결혼 등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백제에는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등 여덟 성이 있어 백제 지배층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의 귀족 사회의 실태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신라의 골품 제도(骨品制度)이다. 골품에는 성골(聖骨)·진골(眞骨), 6두품(六頭品)·5두품(五頭品)·4두품(四頭品) 등이 있었으며, 진골 중에서는 고구려의 고추가와 비슷한 갈문왕이란 것이 있었다.
삼국은 과거의 다원적인 조직을 청산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화된 관등 체계(官等體系)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12관등(官等), 백제의 16관등, 신라의 17관등이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관직은 신분에 따라 한계가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관부(官府)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백제는 처음의 6좌평(六佐平)에서 사비 시대의 22부(部)에 이르러 비교적 정비된 관부들이 이 기록에 나타난다. 신라에 있어서는 필요에 따라 병부(兵部)·창부(倉部) 등의 관부가 생겨나서 국무(國務)를 관장했다.
삼국의 정치는 대개 합좌 제도(合坐制度)로써 행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수상인 대대로(大對盧)의 임명을 귀족들의 선출한 결과에 따랐으며, 백제에서는 정사암(政事巖)의 고사(故事) 같은 것을 미루어 보아 역시 투표로써 재상(宰相)을 선출한 듯하다. 신라의 화백(和白)은 그 뚜렷한 형태로서 사영지(四靈地)에서 행해졌다.
중앙의 권력은 지방에까지 미쳐서 행정적인 구획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부족들이 웅거하던 지역에는 성(城)을 쌓고 이것을 군(郡)이라 불렀다. 그 장관을 고구려에서는 처려근지(處閭近支), 백제에서는 군장(郡將), 신라에서는 군태수(郡太守)라고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성주(城主)라 했다. 뒤에는 여러 성을 통괄하는 행정 구획이 생겼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5부(部)였고, 백제의 5방이었으며, 신라의 여러 주(州)였다. 그리고 중앙 귀족의 근거지인 서울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모두 5부로, 신라에서는 6부로 나누는 특별한 행정 구획을 갖고 있었다.
부족 연맹 시대의 군대는 부족 단위로 조직된 부족군의 연맹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국가의 발전은 이러한 연맹군을 해체시키고 국왕의 지휘하에 놓인 전국적인 군대를 편성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왕은 곧 전국의 최고 군사령관이었고, 중앙 귀족들이 모두 장군이 되었다. 신라의 당(幢)은 이러한 부대 조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귀족군의 보충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 단체가 고구려의 경당(扃堂)이며, 신라의 화랑도(花郞道)였다. 이 두 조직은 모두 미성년 집단이라는 공동체적인 유제를 이용하였다는 데에 공통적 특색이 있다. 그들은 모두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의를 연마했다. 경당에 모인 청년들은 경전(經典)을 읽었으며, 화랑도는 원광(圓光)이 가르쳤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믿었다. 그리고 평상시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수양했으나 유사시에는 국가를 위한 전열에 참가했다.
한편 삼국은 모두 지방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지방의 행정 조직은 곧 군사 조직이기도 했다. 성에는 일정한 수의 군대가 주둔하고, 성주는 곧 지휘관이었다.
고대 국가의 성장에 따라 전국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요, 모든 주민은 신민(臣民)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공이 있는 장군들에게는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과 같은 명목으로 많은 토지와 포로들이 분배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와 노예가 사유화되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지방에 강제로 이동되어서 집단적인 거주를 하는 부곡(部曲)과 같은 천민집단이 있었다.
또 신분적으로 양인인 농민은 자기들의 자영지(自營地)를 경작하고 있었다. 국가는 이들을 직접 파악하고 있었으며,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과하였다. 당시는 토지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관심이 컸다. 자영농민은 때로는 용민(庸民)으로 전락하고 또 노예가 되기도 했다.
後期(후기)
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삼국 간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대륙의 정세 변동과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왕위 계승 분쟁의 여파로 귀족 간의 내분에 시달리고 있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상류지역은 신라가 차지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이어 북중국의 북제(北齊)의 군사적인 압력과, 유연(柔然)을 격파하고 등장한 몽골 고원의 신흥 유목민 국가인 돌궐(突厥)의 적극적인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를 맞아, 고구려의 귀족들은 대내적으로는 그들간의 분쟁을 수습하고 귀족 연립 정권 체제를 성립시켰다. 이는 각기 수하병(手下兵)을 거느린 귀족들이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그들 사이에서 3년마다 선임하고 주요 국사는 소수의 귀족들로 구성된 합좌 회의(合坐會議)에서 결정하는 형태로, 이후 고구려 말기까지 이러한 귀족 과두 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유지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한강 유역과 함흥평야 지역을 신라에 넘겨주고 양국이 화평하게 지낸다는 내용으로 신라와 밀약을 맺어 남부 국경선의 안정을 취한 뒤, 서북부 방면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주력하는 방책을 사용하였다.
