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thina Robe-offering Ceremony: Historical and Spiritual Significance
October 1997
Venerable Dhammasami
Today we have been engaged in a series of programme that are part of Kathina robe-offering ceremony. It is important that we understand about what we are doing ? in this particular case, about Kathina ceremony; to be aware of some thing we are undertaking is Buddhist way of doing things which is technically called Right Understanding. There is more chance for Right Understanding when Right Mindfulness is present.
오늘날 우리는 카띠나(Kathina) 가사 공양 의식의 일부가 되는 일련의 행사를 거행한다. 이 특별한 행사인 카띠나(Kathina) 의식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즉,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불교 용어의 '올바른 이해'에 해당하는 덕목을 실천하는 불자(佛者)의 방식이다. 올바른 마음챙김이 할 때 올바른 이해를 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So today it is nothing but appropriate for us to reflect on the practice of Kathina ? the Theravada traditional robe-offering ceremony.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테라와다 전통의 가사를 공양하는 의식인 이 카띠나(Kathina)를 거행하는 것에 관해 숙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The word 'Kathina' is Pali in origin. It means a frame used in sewing robes those days in India. However, before we talk about this Kathina let us look at some other monastic practices related to it so that we can understand Kathina ceremony in a broader perspective.
카띠나(Kathina)라는 단어는 팔리어 기원이다. 그것은 인도에서 그 당시 옷을 꿰매는데 사용된 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카띠나(Kathina)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의식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와 관련된 불교 행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PRACTICE OF RETREAT
Kathina ceremony is necessarily a monastic one, supported by the generous devotees. It is essentially connected to the three months retreat that ends on 16th this month. (October, 1997)
안거
카띠나(Kathina) 의식(儀式)은 필수적인 뷸교 의식(儀式)으로, 인심후한 보시자들에 의해 후원을 받고 있다. 그것은 10월 16일(1997년 당시)에 끝나는 석 달간의 안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We need to discuss about Buddhist Monastic Retreat as a background before we actually take on Kathina issue. Buddhist retreat came into existence as a result of complaint made by the people. Jaina monastic order was already practising this Vassana Retreat practice before the Buddha made His follower Bhikkhus do the same. The people expected monks, both Buddhist and non Buddhist, to stay in one place at least for a certain period. They complained that the monks were moving from place to place all the time without a permanent dwelling. During rainy season, the monks did damage the plants and crops. The Jaina monks and other mendicants observed a treat during rainy season staying in one place for a period. People were wondering why the disciples of the Gautama Buddha did not do so.
본격적으로 카띠나(Kathina) 의식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불교 사원의 안거를 그 배경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안거는 사람들이 불평을 한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이나 교단은 이미 와사나(Vassana) 안거를 실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붓다가 그의 제자들인 비구승들에게(Bhikkhus) 그와 같은 것을 하도록 하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불교도이건 비불교도 이건 간에 수도승들이 적어도 일정한 기간 동안 한곳에 머물러 주기를 바랬다. 그들은 수도승들이 영구적인 거주지 없이 항상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닌다고 불평했다. 우기(雨期)동안, 수도승들은 식물과 농작물에 손상을 입혔다. 자이나승들과 탁발승들은 우기동안 한곳에 일정 기간을 머물며 안거를 지켰다.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This prompted the Buddha to lay down a rule that Buddhist monks should observe Retreat and stay in one place for three months. People wanted them to do that during rainy season and it became known as Rainy Retreat (Vassana). But strictly speaking the three months retreat can now take place at any season ? maybe in winter or summer, although almost all have been observed during rainy season according to meteoric calendar in India.
이로 인해 붓다는 불교 승려들도 안거를 지켜 석 달동안 한 곳에 머물러야한다는 규칙을 정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우기(雨期)동안 안거를 나기를 원했고, 이러한 연유로 그것은 우안거(와사나Vassana)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세 달 동안의 안거는 이제 여름이든 겨울이든, 어느 계절에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안거는 유성(流星)으로 계산된 인도 달력에 따라 우기(雨期)에 지켜진다.
