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과 의리 "이놈, 그런 생각이 바로 김가들이 지은 죄가 아니냐? 내가 왜 남의 재산 을 빼앗겠느냐. 지난 일엔 나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겠다. 앞으로만 잘해 볼 생각이니라." "그럼 김가가 스스로 바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네 놈 눈치가 됐다. 그런 눈치로 모든 일을 염탐하면 된다. 실은 김 가들이 나의 관용(寬容)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새 임금과 나를 깔보고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반성을 촉구시키려고 오늘 상감을 이 별 장에 행차하시게 한 거다." 대원군은 그들에게만 그런 복안을 말했다. 그러나 상감의 행차와 이 별장 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허지만 암만해도 이 별장을 김가들에게 그냥주어 둘 수는 없습니다. 대감 의 별장이 돼야지 우리도 종종 와서 이렇게 놀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너희들이 아다시피 돈이고 땅이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나에게 대원군이란 허명(虛名)을 주기도 아까와하고 두려한 영의정 김좌근이가 그 대신 돈과 땅을 하사해서 편히 살게 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대왕대비께서 상당한 돈과 땅을 하사하겠다 하셨 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런데 내가 이까짓 김가의 별장을 탐내겠느냐?" "저라도 내일 가서 대감께서 이 별장을 퍽 좋아하시더라고 슬쩍 인사를 하 면 곧 바칠 건데요. 김홍근은 대감께 아첨하려고 오늘도 선뜻 빌려준 거니 까요." "허허허 진상 받으실 분은 따로 계시니 걱정마라." "알았습니다. 그럼 김홍근이가 이 별장을 상감께 바쳤군요. 옳아, 그래서 상감께서 아까 첫행차를 하셨군요." "허허허, 아직 바치진 않았지만 상감이 한번 노시고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 다면 그 자는 지금 억지로라도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하하하, 대감님 장난은 이제 알았습니다. 상감께서 행차까지 하신 곳에서 제가 주색 향락의 장소론 쓰지 못하겠지요." "거참, 통쾌합니다. 그러나 상감께 진상되면 우리는 이번이 첫 번 구경이 요. 마지막 구경입니다." 이런 별장 놀이가 있는 며칠 후에 김홍근은 정사(政事)로 고종을 뵈었을 때에 큰 충성이나 하듯이 공손히 아뢰었다. "상감께서 전날 삼계동 소재 신(臣)의 유관재에 나가 노셨다 하와 감격하 였나이다. 경치가 좋다고 칭찬하셨다 하오니 앞으로 종종 소풍하시면 좋을 까 하옵니다. 그런 장소를 신의 도리로서 그냥 있을 수 없사오니 상감께 바치겠습니다." 김홍근은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마음에 없는 충성을 보였다. 자고로 임금 이 놀던 장소는 신하가 소유하지 못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이 런 수단으로 김홍근에게 억지 충성을 시켜서 그 자신의 생색을 내게 해주 었다. 그러나 이 화제도 장안에서 사라질 때쯤 되어 고종은 그 별장을 대원군에 게 내려 주었다. 그때는 아무도 대원군이 김홍근의 별장을 빼앗았다는 말 도 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이 별장문제 이외에는 안동 김씨에게 아무런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전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초당 파 인물중심의 대의명분에서 단행한 조각(組閣) 방침에 따른 인상을 일반 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씨 중에서도 몇 명의 인물을 중용하는 아량과 인정도 베풀었던 것이다. 하루는 대원군이 김병학의 집을 밤중에 혼자 찾아갔다. 김병학도 대원군이 밤중에 남 몰래 찾아왔으므로 약간 뜻밖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우정 을 서로 믿는 사이라 반갑게 맞았다. "밤중에 웬일입니까?" "실은 대감에게 쑥쓰러운 청이 있어서 왔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사이니까 거두 절미하고... 아시다시피 지금 초당파 인물중심의 조 정을 꾸밀 준비 중입니다. 어떤 한 개의 당파나 또는 양반만이 벼슬을 하 는 폐단을 없애고, 어느 정도 똥 상놈까지도 공평하게 등용할 결심입니다. 나라와 나라 일을 하는 벼슬 자리는 어떤 일파나 양반만의 농락물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대감의 그 개혁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똥상놈까지 고관에 등용하 면 역시 종래의 지배층이던 양반 관료와 유림(儒林)에게 지나친 충격과 반 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만은 좀 서서히 하면 어떨까요?" "일리 있는 신중론입니다. 그러나 독초는 뿌리채 뽑아 버리는 것이 혁신정 책이니까 다소 잡음이 있어도 구폐는 이때 단연 일소 해야하겠습니다." "대감의 용단이라면 하실 수 있겠지요마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점입니다. 용단을 내릴 결심도 방안도 서 있지만 나에게 그 용단을 내린 후의 문제를 수습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의 견을 말해 주시오." "글쎄요. 아니 대감에겐 그 능력도 계십니다. 그러나 좀 어렵겠지요." "나도 그 어려울이라는 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실은 대감의 힘을 빌리려 고 청하러 왔습니다. 대감은 계속해서 국사를 봐 주시되 이번 새로 조직하 는 내각의 좌의정(左議政)을 맡아 주십시오." 김병학으로서도 뜻밖의 후대(厚待)였다. "대감의 호의에는 감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선 우리 김씨를 모두 죄인 취 급하고 있으며 또 당연히 삼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로선 친척 들이 다 몰려난다고 비탄하고 있는 이때에 나만 그런 영전을 하면 친척들 에게도 미안하니까 사양하겠습니다." "허허허, 세상 잡음과 인정만 생각하면 크고 어려운 일은 못합니다. 내가 몰아내지 않는데 김씨 일문이 왜 몰려난다고 야단들입니까? 다만 관계(官 界)에 이동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선 김병기 대감과 나하고 사이가 제일 나쁘다고 하지만 그 분도 유임을 청하겠고 김병국 대감도 그냥 유임을 청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김씨 중에서 대감만 운운의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 습니다." 대원군도 중대한 인사문제를 상의하는 자리라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의 지기지정(知己之情)에 감격합니다. 그 문제는 더 좀 생각할 여유 를 주십시오. 그러나 혹 대감도 나와의 종래의 우정에 끌리지 않는가 하 는 점을 재고(再考)해 주십시오." 하고 김병학도 냉정한 태도를 피차가 취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껄걸 웃으면서 김병학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큰 일일수록 사람끼리 서로 믿는 것이 제일 중요 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우정이 가장 중할지도 모릅니다. 내 진정을 탁 털 어놓고 말하면 이제 나도 대감의 종전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 "내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네, 알 뿐입니까." 김병학도 가슴이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조정 조직 명단에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김병학의 우의정 한명 뿐이요, 김병기와 김병국은 유임이 아닌 감등 좌천으로 남았 을 뿐 영의정 이하의 여러 판서들을 지내던 김씨는 모두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두명을 다시 승진시켜서 준 것은 후일의 일이요, 김병학만은 뒤 에 영의정까지 시켜서 대원군의 우정의 표시를 보았다.
112- 天下를 두 손에 쥐고 파격적 인사개혁 파격적 인재등용(人材登用)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모든 파벌을 초월해서 유능한 인재를 적소(適所) 에 등용하는 것이 기초가 된다.】 이것이 대원군이 주장하는 정치조직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믿을 만 한 인물이어야 했고 또 한번 등용하면 자기가 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난한 솜씨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준 조대비에게 감사를 느꼈으나 수렴섭정(垂簾攝政)의 과부 조대비 치맛바람 밑에서 일하는 것을 거북스러 했다. 그래 고종이 열다섯살 되던 고종 삼년 이월에 조대비의 수렴섭정을 폐지하고 국왕친정(國王親政)이라는 명복 밑에서 대원군이 직접 정치에 손 을 대고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이때서야 그도 비로소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비롯한 대신의 요 직을 그의 마음대로 쓰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조정의 요직을 보면 영의정 이 조두순(趙斗淳), 좌의정이 김병학, 우의정이 유후조(柳厚祚)였다. 조두 순과 김병학은 종천의 관록으로나 대원군과의 관계로 보아서 당연한 인사 였다. 그러나 우의정에 유후조를 등용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허어, 죽어 지내던 남인파(南人波) 유후조가 우의정이 됐어!" 하고 대원군의 대담한 인사문제에 또 한번 놀랐던 것이다. 또 한번이란 이에 앞서서도 북인파(北人波)의 임백경(任百經)을 우의정에 등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남인 유후조도 이조판서(吏 曹判書)로 기용한지 불과 일년만에 일약 재상을 시켰기 때문에 정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대원군은 그 뒤에도 남인의 한계원(韓啓源)을 우의정으로 삼았고, 북인의 강로(姜老)도 좌의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노론파(老論波)만 벼슬을 하던 구폐(舊弊)를 타파하고 남인파, 북인파에게도 환심을 샀다. "이제 남인도 북인도 사람 행세를 하게 되었다." 하고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 파에서 한두명이 대관에 등용되어도 그 파에 속하는 많은 선비들까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적어도 세도파에 의한 멸시나 탄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은 퍽 컸던 것이다. 과거의 그런 당화(黨禍)로 억울하게 정치범(政治犯)으로 처형 또는 박해당한 이백명 가까운 사람도 모두 탕척 (蕩滌)하고 복권시켰다. 그전에 유명했던 이하전(李夏銓)의 역적사건으로 고생하던 사람들도 옥에 서 석방되었고 경평군 이세보(慶平君李世補)도 귀양을 풀고 벼슬을 시켰 다. 특히 그전에 반감을 가졌던 이장렴(李章濂)을 위험성 있는 금위대장 (禁衛大將)에 임명한 사실은 대원군의 허심탄회하고도 대담한 인재등용이 라고 큰 화제에 올랐다. 옛날 적에게 역적질 하기 제일 좋은 칼을 주었으니, 대원군이 어느 사이에 이대장을 그렇게 심복부하로 만들었을까? 정말 귀신이 곡할 인물등용의 요술이다. 그보다도 조선(朝鮮) 건국(建國)이래 처음으로 서북인(西北人)을 참판(參 判)에 등용해서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본보기를 증명한 것은 사백년 이래의 처음 보는 일대 영단이었다. 그것도 고려왕실(高麗王室)의 후손인 왕정양 (王庭陽)이있기 때문에 더욱 대담하고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상은 소위 양반 중의 파벌을 타파하고 지방차별을 철폐한 인사행정이었 다. 그것보다도 대담한 것은 아전, 평민, 천민들 중에서도 유능한 심복 인 물을 등용해 정보기관의 관원으로 경향 각지에 배치한 것이었다. 대원군 치하에선 상놈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 이런 덕을 본 사람은 대원군 방랑시절에 친교한 <천하장안(千河長安)>의 난봉꾼을 비롯한 아전계급이었다. 즉 궁녀(宮女)의 오빠들인 천희연(千喜 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長淳奎), 안필주(安弼周)를 비롯하여 환관 (宦官) 이민화(李敏化), 가령(家令), 이속(李屬)의 이승업(李承業), 유재 소(劉在韶), 윤광석(尹光錫) 등 이십여명에 달했다. 이러한 인사문제 하나만으로도 대원군의 인물 된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외국인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는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있는 개성(個性)과 백절불굴하는 강한 의지(意 志)의 소유자로서 한국 근세사상(近世史上)에서 가장 뚜렷한 성격의 인물 이다. 그는 여러 가지로 평가되었는데 어떤 자는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였 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개의 민중선동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 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원군을 민중선동가로 본 점이다. 이 말은 다른 의 미에서는 민심을 제일 잘 알고 또 소중히 여긴 정치가요, 민중을 위한 자 기류(自己流)의 민주주의 방법을 처음에 시도(試圖)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13- 당파소굴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나라를 망쳐버리는 것은 부패한 벼슬아치의 죄 뿐 아니라 조상 뼈다귀 자 세만 하는 양반의 족속들이다. 나라의 덕을 제일 보면서 나라의 대한 의무 도 이행하지 않고 정치에 대한 불평만 하는 것이 양반들이다. 놈들은 일도 안하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 양반의 부당한 기세를 꺾고 일반 다대수의 민 중의 사기(士氣)를 돋구워야겠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모두 백성일 바엔 공 평한 대우를 나라가 보장해야 한다.' 대원군은 이런 선언을 하고 지방까지 뿌리깊이 박힌 토반(土班=지방양반) 의 허리에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평민에게만 물리던 세금과 부역 을 양반에게도 물리게 세제개혁(稅制改革)을 단행했다. 그리고 양반의 평민 학대와 수탈의 구악을 엄중히 금했다. 그러자 일반 백 성들은 양반 압제에서 해방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대해서 양반의 대변자 인 각지방의 유림(儒林)들이 반대 여론을 일으키고 탁상공론(卓上空論)의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에잇,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유림이 입만 살아서 모든 당파 싸움을 조종 하고 있다. 놈들의 소굴인 전국의 서원을 일제히 폐쇄하라." 대원군의 말은 곧 법령이었고 이 법령은 철저하게 신속히 단행되었다. 그 리고 시정(時政)을 비판해서 상소하는 선비는 용서 없이 귀양을 보냈다. 서원에 모여서 천하를 논란하던 유림들은 대단한 불평을 품었으나 그들은 반대운동을 표면화시킬 용기도 없는 문약자(文弱者)들이었다. 다만 뒷공론 만으로 불평을 했다. "대원군은 진시황같이 선비를 탄압하고 학문 연구의 자유를 박탈하는 폭군 이다." 사실상 서원은 처음의 목적대로 지방의 청소년에게 한문과 도덕을 가르치 는 순수한 사립학교의 구실은 않고 정치 불평을 하는 소굴로 타락되었다. 심지어 사원에서는 묵패(墨牌) 통문(通文)을 돌려서 지방민에게 각종명목 의 금전을 수탈하는 원부(怨府)로까지 부패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대원 군은 그들 기생충 선비들에게 철퇴를 내렸던 것이다. "아, 그 지긋지긋하던 서원의 행패가 없어져서 잘됐다. 학자님 생원님들의 유흥비 생활비를 대느라고 백성의 갈빗대가 부러질 뻔했는데 이젠 허리를 펴고 살게 되었다." 백성은 이렇게 좋아했으나 세도와 밥줄이 끊어진 서원 중심의 선비들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개가 있는 지방 대표들은 서울 까지 원정해서 대궐 앞에서 항의했다. 오늘로 말하면 서원폐지에 대한 선 비들의 시위였다. "교육 기관인 서원을 폐지하는 것은 이 나라를 미개지로 만들 위험을 초래 한다. 한문과 학자를 탄압하는 것은 최대의 학정이다." 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대원군은 코웃음을 쳤다. "서원에서 성현의 교육이 끝난지 오래고, 글 읽는 소리가 취흥방가(醉興放 歌)로 변해 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는 서원의 세도로 양민의 금품 을 수탈하는 행동이다. 그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을 잡아서 한강 이남으로 몰아내라." 대원군의 명령을 받자 군사들이 동원되어 시위하러 올라온 삼남(三南)의 유림대표들을 개끌 듯이 잡아서 한강 너머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뒷이어 각 서원에 국가에서 허용했던 일체의 토지를 몰수해서 완전히 서원의 기능 을 박탈해 버렸다. 