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송혜교,김혜수, 탕웨이...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47)의 손을 거친 스타들이다. 최근 결혼한 김태희의 결혼식 메이크업도 정샘물 작품이다. 정샘물이 만지면 달라진다는 얘기에 '갓샘물', '신의 손' 같은 별명도 붙는다. 그녀가 특히 아끼는 작업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메이크업 브랜드까지 가진 정샘물이기ㅔ 화려한 아틀리에를 자랑하려는 줄 알았는데 '화실(畵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꿈꿔왔던 공간이자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안식처'라고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한창일 때 미국으로 미술 유학 "창조도 기초가 탄탄해야..." 해부학까지 공부 'K뷰티' 수강생 커리큘럼 미술이 필수 과목
메이크업 아티스트 정샘물(47)을 보고 있으면 고생이란 건 모르고 자랐을 것 같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나이가 보인다’는 손등에도 주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26년간 유명 스타들과 일하면서 화려한 생활에도 꽤 노출됐을 듯하다. 서울 청담동 이스트·웨스트와 롯데 애비뉴엘 매장을 운영해 직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
이 얘길 꺼냈더니 정샘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창의성의 원천은 ‘결핍’이에요. 어린 시절 누구보다도 힘들게 지냈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단 한 번도 분식집에 가거나 연예인 얘기하며 수다를 떤 기억이 없어요. 중학교 땐 등록금이 없어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매를 맞고 벌을 서야 했죠. 가난한 게 아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죠.”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나온 어머니를 따라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사회에 일찍 나와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내 연세대에서 사환으로 근무했다. 1987년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진 날, 그녀도 연세대 교정에 있었다. 키 작은 고등학생 ‘꼬마’는 최루탄이 눈앞에 떨어져 기절했다고 했다.
“그곳을 떠난 지 20년 만에 특강 초청을 받아 강연했어요. 강의 시간이 오후 4시였는데 아침 일찍 학교에 갔어요. 기분이 무척 이상하더라고요. 이 순간을 내가 기다려왔구나.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학교가 생각보다 작고, 대단해 보였던 학생들이 이젠 제 아들 같고 딸 같더라고요(웃음).”
유학을 가게 된 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정상을 누리고 있던 2006년이었다. 4년여의 기간. 그렇게 성공했는데 무슨 공부냐며 말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경쟁이 치열한 업계여서 어느 순간 명성이 잊힐 수도 있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만큼 열렬히 원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가고 싶었죠. 남편이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어요. 한국 일은 전혀 걱정하지 말라며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요. 제 시기에 학창 시절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애원하고 더 매달렸던 거 같아요. 두 다리 뻗고 잠을 잔 기억도 거의 없어요. 미술이 그만큼 저한테는 소중했기에. 그냥 보내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거든요. 지금은 안 다녀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그렇게 탄생한 공간이 지난 2014년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아트 앤 아카데미’다. 개인 미술 작업실과 그녀의 노하우를 모두 담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양성소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양한 메이크업 작업실을 가진 건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 화실(畵室)까지 두며 ‘K 뷰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미술까지 가르쳐주는 이는 찾기 어렵다.
현장을 찾으니 입구 안쪽에 길게 늘어진 복도 양쪽 벽면에 그간 해왔던 메이크업 사진과 수강생들이 그린 미술 작품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마스터 카피’라고 해서 칸딘스키·피카소·달리 등의 작품을 재해석해 그려놨다. 출입구 오른쪽 방은 그녀의 전용 미술 작업실이다. 메이크업이란 생업을 움켜쥐고 있지만, 미술이란 꿈을 삶의 반경 중심에 두고 있다. “메이크업이 제 인생의 밑그림이라면 그림은 ‘인간’ 정샘물을 완성하는 붓 터치”라고 했다.
미국 유학 시절 외국 친구들을 제치고 ‘전체 1등’을 했다는 초상화 그림, 메이크업을 해주는 아티스트를 그린 모습 등 여러 장이 이젤 밑에 놓여 있다. 그 옆 책장엔 예술 서적, 사람 골격 상, 두상 해골, 팔레트가 겹겹이 쌓여 있다. 공간을 촬영하겠다는 말에 검정 앞치마를 바로 꺼내 입는다. 물감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라면 캔버스, 나무 화판 가리지 않는다.
“창조는 어쩌면 조금씩 비트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유학 시절 순수미술을 배우면서 해부학도 공부했어요. 4년 동안 말마따나 ‘얼굴만 팠죠’. 아티스트에겐 손이 ‘제2의 뇌’라고 생각하거든요. 얼굴과 신체 골격, 근육 같은 ‘고유의 선’을 깨닫고 나서야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거죠. 정확하고 예민한 눈으로 훈련하는데 자꾸 그리다 보면 붓이 나가는 지점을 알게 되고, 알면 보이고, 보이면 그제야 제대로 그리게 되거든요.”
아카데미에 등록한 수강생들을 위해 전문가반, 마스터반 등 총 9개월의 과정이 개설돼 있다. 최근에는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는 물론 호주, 미국 등지에서 온 외국인 수강생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면 비달 사순이나 토니 앤 가이 등 해외에서 ‘배워오는 게’ 기본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K뷰티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이다. 커리큘럼 과정 중 ‘컬러 앤 디자인’이라고 이름 붙은 미술 수업은 필수. 기초 미술을 배우고 배우지 않고의 차이가 메이크업을 현격하게 차별화시킨다는 얘기다.
그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결핍’을 즐기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겪었던 어려움이 다양한 사람에 대해 이해력을 넓히는 데 큰 도움됐다고 덧붙였다.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중요하죠. 시야가 좁으면 왜곡할 수 있어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메이크업은 살아있는 대상에 연출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얼굴을 자연스레 만질 수 있죠. 마음이 지옥이면 얼굴도 지옥이거든요. 경직돼 있거나 눈동자가 흔들리고 미간이 모여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죠. 이를 풀어줘야 메이크업이 완성됩니다. 테크닉만 살아있다고 아트가 되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 청담동에 메이크업 전문 연구 공간인 ‘아틀리에’를 열고 제품 연구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고향은 ‘아트 앤 아카데미’에 있는 ‘화실’이다. 가끔 마음이 어지럽거나 힘든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화폭을 펼쳐 붓을 잡는다. 그 뒤 명상을 하거나 기도로 정신을 달랜다.
정샘물은 3년 전 딸아이를 입양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를 통해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마스터피스(걸작)’라는 걸 다시금 느낀단다. 요즘에는 아이의 시선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재미를 키우고 있다. 익숙해 보였던 게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새롭게 보이고, 그 사이에서 창의성이 나온다. “날마다 기적이고, 절로 상상력이 샘솟는답니다.”
정샘물의 Creator’s tip
―위인전을 많이 접하라. 아티스트의 인생사와 시대 역사를 알아야 기초가 탄탄해진다. 테크닉은 그다음이다.
―결핍을 경험하라.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진다.
―보는 이의 의문을 자극하라. 한눈에 나의 수(手)가 읽히는 건 프로가 아니다.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보지 않는 데서 창의력이 길러진다.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어제와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