The period is the same ? three months. This practice has been mostly observed during rainy season because the people wanted the monks to do so in ancient India ? that is mainly, as I said earlier, for agricultural reason.* There were no high ways during the Buddha's time. One had to across farm lands to travel. Therefore, this practice has its relevance in that 6th century BC Indian society.
이 기간은 똑같이 석 달이다. 이 행사는 일반 사람들이 승려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고대 인도에서는 대부분 우기에 지켜졌는데,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주로 농사에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다. 붓다 당시에는 전용도로가 없었다. 사람들은 농장 지대를 지나 다녀야 했다. 그러므로, 이 행사는 그러한 기원전 6세기의 인도 사회와 관련이 있다.
Nevertheless, even in India at that time the approval of the three months retreat practice was by no means limited to the agriculturists. It was seen as a means to spiritual progress as well. That was why during the time of the Buddha itself, Bimbisara, the King of Magadha sent an envoy to the monks asking them to come and observe a retreat in his kingdom. But it happened to be in summer and the monks first didn't accept it. Instead they referred it to the Buddha, who then relaxed the rule by adding that a monk could make a retreat during summer provided it is the wish of the ruler of the land. Therefore, the monks can also observe this practice of retreat in any other seasons other than rainy one if there are circumstances we have just described.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인도에서조차 석 달 동안의 안거를 찬성하는 것은 결코 농경민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정신적인 진보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이유로 붓다 시대 당시에도, 마가다국의 왕인 빔비사라(Bimbisara)는 승려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그들에게 그의 왕국에 와서 안거를 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그때가 여름이어서, 승려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 문제를 붓다에게 아뢰었고, 붓다는 그때 규칙을 완화해서 만일 그 지역의 통치자가 원한다면, 승려들은 여름동안 안거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그러므로, 승려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되면, 우기(雨期)가 아닌 다른 계절에도 또한 위와 같은 안거를 할 수 있다.
Before this rule was there, the monks including the Buddha Himself travelled around the year and they still did so for nine months after the rule was laid down. Travelling and meeting people at different places is a kind of missionary life that the Buddha envisaged. It helps the monks not to be attached to dwelling places and people. It enables them to render their service to as many as possible.
이러한 규칙이 있기 전에, 붓다 자신을 포함한 승려들은 일년 내내 유행(遊行)을 하였으며, 그들은 그 규칙이 정해진 후에도 아홉 달 동안에는 여전히 그랬다. 유행(遊行)하며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붓다가 염두에 둔 일종의 포교 활동이었다. 그것은 승려들이 주거지와 사람들에게 집착을 갖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승려들이 가능한 한 많은 봉사를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It frees them from a huge burden of constructing, maintaining and developing a big temple or monastery. It helps the teachings to spread everywhere as they travel. Travelling made them encounter with different cultures. It gave them an understanding of real nature of life. Roaming around empowers them to endure hard life. When you have to move from one place to another almost all the time, you do not gather things. You start gathering things only when you have the idea to settle. Since they wander most of the time their way of thinking, their attitude towards life and their spiritual practices are very pragmatic, realistic and are based on facts.
그것은 승려들이 거대한 절이나 사원을 짓고 유지하고 증축하는데 따른 큰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다니는 모든 곳에 붓다의 가르침이 전파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유행(遊行)을 하며 승려들은 여러 문화들과 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삶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생활은 그들에게 힘든 생활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다. 여러분이 거의 언제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한다면, 여러분은 물건을 모으지 않을 것이다. 정착할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물건을 모으기 시작한다. 승려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삶의 태도, 그리고 정신적인 수행은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고, 사실에 토대를 두고있다.
You can see now some development was taking place in monastic life. With this Rainy Retreat (Vassana) practice coming along, the monks got a bit comfortable shelter. The devotees who approach them can enjoy the opportunity of learning the Dhamma from the monks: they have regular and appropriate receivers in performing their act of generosity. Therefore, the benefit of the three months retreat is mutual. (Samyutta Nikaya)
이제 우리는 승단 생활에 어떤 발전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된다. 이러한 우안거(Vassana)와 더불어, 승려들은 다소 안락한 거처를 얻게되었다. 그들에게 오는 보시자들은 승려들로부터 법(法;Dhamma)를 배울 기회를 누렸다. 즉, 그들은 보시를 할 때마다 정기적이고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석 달 동안의 안거의 이익은 상호적인 것이다.(사뮤따 니카야; Samyutta Nikaya)
I think that with the introduction of this Vassana practice, Buddhist monastic life came to balance its way of life. Brahmanism has secular lay life as its core while Jaina monastic life encouraged no shelter whatsoever such as a place for three months retreat. Buddhist Vassana practice could be viewed as middle way in this context.