이런 서원들 중에서도 가장 부당한 세도를 부린 대표적 서원이 청주(淸州) 에 있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었다. 이 서원은 우암 송시열(尤庵宋時 烈)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명말(明末)의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추모 (追慕)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화양서원을 근거로 삼고 행 패를 부린 유림들은 중앙의 세도가들과도 결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이 강대했다. [모월, 모일에 제향을 올리겠으니 제수전(祭需錢)을 얼마씩 봉납(奉納)하 라!]는 묵패라는 고지서를 발송하면 관리고 백성이고 땅을 팔아서라도 기 부하지 않으면 서원마당에 잡혀가서 볼기를 맞고 주리를 틀리는 사형(私 刑)을 받았다. 이런 악폐에 대해서 대원군이 전에도 관령으로 단속해 보려 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세도를 부린 화 양서원이라 제향 올리는 규모도 호화스러워서 일종의 문화명물(文化名物) 로 유명했다. 대원군 자신도 낭인 시절에 청주까지 가서 그 제사지내는 광경을 구경하다 가 큰 봉변을 당했으므로 다른 일반 백성이 두려워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 원군은 수수한 낭인으로서 제사 구경을 갔다가 무심코 손에 부채를 든 채 서원의 돌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저런 불경(不敬)스러운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무엄하게 부채를 든 채 올라가느냐?" 하고 유생(儒生)과 서원 청지기가 달려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네가 어떤 놈이냐? 성명을 대라." "성명이랄 게 있는 사람도 못되오." "뭐, 성명 삼자도 없는 놈이냐? 성명도 모르는 무식쟁이 놈이 감히 부채 를 든 채 이 서원의 층계를 올라?" "성명을 대라, 보아 하니 상놈은 아닌데 어디서 온 누구냐?" "서울서 이 서원의 제향이 유명하다기에 구경 왔소." 대원군은 마지 못해서 대답했다. "이놈아, 제향구경을 하다니, 네 조상 제사도 구경만 하느냐? 성현의 제 향엔 경건히 참배하는 법이다." 하고 유생은 대원군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대원군은 분한 마음을 꾹 참고 그들의 행패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서원을 뛰어나왔다. 그때 그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밝혔으면 봉변을 안 당 했을지도 몰랐다. 설사 몰락한 낭인 왕족의 신분을 밝혔더라도 가짜라고 추궁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혹은 왕족이 그런 예법도 모르냐고 모욕을 당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때도 자신이 평민으로 자처했고 또 세상의 갖은 모욕을 꾹 참는 인내성이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게 돼서 백성의 원부가 된 서원을 때려 부시는 이때, 그 당시의 봉변을 회상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114- 웅장한 景福宮 재건 대원군은 자기 자신의 사생활은 여전히 풍류객답게 간소한 것을 좋아했으 므로 절제해서 사치스롭고 호화로운 것을 피하고 재물에 대한 태도도 담백 했다. 그러나 그의 웅장한 정치적 포부를 펴기에 앞서서 왕실의 권위의 상 징이요, 자기의 친아들 고종왕이 새로 들어앉을 웅장한 궁전을 지을 결심 을 했다. 경복궁은 조선 건국시에 건설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의 병화로 타 버렸다. 그 치욕의 흔적이 이백년 동안이나 그대로 폐허로 남아 있어 낮에도 산짐승이 우굴대고 밤에는 귀신이 나올 듯한 흉한 궁터가 되어 있 었다. 대원군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이백년 동안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은 내가 꼭 전보다 훌륭한 규모로 재건 하겠다."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건축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재와 재정과 인력 동원이 큰 난관이었다. 다른 왕의 시대에도 경복궁 재건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것 의 가능성이 없어서 항상 중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하고자 해서 못할 일이 없다고 스스로의 힘을 믿는 대 원군이었지만 이 문제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의견을 물었다. "지금 국고의 재정이 미약하고 백성의 힘도 약한데 어찌 그런 거대한 역사 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공연히 무모한 공사를 일으켰다가 민원(民怨)을 사거나, 중도에서 기진맥진해서 완성하지 못한다면 왕실과 대원군의 수치 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못됩니다." 하고 중론이 반대했다. "어려운 일인 줄은 나도 아오. 그러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선 우선 나라의 근본이요, 상징인 왕궁이 부흥해야 하오. 내 설계가 비록 우리 나라 조선 최대의 규모라 하지만, 그래도 청나라의 궁궐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될 소규 모요. 허나 외국에 대한 우리 나라의 위신을 지킬만한 궁궐로서 경복궁 재 건만은 꼭 해야겠소." 대원군은 끝내 주장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반대하는 이유에도 나라 를 위한 고충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자면 결국 남의 집을 짓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왕족인 대원군으로는 불타버린 조상의 집을 다시 짓고 싶은 생각이기도 했다. 더구나 새로 된 임금 내 아들에게 훌륭한 궁궐을 지어 주고 싶은 것과 내 집에 대한 욕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현재의 국가 재정의 실정을 방패로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마침내 귀신의 힘을 빌려서 일반 민심을 납득시키려 는 기계(奇計)를 안출했다. 다시 말하면 미신의 효력을 이용할 음흉한 모 략이었다. 그는 이에 앞서 조대비의 여자다운 허영심을 충동하여 그 찬성 을 얻으려고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창덕궁은 경복궁이 전화로 소실된 후에 임시로 지은 가궁(假宮)에 지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나라를 번영시킬 이 기회에 우선 왕실의 위엄을 백성에게 보이고 외국에 대하여 위신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도하던 일개 대신들의 집도 굉장히 크고 호화로운데 궁궐이 이렇게 초라 해서 되겠습니까? 청나라에 갔다 온 사신들이 그 나라의 궁전이 얼마나 굉장한가는 대비께서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또 선성(先聖)께서 나라와 함께 건설한 경복궁을 저런 폐허로 버려 두는 것은 왕실의 후손으로도 죄 송한 일입니다." 조대비는 결국 자기 집을 훌륭히 지어서 호강시켜 준다는 대원군 말에 혹 반해 버렸다. "대원군의 말이 옳소. 대원군 계획대로 해 보오." 대원군은 그전에도 서로 상의했던 조대비의 찬성을 다시 다짐하고 "조대비께서도 경복궁 재건을 열심히 바라고 계시다." 하는 소문을 퍼뜨리고 반대하는 중신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완고한 그들은 종전의 태도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운현궁에 데려다 두고 직접 청지기 로 부리고 있는 천가, 하가, 장가, 안가 네명을 함께 불렀다. "이크, 우리 네명을 함께 부르시는 것을 보니 무슨 기쁜 소식이 있나 보 네." 하고 그의 앞으로 나갔다. "대감, 무슨 분부이십니까?" "음, 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이리로 가깝게 오너라." "네" "이번에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었다..." "완고파들의 벽창호 콧구멍을 뚫으셨습니까?" "아직 멀었다. 그 막힌 콧구멍을 너희들 힘으로 뚫어야겠다." "저희들이?" "그래, 코를 뚫기 위해서 우선 그 자들의 눈을 속이고 입을 막는 비결을 써야겠다." 그리고는 퇴침만한 청석(靑石) 돌을 주었다. 그리고 그 돌을 갖다가 이리 이리 하라고 비밀지령을 내렸다. 그들은 대원군 앞을 물러나와서 '이것이 뭘까?' 하고 궁금증이 났다. 청석 돌멩이에는 이상한 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방이라시더니 이것이 무슨 주문(呪文)인가 보다." 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거렸으나 무식한 그들의 눈엔 한문으로 쓴 글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에 창덕궁 의정부(議政府)의 청사를 수리할 때, 땅 속 에서 청지기들이 몰래 묻어 두었던 그 돌멩이가 두 군데서 나왔다. 역사하 던 인부들이 무슨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수상스럽게 여기고 흙을 털고 공사 감독에게 갖다 보였다. "이런 돌이 땅속에서 나왔습니다." 공사감독도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한문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豫言) 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癸末甲元 新王雖登 國嗣叉絶 可不懼哉 景福宮殿 更爲 建 寶座移定 聖子神孫 繼續承承 國祚更延 人民富盛 東方老人秘訣 看此不告 東國逆賊 [계해년 말에서 갑자년 초에 걸쳐서 새 임금이 등극하더라도 나라를 이을 자손이 또 끊어질 운수이매 어찌 송구스럽지 않으랴. 그러나 경복궁을 다시 짓고 보좌(寶座)를 옮기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 번성해서 나라의 경사가 무궁하고 백석이 부성(富盛)하리라. 이 글은 동방노인(東方老人)이 예언한 비결이라 만일 이 비결을 발견하고 도 이대로 아뢰고 실행하지 않으면 나라의 역적이다.] 공사감독은 깜짝 놀라서 이 비결의 돌을 임금께 바쳤다. "경복궁을 짓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 비결대로 하지 않는 신하는 나 라의 역적이다." 하는 천명(天命)을 빙자한 대원군의 모책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재건을 반대하던 대신들도 그것이 대원군의 장난일지 모른 다고 추측했으나 그런 증거를 폭로할 수도 없었고 이 비결을 미신이니 묵 살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국왕의 손이 끊이고 나라가 망해 도 좋다는 불경 죄로 몰려서 그야말로 역적의 누명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청석명(靑石銘)의 예언은 궁중을 비롯한 야반 백성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화제가 되어서 전국에 유포되었다. 아직도 미신을 믿는 일반 민심은 '그런 비결까지 나왔으면 경복궁을 지어야지. 반대하는 대신은 역적이지.' 하면 서 경복궁 재건은 당연한 일이라는 편으로 민심은 움직였다.
115- 원납금(願納金)제도 조대비는 고종 2년 4월 3일에 현임(現任) 대신들과 전임(前任) 대신들을 모두 희정당(熙政堂)에 불러 놓고, 경복궁 재건에 대한 최후 결정을 내릴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경복궁 재건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인 이유 원(李裕元)과 물러난 영의정 김좌근도 참석했으나 대원군은 보이지 않았 다. 발을 늘인 저쪽 섭정(攝政) 자리에 앉은 조대비가 입을 열었다. "국초(國初)에 국가와 왕실의 지초로 세운 경복궁을 적국의 병화에 태운 채 이백년이나 그대로 폐허로 버려 둔 것은 열성(列聖)에 대하여 황송하고 백성에 대해서도 위신이 서지 못했소. 선대(先代)도 이 문제가 한두번 논 의 되었으나 왕실에 그만한 일을 감당할 중심이 없어서 중지되어 왔으나 이젠 책임지고 일할만한 대원군이 있으니, 이 기회에 경(卿)들은 대원군과 상의해서 재건공사를 일으키도록 하기 바라오." 이 말을 들은 이유원은 모든 것이 대원군의 연극임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고 간단한 심중론을 말했다. "경복궁의 재건 취지에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오직 걱정되는 것은 막대 한 경비와 부역 동원의 문제입니다." "나도 잘 아오. 그런 점을 대원군과 잘 상의하면 될 줄 아오." 이런 압력에 대해서 대원군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서 가장 연장자인 원로 중신 정원용이 또 대원군에게 찬성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궁궐을 재건하는 것은 가장 큰 경사로 생각하오. 모 든 힘을 기울여서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다할 기회라고 믿습니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고 좌중이 잠잠했다. 좌의정 김병학도 대원군 편을 들고 나왔다. "역대에 못한 큰 사업을 지금 하는데 성대(聖代)의 뜻이 있습니다. 대원군 이 총책임을 지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김병학의 말이 있은 뒤라 말하기 쉽다는 듯이 김좌근이 입을 열었다. "막대한 재정이 첫째 문제요. 아직도 삼남지방의 유림과 백성의 마음이 안 정되지 않는 이때라 시기가 아직은 이른가 하옵니다." 시기상조(時機尙早)론으로 소극적 반대를 한 것이다. 이때 영의정 조두순 이 간단하나 결정적인 찬성을 했다." "큰 일을 하는데는 다소의 난관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복궁을 재건하지 못한 것은 신들의 불찰이었습니다." 반대론의 대표적인 이유원도 하는 수 없이 "재정이 준비되는 대로 착수하기로 우선 정해 두고..." 하는 말로 중신회의는 침울한 공기 가운데 끝났다. 이런 결정이 내리자 대원군은 그날로 활동을 개시했다. 조대비의 교서(敎 書) 형식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 대계획을 발표하는 동시에 영건도감(營建 都監)을 설치했다. 대원군의 총지휘 하에 도제조(都提調)에 영의정 조두순, 제조(提調)에 열 두명의 고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재정문제는 우선 거국적인 원납금(願納金)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나라의 궁전을 이룩하는데 충성을 표시하는 기부금을 자원해서 내라는 대원군의 명령을 거역할 신하와 백성 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그 본보기로 궁중에서는 조대비의 명의로 십만냥의 국고금을 하사했 다. 오랫동안의 세도로 거부가 된 안동 김씨 일파에서는 사과하는 의미와 구명하는 운동비로서도 남보다 거액의 원납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의 부하들은 반 위협적으로 장안의 부호가들을 찾아 다녔다. 타의 (他意)겸 자의(自意)에 의한 원납금은 막대한 금액으로 모여 들었다. 김병 기는 이만냥을 내었고, 김병학도 만냥을 냈다. 원납금을 모으러 다니는 대원군 부하들은 "예전엔 세도가가 백성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 갔지만 이번에는 자기 형편 에 따라서 양심껏 나라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면 된다. 마음에 없으면 내지 않아도 좋다. 절대로 강제가 아니다." 이런 권유는 강제보다도 더 무서웠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원납 금 운동이 시작된지 며칠이 안 되어 벌써 사십만냥이라는 거액이 모였다. 대원군은 만족한 표정으로 종친(宗親)들을 모아 놓고 "백성의 경복궁 재건에 막대한 원납금을 바치고 있는 이때 우리들 왕족으 로서 그냥 있을수가 있겠소? 우리 종친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으니 내지 못하거나 적게 내는 사람의 체면도 생각해서 개별적 원납은 그만둡시다. 그리고 형편대로 낸 원납금을 모아서 종친 일동의 명의로 내면 좋을까 하 오." "대감의 말씀이 고맙소." 하고 가난한 왕족들이 기뻐했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제일 많은 금액을 발기장에 적었다. 그래서 모은 돈 사만냥을 원납해서 빈한한 왕족들의 체면도 세워 주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원납금을 내기가 어려울 테니 공사장에 나와서 부역으로 충성을 다하면 좋다." 이런 지시도 내렸다. 부역도 결국은 재정의 일부를 부담하는 것이지만 농 민들에게는 관대한 처치였다. 사월 십오일을 기해서 경복궁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안의 빈민들이 모여 와서 신속하게 기초공사가 진행되 었다. "시작이 반이다. 대원군의 수완이 굉장하다." 터가 닦아지는 공사판에선 신들이 났다. 밥도 술도 잘 나왔으므로 고마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부근의 성 밖에 농민들의 자진 부역 부대 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때가 마침 농사를 시작하기에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속으로 원망했던 것이다. 그 기미를 알게 된 대원군은 지 령을 내렸다. "지금은 농사를 다 지은 뒤에 하도록 하라!" 