이에 신라는 553년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였다.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이듬해 백제군과 가야군 및 1천 명의 왜군을 포함한 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에 대한 반격전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이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와 연합해 신라와 싸운 가야군은 대가야(大加倻)가 중심이 된 군대였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의 총칭이다. 가야는 철이 많이 생산되고,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과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해상 무역로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일찍부터 문물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4세기 후반 이후 백제와 신라의 세력이 뻗쳐왔고, 고구려도 한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왜도 개입하게 되어, 가야는 동북아 지역의 주요 분쟁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야의 여러 소국 중 낙동강 하구 지역에 있었던 금관가야(金官加耶)가 두각을 나타내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 금관가야는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낙동강 유역 원정 이후 크게 쇠약해져, 6세기 초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후 신라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가야의 소국들은 백제나 왜와 연합하여 대응하였고, 고령(高靈)의 대가야가 이 지역의 중심국이 되었다. 그런데 대가야가 554년의 전투에 패배한 후 얼마 안 있어 신라에 병탄되고, 소백산맥 동쪽의 가야지역은 신라의 영역이 되어, 가야는 완전 소멸하였다.
554년 이후 백제와 신라 간에는 해를 이은 상쟁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6세기 종반 고구려가 돌궐의 공세를 저지한 후 재차 남으로 예봉을 돌림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에 삼국은 각각 상쟁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영역 국가 체제를 구축한 삼국 사이에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확보하려는 전쟁이 계속 전개된 것이다.
삼국 간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은 사회 분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귀족은 전쟁을 통해 빈번히 전쟁에 동원된 소농민층의 경우, 급박한 군사 정세에 따라 때로는 노약자도 징발되었으며, 복무 기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일부 소농민층은 몰락해 갔다.
삼국에서 영역 국가 체제가 자리 잡아가고 사회 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촌락의 공동체적 관계가 급속히 해체되고 지역 간의 주민교류가 활발해졌다.
지방의 유력가나 몰락한 농민의 일부는 수도로 올라와 생존과 출세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당시 잦은 전쟁에 따라 늘어난 병력 수요와 신속한 동원력의 필요에 따라 행해진 모병(募兵)에 응하기도 하였으며, 귀족의 휘하에 몸을 의탁하여 입신(立身)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유력한 귀족은 정치적·군사적 필요에 따라 이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한편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6세기 후반 중국에서 수(隋)나라가 등장함에 따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수나라는 3백여 년간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하고 몽골 고원의 突厥(돌궐)을 격파·복속하였다.
三國(삼국)의 同盟(동맹)關係(관계) 變化(변화)
4世紀(세기) 後半(후반)
百濟(백제) 倭(왜) 同盟(동맹)
高句麗(고구려) 新羅(신라) 同盟(동맹)
[370년대까지 百濟(백제)의 全盛期(전성기)]
[391년 倭國(왜국)의 韓半島(한반도) 南部(남부) 侵略(침략)으로 高句麗(고구려)의 南進(남진)]
5世紀(세기) 初盤(초반)
高句麗(고구려) 新羅(신라) 同盟(동맹)
[百濟(백제) 首都城(수도성) 陷落(함락)]
[백제의 몰락과 동부여 이민족을 받아들여 고구려 전성기 성립]
5世紀(세기) 後半(후반)
[百濟(백제)王(왕) 戰死(전사)]
百濟(백제) 新羅(신라) 同盟(동맹)
6世紀(세기)
[高句麗(고구려)가 占領(점령)하고 있던 漢江(한강)帷帟(유역)을 新羅(신라)가 빼앗음]
[新羅(신라)의 全盛期(全盛期(전성기)]
7世紀(세기)
[新羅(신라)를 향한 百濟(백제) 高句麗(고구려)의 總攻勢(총공세)]
신라 당나라 동맹 고구려 백제 돌궐 왜 동맹
[百濟(백제) 滅亡(멸망)]
[高句麗(고구려) 滅亡(멸망)]
新羅(신라) - [新羅(신라)의 三國統一(삼국통일)]
經濟(경제)
기록상으로는 三國(삼국) 초기부터 貨幣(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유물이 發掘(발굴)된 것은 없으나, 物品貨幣(물품화폐)가 주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新羅(신라)에서는 5世紀(세기) 末(말)과 6世紀(세기) 初(초), 都邑(도읍)인 慶州(경주)에 市長(시장)을 열고 監督(감독)하는 機關(기관)을 두었다.