나는 이 우안거(Vassana)의 도입과 더불어, 불교 승단 생활이 균형 잡힌 생활방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브라만교(Brahmanism)는 그 핵심으로서 세속주의를 생활 방식으로 삼았고, 반면 자이나 교단 생활은 석 달간의 안거를 위한 장소와 같은 어떠한 거처도 마련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았다. 불교의 우안거는 이러한 맥락에서 중도라고 간주되어질 수 있다.
A monk can choose his own time to start Rainy Retreat. There are two commencing dates different from one another exactly a month. But he is entitled to receive Kathina-civara (Kathina-robe) only if he starts his retreat with an earlier date ? not the later one. This is quite important condition required of a monk to be entitled to Kathina-robe. Within three months retreat he must not break the rule of retreat by spending nights somewhere else without a valid reason consented in the Vinaya (Buddhist Monastic Disciplinary Rules). If there is emergency reason to travel, he can do so even during the retreat.
승려는 우안거를 시작하는 시기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한 달 안에 시작하는 날짜가 서로 다른 두 개가 들어있다. 그러나 둘째 번이 아닌, 오직 앞의 날짜에 안거를 시작해야만 카띠나-시와라(Kathina-civara;까띠나 가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이것은 승려가 가띠나 가사를 받을 자격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필수조건이다. 석 달의 안거 기간 동안, 그는 위나야(Vinaya;불교 승단의 계율)에서 인정한 합당한 이유가 없는 여타 장소에서 밤을 보냄으로써 안거 계율을 어겨서는 안 된다. 만일 길을 떠나야 할 긴급한 일이 생기면, 안거 동안에도 그렇게 할 수는 있다.
To make the offering of robe especially valid as Kathina-civara these rules are much essential. Failing to comply with either of the two conditions will affect the validity of Kathina-robe. Invalid Kathina-robe, of course has more to do with the monks than the devotees. Though the devotees got the same merits whether the Kathina-robe is considered valid or not, the monks will lose the advantages associated with Kathina.
가사 공양이, 특히 카띠나-시와라(Kathina-civara)로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 이러한 계율은 매우 필수적이다. 두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 가띠나 가사의 유효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유효하지 못한 까띠나 가사는 보시자보다는 승려와 더 관계가 있다. 비록 보시자들은 가띠나 가사가 유효성이 있다고 간주되든 아니든 간에 동일한 공덕을 받겠지만, 승려들은 카띠나에 관련된 공덕을 잃게 될 것이다.
It means they will get the robe but he can not enjoy five relaxations on Vinaya that come necessarily with the validity of Kathina procedure. Once being offered a valid Kathina-robe in this way during this particular one month's time the monks can remain without following five of the 220 disciplines ? known as 'Vinaya Sikkhapada' for four months starting exactly a month after the end of the retreat. This is something about Retreat which is a precondition to Kathina-robe offering.
이는 승려들이 가사를 받지만 유효한 까띠나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위나야에 관한 다섯가지 면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이 특별한 한 달 동안 유효한 까띠나 가사를 제공받으면 승려들은 안거가 끝난 후부터 시작해서 네 달 동안은 '위나야 시까파다(Vinaya Sikkhapada)라고 알려진 220계 중에 다음의 다섯 가지 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것이 카띠나 가사 공양에 전제조건인 안거에 관한 내용이다.
INVITATION CEREMONY
The second important procedure that must be done before Kathina ceremony is Invitation Ceremony (Pavarana). This is again purely monastic practice.
청죄식(請罪式)
까띠나 의식(儀式)에 앞서 행해져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절차는 청죄식(파와라나;Pavarana)이다. 이것 역시 순수한 승려들의 행사이다.