순진한 농민들은 당장의 사정만 봐 주어도 고마웠다. 대원군에 대한 인기 는 또 올라갔다. 그래도 장안의 빈민을 비롯하여 원납전을 내지 못할 가난한 양반들까지 모 두 부역에 나와서 공사장은 활기를 띠었다. 하루에도 천명 가까운 장안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경복궁 기지(基地)안에는 임시로 휴게소와 숙소가 늘어서고 막걸리 집도 생겼다. 대원군은 그 삯 없이 일하는 부역꾼들의 식사를 위하여 삼시로 따뜻한 밥 을 지어서 배부르게 먹였다. 그 쌀은 물론 호조(戶曹)의 창고에서 나오는 나라의 쌀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민심을 사면서 일을 시켰던 것이 다. 이런 활발한 역사는 빠른 성과를 올려서 한달도 못 가서 그 넓은 궁궐 의 터전이 잘 닦아지고 주추가 놓여질 단계가 되어서, 전국에서 목공과 석 공(石工)이 동원되었다. 그들에게는 물론 공전을 주었다. 그리고 부역 부대가 점점 늘게 되자 그들 에게 식사를 지어 줄 수 없게 되어서 밥값 정도의 일당을 내주었다. 그러 자 경복궁 공사장 외곽에는 밥장수 술장수가 번성했다. 밤으로는 창녀들의 매춘행위도 놀음판도 벌어졌으나 대원군은 그 노역하는 자들을 위안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116- 경회루(慶會樓)의 유래 * 천주교 박해 의기가 양양해진 대원군은 점점 욕심을 부려서 예정보다도 궁궐의 수를 늘 이고 목재와 석재도 더 좋은 것을 택하게 되었다. 목재는 서울에서 가까운 능림(陵林)에서 베어 쓰다가 그것이 부족해서 역시 민간 산림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석재는 멀리 강화도에서 떠왔으므로 수륙의 운반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 다. 처음에 환영하던 백성들에게서도 점점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러나 대원군은 예정대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그 해 구월에 벌써 경복궁의 광화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네 궁문(宮 門)이 상량식을 올리게 되었다. 경복궁 서쪽에는 큰 못을 파고 그 안에 옛날 있었던 석경루(石瓊樓)를 재 건하려고 땅을 파다가 박경회(朴慶會)라는 인부가 동제(銅製)의 옛날 보기 (寶器)를 파냈다. 공사를 감독하던 참찬관(參贊官) 김태욱(金泰郁)이 뚜껑 을 보니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안에 옛날 상감님아 쓰시던 보배(寶盃)가 들어 있구나." 하고 열어 본즉 안에는 과연 금동제(金銅製)의 술잔이 들어 있었다. 그리 고 그 잔에는 칠언 절귀(七言絶句)의 한시(漢詩) 한수가 새겨져 있었다.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 靑牛十廻白己節, 開封人是玉泉翁. [화산도사(華山道士)의 소매 속에 들었던 이 보배를 동방의 국태공(國太 公)의 손을 빌어 바치노라. 도사가 푸른 소를 타고 돌아오는 이날에, 이 보배를 발견해서 열어 보는 사람, 옥천옹(玉泉翁)일러라.] 이런 비결의 보물 발견은 처음에 발견했던 청석명(靑石銘) 보다도 큰 반향 을 일반 백성에 일으켰다. 국태공이란 대원군의 공식칭호(公式稱號)였던 것이다. 대원군은 점점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원납전과 부역의 고통을 느끼게 된 백성들이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자 또 이런 모략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대원군의 연극이라는 것을 유식한 사람들은 곧 알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서 욕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런 소수의 빈축을 살 것은 물론 처 음부터 알고 한 계략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는 일반 대중에게 지지를 받 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전의 청석명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대원군 자 신의 위대성(偉大性)을 화산도사의 이름으로 찬양한 점이다. 이제는 그만 큼 그의 세력은 확고 부동하다는 자신을 갖고 구차한 복면은 벗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경사가 없다. 이 보물을 발견한 인부 박경회가 바로 옥천공이매, 누 명(樓名)도 그의 이름을 따서 경회루(慶會樓)라고 하자." 하고 대원군은 명명(命名)했다. 대원군은 아마 처음부터 이 누명을 미리 생각하고 그 인부에게 그런 가명 (假名)을 자백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 나 대원군은 그 비결의 보물이 진짜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발견한 인부 에게 당장의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시키고 나중에는 중추부사(中樞府事) 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대원군의 연극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경지로 되었다. 날 마다 삼천명이나 되는 부역 인부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경복궁에는 무대 가 만들어지고 대규모의 흥겨운 연극이 벌어졌다. 열명 한반(一班) 열반 일대(一隊)의 집단은 삼백이나 되었다. 그들의 대마다 서민자래(庶民自來) 라는 깃대를 세우고 농악을 잡혀서 공사장으로 출동시켰다. 대 앞에는 화 려한 의상을 입힌 소년을 장정 어깨에 무동세우고 대원들은 머리에 종이로 만든 꽃벙거지를 씌웠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도 농악을 이용해서 사기를 돋우는 동시에 그들의 피로를 덜어 주었다. 그리하여 일의 능률을 올리는 동시에 고역에 대한 불평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큰 토목을 운반할 때나 터를 다지는 공동작업에는 으레 한명의 고수(鼓手) 가 북을 치면서 합창지휘를 했다. 이것이 유명한 경복궁타령이다. "한양천도(漢陽遷都) 오백년에..." 하고 고수가 북을 치면서 첫마디를 메기면 대원들이 일제히 줄을 잡아 당 기면서 힘찬 노래를 불렀다. 한양천도 오백년에 천하영웅 국태공이 천우신조 북받으며 국태민안 경복궁을 백성들의 충성으로 구름높이 이룩하네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한 노래가 끝나면 고수가 덩덩 북을 치면서 또 다른 노래의 첫마디를 메긴 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이에 따라서 대원들이 또 합창하면서 신난 듯이 줄을 끈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삼각산도 높을세라 이궁 앞을 내다보면 한강수도 푸를세라 이 경치에 복을 받아 궁 이름도 경복일세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이럴 때 대원군도 공사장으로 가끔 나와 보았다. 그는 일을 독려하려고 하 지 않고 위로의 말만 했다. "수고들 한다. 그만 쉬고 술이나 한잔씩 하라." 하고 돈을 주며 돌아 다녔다. 그래서 공사장에서는 대원군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래도 확대만시켜 가는 공사로 막대한 재정 부담과 부역에는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늘어갔 다. 공사를 시작한지 만일년이 되는 고종 삼년 삼월에는 공사장에 산적했 던 목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전부 태워버렸다. 이때가 마침 천주교도(天主敎徒)를 박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천주교도가 원한을 품고 방화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이 그럴는지도 몰랐으나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풍문은 천 주교도 박해를 더 가혹히 하는 구실을 주었을 뿐이다. 재목이 부족해지자 민간 소유 산림에 원납목(願納木)을 갖다 쓰게 되었다. "이크, 이제 양반이 죽을 판났다." 큰 재목이 될 만한 산림은 양반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양반의 압제를 받 아 오던 백성들은 대원군의 가혹한 원납목 방법을 좋아했다. 대원군의 수완으로도 오년에 걸친 거대한 경복궁 공사에는 진땀을 뺐다. 재정이 어려워지자 상경하는 지방인 에게 남대문을 비롯한 성문(城門)에서 통문세(通門稅)까지 받았다. 그리고 전에는 평민만 물던 나라에 대한 세 금을 양반에게도 물게 했다. 이 점에는 일반 백성이 통쾌해 했다. 그래도 건축비가 딸리자 화폐개혁까지 해서 당백전(當百錢)을 새로 만들어 내서 통화가 팽창하게 되었다. 자연 물가가 앙등했고 사주전(私鑄錢)의 피해가 심했다. 사주전을 막기 힘 들게 된 대원군은 청나라의 동전(銅錢)을 썼으므로 그 폐단도 막고 차차 물가가 안정되긴 했지만 이때만은 대원군도 당황했다. 그러나 빈약한 국가 재정을 기울이고 광범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처음 계획 보다도 웅장한 규모의 경복궁 재건을 완성시킨 것은 대원군의 굳은 의지와 인내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몽상하지 못할 큰 공 사였다.
117- 少年王의 첫사랑 열두살에 양자 임금으로 궁중에 들어온 고종은 생부 대원군과 사사로운 가 인(家人)으로 만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궁중에 자주 들어오는 대원군은 대개 조대비와 중요한 정치문제만 수군대고 돌아갔다. 모친 민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기회는 더욱 없었다. 처음에는 잠자다가도 "어머니!"하고 잠꼬대를 하는 수가 많았다. 자기를 보고 "개똥이, 이자식아!" 하고 욕하며 놀던 평민 시절의 동무들이 그립기 도 했다. 그런가하면 궁중에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가족도 없었다. 삼대(三 代)의 과부들인 선대(先代)의 왕후들도 그를 따뜻한 애정으로 돌봐 주지는 않았다. 제일 어른인 조대비가 양모(養母) 관계이긴 해서 가장 소중히 여 겨 주었지만 그것도 대원군과의 정치적 흥정과 같은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 어서 육친의 애정이 있을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권한도 모조리 대원군에게 있으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러나 어린 임금은 아직 정치권력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 대신 개인적 생활 에는 완전한 자유라기보다도 방임주의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능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창 발달할 시기의 소년왕에게는 지도하는 어른 이 없었다. 몰론 글공부는 했지만 신하로서 어려워만 하는 선생에게 맡겨 졌을 뿐이다. 외롭기만 한 소년은 따분한 글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아도 다가오는 사춘기(思春期)는 성에 눈을 뜨게 했다. 외롭던 소년의 마음을 끈 것은 후궁에 많은 예쁜 궁녀의 매력이었다. 글방보다 궁 녀들 방에 놀러가는데 재미를 붙인 소년은 드디어 궁녀 이씨의 미색(美色) 에 반해 버렸다. 궁녀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정실 왕비는 못 되더라 도 귀인 또는 빈궁(嬪宮)으로서 첩 노릇을 할 수가 있고,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세자(世子)로 삼아서 임금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상 궁(李尙宮)은 자태가 아름다웠고, 머리가 영리하고, 나이 또한 고종보다 많은 처녀였다. 이 궁녀는 처음에는 시녀로서 고종을 섬겼으나, 점점 친해 지자 누이같이 친절히 고종의 신변을 돌봐 주었다. 그러던 중에 서로 사랑 의 싹이 트게 된 것이다. "상감마마" 하고 손을 잡아 주며 옷을 입혀 줄 때에 탄력 있고 부드러운 처녀의 몸이 스치는데 쾌감을 느끼게 된 소년왕은 자기도 모르게 애욕이 동해서 궁녀의 가슴에 안기며 젖가슴을 더듬었다. "아이.. 상감마마 왜 이러세요." 하고 소년왕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붉 혀 보이면 왕은 더욱 애달픈 피가 끓어 올랐다. "너 그러지 말고, 우리 장가 들고 시집 가는 흉내 좀 해보자." "어머나, 상감께서는 아직 아기신데 그런 소리까지 하세요? 그러다가 이 상한 소문이 퍼지면 큰일 나옵니다...." "나는 임금이다. 임금이 너를 좋아한다고 누가 감히 막을 소냐?" 궁녀에게만은 왕노릇을 해보겠다는 듯이 제법 조숙한 말까지 하면서 치마 끈에 매달렸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뒤에, 소년왕은 밤중에 궁녀의 방으로 가서 놀다가 궁녀 이씨의 이불 속에서 임금의 어린 동정(童貞)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 고종은 낮에 글을 읽고 있어도 이상궁 생각만 나서 좀이 쑤셨다. 그 러면 책을 덮어 놓고 이상궁의 방으로 가서 풋사랑의 쾌감에 취했다. "상감마마, 밤에나 가끔 오시지 낮에 공부도 않고 놀러만 오시면 어떡하세 요? 제가 무슨 춘향이라고 이도령처럼 글공부도 않고 이러세요?" "춘향이면 너보다 잘난 미인이랴. 나는 이도령 이상으로 네가 좋다. 책을 펴고 글을 읽으려면 글자가 모두 네 귀여운 눈웃음으로 보여서 견딜 수 없 다. 이도령처럼 너를 끝까지 사랑하마." "어마. 저도 상감마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여자를 가깝게 하시면 중하신 몸에도 좋지 못합니다." "왜?" "기운이 파해서 병이 될 염려도 있습니다." 이상궁이 그런 주의를 시킬 정도로 어린 임금은 여자의 몸을 밝혔다. "너를 사랑하다가 병이 돼서 죽어도 좋다. 너는 내가 싫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이상궁은 시무룩해진 왕을 안아 주며 달랬다. 그러던 중에 고종이 열다섯살의 봄을 맞게 되자, 왕후책립(王后冊立) 문제 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임금의 결혼은 왕실의 가장 큰 경사였다. 그러나 왕후 후보자를 둘러싸고 또 각파의 세력 암투가 벌어졌다. 자기파에 유리 한 규수를 왕후로 만들어야 세도를 부릴 지반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신랑감인 십오세의 고종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이상궁과 더 자유로운 애정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중전마마를 맞으시면 저는 본 척도 않고 버리시겠지요? 아주 버리시면 저는 죽고 말겠어요." 이상궁은 눈물을 흘리면서 속삭였다. "중전이 들어와도 나는 너만 사랑하겠다. 맹세한다. 너보다 귀엽고 예쁜 여자가 이 천지에 어디 있겠느냐?" "정말이세요? 그야 저는 천한 궁녀니까 지금까지처럼 상감님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잊지만 말고 종종 제 방에 와 주시면 만족 하겠습니다." "걱정 말아라. 중전이 들어와도 너는 내 첫정이 든 사람이니까, 실제는 본 실이다. 나만 너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아이 좋아. 그럼 상감마마만 믿습니다. 변심 하시면 저는 죽어버리겠습니 다." "그런 방정맞은 소리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못 산다." 하고 고종은 이상궁을 끌어 앉았다. 이상궁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애인을 마치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듯이 헤 친 가슴을 내맡겼다. "흐흐흐... 내가 임금이 돼서 제일 기쁜 것은 너하고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그래도 저는 걱정입니다." "뭐가?" "이번에 들어오실 중전이 강짜가 심한 규수가 아닐까 하고요." "내가 여편네 하나를 못 꺽을 남자같이 보이느냐?" "그러나 누가 알아요? 상감마마 젖혀놓고 세도 부린 중전이 전에도 계셨 다는데요." 궁녀들은 항상 역대의 왕비들을 화제에 올렸고 특히 궁녀들과 임금 사이의 치정관계에 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장차 맞을 자기의 비 (妃)가 자기를 맞고 세도를 부릴 영악한 여성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구나 자기 생각대로 못할 것이 없는 대원군 조차도 자기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 간택한 며느리인 왕비가 배은망덕하게 자기의 세력을 타도하고 덤 빌 강적이 되리라고는 천만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왕 삼년상도 지냈으니 곧 왕비를 책립(冊立)해야 한다." 고종 삼년 삼월부터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궁중에선 조대비가 서둘렀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도 이 대혼(大婚) 문제를 둘러싸고 모두 자기들 파에 유리한 규수를 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대원군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부인 민씨에게 상의했다. 당시의 권력으로 보나 며느리 간택의 시아버지 입장으로 보나 그에게 거의 결정권이 있었다. 문제는 어떤 집의 규수로 정하는냐에 있었다. 문벌도 봐 야겠고, 규수의 인물도 봐야겠고, 자기 세력 유지에도 편의한, 세가지 조 건이 구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밤중 침실에서 부인 민씨에게 이 문 제를 여러번 상의했다.
