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선 수영장, 축구장, 숲길이 회의실이다. ‘Playground’라 이름 붙은 곳은 축구장을 콘셉트로 만든 회의실. 책상은 축구 경기장, 의자는 축구 선수 유니폼 모양에 관중석도 있다. ‘Pool’이라 이름 붙은 회의실은 수영장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레인이 그려진 파란 타일 바닥 위에 투명 플라스틱 책상과 의자가 놓였다. ‘산책’은 제주 사려니숲길을 모티브 삼았다. 숲속에 놓인 자작나무 테이블은 정적이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톡톡 튀는 감성으로 무장한 곳, 여느 신생 IT 기업이라면 어쩌면 식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71년 된 제조업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2013년 충북 청주 오송생명과학단지에 문을 연 샘표식품의 ‘우리발효연구중심’. 우리 장과 발효 식품을 전문 생산하는 샘표식품의 연구소다. 1946년 창립한 샘표식품은 국내 최장수 상표(1954년 등록번호 362호)인 ‘샘표’ 하면 떠오르는 간장부터 된장, 고추장 등 우리 고유의 장맛을 3대째 지켜온 장수(長壽) 기업이다.
서울 필동 본사와 경기도 이천·충북 영동 공장에 흩어져 있던 연구 시설이 우리발효연구중심이 세워지면서 한곳으로 모였다. 전체 직원 750명 중 연구원 150여 명이 이곳에서 근무한다.
장(醬)이 예술을 만나다.
샘표식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우리발효연구중심’은 건물 짓기부터 창의적 공간 꾸미기가 우선 과제였다. 열쇠는 ‘갤러리 프로젝트’였다. 건축가,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참여해 회의실과 복도, 로비를 갤러리로 만들었다. 서울 창동 공장의 오래된 벽돌 굴뚝을 화분으로 재현한 ‘기억을 기록하는 화분’(장윤규), 곰팡이를 키울 때 사용했던 틀로 만든 ‘Ferment’(김기철) 등 회사의 역사를 담은 작품 등으로 꾸민 상상력 가득한 공간들을 오가며 연구원들은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한다.
샘표식품은 2011년 이미 ‘아트 팩토리 프로젝트’로 공장이라는 공간의 틀을 깼다. 국내 최대 간장 공장인 이천 공장 외벽은 작가들이 공공 미술이라는 새 옷을 입혔다. 회색빛 공장에선 직원들이 경직될 수밖에 없다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예술을 공장에 끌어들였다. 갤러리 프로젝트는 그 연장선이다.
잔디 공원으로 꾸며진 로비 쉼터와 그릴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질러 놀이터, 아늑하게 꾸며진 카페테리아, 컨테이너로 만든 개폐식 강당까지 작품 외에도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쉬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가득하다. 식품안전연구센터 신춘미(48) 연구원은 “이곳에선 연구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쉬면서 생각할 수 있다”며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갖춰졌다”고 했다.
오래된 회사의 오래된 미덕, 재입사 제도
공장, 연구소의 틀을 깬 것처럼 일하는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려는 시도는 다양하다. 사무실은 스마트 오피스로 변신했다. 고정된 좌석을 없애고 누구나 매일 원하는 자리에서 일할 수 있는 ‘핫데스크(Hot Desk)’제도를 도입하고 이동에 제한 요소가 됐던 선도 없앴다. 직급이나 업무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일하며 자유롭게 소통하는 수평적 문화는 일상이다. 연구개발4팀 정문경 연구원(26)은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 연구원이라는 호칭을 쓰고 신입 사원이라도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존중해준다”고 했다.
‘칼퇴근’은 물론 휴가 쓴다고 눈치 볼 일이 없단다. 아예 회사에서 노는 날도 만들어줬다. ‘펀데이(Funday)’는 팀마다 분기별로 공식적으로 놀 수 있는 날로 회사 지원(1인당 3만원)을 받아 여행, 놀이공원 나들이, 영화 관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날리며 팀워크를 다진다. 제대로 ‘잘’ 놀면 회사에서 상도 준다. 연차가 부족한 동료에게 내 연차를 나눠주는 ‘휴가 나누기’ 제도까지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재입사 제도’. 생산기술팀 함창식(64) 연구원은 2011년 정년퇴직 후 재입사해 올해로 38년째 근무 중이다. 정년퇴직 후 촉탁직으로 재입사할 수 있는 제도 덕이다. 함 연구원은 “회사가 내 연륜을 인정해주고 일할 기회를 준 만큼 현직으로 일하며 후배들에게도 노하우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매년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식품회사답게 요리 면접에 젓가락 면접까지
채용정보
샘표식품은 매년 하반기 공개 채용으로 신입 사원을 선발한다. 서류전형과 인적성검사, 면접전형을 통해 연간 40~50명을 신규 채용하고 있다. 모든 전형에서 지원자의 나이, 성별, 학교, 출신 지역 차별은 없다.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직무에 지원할 수 있으며 공인 영어점수도 필수가 아니다.
샘표에 들어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특이한 면접이 있다. 서류전형과 인적성검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은 ‘요리 면접’과 ‘젓가락 면접’이라는 이색 면접을 치르게 된다. 기업 철학과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인재를 찾기 위한 샘표식품만의 묘수(妙手)다.
2000년부터 도입된 요리 면접은 “식품회사 직원으로서 요리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는 박진선 대표이사의 지론에서 시작됐다. 그렇다고 요리 실력을 보는 건 아니다. 4~5명이 팀을 이뤄 함께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태도와 인성, 리더십, 팀워크가 평가 기준. 나이, 학번을 내세우며 위계질서를 강요하거나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얼굴을 붉히거나 입을 닫는다면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다. 한 지원자는 튀김 요리를 하다가 뜨거운 기름이 쏟아지자 당황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냅킨으로 침착하게 기름을 닦아내는 모습으로 호평받아 최종 합격했다. 경력 2~3년 차 사원들이 면접관으로 참여하는 것도 특징. 연령대가 비슷하고 요리 면접을 경험했기 때문에 지원자의 태도와 인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2013년부터 신입 사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젓가락 예절을 가르쳐온 샘표식품은 2017년 신입 사원 공채에 아예 젓가락 면접을 도입했다. 우리 고유의 식문화를 연구하는 식품회사인 만큼 우리나라 기본 식사예절인 젓가락 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 젓가락 면접은 지원자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옮기는 모습을 관찰한다. 젓가락 사용 기술이나 속도보다는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