Invitation means at the end of retreat the monks must get together and invite one another to point out at one's fault if they have seen it themselves or have heard from some one or are just in doubt. This would help them in purifying themselves. A Bhikkhu has to be open to any criticism from his colleagues regarding his behaviour. He can not say, "Is it your business?" or "This is my life".
청죄(請罪)는 안거 마지막에 승려들이 함께 모여, 만일 그들이 직접 보았거나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혹은 단지 의심이 드는 잘못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지적해달라고 서로에게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구(남승;Bhikkhu)는 그의 행위에 관해 동료들이 어떤 비판을 해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Being open was a way of life the Lord Buddha led. The monks have to be sensitive to a complaint made by the people in order to win their respect and in order to encourage them to learn the Dhamma. They have to be sensitive towards the remarks made by their fellow monks. This, according to the Buddha, could maintain both unity and purity in the Buddhist Monastic Order. It could also help keep the Monastic Rules and Regulations (Vinaya) alive. It is a kind of check-and-balance system between individual Bhikkhus as well as between the seniors and the juniors. This is exactly the core of Monastic Discipline as much as of the Teachings.
열린 마음은 위대하신 붓다의 삶의 방식이었다. 승려들은 일반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법(法;Dhamma)을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의 불평을 잘 들어야한다.
그들은 동료 승려들의 비평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붓다에 의하면, 이로 인해 불교 승단은 일치와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승단의 계(戒)와 율(律;Vinaya)이 실효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장로들과 후배 승려들 사이뿐만 아니라 승려 개개인들 사이에 일종의 점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체계이다. 이것이 가르침의 핵심만큼이나 중요한 승단의 핵심이기도 하다.
Every fortnight there has to be a meeting between the higher ordained ones, known as Bhikkhu (monks) or Bhikkhuni (nuns) in the case of ordained female. In that kind of assembly, a learned monk recites the 220 rules to the monks. Before he recites there has to be a procedure of confession, which means every individual has to inform the Sangha of the offense he has committed.
비구(남승;Bhikkhu) 그리고, 여성이 수계를 받았을 경우 비구니(여승;Bhikkhuni)라고 불리는, 높은 단계의 성인 수계를 받은 승려들은 이 주일마다 모임을 가져야 한다. 그 모임에서, 학식이 있는 승려는 220계를 승려들에게 암송한다. 그가 암송을 하기 전에, 참회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모든 승려들은 자신이 범한 위반행위를 상가(Sangha;승단)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This kind of confession can clear him from 203 kinds of offenses out of 220. Confession can psychologically relieve someone who has committed a grave evil like patricide. The story of King Ajatasattu who killed his father is an example. He could not sleep until he confessed his sin to the Buddha. Confession did not put his sin away but practically relieved him from psychological burden.
이러한 종류의 참회는 220 계 중에서 203 가지의 위반을 사면해 줄 수 있다. 참회는 친부(親父) 살해와 같은 중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적인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아자타삿투 (Ajatasattu) 왕의 이야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붓다에게 참회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을 잘 수 있었다. 참회는 그의 죄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심리적으로 고통을 완화시켜준다.
In being open to others the Buddha Himself was the best example. At every fortnight meeting the Lord Buddha would start inviting anyone present there to point out His fault if any. He encouraged people to be open making Himself the subject of openness. That must be the reason why people felt so close to Him. They did respect Him for a reason. They spoke so openly their opinion to the Buddha. They knew well that the Buddha did not take their offense.
다른 사람들에게 숨김없이 솔직함에 있어서 붓다 자신은 훌륭한 전형(典型)이었다. 이주마다의 모임에서 위대하신 붓다께서는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해 달라고 거기에 참석한 누구에게나 맨 먼저 청하곤 했다. 붓다는 자신을 숨김없는 솔직함의 시험대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이 되도록 장려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붓다에게 매우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이유로 붓다를 존경했다. 그들은 붓다에게 그들의 의견을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붓다가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Venerable Sariputta, the most important figure apart from the Buddha would ask the monks to point out his fault too. In this way, the invitation was to be offered by any monk present. Actually, what we call Arahat means the one who has no longer secret. He is perfectly open to anyone especially regarding his behaviour.