118- 運命의 女人, 첫날밤 "부인, 왕비를 빨리 간택해야겠는데, 적당한 규수가 생각 안 나오?" "글쎄요. 좋은 규수를 골라야겠는데요..." 대원군의 물음에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고 "궁중과 대신들의 동정은 어떤지요? 남들이 천거하기 전에 대감이 먼저 마 음에 든 규수를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재촉하기도 했다. "좋은 혼처가 생각 나지 않소. 그럴 듯한 규수는 역시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좋은 규수를 둔 집이 없소?" 며느리 보는데는 역시 시어머니 의견이 큰 영향력을 갖는 법이다. 부인 민 씨는 이 기회에 자기 친정편인 민씨 문중에서 왕비될 규수를 추천하고 싶 었다. 그러나 가까운 친정엔 적당한 규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갓집 인 민치록(閔致錄)의 딸이 똑똑한 것을 어릴 때 본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러나 자기 친정 쪽에서 추천하는 것이 좀 거북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원군 이 처갓집을 무시하는 형편인데다, 규수의 집안 문벌이 미미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감께 좋은 규수가 생각 안 나시면 우리 친정 민씨집은 어떨까요?" "당신같이 못나지 않고 규수만 잘 두었으면... 허지만 민망하지만 민가 는..." 대원군이 부인을 놀리는 말투로 얘기하므로 부인은 오히려 말하기가 쉬웠 다. "민가 민가 하시지만... 내가 못났다 하시지만 상감될 아들을 낳은 건 민 씨집 딸의 내가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군. 어디 우리 왕자(王子) 같은 왕손(王孫)을 낳아 줄 규수가 민씨 집안에 또 있을까?" "염려 마세요." "허지만 민씨도 왕비된 뒤엔 모두 좋게 못했어. 태종(太宗)의 민비는 그 외척(外戚)이 세도 부리다가 장인과 처남이 역적으로 몰렸거든. 이번에도 민비를 세웠다가 내가 역적으로 몰리지 않을까? 허허허..." "대감 그런 흉한 소린 마세요." "아냐. 숙종(肅宗)의 민비도 아들을 낳지 못했어. 암만 해도 민비는 왕실 로선 궁합이 맞지 않는 모양이야." "대감도 그런 미신 같은 말씀을 하셔요? 태종의 민비는 그래도 좋은 아드 님을 낳으시지 않았어요." "뭐 우스개 소리로 한거요. 허지만 우리가 이번에 민가를 추천하면 나를 못마땅해 하는 놈들이 그전 전례를 들고 나와서 반대할 거요." "그런 반대래도 규수만 좋으면 우리가 미는 며느리감을 누가 막겠어요." 하고 부인은 자신 있게 말했다. "실은 민치록의 딸이 똑똑했어요. 지금쯤 어엿한 규수가 돼 있을 겁니다." "치록이가 누구지?" 대원군에게도 얼른 생각나지 않는 무명인사의 이름이었다. "벼슬은 군수밖에 못하고 죽은지도 오래니까 대감은 잘 모르실 거야요." "아, 알겠소. 아비도 없는 딸이군." "어머니도 없는 외로운 소녀지만, 임금 처가의 세도를 제일 미워하신 대감 이 그런 말씀하셔요?" "음, 그래. 왕비의 친정이 무력한 건 도리어 좋소. 문제는 규수인데." "그 규수가 잘 생겼다니까요." "민비를 세우고 그 덕으로 민씨가 좀 세도를 써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 니까?" "음, 그럼 그 규수를 당신이 다시 선을 본 뒤에 생각해 봅시다." 부인 민씨는 자기가 시골에 있는 그 집에 가면 무슨 소문이 날까 두려워 하고, 몰래 가마를 여주(驪州) 땅까지 보내서 규수를 운현궁에 데려다가 하루를 묵혀서 보내고 비단 옷감도 선사했다. 그리고 다른 눈치는 보이지 않고 적당한데 혼처를 구해 주겠다고 외로운 소녀를 위로해 보냈다. 대원 군도 그때 잠깐 규수의 선을 보았다. 규수를 보낸 뒤에 대원군은 먼저 부 인에게 말했다. "음, 그만한 규수면 됐소. 역시 당신의 눈이 높군." "그것 보세요. 대감도 이젠 처갓집에 절해야 합니다." "허허허, 벌써부터 민비의 세도를 쓰는군." "세도가 아니라 기뻐서 그래요. 며느린 역시 우리 시부모가 골라야 해요." 하고 부인은 기뻐하면서 친정 자랑을 했다. 대원군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조대비에게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서 가장 적당하다고 추천했다. 조대비는 대원군의 말이면 무조건 듣는 처지였고, 더구나 며느리뻘의 간택이라 곧 찬성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 민씨는 기뻐 했다. 그러나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러나 그 딸만 남았던 집이니 딸을 궁중에 바친 뒤에 계모가 외롭겠어 요. 이 기회에 적당한 양자를 넣어서 대를 이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부인에겐 다른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군. 그 집을 이어 줄 양자론 누가 좋겠소?" 하고 대원군은 당연한 말이라고 찬성했다. 지금 까지는 보잘 것 없는 처지 였기 때문에 양자도 두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낸 말이니, 그 집의 양자론 내 친정 동생 승호(升鎬)가 좋겠어요." 대원군은 자기 처남을 그 집의 양자로 넣어서 고종과도 처남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이 매우 마음 든든한 묘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원군 처남 민 승호를 국척(國戚)의 당주(當主)인 양자로 밀어 넣었다. 국혼(國婚) 절차는 빨리 진행되었다. 궁중에서 삼간택(三揀擇=세번째 선 보는 마지막 절차)을 마친 대왕비 조대비는 교서(敎書)로 [고첨정(故僉正) 민치록의 딸과 대혼(大婚)이 결정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죽은 국구 (國舅) 민치록에게는 즉일로 영의정을 추직(追職)하고 여성부원군(驪城府 院君)을 봉했다. 그 뒤에는 십오세의 신랑인 고종은 비로소 맞선보는 친영례(親迎禮)를 올 렸다. 그 예식을 끝낸 뒤에는 곧 신랑 신부인 고종과 민비가 사사로운 가 인(家人)의 지위로 운현궁에 행차하여 친부모인 대원군 부부에게 절을 하 고 새 며느리인 민비도 시부모에게 보였다. 그 다음 날인 고종 삼년 삼월 이십이일에는 고종이 성인이 된 임금으로서 인정전(仁政殿)에서 백관(百 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전국의 죄수에게도 대사령(大赦令)을 내려서 나 라의 경사를 축하했다. 꿈결에 왕궁의 안 주인이 되고 이천만 백성의 국모(國母)가 된 민씨는 왕 보다는 한 살 위인 십육세의 시골 소녀였다. 그러나 여주 시골에서 가난한 편모 슬하에 고생만 하던 민비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궁녀와의 풋사랑 에만 취해있는 남편 고종보다도 세상물정과 백성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리고 천성이 영리하고 영특해서 여걸(女傑)다운 천질까지 있었다. 비록 가난한 시골 집에서 편모 아래 자랐지만, 양반집 전통으로 글도 배워 여러 면에서 고종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 신부 민비는 첫날밤부터 신랑 고종에게 냉랭한 소박을 맞았다. 궁중에선 중전(中殿)마마로 섬겨 바치고 국민들도 국모로 우러러 보았으 나, 민비는 깊은 궁중에서 고독한 생과부의 한숨만 쉬면서 새로운 인생의 고민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이 신부 민비를 소박한 것은 물론 후궁의 요화(妖花) 이상궁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들어온 어린 왕비로서 궁녀에 대한 강짜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겉으로는 정숙 온순한 왕실의 정부(貞婦) 노릇을 했다. 아 직도 처녀인 민비는 남편의 애정에 굶주린 비애를 책 읽는 일로만 위로하 면서 남편의 마음이 변해 주기만 기다렸다. 결국 민비는 그 후 삼년 동안이나 공부하는 동안에 후일에 여걸 정치가로 서의 실력을 기를 수가 있었다. 민비는 많은 독서를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나라 일과 백성을 지도할 뜻을 품고 특히 맹자(孟子)와 춘추좌전(春秋左 傳)을 애독하고 연구했다. 민씨는 거기서 사회학(社會學)과 정치학(政治 學)과 국가 흥망의 역사철학(歷史哲學)을 배웠던 것이다.
119- 독수공방(獨守空房) 생과부의 히스테리 고종왕비로 민비가 등장한데 대해서는 천하가 깜짝 놀랐다. 부모도 없는 가난한 시골 처녀가 일약 중전마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민비의 부친 민치록은 벼슬이라고는 군수밖에 지내지 못했으며, 살기가 어 려워서 서울 안국동에서 살던 집까지 팔고 여주 땅에 사는 친척을 의지하 고 낙향(樂鄕)해서 농사를 지어 연명했다. 그러므로 민비의 소녀 시절은 불행했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맞았 으나 얼마 후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민비는 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 고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런 고생 중에도 밤으로 글공부를 해서 재원(才 媛)이란 칭찬을 받았고 여자로서 해야 할 모든 집안 일을 솜씨 있게 처리 하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만 하면 재상집 맏며느리 노릇도 잘할 처녀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큰 과거를 할 텐데 딸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 하고 칭찬해 오던 시골 사람들은 그 처녀가 일약 국모(國母)가 되었을 때 는 깜짝 놀랐다. "중전까지 된 것은 역시 하늘이 낸 복이지만 대원군의 솜씨가 대단하다. 본인이 아무리 잘났기로 부모가 다 죽고 보잘 것 없는 집의 혈혈 고아를 중전으로 간택한 것은 역시 대원군다운 영안이다. 대원군 부부는 상감의 생가족으로 중전의 처가족으로 완전히 궁중세력을 독점했으니 앞으로의 세 도가 더욱 극성맞을 것이다." 하면서 은근히 대원군의 처사를 빈정대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로서 최고의 영위(榮位)에 오른 그 민비가 고종의 소박으로 독 수공방(獨守空房) 생과부 노릇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수군거렸 다. "이름만 중전마마면 뭘해. 여자는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생남생녀해서 일가 화목이 제일이지. 차라리 시골 농부의 아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 을까 하고 후회할 거야. 그러기에 분수에 넘친 일시의 호강은 도리어 화가 되는 거야. 민중전을 그렇게 소박하는 건 이상궁이 양귀비 같은 미인이라 그렇다지." 결국 여성인 민비를 동정하는 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그렇게 좋아 하던 대원군조차 민비가 왕손을 낳아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 다. 궁내 정보에 정통한 그는 고종이 궁녀 이씨를 사랑하고 민비에게 냉담한 사실은 알았지만, 민비가 삼년동안이나 처녀로서 독수공방할 정도로 고종 이 멀리하고 있는 침실의 비밀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남자로서 열 계집 백 계집을 마다 할 리가 없다는 것은 자기의 오입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손자의 얼굴을 보고 싶은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까지 싫은 소리 를 했다. "민중전은 암만해도 자복이 없나 보오.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젊은 몸으로 삼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다니 역시 숙종의 민비처럼 아들을 못 두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오. 그래서 처음에 내가 민가는 어떨까 했 더니 당신이 졸라대는 통에 그랬지만, 아마 큰 실책이었나 봐." "잘 된 건 영감 힘이요, 못 되면 민가 탓이군요. 그렇지만 두고 보세요. 상감이 아직 젊고, 삼년쯤 태기가 없대서 걱정할 건 없습니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초산하는 일도 흔하지 않습니까?" "아니, 십년 동안이나 손자를 못 보고 기다리란 말이요? 정 그렇다면 빈 궁(嬪宮)이라도 맞아서 손자를 빨리 봐야지." "빈궁이 아니라도 이상궁이 있지 않습니까? 이상궁과는 중전보다 가까이 했어도 역시 태기가 없지 않아요? 그렇다고 상감에게 자복이 없다는 것도 아니니 좀 더 기다려 보세요." "대감보다 내가 더 걱정이라 불공도 드리고 명산 대천에 기도도 올리게 하 고 있으니까 멀지 않아서 경사로운 영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 미신을 어떻게 믿겠소." 대원군은 백성들의 미신은 금하고 있었으나 궁중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뿌 리 깊은 미신 행사는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소문이 궁중에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이상궁의 지위가 중전마마인 민비보다도 더 높아질 듯한 대우 가 공공연히 엿보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질투를 꾹 참고 자중해 오던 민비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이상궁을 죽여 없앨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 했다. 대원군이 공공연히 이상궁에게 보약을 구해다 주는 것도 눈에 거슬 렸다. 그러나 영리하고 치밀한 민비는 고종에게만은 조금도 그 문제로 감 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애정을 자기에게 돌리려는데만 전력을 기울 였다. 첫째는 이상궁에지지 않을 만한 여자의 매력으로 고종의 애정을 끌 려고 했다. "궁녀 이가 년이 상감의 눈에 고운 꽃으로 보인다면 나도 고운 꽃으로 보 이게 향기와 웃음으로 대해 보자." 여자로서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귀천의 차이가 없는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민비는 그전에 소홀히 여기던 화장과 의상에도 각별한 힘을 썼다. 그런 몸단장을 했는데 고종이 본 척을 않자 실망과 분 함이 들끓었다. 실망한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고는 쓸쓸한 자기 얼굴을 스 스로 위로하면서 웃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보다도 자존심이 궁녀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쓸쓸한 웃음을 남자의 마음을 유혹할 수 있는 미소(媚笑)로 꾸며 보기도 했다. 남자의 마 음을 사로잡는 요부(妖婦)의 웃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거울 속의 얼굴로 기생 표정도 창작해 보면서, 소박맞은 젊은 생과부의 심정을 위로했다. "내 미모로 부족하면 내 지식으로, 아니 상감의 권력에 대한 야심을 불태 워서라도 내 존재를 알리고, 상감의 마음을 끌어야겠다." 애정에 굶주린 민비는 차츰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있었다. 대원군이 언제까지나 고종을 무시하고 궁중의 사생활까지 뒤흔드는 것이 보기 싫었 다. 대원군의 섭정을 빨리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변경시키고, 자기 자신 이 권력을 잡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고종을 자기의 애정과 정치적 식견으로 신임받아야 했다. 굶주린 애정도 충족시키 는 동시에 오랫동안 책에서 배운 정치적 포부도 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십이 되도록 숫처녀로 정력을 써 보지 못한 민비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 로도 이미 폭발점에 달해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도 이상궁도 죽음도 두렵 지 않은 굳은 결심을 했다. 만일 일개 궁녀인 이상궁이라는 애정의 적이 없이 처음부터 고종의 총애를 받고, 여성으로서의 행복만 가졌다면, 그리고 이상궁이 고종의 아들을 낳 지 않고, 설사 낳았더라도 대원군이 조급하게 그 궁녀 소생의 아들을 세자 (世子)로 봉하려고까지 안했더라면 민비와 대원군과의 피투성이 권력 투쟁 은 일어나지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원군은 자기가 고른 며느리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비참한 몰락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까지 몰아낼 야망을 품게 된 민비는 이상궁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질투의 권화(權化)로 돌변한 민비는 노골적으로 이상궁 학대를 하기 시작 했다. 하루는 이상궁을 불러 세워놓고 죄인 다루듯이 날카로운 문초를 했다. "이년, 요망스러운 미태로 상감님 총명을 흐리게 해서 공부도 못하시게 네 방에 끌어 모시고 추잡한 짓을 한다니, 그러고도 무엄한 줄 모르느냐? 