三國(삼국)의 文化(문화) 發達(발달)
이 部分(부분)의 本文(본문)은 三國(삼국) 時代(시대)의 文化(문화)입니다.
三國(삼국) 時大(시대)의 文化(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초기의 부족 聯盟體(연맹체)적 特徵(특징)과 함께 漢字(한자) 文化圈(문화권)에 編入(편입)되었다는 점과 古墳(고분) 및 遺物(유물)과 壁畫(벽화)로써 전해졌고, 佛敎(불교) 色彩(색채)를 띤 遺物(유물)과 遺跡(유적)이 많다는 점이다.
佛敎(불교)와 道敎(도교)의 收容(수용)
三國(삼국)은 律令(율령)을 制定(제정)하고 地方(지방)制度(제도)와 中央(중앙)組織(조직)을 改編(개편)하여 王權(왕권) 강화에 힘쓰던 4世紀(세기)에 佛敎(불교)를 收容(수용)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中國(중국)의 전진을 통하여 小獸林王(소수림왕) 때에 佛敎(불교)를 收容(수용)하였고(372), 百濟(백제)는 동진에서 枕流王(침류왕) 때 佛敎(불교)를 받아들였다. 高句麗(고구려)를 통하여 佛敎(불교)가 전래된 新羅(신라)는 1世紀(세기) 가까운 民間(민간)傳承(전승)을 거쳐 法興王(법흥왕) 때 비로소 佛敎(불교)를 國家的(국가적)으로 公認(공인)하였다.
三國(삼국)은 佛敎(불교)를 信仰(신앙)으로 널리 收容(수용)하였다. 中央集權(중앙집권)體制(체제) 確立(확립)과 地方(지방)勢力(세력)의 統合(통합)에 힘쓰던 이 時期(시기)에 佛敎(불교)는 새로운 國家(국가) 精神(정신)의 確立(확립)에 寄與(기여)하고 强化(강화)된 王權(왕권)을 理念的(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役割(역할)을 하였다.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에서는 思想的(사상적)으로 佛敎(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新羅(신라)에서는 佛敎(불교)가 王權(왕권)과 密着(밀착)되어 성행하였다. 僧侶(승려)가 醫術(의술)을 擔當(담당)하고 傳統(전통) 信仰(신앙)에서 神聖(신성)하게 여기전 場所(장소)에 寺刹(사찰)을 建立(건립)하면서 佛敎(불교)는 점차 傳統信仰(전통신앙)의 機能(기능)을 代身(대신)하였다. 新羅(신라)에서 널리 받아들인 佛敎(불교)의 中心(중심) 敎理(교리)는 업설과 彌勒佛(미륵불) 信仰(신앙)이었다.
이는 王(왕)이 곧 부처라는 思想(사상)을 통하여 王(왕)의 權威(권위)를 높여 주는 한편, 貴族(귀족)들의 特權(특권)을 認定(인정)해 주는 一面(일면)이 있었다. 新羅(신라)의 여러 王(왕)들이 佛敎式(불교식) 이름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아울러 彌勒佛(미륵불)이 나타나 理想的(이상적)인 佛國土(불국토)를 建設(건설)한다는 彌勒佛(미륵불) 信仰(신앙)은 眞興王(진흥왕) 때 組織化(조직화)된 花郞(화랑) 制度(제도)와 密接(밀접)한 關聯(관련)을 가지면서 新羅(신라) 社會(사회)에 定着(정착)되었다.
三國(삼국)에는 道敎(도교)도 傳來(전래)되어 山川(산천) 崇拜(숭배)나 神聖(신성) 思想(사상)과 結合(결합)하여 貴族(귀족) 社會(사회)를 中心(중심)으로 歡迎(환영)받았다. 百濟(백제)의 山水(산수)무늬 벽돌과 山水(산수)무늬 기와는 自然(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생각을 담고 있으며, 百濟(백제) 金銅(금동) 大香爐(대향로)는 神仙(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을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者(자)의 死後(사후) 世界(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表現(표현)하고 있다.
三國(삼국)에서 冀願(기원)한 姓氏(성씨)
韓國(한국)의 高句麗系(고구려계) 姓氏(성씨)
韓國(한국)의 百濟系(백제계) 姓氏(성씨)
關聯(관련)項目(항목)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歷史(역사)
첫댓글 이승철 ~ 토 2020-12-26 오후 5:38 ~ 역사적인 귀한 자료 잘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