붓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사리풋타(Sariputta) 존자(尊者) 역시, 승려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청하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청죄(請罪)는 참석한 승려는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실재로, 이른 바 아라한(Arahat)은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특히 자신의 행위에 관하여 누구에게나 완전히 공개되어 있다.
The Buddha wanted His disciples, at least those who have been ordained, to be as close as possible in their spiritual quest helping one another along the way. The only way of doing it and maintaining it is to practice to become increasingly open to each other that we no longer have anything to hide. Public morality can be maintained in this way. Therefore, we can say that monastic life is where one has least privacy.
붓다는 제자들이, 그들은 적어도 수계를 받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정신적인 탐구에 있어서 서로 사이좋게 도와가며 가능한 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는,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에게 점점 더 솔직해지게 되는 의식을 행하여 더 이상 숨길 것이 없게되는 것이다. 승단의 도덕성은 이런 식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승단 생활은 사생활이 최소화 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This Invitation Ceremony is so important ceremonially as well as spiritually. Without this there can not be a proper Kathina robe-offering ? it may become only ordinary robe-offering with whatsoever no advantage on the part of the monks themselves.
이 청죄식(請罪式)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유효한 카띠나 가사 공양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승려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덕도 없는, 단지 평범한 가사 공양이 되어 버릴 것이다.
The two ceremonies ? the Ceremony of Invitation and that of Offering Robe ? mark the termination of the Retreat.
청죄식(請罪式)과 가사 공양 의식, 이 두 의식(儀式)으로 안거는 끝을 맺는다.
KATHINA CEREMONY
Now let us pick up our main topic 'Kathina'. We may well imagine a situation during 6th BC where any advanced textile technology hardly known to the people. The monks had no choice but to do the sewing the robe and giving it a dye themselves. The Buddha asked them to help one another using the best technique then available. Some made a frame while some went out in search of needle and thread.
가띠나(Kathina) 의식(儀式)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카띠나(Kathina)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발전된 직물 기술이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승려들은 스스로 가사를 짓고 그것을 염색할 수밖에 없었다. 붓다는 승려들에게 그 당시 채용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이용해서 서로 도우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마름질을 하고, 그 동안 어떤 이들은 바늘과 실을 찾으러 다녔다.
Some sew pieces of clothe to make it a robe while others prepared for another process of making fire and getting a suitable colour ready. Dying a robe was extremely difficult because they had to boil the bark of the tree to get the colour they wanted. Just imagine how the monks were busy to get a robe done. It was a hard life collecting pieces of cloth from different places such as rubbish -heap, cemetery, and streets to get it sufficient for a robe. Ordinary life was at that time reasonably hard especially regarding clothes; the monks were no exception; they had to struggle for a robe.
어떤 이들은 천 조각을 바느질해서 가사를 만들고, 그 동안 다른 이들은 불을 지펴 알맞은 색상을 얻는 또 다른 과정을 준비했다. 그들이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나무 껍질을 끓여야 했기 때문에, 가사를 염색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가사를 한 벌을 만들기 위해 승려들이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상상해봐라. 가사를 지을 충분한 옷감을 얻기 위해 쓰레기 더미, 묘지 그리고 거리와 같은 여러 장소에서 천 조각을 모으는 것은 힘든 생활이었다. 일상 생활은 그 당시에 당연히 힘들었으며, 옷감을 구하는 것에 관해서는 특히 그랬다. 승려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은 가사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했다.
But this became a kind of practice that trained monks to depend on themselves, to live in simple way creating no burden to the lay community and to be content with basic needs.
그러나 이것은 승려들이 자립해서 재가자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살며 기본적인 필수품으로 만족하도록 훈련하는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Though we could say that this practice would reflect the economic reality in India those days, when the Lord Buddha declared this practice it was automatically adopted as a social norm among the followers. Those monks with well-to-do family and royal family background were no exception. They all adopted the practice. As we all know the majority of the immediate disciples of the Buddha came from either royal families or families of noble background They were in comfort to ignore this practice of making a robe in such a difficult process. Instead, they took it as a way of life with a great honour. This humbleness and contentment clearly indicate high spiritual achievement.