도 대체 너는 중전인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행동을 하느냐?" "상감께서 가끔 제 처소에 행차하십니다마는 제가 무슨..." "이년 가끔이라니? 하루에 두번 세번 가셔도 가끔이냐?" "..." "상감께서 네 방에 왜 그렇게 자주 가시느냐? 네가 무슨 아양을 부려서 그 런 것이지?" "오시는 상감을 저로선 거역할 수도 없사옵고.." "네 배에 애가 들었다는데 사실이냐?" 민비의 말은 독이 올라서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네 뱃속의 일을 몰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배를 갈라서 보 겠다." "아마 그런 듯도 합니다." "몇 달 됐느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궁중에 소문이 파다할제야 여러 달 된게 아니냐?" 민비는 상사람의 욕과 다름없는 말을 했다. 이상궁도 바른대로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댓달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세자로 봉해 주신다는 어른들 말이 정말이냐?" "그런 말씀은 듣지도 못하였으며, 소녀로서는 더욱 생각조차 못할 말씀입 니다." "상감께선 무슨 말씀하시더냐?" "상감껜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이 간롱스러운년, 또 거짓말이냐? 왜 못 알려 드렸느냐?"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년이 어린 임금을 유혹했어? 상감마마를 언제부터 농락했느 냐?" 농락이란 말에 이상궁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20- 민비의 필사적인 유혹 드디어 첫날밤 이상궁이 민비의 억지에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소녀가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를 농락하겠습니까?" "그럼 마다는 네 몸을 상감께서 억지로 농락 하셨단 말이냐?" 이상궁은 그렇다고 할 수는 더욱 없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하며 우물쭈물하는데 "흥, 어쩌다가 모르는 새에 애까지 뱃느냐? 대관절 언제부터 상감을 가까 이 모셨느냐?" "중전마마께서 들어오시기 전부터..." 이상궁은 이 말에는 좀 기운이 났다. 민비보다 임금의 사랑에는 기정사실 의 우선권이 있다는 대답이었다. 민비는 더 묻고 싶지가 않아졌다. "네 지난 죄는 더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부턴 상감을 가깝게 해선 아니 되니라!" "........." "내 명이 못마땅하냐? 상감을 가깝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네, 그리 하오리다." "꼴 보기 싫다. 그만 물러 가거라." 이상궁은 겁도 나고 분하기도 해서 후궁의 자기 방에 가서 푹 엎딘 채 혼 자 울고 있었다. 그때 고종이 소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엎드린 이상궁의 등을 끌어 안았다. "내가 누구냐?" 고중은 농을 걸었다. "모르겠습니다." 쌀쌀히 쏘아 붙이는 듯한 이상궁의 어깨가 떨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고종을 놀라게 했다. "너 우는구나. 왜 우느냐?" 그러나 이상궁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상감마마, 낮에 이렇게 제 방에 오시면 안 됩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어디 글을 읽고 있을 수 있어야지. 대관절 왜 우느 냐?" 하고 고종은 억세고 능란한 청년의 팔솜씨로 여자의 몸을 끌어 일으켜서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씻어 주었다. 이상궁은 금시에 마음이 풀렸 다. "상감마마 이번이 마지막으로 소녀와 멀리해 주십시오." 하면서도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원망스러워하는 태가 더욱 귀여워진 고종 은 이상궁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고 비벼대면서 "그런 말 못 나오도록 이렇게 막아 버리겠다. 내가 오는 것이 그렇게도 싫 으냐?" "싫을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제 몸이 괴로워서 그럽니다." "왜?" "제 몸이 점점 무거워져서요..." "흐흐흐, 알겠다. 어디 내 옥동자가 얼마나 커졌나, 아버지 손으로 배 좀 만져 보자." "어마, 부끄러워. 그러시지 마세요." 하면서도 이상궁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고종의 손을 막지는 않고 행복스 러운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민비의 강짜로 혼났다는 말은 알리지 않았다. 고종은 이상궁의 배를 어루만지는 쾌감에 취해서 "이런 경사에 울긴 왜 우는 거냐. 네가 옥동자를 낳으면 맏아들이니까 세 자가 된다. 그러면 너도 지금보다 떳떳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울었느냐?" 하고 고종은 제법 어른처럼 이상궁을 위로했다. "너무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중전마마께서 노하십니다." 하고 그제야 민비의 말을 했다. "아기가 커가기 때문에 몸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구나. 중전이 질투하 고 너를 괴롭히지나 않드냐?" "중전마마도 여자이신데, 왜 저를 미워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상감 께서 저를 멀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중전이 뭐라고 해도 걱정 마라." "상감마마 아기만 무사히 낳아 드리면 저는 죽어도 원한은 없습니다." 이상궁은 민비와 충돌을 하는 것이 겁났다. 그래서 민비에게 혼난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민비의 저주 가운데도 이상궁의 뱃속의 왕자는 자라고 세월은 흘러서 고종 오년 사월에 첫 아들을 낳았다. 민비의 초조한 고민은 극도에 달했다. 대 원군은 왕손(王孫)을 본 기쁨을 참지 못하고 이상궁 소생에게 완화군(完和 君)이라는 칭호를 봉하고 왕손 모자를 지극히 사랑했다. "내 몸에서 아들을 못 낳으면 저 궁녀 소생이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다." 이렇게 될 장래를 생각한 민비는 이상궁 모자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 올랐 다. 당장에 그 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원수 같았다. 그러나 민비는 그런 표정을 일체 나타내지 않고 고종과의 화합에만 전력을 다하면서 그럴 기회만 기다렸다. 하루는 고종이 내전(內殿)에 들렸다가 민비 방에는 전과 같이 들리려고도 않고 그 방 앞의 마루를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단장하고 있던 민비가 기 민하게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고종의 앞을 막고 요염한 웃음을 띠우며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상감마마, 지금 왕실과 국가에 큰 불행한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잠간 제 방으로 들어 오십시오." 하며 손을 잡을 듯이 청했다. 이제는 자기의 지위가 어떻다는 것도 알고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막연히나마 느끼게 된 고종은 깜짝 놀라서 민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큰일인데 나를 놀라게 하오.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있소?" "지금 나라가 망하고, 상감께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를 위태한 시기에 이 르렀습니다. 이때 상감께서 큰 용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어서 말을 하오. 무슨 역적음모라도 있는 것이오?" 고종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실은..." 민비가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망을 세웠던 시녀가 당황히 뛰어와서 알렸 다. "중전마마, 지금 대원군께서 내전으로 오십니다." 민비는 당황해 했으나 곧 침착하게 "상감, 오늘 자정쯤 다시 오십시오." 하면서 뒷문으로 고종의 등을 밀어서 내보냈다. 고종은 중대문제가 대원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예감이 번개같이 머 리를 스쳤다. (설마 그럴 리야...) 고종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한 민비와 대원군이라 그러는 줄만 알았다. 즉 대원군이 싫어하는 민비방에 고종이 낮에 와서 있는 것을 보면 민비의 입장이 거북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자기로서도 민비 방에 와 있는 것을 대원군에게 알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자정 때쯤 고종은 보통 옷 차림으로 민비의 방을 찾아갔다. 민비 는 이런 깊은 밤에 자기 방에서 고종을 맞게 된 것을 천재일우(千載一遇) 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국가의 중대한 기밀을 알리겠다고 약속한 민비는 화려한 밤화장을 하고 금침까지 깔아 놓고 있었다. 준비시 켰던 술상도 시녀들이 들여 오고 곧 물러나갔다.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하기만하던 민비의 다정스러운 여자 모습을 새로 발 견하고 남편으로서 미안한 감조차 들었다. 민비는 술을 권하면서 웃기만 했다. 고종의 눈에는 오늘밤따라 민비의 얼굴이 고와 보였다. "우선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민비는 술잔을 권했다. 고종은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중대한 말을 묻고 싶 었으나 민비의 정성에 동정심이 앞섰다. (억시 여자였구나. 중대한 얘기를 한다더니, 금침을 펴고 기다린 것은 남 편의 정이 그리워서 나를 끌어오려는 수작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고 안심되었다. 아까 낮에 놀란 듯이 무슨 역적음모라도 있어서 그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닌 것이면 얼마나 다행하랴 하는 안심이었다.
121- 민비의 음모와 이상궁과 아들의 죽음 민비는 고종에게 술을 권한 뒤에 갑자기 수심을 짓는 듯한 엄숙한 태도로 "상감마마" 하고 고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참, 낮에 하려던 중대문제란 도대체 뭐요?" 고종은 물었다. "상감께서는 인제 이십세가 다 되신 어른이십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섭 정(攝政)으로 국정을 농단해서 국내외로 원성이 높습니다. 특히 상감을 사 사로운 어린 아들처럼 무시하고, 상감의 허명만 이용하고 왕실까지 업신여 기니 신하로서 삼가는 태도가 일호도 없습니다. 더구나 무모한 쇄국 외교 정책으로 서양의 강대국들은 물론이요, 옛날부터 친선하던 청국까지 대원 군의 외교정책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런 국내외의 정세가 위급한 때에 빨 리 대원군의 섭정을 중지시키고 상감께서 친정(親政)을 하셔서 왕권을 회 복하시고 국가의 유지와 번영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으..음"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만 맞던 민비가 자기에게 임금 대접을 하면서 정치문 제를 상의하는데 감격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처음으로 듣는 정치문제에 관 한 말이었다. 그는 이제야 자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듯 했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나라를 대원군이 망쳐 놓아도 그 책임은 상감께 있고 왕실 열성(列聖)에 대한 죄도 상감이 지게 됩니다. 빨리 친정을 하셔야 합니다." 민비는 현실의 정치문제를 비판하고, 이론적으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과 맹자(孟子)에서 배운 왕도(王道)와 정치철학을 도도히 강의했다. "음, 중전의 말이 옳소. 의당 그래야 할 것을 내 불찰로 국정을 섭정에 일 임하고 전혀 관계하지 않았지만 금후론 빨리 친정을 회복해야겠소. 그러나 나는 아직 대신들과도 생소하고 지식과 경험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럼 제가 내조에 힘쓰겠습니다. 대신들도 대원군의 세도에 마지못해서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사람이 태반이니, 그들과 비밀리에 상통해서, 우 선 친정복귀(親政復歸)의 대의명분으로 힘을 규합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신들의 찬성을 얻을 수 있겠소?" "예, 제가 비록 여자지만 상감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습 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이 고마웠고, 여장부다운 권위까지 느꼈다. 민비는 고종 이 자기 말에 찬성한 것이 기뻤다. 그와 동시에 정치문제에는 백지같이 단 순하면서도, 역시 권력에 대한 욕망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 다. 그리고 아내인 자기에게 애원하다시피 경의(敬意)까지 표하는 순진성 에는 민망스럽기도 했다. 이 순간 민비는 일개 여성으로 돌변하더니 고종을 남편으로 존경하고 사랑 하는 아내의 지위로 내려가서 거의 노골적인 성적 매력을 고종에게 뿜었 다. "상감, 오늘밤은 밤도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세요." 민비는 부끄러운 듯이 추파를 던졌다. "음, 그게.." 고종은 지금까지 민비를 소박만 해온 것을 후회했다. "이상궁이 여자라면 저도 여자입니다. 하찮은 궁녀에게 질투를 하는 건 체 통이 서지 않아서 참고만 있었지만, 제가 명색만의 중궁으로 얼마나 외로 운 신세 한탄을 하면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미안하오." 고종은 비로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사과했다. 첫날밤에 옷도 벗겨 보지 않은 채 삼,사년 동안이나 소박해 온 민비에 대해서 그는 처음으로 여자로 서의 매력을 느꼈다. 이미 이상궁에게서 남녀 관계에 능숙해진 고종은 노 처녀인 민비의 옷을 벗기고 첫날밤의 화합을 했다. 민비는 비로소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그날 밤을 행복하게 지냈다. 그 뒤로 민비는 육체적 애정으로도 고종을 완전히 매혹시키고 정치적으로 는 지도하는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비의 방에는 상감의 출입 이 잦고 이상궁의 방에는 발길이 점점 적게 되었다. 이렇게 고종의 애정과 신임을 독점하게 되자 민비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정치적인 비밀 운 동의 그물을 정계에 펴기 시작했다. 목표는 대원군 축출을 위한 고종의 친정 회복(親政回復)이었고, 대원군 실 정으로 위험하게 된 배외정책(排外政策)을 꼬집고 나섰던 것이다. 민비의 비상한 활동과 국내외의 사정이 대원군에게 불리한 것을 간파한 각 파의 정객들은 은연중에 민씨의 대원군타도 운동에 호응해 왔다. 대원군의 방 안에서 호랑이 잡는 식의 무모한 배외정책을 직접적인 공격 목표로 삼고, 그의 독재 권력을 타도하려는 민비의 교묘한 비밀 정치 운동 은 착착 효과를 거두어 갔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기 권력에 도취한 대원군도, 그의 치밀한 정보망 도 일개 심궁(深宮)의 여자인 민비가 그런 강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무렵에 민비는 애정 문제에 있어서도 완전히 이상궁에게 승리하고 고종 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는 대원군이 자기의 비밀정치 운동을 미리 알까 두려워 해서 일부러 이상궁에 대한 학대를 했다. 그렇게 하므로 밖으로는 개인적인 질투에 여념이 없는 여자라는 연막(烟幕)을 펴고, 안으 로는 역시 꼴 보기 싫은 이상궁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일석이조 (一石二鳥)의 계략이었다. "이상궁의 소생의 왕손(王孫)을 세자로 삼을 기미를 알자 자복 없는 민비 가 미안한 줄도 모르고 질투가 심해진 모양이오."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 며느리 흉을 보면서 경멸했다. 민비가 못마땅해진 대원군은 중전마마라는 존칭도 부르지 않고 민비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 았다. 이런 남편의 말에 대해선 부인 민씨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를 며느 리로 추천했다는 남편의 조롱이 두려워서 친정 출신의 민비를 두둔하기도 거북한 입장이었다.
