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계곡에서 내는 허무의 소리를 못 듣겠다 잎 다 지고 열매 다 퍼주고 할 일 마친 나무들이 내는 소리, 그 몸 속엔 기쁨보다 더한 쓸쓸함이 들어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로 어느 날은 풍요를 짓더니 오늘은 가난한 햇살들을 모아 허무를 굽고 있다
빈 나무 아래 누우면 발 밑 그림자를 황금목걸이 마냥 꿰차고 스치는 햇빛 몇 점과 이승에서 맨 처음 터트린 꽃과 그 열매들의 환희 섞인 눈물이 뚝뚝 지면서 아릿한 추억으로 번져 가는 이 고요를 나는 어쩌지 못한다 슬픔도 닳아 슬픔인 줄 모르고 기쁨도 낡고 삭아 기쁨인 줄 모르는 그저 무한량의 적막전(寂寞殿)에 들어 허무나 맛나게 씹어볼 뿐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축복을 받는 몸이다 산아래 별빛 달빛까지 비껴 가는 아주 깜깜한 밤중에 낙엽 덮인 산 속을 걷고 있음으로 해서 낙엽 밟힌 소리가 내 인생의 여분의 길처럼 사각사각 희망의 소리를 구워 앞서 들려주는 걸 당장은 내 기도에 대한 기꺼운 화답인 것임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