이 관례는 그 당시 인도의 경제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위대하신 붓다께서 이 관례를 선포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불자(佛者)들의 사회적 준칙으로 채택되었다. 부유한 가문과 왕족 출신의 승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관례를 따랐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붓다의 직제자들 중 대다수가 왕가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가사를 만드는 이 관례를 무시한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이 관례를 매우 영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겸손함과 자족(自足)은 높은 정신적인 성취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The Buddha recommended this practice to be observed at the end of the Retreat because monks can still be found in a large number in one place at this time and they could help one another.
붓다는 안거가 끝날 때 이 관례를 지킬 것을 권장했는데, 이 때가 많은 승려들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서로 도와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Once entitled to Kathina-robe, a Bhikkhu is permitted to ignore some five minor rules. The relaxation is mainly felt on travel and invitation for alms-giving. Normally a Bhikkhu, senior or junior has to inform his fellow Bhikkhu living in the same temple before he goes out. He can choose not to do it when he has received Kathina-robe.
일단 카띠나 가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지면, 비구는 다섯 가지 사소한 계율을 무시하는 것이 허용된다. 면책은 주로 유행(遊行)과 탁발(托鉢)에 관한 것이다. 대개 비구는 장로든 후배 승려든 같은 절에 사는 동료 비구에게 외출하기 전에 그것을 알려야 한다. 카띠나 가사를 받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Usually he has to carry all the three pieces of robe wherever he goes. He can now leave one behind if he wishes after he has been offered Kathina-robe. He certainly has less restriction on travel. He can also accept as many robes if offered during the period of four months. Monks on the usual occasions are not supposed to accept food offered by someone using the terms of layman culture, the words normally employed by people in their social interaction. But once offered Kathina-robe(s) a Bhikkhu can receive such food given to him in that way.
대개 승려는 어디를 가든지 세 벌의 가사를 모두 지니고 다녀야 한다. 카띠나 가사를 받은 후에는 원한다면 한 벌은 남겨둘 수 있다. 그는 확실히 유행(遊行)을 하는데 덜 제약을 받게된다. 그는 또한 네 달 동안에는 보시하는 모든 가사를 받을 수 있다. 평소에 승려는 재가자 문화의 용어, 즉 재가자들이 사교 활동을 할 때 평상시 사용하는 말로써 공양을 올린 음식은 받지 않게 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카띠나 가사를 받으면, 비구는 그런 식으로 그에게 공양된 음식을 받을 수 있다.
This Kathina ceremony is, as far as I can see, recommended by the Lord Buddha mainly for the welfare of the Sangha (the Community of monks). The Lord Buddha did take into consideration how the Order He founded could survive. After the Mahaparinibbana (the Great Passing Away) of the Buddha Himself, the whole responsibility of both perpetuation and propagation of His Teachings would certainly fall on the Sangha.
이 카띠나 의식은, 내가 아는 한, 주로 상가(Sangha;승단)의 복지를 위해 위대하신 붓다께서 권장한 것이다. 붓다는 그가 세운 승단이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붓다 자신의 마하파리닙바나(Mahaparinibbana;대열반)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영구히 보존하고 전파하는 모든 책임은 당연히 상가(Sangha;승단)에게 떨어졌다.
Therefore, the continuity of the Sangha means the continuity of the Dhamma itself. Moreover, after His Mahaparinibbana, we could see the Buddha Himself only once we see, understand and realise the Dhamma. This was the case even when the Buddha was still alive for He declared that one really sees Him only once one sees the Dhamma. Now we can see the logic behind the recommendation of this Kathina ceremony ? how it is important for the cause of Buddhism itself.
그러므로, 상가(Sangha;승단)의 지속은 법(法;Dhamma)의 지속을 의미한다. 더구나, 붓다의 마하파리닙바나(Mahaparinibbana;대열반) 이후, 우리는 우리가 법(法;Dhamma)을 보고, 이해하고, 깨달을 때에만 붓다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붓다가 살아있을 때, 그가 오직 법(法;Dhamma)을 보는 자 만이 붓다를 진정으로 볼 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카띠나 의식의 권장 뒤에 놓여있는 논리와 그것이 불교의 목적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The Buddha did not start preaching to every one before He had had the Monastic Order well established. After His Enlightenment, He made a long journey to Benares ? a journey that took Him more than a week ? just to convert a group of five ascetics and made them a monk. He knew very well that all the five had a very high possibility of becoming a monk and forming the Order.