"민비가 아무리 질투를 해도 왕실의 대를 잇는데는 맏 왕손의 완화군을 세 자로 봉해야 하오. 대왕대비도 찬성이시고..." 대원군은 그 전에도 해오던 말을 부인에게 또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 소생의 완화군은 건강하게 자라다가 삼대 과부 왕후들 의 귀염 가운데 성대한 돌 잔치로 축복 받은 뒤에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 이상궁도 자하문 근처의 작은 여염집에 감금되 고 말았다. 이상궁이 궁중에서 축출된 것은 고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뒤에는 민비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상궁이 밤중에 담을 넘어서 외간 남 자와 밀통 했다는 음해가 고종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다. "그년이 상감께서 자기를 멀리하자, 무엄하게도 상감께 분풀이로 외간 놈 과 밀통을 했습니다." 하고 민비는 고종을 충동했다. 고종도 반신반의했으나, 밤에 담을 넘어 다니는 것을 목격햇다는 증인이 나서기도 했고 이미 총애하는 민비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도 궁중에서 말썽 이 되는 이상궁을 아주 내보내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이상궁 도 민비의 밀령을 받은 자객(刺客)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상궁을 죽인 것은 민비가 시킨 보복이다." "완화군을 죽인 것도 민비가 시킨 것이다." 이런 소문이 돌았으나 이때는 이미 민비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정계에도 은연한 세력을 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진상을 폭로할 사람은 없었다. 대원군도 일개 궁녀의 편을 들고서 며느리 민비를 공격하면 위신 문제이기 도 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인(小人)과 여자는 역시 할 수 없다." 하고 민비에 대한 의심에는 쓴 입맛만 다셨다. 그뿐 아니라 포대기 속에서 원인 모르게 죽은 왕손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 려던 자기의 계획은 이미 청국의 압력으로까지 반대를 받아서 그로서는 더 언급하기도 거북했던 것이다.
122- 민비의 첫 아들과 심궁독삼(深宮毒蔘) 완화군이 죽기 전에 민비는 완화군의 세자 책립(冊立) 운동이 일어나자, 청국의 힘으로 대원군의 계획을 꺾으려고 했다. 마침 이유원(李裕元)이 동 지사(冬至使)로 청국에 가게 되자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그에게 비밀 사명을 주어 보냈던 것이다. 민비는 청국의 총리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고 대원군의 무모한 전횡(專橫)으로 조선 왕실이 위태롭다고 밀고했다. 천한 궁녀의 소 생인 서자(庶子) 완화군으로 세자를 삼는 것은 왕통(王統)과 천륜에 어긋 나는 처사이므로 중전 민비가 낳을 왕자로 정통을 이어야 한다고 설명했 다. "대원군의 고집은 청국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소. 세계 정세도 모르고 외국 과 충돌만 하는 그로서 자기 어린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더니, 세자 문제도 좌지우지해서, 현숙한 왕비를 그토록 괴롭게 합니다." 청국에서는 민비의 청대로 조선 조정에 대한 공식 외교문서를 보내서 완화 군 세자 책립을 반대하는 의향을 전했던 것이다. 이홍장의 권고 문서를 가지고 돌아온 이유원은 조정에 보고한 뒤에 대원군 에게 자기가 민비의 청으로 그런 문서를 받아 온 것을 알까 두려워서 "청국의 세계 각국에 대한 외교 정보가 신속하고 빠른데는 놀랐습니다. 이 홍장은 벌써 우리 조정에서 백성에게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정책을 알고 있으며, 우리도 모를 지방 소식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완화군 문제만 하더 라도 아직 정식으로 논의된 바도 없는데, 그런 권고 서한을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더니 당신도 완화군 세자책립에 찬성이냐고 하는 핀잔을 받았습니다." "이홍장은 그럴 자요. 그전에 청국 명령이라면 굽실굽실하던 우리나라가 요즘 좀 줏대가 잡히자 나 하는 일엔 모두 못마땅해 하니까요." 대원군은 민비의 수단에 농락된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의 위력을 자랑했 다. 이 문제 뿐 아니라 민비는 대원군이 모르는 동안에 이미 대원군 반대 세력 을 정계 각파에서 규합하는데 착착 성공하고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을 이 용해서, 겉으로는 대원군 자신이 자기의 심복 부하를 조정 요직에 등용시 키는 형식으로 민비와 미리 결탁한 인물들을 교묘하게 등용했다. 민비 친정의 오라버니 승호(升鎬)를 비롯한 규호(奎鎬), 겸호(謙鎬), 태호 (台鎬)도 대원군이 인심을 쓰는 형식으로 등용되었지만 민비가 미리 사전 연락을 했으며, 또 대원군보다는 민비에게 핏줄이 가까웠다. 그러나 대원 군은 형식상 자기가 벼슬을 시켜 주었으니까 민비보다는 자기편을 들리라 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趙寧夏), 조성하(趙成夏)도 대원군에 대한 불평이 있으므로 민비는 오라버니 민승호와 결탁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직 에서 감등되어서 겨우 붙어있는 안동 김씨의 병기(炳冀), 병국(炳國)도 끌 어 넣었고 실권도 없이 대원군에게 이용만 되고 있는 영의정 조두순(趙斗 淳)까지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민비는 대담하게 대원군 친형과 맏아들까지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용 해서 대원군의 정치적 기밀을 훔쳐냈고 후일에 후대할 미끼로 잡아두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李載冕)은 사람이 미련해서 자기 부친에 게도 자식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어리석은 점을 이용했고, 대원군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도 아우에게 멸시당하는 불평을 이용해 서 민씨는 접근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원 철폐와 양반 계급 멸시에 불평인 유림들과 결탁을 하고 유 림의 여론을 좌우할 거물 최익현(崔益鉉)과 대원군 타도 운동의 밀약을 하 는데 성공했다. 이 모든 계획과 방법은 민비가 그들과 한번도 만나지 않고 깊은 궁중 규방(閨房)에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원군도 강짜 심한 며느리가 완화군 문제로 이상궁 모자를 박해하 고 고종의 총애에만 취해서 단꿈을 즐기는 요부(妖婦) 이상으로는 생각하 지 못하고 있었다. 민비와의 비밀 연락은 모두 대원군의 처남, 즉 대원군 부인의 친 동생인 민승호가 맡아서 민비의 수족같이 활동했다. 민승호는 호적상으로는 민비 의 오라버니였지만 민비와는 먼촌 일가에서 양자로 들어왔으므로 친누이인 대원군의 부인보다 혈통 관계로는 남이었다. 그러나 민비의 수단과 권력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대원군 부부를 적으로 삼고 민비의 수족이 되어서 암 약했던 것이다. 민비의 정치 세력이 암암리에 확장되어 갈 때 민비는 최대의 행복의 날을 맞았다. 고종 팔년 동짓달에 민비 몸에서 첫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중전께서 첫아드님을 낳으셨다. 나라의 큰 경사다." 민씨는 이제는 당연한 세자감인 첫아들을 낳았으므로 기뻐했고 물론 고종 도 기뻐했다. 민씨의 세력은 요지부동의 큰 기둥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민비의 행복감은 후산(後産)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사흘 만에 악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중에서부터 병을 지니고 출생한 아이는 첫 울음을 울었지만 대변 불통이 라는 괴상한 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애처로운 생명이었다. 대원군은 어린 왕손(王孫)의 위독을 구하려고인지 혹은 독살하려고인지 산 삼 한 뿌리를 구해다가 독삼탕을 끓여 먹이게 했다. 이때는 민비 자신도 그 구하기 힘든 산삼으로 죽어가는 평생소원이던 첫아들이 소생할 것을 빌 면서 시아버지의 문병을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 산삼의 효력도 없었는지 혹은 그 산삼이 독이 되었는지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러자 궁중에서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다가 실패한 대원군은, 완화군을 민중전이 죽였다 는 분풀이로 이번 민중전이 낳으신 아드님을 독살했다." "산삼이 무슨 독약일까?" 하는 반문도 생겼다. "독삼탕은 어른에게도 조심해 쓸 정도로 위험한데 갓 낳은 아기에겐 만부 당한 독약이 된다. 대원군은 그것을 알고서 구하는 척하고 죽인 것이다." 민비는 그런 말을 듣고 대원군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는 총명하 고 상당한 학문의 실력도 있었지만 여자의 약점인 의심증이 많았고 또 무 식한 여자보다도 미신과 신령기도를 좋아했다. "갓난 아기에게 산삼이 독약이냐?" 하고 궁중 전의(典醫)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대원군이 가져온 산삼을 달여서 쓰는데 찬성한 책임상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못했다. 그러나 영리 한 민비는 시중의 민간 의사에게까지 물어오라고 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갓난 아기에겐 해롭기도 하지만 당시의 증세를 모르니까 단정하기는 어렵다 합니다." 어떤 의사도 이 이상의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민비를 동정하는 의사 도 현재 세도를 부리고 있는 대원군이 자기 손자를 민비 소생이기 때문에 산삼이 독인 줄 알고 먹여서 죽였다고 할 용기가 없었다. 점을 쳐 보아도 신통한 분풀이를 할 점괘는 나오지 않았다. "허허허,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손자를 독살 하다니. 소인과 여자는 할 수 없다." 그 이상은 언급하기도 싫어한 대원군은 더욱 민비가 미워졌다. 그러나 호 김심이 많은 세상 사람들은 완화군을 민비가 죽였다는 소문과 그 보복으로 민비의 아들을 대원군이 죽였다는 소문을 연결시켜서 쉬쉬하는 화제로 입 에 올렸다. 민비는 대원군을 더욱 미워했으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 잃은 슬픔을 새로운 아들을 비는 미신으로 위로했다. 궁중에서는 사흘이 멀다고 기도를 올렸다. 무당과 판수와 중과 도인(道人)이 활개를 치고 궁중에 출입했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까지 세자 탄생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이 때문에 국고의 재정이 기울 정도였다. 대원군은 이제 민비의 세력을 꺾 을 수 없을 정도로 대신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음을 알았다. 대원군은 때 늦게 자기 세력의 만회에 초조해졌으며 민비는 하루라도 빨리 대원군의 세 력을 꺾어 버리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민비에게는 마침내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공격을 노골적으로 표면화 할 기회가 왔다.
123- 권력에서 밀린 대원군, 적막강산으로.. 고종 십년 여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국력을 강화한 일본에서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머리를 들었다. 대원군의 배일정책(排日政策)은 일체 외 국에 대한 완강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의 하나였지만 대원군이 일본의 수교 사절(修交使節)을 적대적(敵對的) 태도로 쫓아 보낸데 대하여 일본은 강경 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만일 일본과 정면 전쟁이 되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상의 타격을 받으리 라고 대원군 이외의 정객들은 두려워 했다. 민비는 이 기회에 대원군을 몰 락 시키려고 우선 대원군의 위험한 쇄국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야(朝 野)에 조성시켰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세계 대세에 역행하는 위험천만한 망국 정책이다. 자 기의 세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연한 외국에게 국민의 불만을 전환시키려 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외국과도 화친을 논하는 자는 매국노(賣國奴)라는 그의 고집 은 아직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해 시월에 민비는 고종의 명의로 대원 군이 꺼려하는 유림의 거물인 최익현(崔益鉉)을 부승지(副承旨)로 등용하 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을 과격히 비판하고 고종의 실질적인 친정(親政)으로 국난을 구해야 한다는 수만어(數萬語)에 달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상감과 중전께서 대원군의 반발을 막아 줄 테니 철저하게 대원군을 탄핵 해 주시오." 민비의 뜻을 전하는 민승호는 최익현을 격려했다. 최익현은 대원군에 대해 서는 사원(私怨)과 공분(公憤)을 품고 있었다. 민비는 그의 신망과 이론과 문장력을 이용해서 대원군 배척의 불길을 조야에 던지게 했던 것이다. 그 과격한 상소문에는 대원군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대신인 육경(六卿) 간 관(諫官)들도 그의 위력이 두려워서 꿈쩍 못하고 비굴한 속론(俗論)만 일 삼는다고 고관들의 무능까지 겸해서 공격했다. 이런 식으로 고관 전체를 공격했으므로 정계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민비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므로 고종은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衷情)에서 나를 경계 하도록 하는 정론이매 극히 가상(嘉尙)하다." 하고 최익현을 칭찬했다. 대원군은 공격의 중심 대상이 자기였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체면상 침묵을 지키고 뒤에서 간접적으로 욕을 먹은 대신들을 충동 시켜 "우리들을 모욕하는 최익현의 상소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상감 의 비답(批答)이 황송하므로 우리는 총사직하겠습니다." 하고 고종을 위협케 했다. 고종은 뜻하지 않은 고관 전체의 반발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파생적 잡 음에 대해서 민비는 눈썹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상감 걱정 마십시오. 대신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좀 지나친 구절도 있었지 만, 대신들의 대부분도 대원군을 탄핵한데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대원군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의 충고도 못한 그들은 당연히 그 만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말로만 발뺌을 하려고 그러지 만 사직할 뼈다귀 있는 대신은 한명도 없습니다. 그것도 대원군의 충동에 자기들의 체면 유지로 흥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의정 강로(姜老)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이 최익현의 상소취지 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도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는 정당하다. 그것은 대신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나 역시 반성하고 실천해야 할 충언(忠言)이다." 하고 최익현의 상소를 적극 비호했다. 대원군도 고종의 비답(批答)이 뜻밖에 강경한데 놀랐다. 다음에는 영돈녕 (領敦寧) 홍순목(洪淳穆)도 최익현의 상소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 諫院)과 승정원(承政院)이 총동원해서 최익현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무능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가겠다고 고종을 위협했다. 그들은 대원군 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체면 손상에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경들이 무능함을 스스로 책임지고 물러나면 굳이 말리지 않노라." 