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동사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0미터 낮은 지역이라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급한 내리막길 이었으며
지형이 험악하여 강도들의 출몰이 잦은 곳이었다 합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누가복음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을 누가복음 10장은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상태라 합니다.
이렇게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갑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0:31-32에“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입니다.
“보고, 피하여, 지나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곧 제사장과 레위인은 의지적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음을
알 수가 있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율법학자가 율법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그 누구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은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서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사랑을 관념이나 이론으로 생각하며
지나쳤을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다 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실제로 만나자
보고서도 피해버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명사에 해당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해박하게 말하는 지식보다 사랑이 필요한
대상을 보았을 때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에 대하여 무수히 말했을 것이고
이론적으로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는 보고서도 피하여 지나간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던 사마리아 사람의 반응을 보십시오.
눅10:33-35절입니다.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아 사람의 구체적 행동을 성경은 몇 가지 표현으로 말씀합니다.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붓고, 싸매고, 태워,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들 모두 동일하게 강도 만난 이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보고도 못 본 척 하며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반면에 당시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멸시 천대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응급조치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면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하나님 사랑을 습관처럼 말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구체적 상황에서는 보고서 피해 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속에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거창한 이론적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난 당한자의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대상을 보았을 때 구체적 행동으로 손 잡아주려는
몸부림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을 때입니다.
여러분 한 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