하는 비답으로 그들을 전부 파면시켰다. 대원군은 고종에게 그런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물론 민비가 뒤에서 시키는 자기 배척운동이라고 이를 갈았다. 고종은 그 뒤에 도 최익현의 상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자들은 귀양을 보내고 유생(儒 生)에게는 과거 볼 자격을 박탈해서 더욱 강경한 처단을 내렸다. "대원군이 물러나면 될 것을 공연히 다른 사람들만 희생을 당한다. 그래도 대원군이 직접 자기 이름을 지적해서 규탄하지 않았다고 모른 척하는 것은 철면피다. 인제 직접 그를 공격해야 한다." 하고 민비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자기 상소에 대한 반박을 재반박하는 상소 문을 또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서 최익현은 명확히 대원군이 정치에서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 경한 주장을 했다. "오직 상감의 사친(私親) 관계에 있는 자는 그 지위를 존중히 해서 생활비 로 국록을 후히 대접하되 국정에 관여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레 동안의 상소파동(上疎波動)은 이렇게 발전해서 대원군에게 불리한 대 세(大勢)는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일개 유림 출신의 부승지가 어찌 감히 그런 용기가 있으랴. 물론 민비의 대변이긴 하지만 아직도 칼자루를 잡고 있는 대원군에게 암살될 위험을 무 릅쓰고 나온 것은 역시 나라에 대한 충성이다." 정계의 소식통들은 대원군을 규탄하는 최익현을 충성 된 영웅으로 칭찬했 다. "최선생은 역시 대학자요, 충신이다." 유림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특정인물까지 지목한 최익현의 과격한 상소로 세 상에 부자지간에 권력 암투가 있다는 이면이 폭로되어서 체면상 거북하게 되었다. "최익현은 용감한 충신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돼서 좀 거북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올 것이 온데 지나지 않아서 통쾌합니다. 다만 대원군 이 그를 암살할지 모르니 이 기회에 상소문이 과격하다는 핑계로 필시 귀 양 형식을 취해서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들의 그에 대한 감정도 무마하고 그의 생명도 보호해 주었다. 그가 제주도로 귀양 갈 적에 대원군의 독재에 지친 백성들은 "최충신이 억울한 귀양을 가신다." 하고 공공연히 환송을 했다. 민승호는 미리 최익현에게 가서 "선생의 신변이 위험하고, 대신들의 오해를 풀고, 상감과 중전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시 제주도에 가서 편히 계시다가 대원군이 아주 물러난 뒤에 모셔 오겠습니다." 하고 민비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충신 최익현을 귀양 보낸 연극은 대원군도 스스로 귀양 가라는 것인데 대 원군도 바보야." "자기 세월이 다 갔는데도 왜 운이 다간 세도에 연연사고 있는 거야. 저러 다가는 민비에게 시아버지 체면도 유지 못하고 정말로 창피를 당하려는 모 양이다." 그런 백성의 여론이 대원군의 귀에도 들려 오게끔 대세는 기울고 말았다. 울분을 호소할 곳도 없게 된 대원군은 아직도 자기에게 동정하는 대신 박 규수(朴畦壽)와 몰래 만나서 정확한 정세 판단을 물었고, 자기가 섭정에서 물러나야만 되느냐고 물었다. "대감의 심정에는 미안한 말이나 진퇴에는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대감은 십년 동안 집정으로 국정에 많은 개혁을 하신 공이 큽니다. 그러나 정계는 물론 일반 민심도 십년이면 변합니다. 이 때 정국을 안정시키는 대국적 견 지에서, 담백한 태도로 대정(大政)을 봉환(奉還)하시고, 풍류와 산수로 그 동안의 심신 피로를 휴양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박규수는 대원군의 실정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그가 자진해서 섭 정에서 물러나라고 권했다. 대원군은 박규수까지 그런 말을 했으므로 섭정 사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앙큼한 년, 지금은 내가 너한테 쫓겨 나지만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며느리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곧 섭정을 사임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삼계동 별장에 가서 홧 술과 낮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대원군 시대가 오기 전까지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에게 그 별장을 바치게 하던 일세의 영웅도 이제는 그 별장에서 자신이 몰락 정객의 신세로 탄식하게 되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그 무서운 대원군의 호랑이 세도도 십 년으로 끝났다." "앞으로 민비세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대원군을 거꾸러뜨린 것만은 통쾌하다. 좌우간 민비는 여걸이다." 대원군의 몰락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독재에 억압되었던 백성들의 해방감 (解放感)이었다. 그의 탄압으로 삼만여명이 학살당한 천주교도의 친척들이 제일 시원히 여 겼으며, 앞으로 민비가 외국과 친교를 맺고 개명정책을 써서 다시 신앙의 자유가 오기를 바라며 기뻐했다. 대원군은 삼계동 별장이 장안에 있어 급속도로 자기의 과거 영향이 사라지 는 것을 듣고 볼수 있어 가슴이 아팠다. "내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아첨하고 은혜를 입은 놈도, 인젠 한 놈도 위로 하러 오지 않는구나. 보기 싫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서 시골 산속으로 숨 어버리겠다." 하고 그는 양주군(楊洲郡) 직곡산(直谷山) 속에 지었던 산장(山莊)으로 들 어가고 말았다. 그 곳의 자연은 전과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눈에는 적막강산 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권력에 미련이 남아서 그전의 풍류 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124- 궁중 속에서 춤추는 무당과 중의 무리들 대원군이 물러나자 그 해 십일월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단행되어 대원군 이 다시 정치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비는 야심대로 성공하였고 천 하의 실권을 잡고 휘두르게 된 것이다. 고종도 처시하(妻侍下)인 민비의 치마바람은 삼천리 강산의 초목까지도 벌벌 떨게 했다. 정권을 한 손에 잡은 민비였지만 정계에 정면으로 나설 수는 없게 된고로 궁중행사 이외에는 모두 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와 일가 오라버니 뻘 되 는 민규호(閔奎鎬)에게 맡겼으므로 또 다시 민씨에 의한 척족(戚族)의 세 도정치가 재현되고 말았다. 민승호는 민비의 권력을 대행하는 제1인자가 되었고 민규호가 제2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영의정 이하 모두가 민비와 결탁하여 대원군 축출에 공로 가 있던 인물로 개편되었다. 영의정으로 이유원(李裕元), 박규수(朴畦壽)로 우의정, 아우인 대원군을 배반한 이최응(李最應)으로 좌의정을 삼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역시 각파 의 인심을 얻으려고 조대비 친척인 조씨문중의 중심인물인 조두순(趙斗淳) 을 원훈(元勳)으로 예우(禮遇)하고,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趙寧夏)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원군의 최대의 정적(政敵)이던 안동 김씨의 김병국(金炳國)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시켰다가 뒤에 우의정까지 시켰다. 한편 대원군의 후퇴에 결정적 동기를 만들었던 탄핵상소의 주인공 유림 최 익현을 명목상의 귀양으로 제주도에 보호해 두었던 것을 석방 상경시켜서 충신 대우를 했다. 그와 동시에 유림에 대한 대원군의 탄압을 완화해서 그 가 폐쇄시켰던 청주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서원을 부활시켜서 삼남(三南) 지방에 세력이 굳은 유림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대원군의 독재를 종언시킨 것은 좋았지만, 그가 실시한 정책은 거의 모두 말살하고 그전의 상태로 복귀시킨 것은 감정적 처사였으며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의 독재가 민비의 독재로 권력의 주인공만 바뀌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대원군을 중심으로 모였던 남인계(南人系)의 인물을 무자비하게 정계 에서 숙청한 것은 정계 이면의 파벌 암투를 심각케 했고, 밖으로 일본에 대한 반동적인 개방외교정책(開放外交政策)은 상당히 큰 영향을 그 후의 국운(國運)에 미치게 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양주 산 속에 숨어 있었으나 그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민씨 일족에게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고, 민씨파에게 숙청당한 대원군파는 대 원군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지하공작의 음모를 끈덕지게 했다. 이 때부터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정점(頂點)으로 하는 양파는 표면의 경쟁을 떠나서 모략과 암살의 수단을 서슴지 않아서 장안은 암흑세계(暗黑世界)의 중심지 가 되었다. 대원군의 산장에는 민비가 파견한 밀정이 주위에 잠복해 있었으므로 이름 난 불평 정객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지기 등속의 천하장안(千河 長安)을 비롯한 잡패들은 외부와의 연락을 하면서 정보를 제공했다. "민가 일족을 소탕해야만 우리 동지가 살고 나라도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다.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진 산발적으로 놈들을 죽여서 가슴을 서늘케 해주어야겠다." 천가, 하가, 장가, 안가를 비롯한 패거리들은 대원군의 뜻을 받고 하수인 (下手人)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런 활동이 그들에게는 신이 났고 대담한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암살에 필요한 무기도 입수하면서 민씨 요 인의 암살을 모의했다. "대감, 자기황(自起黃)을 쓸 만큼 구했습니다." "속아 사지나 않았느냐. 한 개쯤 산 속에 가서 시험해 봐라." "진짜에 틀림없지만, 시험도 해보겠습니다." 그들은 자기황 한방으로 민비 이하의 정적을 몰살시킬 듯이 의기가 등등했 다. 자기황이란 그 당시 청국에서 수입해 오는 일종의 폭탄으로서 유황(硫 黃)을 비롯한 화약을 장치한 간단한 폭발물이었다. 대원군이 물러난지 한달 만인 십이월 십일 밤중에 경복궁 안의 민비 침전 (寢殿)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장한 폭음을 내고 자기황이 터져서 침전 일부를 폭파하는 동시에 자경전(慈慶殿)에 화재를 일으켰다. 이 불길은 삽 시간에 번져서 자경전을 비롯해서 순희당(純熙堂)과 자미당(紫微堂) 등 사 백여간의 전각(殿閣)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궁중과 조정은 발칵 뒤집 혔다. "어떤 역적의 흉한이 이런 대담무쌍한 투탄(投彈) 방화를 했을까?" "대원군이 시킨 반란 음모다." 조야에는 이런 풍문이 돌았다. 고종과 민비는 우선 난을 피해서 창덕궁으로 옮기는 동시에 포도청의 전기 능을 동원해서 범인 체포를 엄명했다. 그러나 교묘하고 대담한 범인은 체 포하지 못했다. 민비로서도 증거를 잡지 못한 풍문과 추측만으로 대원군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되자 민비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 해서 궁중 화재는 실화(失火)였다고 발표하고 일체의 유언비어(流言蜚語) 를 단속하라고 해서 결국 불문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선 경복궁 화재에 나를 관련시켜서 의심하는 풍문이 도는 모양인 데,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경복궁을 내가 태워 버리다니, 그런 모함 이 어디 있느냐. 나도 산 속에서 홀로 근신하는 몸인데 귀신이 돼서 경복 궁에 들어갔단 말이냐. 산중에 와서 조용히 있는 나까지 잡으려는 간악한 모략이다." 대원군은 일소에 붙이고 한 술 더 떠서 "그런 추잡한 모략이 횡행하는 정치무대기 때문에, 내가 섭정을 스스로 그 만두고 한가한 생활을 택한 것이 아니냐? 경복궁에 화재가 난 것은 하늘이 민씨 일족의 행패를 미워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경계의 천화(天火)였을 것 이다." 하고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에 대한 비난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상한 수완을 알고 있는 민비측에서는 대원군의 동정을 더욱 엄중히 감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잔당의 탄압을 더욱 철저히 했다. "대원군이 죽기 전엔 안심할 수 없다." 하고 민씨파에서는 역시 대원군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민비는 다음해(고종11년)에 기다리던 아들을 또 낳았다. "세자님 되실 생남 기도를 올린 덕택입니다." 하고 그동안 굿으로 한몫 보던 무당, 판수, 술객(術客), 도인(道人)과 불 공을 올리던 중들이 자기들 공을 자랑하면서 축하를 올렸다. 민비는 미신 을 좋아하는 여성이었으므로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국고를 기울일 정도로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민비의 수족으로 활약한 오라버니 민승호도 불교를 믿었으므로 왕자를 비는 불공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신불기도로 세자감의 아들을 낳았다고 믿게된 민비는 그 후로 더욱 미신에 취했으므로 신임을 받는 무당과 중이 궁중에서 득실거리고 세도까 지 부리게 되었다. 민비는 세자 탄생의 축하로 죄수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유림에게 경 과(慶科)의 과거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 학식과 인물 좋은 신인(新人)을 등용한다는 과거제도(科擧制度)의 취지와는 달리 방(榜)에 발표된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은 모조리 민씨 일족의 자제거나 민씨파에 속하는 고관들의 자제 뿐이었다. 이처럼 칫번 과거부터 세도정치로 부패했 으므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었던 유능한 선비들은 실망하고 민비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저희들 자식만 급제시키는 게 무슨 과거냐? 무식한 병신이라도 민가 자식 이면 급제시키고, 그밖의 선비는 아무리 제갈량 같은 재주와 포부를 가졌 더라도 낙방거사로 돌려보낸다." "그래도 대원군 시절엔 선비를 이렇게까지 모욕하진 않았고 인사행정이 이 렇게까지 썩어 빠지진 않았다. 무당과 넋두리 춤만 추는 치마바람에 나라 가 망해 버린다." 세자탄생을 축하려던 과거도 결국 유림들의 저주만 늘리고 말았다. 그러나 궁중에서 민비가 벌이는 무당춤 넋두리는 점점 번성하기만 했다. "중전마마, 낳으신 복보다도 잘 기르시는 복이 정말 큽니다." 요망스러운 무당과 중의 무리는 아들에 미친 민비를 유혹하고 위협했다. 옥동자도 크지 못하고 죽으면 도리어 불행하다는 말은 먼저번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잃었던 민비의 뼈아픈 슬픔을 공포심으로 이용하려는 간사한 무리들의 위협이었다. 민비는 아들의 명(命)을 위한 굿을 매일같이 올렸다. 궁중에는 괴상한 의 상을 입은 요무(妖巫), 괴승(怪僧)의 무리가 활개를 치고, 무슨 굿, 무슨 기도 하고 법석대는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주문(呪文)과 경문(經文) 외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궁은 마치 화려하고 웅장한 무당집이나 불당(佛 堂)과 같았다. 민비는 궁중에서 행하는 세자 명복(命福)으로도 부족해서 명산대천(名山大 川)과 불각(佛閣) 음사(陰祠)에까지 기도행사를 확대하였다. 이에 대한 경비가 예상외로 막대하게 들자 궁중과 국가의 재정을 맡은 관 리들은 비명을 올렸다. 처음에는 궁중예산을 집행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을 썼으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국가의 일반 재정인 호조(戶曹)의 재정까지 함부로 갖다 탕진했다. 국가의 재정을 맡은 호조판 서도 마침내 민비에게 간(諫)했다. "중전마마, 그만큼 하셨으니 인제 기도행사를 중지하여 주십시오."
125- 이상한 선물상자 "호판, 나 하는 일에 왜 반대하오? 그것도 세자의 명복을 비는 일인데. 호판에게는 그런 충성보다 경비 드는 게 더 아깝소?" "나라 일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본디 넉넉치 못한 예산에서 이처 럼 예정밖의 비용이 자꾸 들어서는 나라 일에 큰 지장이 생깁니다."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나라를 위해서 나라 전곡(錢穀)을 쓰는데 왜 반대 하는 거요?" 하고 민비는 호조를 마치 역적처럼 몰아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궁중의 모든 비용은 내수사 재정으로 쓰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반재정인 선혜청(宣惠廳) 전곡까지 기도 비용 으로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선혜청 재산이 세자 기도의 비용도 댈 수 없이 빈약하오?" "예, 예산된 일반 국용에도 많이 부족한 형편이오라...." 민비는 국가가 내 것이요, 내 아들이 왕자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만 있었 지 국가의 재정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몰랐다. 결국 민비는 자기의 정치자 금으로 또는 미신 비용으로 물쓰듯이 했으므로 국고는 텅텅 비게 되었던 것이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요 일년 동안에 든 재정이 대원군 십년 동안에 든 것 보다 더 많았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의 검소와 자기의 낭비를 비교한 호조판서의 말에 눈썹을 치 올리고 화를 냈다. "나라의 재물을 나라에서 쓰는데 무슨 불평이요?" "신도 얼마든지 바치고 싶으나 실정이 기도에 쓰실 비용이 없기 때문입니 다." 호조는 우는 상을 했다. "그럼 좋소. 각 지방 재정에서 바치게 하오." "지방 재정이 곧 호조의 재정입니다." "지방 창고도 다 비었단 말이요?" "예. 지방비도 태반 부족한 실정이오니, 빈것이나 일반입니다." "그럼 백성들에게 바치게 하오." 백성의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들여다가 왕자 명복의 굿비용으로 탕 진하겠다는 민비의 무모한 독단이었다. "호조로서는 적당한 세금을 받는데도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데 무슨 명목으로 더 받겠습니까?" "호조는 그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소." 하고 민비는 성을 냈다. 이렇게까지 민비에게 바른 말을 한 호조는 궁중에서 물러 나와서 곧 영의 정에게 사표를 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 다고 민비의 미신에 의한 국고 탕진에는 아무런 반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궁중에서 암탉이 울고 활개치는 바람에 춤추고 새도하는 것은 민가 떨거지 와 무당년, 판수놈들 뿐이다. 일년동안 벼르던 대원군은 마침내 민씨 일족 암살의 음모를 계획하고 심복 부하의 행동대에게 밀령을 내렸다. "우선 민비의 수족 민승호를 죽여라!" "대감님 그놈의 식구를 몰살시킬 묘안이 있습니다." 하고 부하는 장담했다. "그러나 꼬리를 잡히지 않게 조심해서 해야 한다." "예, 걱정마십시오. 대감님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만일 불행히 잡히 더라도 절대로 대감님 관계는 불지 않고 달게 죽겠습니다." "음, 잡혀서 죽다니 그러면 너희들 공을 갚지 못할 게 아니냐?" "저희들이 대감님과 가까운 것은 세상이 다 알고 민승호며 그집 청지기까 지 얼굴을 아니까 시골 동지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좋다. 그리고 묘안이란..?" "네, 실은...." 하고 그들은 대원군과 함께 민승호 암살 계획을 밀의(密議)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십일월 이십팔일,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시골티 나는 관가(官家)의 청지기 한명이 민승호 집을 찾아왔다. "대감님 계십니까?" "어디서, 무슨 일로 왔소?" "실은 시골 어떤 원님의 봉물과 편지를 대감께 전해 올리러 왔소." "어느 원님 댁에서...?" "그건 밝히지 말고 봉물과 편지만 올리고 오라는 우리 원님 분부라..." 하고 청지기는 싱긋 웃었다. 민승호 집의 청지기도 더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각 처에서 엽관운동(獵官運 動)과 승진운동으로 이름을 숨기고 뇌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부지기수(不知 其數)였기 때문이다. "알았으니 두고 가시오. 수고했소." 민대감집 청지기는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그럼 부탁하오." 하고 어떤 원님의 청지기라는 이상한 사나이는 돌아갔다. 민승호는 마침 그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돌아와서 마악 저녁상을 받고 있다가 청지기가 들여온 편지와 보배를 싼 작은 상자를 받았다. 우선 편지를 뜯어 본즉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다. 『상자 속에 것은 귀중한 진품(珍品)이오니 타인이 모르게 대감께서 친히 열어 보시고 소납(笑納)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보물일까? 혹은 무슨 기밀문서일까?' 궁금히 여긴 민승호는 그 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양모 (養母)인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과 자기 아들애가 있었다. 이 양모가 바 로 민비의 계모(繼母)이다. "시골 원이 보낸 선물인데 진귀한 물건이라기에 여기서 펴보려고 왔습니 다." 민승호는 양모에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와 손자는 자기들에게 물건을 보여 주려고 안방까지 갖고 왔다 생각하며 호기심이 나서 앞으로 다가앉았다. 새로 만든 나무 상자는 잠겨져 있는데 뚜껑 밑에 구멍이 뚫어지고 열쇠가 끈에 달려 있었다. "뭘까?" 어린 아들이 궁금해 했다. "알아 맞추면 너 주마." "아버지, 어서 여서요, 빨리 먹고 싶어요." 소년은 우선 맛있는 음식이 들어있으려니 하고 졸랐다. "오냐. 열쇠로 열어 보자." 민승호는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순간, 쾅! 하고 터지는 폭탄 소리가 나고 방안의 벽이 달아났다. 양모와 아들은 즉사 하고 비명 한 마디내지 못했다. 중상을 입은 민승호의 피투성이가 된 몸이 피바다 같은 방바닥에 자빠져서 꿈틀거리면서 비명을 올렸다. 폭발 소동에 식구들과 남녀 비복(卑僕)과 청지기가 몰려 왔다. 이 때는 부 서진 방안의 물건이 타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은 시체와 중상자보다도 불끄기에 정신이 없었다. 불은 곧 껐으나 끔찍한 방안의 참경에 모두 벌 벌 떨다가 곡성을 터뜨렸다. "나를 죽인 놈은... 으... 그 놈은 운현궁이다..." 죽어가는 민승호는 최후의 저주를 했다. 운현궁이란 자기의 매부인 대원군 이었다. 청지기는 곧 의원을 불러다가 응급치료를 하려 했으나 의원이 오 기 전에 민승호도 죽어서 모자손(母子孫)의 세 초상이 눈깜짝할 사이에 났 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는 대원군을 배반하고 민씨파에 붙어서 영화를 누 리던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李最應)의 집에도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연달 아 일어나는 폭살(爆殺)사건, 방화사건은 민비 일파 거물들의 가슴을 서늘 케 했다. 조정에서는 민승호 폭발사건의 범인 체포에 힘쓴 결과 폭탄을 전한 범인을 잡고 보니 뜻밖에도 진주병사(晋州兵使) 신철균(申哲均)의 청지기였다. 민 비는 신철균과 그의 청지기 장(張)가를 대역죄(大逆罪)로 고문한 끝에 참 형(斬刑)에 처했다. 그는 물론 대원군 지지파였으나 대원군의 직접 지령이 라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뒤에서 이런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는 풍문은 세상에 돌아 서 공공연한 비밀로 인정되었다. 민승호의 암살로 민비파가 전전긍긍하게 되자 대원군파에서는 폭탄세례로 선전 포고를 한 기세로, 이번에는 정치적 공세를 표면적으로 취하기까지 했다. 장령(掌令) 손영로(孫永老)로 하여금 대담하게도 대원군을 다시 조정에 모셔야지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 를 구할 수 있다고 친정(親政)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대원군이 섭정으로 다스린 십년간의 공적으로 탐관오리가 숙청되고 상하 에 검소한 생활이 실천되었더니, 친정 일년 동안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을 비롯한 불충지신(不忠之臣)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자행(恣行)해서 정계 에 뇌물이 성행하고 국정을 부패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런 세도의 병폐 를 일소하고, 대원군에게 다시 정치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비는 펄펄 뛰었다. "이놈도 민대감을 암살한 신가놈과 결탁한 놈이다. 무엄하게도 상소라는 형식으로 상감을 협박하고 있다." 파랗게 성이 난 민비는 사헌부(司憲府)에 처벌하라고 명했다. 대원군을 지 지하는 의사는 상소문으로도 표시하지 못하게 간관(諫官)들의 언론 자유마 저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손영로는 금갑도(金甲島)로 귀양을 보 냈다. 이에 대해서 간관과 옥당(玉堂)들이 상소하는 사람을 벌하면 국정 비판과 건의(建議)의 길이 막힌다는 상소를 했으나 모두 묵살되고 말았다. 그 후 에 계속해서 상소한 유생(儒生)들은 모조리 귀양을 보내고 암살까지 했다. 그리고 암살된 민승호의 부자(父子) 뒤에 누구를 양자로 들여 앉히느냐 하 는 문제로 민씨 문중에 또 암투가 벌여졌다가 마지막에 역시 민비의 환심 을 더 산 민태호(閔台鎬)의 아들 민영익(閔泳翊)이 들어가서 세도하는 대 를 이어 받았다.
126- 일본의 외교 "맞고 열래? 그냥 열래?" 일본은 대외 강경책을 쓰던 대원군이 몰락하고 민비가 정권을 잡고 등장하 자 조선과의 수교통상(修交通商)을 서둘렀다. 그러나 종전의 배일정책을 곧 개방하는데는 김병학(金炳學) 등이 아직 반대했다. 일본은 민비의 새조정도 곧 대일화친정책을 쓰지 않는데 조급해서 군함 운 양호(雲揚號)를 비롯한 일곱척의 군함과 육천명의 군대를 가지고 강화도로 몰려왔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시위로 통상조약을 강요할 계획이었다. 그들 은 강화도 해협의 수심(水深)을 측량하고 부근의 육지와 섬도 조사했다. 고종 십이년 팔월 이십일일에 일본 함대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 바다에 머물고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井上) 제독(提督)이 수십명의 해군을 거느리고 연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이 초지진(草芝鎭)에 있는 우리 수비병진지의 포대(砲臺)에까지 접근하자, 도민들과 수비병은 깜짝 놀랐다. "불란서 군대인지, 미국 군대인지 또 외국 군대가 들어왔다." 그전에 불란서 군함과 미국 국함에게 놀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복으로 된 군복을 입고 서양식 무기로 장비된 일본군대는 먼눈으로 봐서는 서양군대 같았다. 포대의 수비병이 나가서 그들에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왜 우리나라에 무단으로 침범하느냐.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 냐?"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작고, 조선 사람과 얼굴이 비슷한 황색인(黃色人)들이 었다. "우리는 일본 사람이다." 하고 그들은 한문(漢文)으로 대답을 써 보였다. "일본 군대가 왜 우리 나라를 침범하느냐?" "우리는 조선과 이웃나라로서 화친할 생각은 있어도 침범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이번 상륙한 것은 청국으로 통신(通信)하려가다가 물이 떨어져서 식 수(食水)를 구하려고 왔다." 우리 병정은 곧 그 사실을 수비대 본부에 보고 했다. 포대에서는 그것이 거짓 핑계라고단정하고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일본군대는 곧 단정(短 艇)을 타고 철수했다. "우리 강화도 포대는 전부터 외국 군대를 쫓아 보낸 승리의 전통이 있다. 불란서 군함, 미국 군함도 보기 좋게 격퇴시킨 우리다. 네까짓 일본 군함 쯤 문제냐?" 하고 그들을 통쾌히 비웃었다. 그러나 그런 장담도 순간에 지나지 못했다. 일단 본함(本艦)으로 돌아간 그들은 우리 포(砲)보다 굉장한 성능이 강한 거탄(巨彈)을 퍼붓고 반격해 왔다. 이 일본 군함 운양호는 초지진 포대를 파괴하여 침몰시킨 후에 유유 히 함수(艦首)를 돌려서 영종진(永宗鎭) 포대에 맹공격을 가했다. 영종진 포대에서는 응전했으나 당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일본군 육전대(陸 戰隊)가 상륙, 공격을 감행해서 살육과 방화와 약탈을 감행했다. 영종진 진지에 있던 수비병 오백명 중 사령관인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이하고 풍지박산으로 도망치고, 삼십오명의 전사자와 십육명의 포로라는 큰 희생 을 내었다. 그리고 대포 삼십육, 화승총(火繩銃) 백삼십개를 약탈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피해는 두명의 경상자(輕傷者)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의 무기는 구식인데다, 규모가 작았으며, 수비병의 사 기(士氣)도 대원군 시대보다는 여지없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패 를 당했던 것이다. 이 운양호사건이야말로 근대국가로 개명한 일본이 우 리나라에 무력침략을 감행한 시초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으로선 일본의 불법 행동에 아무런 대책도 결정하지 못 하고 이 사건을 쉬쉬해서 일반 국민에게 숨겨 두려는 태도로 우물쭈물했 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도리어 우리에게 추궁했다. "항해 중의 선박이 담수(淡水)를 구하려고 섬에 들렸는데, 불법으로 포격 한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인도상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하는 동시에, 우호통상 관계를 맺고 친선을 하자." 이에 대해서 민비정권은 당황했다. 일본은 청국과의 교섭까지 통해서 조선 에 압력을 가했다. 그해 십이월에는 전보다도 큰 규모의 외교, 군사를 겸 한 거물급 사절단을 보내서 우리 조정을 위협했다. "화친이냐, 전쟁이냐. 둘중의 하나를 택하라. 그것도 오직 조선의 태도 여 하에 달려 있다."A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대 외교공세였다. 이 무장된 외교사절단의 명단만 보아도 일본의 비상한 관심도(關心度)을 알 수 있었다. 즉 일본은 거물급 대사(大使)를 조선에 파견해서 과거 대원군의 배외정책으로 일본에게 행한 국서불수리(國書不受理)에 대하여 무례를 추궁하고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것은 이를 계기로 국교 재개를 촉진시키기로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청국주재공사 모리 유우레이(森有禮)로 하여금 청국의 태도를 확인 하는 한편 일본주재 각국 공사에게도 양해를 구해서 사전 준비를 했다. 그 뒤에 특파 전권대사로는 육군 중장겸 개척장관 구로다 기요다까(黑田淸 隆), 부사(副使)로는 이도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심복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聲)였다. 그리고 실문진영으로는 육군소장 다네다 마시아끼(種田政明), 외무대승(外 務大丞) 미아모도 고이찌(宮本小一) 육군중좌 가바야마 지끼(樺山資紀),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 외교와 군사 전문가 를 배치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조선에 대하여 국제적인 양해 밑에 거국적인 태세로 임했으 나, 조선의 민비정권은 대외문제에 무식하고 무능해서 화전(和戰) 양단간 의 뚜렷한 정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황만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원군은 정권 만회의 기회만 노리고 울분에차 있다가 대일수교반대(對日 修交反對)라는 대의명분을 들고 민비정권에 불평을 품은 유림을 선동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그는 산 속에서 잠자던 호랑이처럼 정치 무대인 장안 의 운현궁으로 돌아와서 민비정권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림 들을 통하여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동시에 애국심을 자극하는 유언비어(流 言蜚語)도 퍼뜨렸다. 대원군이 다스릴 때는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국방비를 저축해서 외군 침략 을 통쾌하게 격퇴시켰다. 그런데 민빈정권은 미신의 굿비용으로 국고를 탕 진하고 국방을 돌보지 않았다. 무당, 판수가 호의호식하고 세도까지 부리는 반면 군대에겐 무기도 제공하 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서 싸울 충성도 기운도 없게 됐다. 그뿐 아니라 썩은 현 정권은 자기들 세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 해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 먹으려고 비밀 외교를 하고 있다. 한편 민비정권에서는 실제로는 친일(親日)보다도 오히려 공일(恐日)병에 걸려서 고민했다. 이틈을 타서 대원군이 그것을 구실로 정권을 다시 노리 려는 책동도 또한 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오래 논의했으나, 세계대세와 현재의 국력으로는 일 본과 수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위 대일완화책이 좌의정 이최응의 명의로 고종에게 건의되었다. 이최응은 대원군의 친형이었느데, 또다시 그와 정 면충돌하는 상소문을 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黑田) 일행이 현무호(玄武號)에 타고 야포(野砲) 팔문(八門)과 의장병(儀仗兵) 이백오십명으로 위신을 세우고 따로 군함 석척과 수송선 두척에 오백오십명의 병력을 싣고 부산항에 들어 왔다. 신식 무기로 장비한 병력만도 팔백명이나 되어 그들의 강경외교정 책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과 백성들은 큰 공포심에 떨었다. "우리 나라를 쳐들어 오는 일본의 선발대다. 지금의 일본은 임진왜란(壬辰 倭亂) 시대의 일본보다도 강한 서양식 군대로 개량되어 있다. 대원군 같으 면 이기건 지건 한번 싸워 볼 용기라도 있겠지만 무당에 홀린 민비로선 싸 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것이다." 외교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일본의 대사가 군대의 호 위로 왔다는 것 자체가 선전포고차 온 것으로 알고 겁을 냈다. 이런 국민 의 공포증을 대원군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민비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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