붓다는 그가 승단을 잘 설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깨달음 이후, 붓다는 베나레스(Benares)로 오랜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은 일 주일이 넘게 걸렸고, 단지 다섯 명의 고행자를 개종시켜 그들을 승려로 만들었다. 붓다는 그 다섯이 모두 불교 승려가 되어 승단을 형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He continued focusing on establishing the Order until He became confident that the Order has been well established and was capable of helping Him to propagate the Dhamma. His teachings spread far and wide after He passed away. Despite the fact that the Buddha was no longer with us, the geographical expansion still took place in a greater scale. The Buddha Himself would have definitely foreseen this great service of His disciples that He put a lot of effort to establish the Monastic Order (Sangha).
그는 승단이 성공적으로 조직되어 법(法;Dhamma)을 전파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승단을 설립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가르침은 그가 열반에 든 이후에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파되었다. 붓다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파의 지리적 확산은 더 큰 규모로 일어났다. 붓다 자신은 그가 승단(Sangha)을 조직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당시의 제자들이 이러한 전파에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예견했던 것이다.
The Monastic Order was firmly established when the Buddha had ordained sixty men ? all of whom came from either royal family or that of nobility. Missionary work in its true sense started only then with sixty deputies, despatching them to different directions asking two not to go in the same way.
승단은, 붓다가 60명을 수계했을 때 확고하게 조직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왕족이거나 귀족 출신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포교활동은 그들 60의 제자들과 더불어 시작했을 때, 즉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는 가지 말 것을 당부하며 그들을 사방으로 파견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The implication here is that the existence of the well-established monastic order is extremely essential if we are about to get the teachings of the Buddha across the people. The Arahat Mahinda simply had this in mind when he told King Devanam Piyatissa of Sri Lanka (3rd BC) that the Sasana (Buddha's Dispensation) will get rooted on Sri Lankan soil only when a Sri Lankan native monk has become well versed in Monastic Rules (Vinaya).**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만일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람들 사이에 전파하려면, 잘 조직된 승단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라한, 마힌다(Mahinda)가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의 왕인 데와남 피야티싸(Devanam Piyatissa)에게 스리랑카인 승려가 승단의 계율에 정통했을 때에 비로소 사사나(Sasana;붓다의 관리지역)가 스리랑카에 뿌리를 내렸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There was a time in the West when European Buddhists used to consider that monkhood is nothing more than to set an exemplary life and to spread the words of the Buddha does not depend on the existence of Monastic Order.
서구에서는 한 때, 유럽인 불교도들이 승려의 신분은 단지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고,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은 승단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간주했던 시기가 있었다.
Let us look at this attitude carefully from Buddhist History. Let us not forget to use our common sense. History always shows that the Buddhist Monastic Order was at the core of the matter ? whether Buddhism was on the decline or progress. The monks have to share more responsibility ? sometime for the degeneration and sometime for the growth. It is in the best interest of the whole Buddha's Sasana that Buddhist Monastic Order is properly maintained, purified and well supported. The Bhikkhus dedicate their whole life to the cause of Sasana ? studying, training, meditating, preaching, and writing about the Buddha's Dhamma.
이러한 태도를 불교 역사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우리의 상식을 이용하는 것을 잊지말자. 역사는 항상 불교 교단이 불교의 흥망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승려들이 불교가 때로는 쇠퇴하고 때로는 발전하는데 더 많은 책임을 져야하는가? 불교 교단이 적절히 유지되고 청정하고 잘 지지를 받는 것은 붓다의 사사나(Sasana) 전체의 최고의 관심 속에서이다. 비구들은 붓다의 법(法;Dhamma)을 연구하고 훈련하고 명상하고 설교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저술을 하며 사사나(Sasana)의 대의(大義)에 그들의 전 생애를 바쳤다.
In this respect, we should be encouraged to see the Amaravati Monastery (Theravada Forest Tradition) and its branches doing very well with the sons and daughters of the United Kingdoms at the helm. In other European countries, the natives have not been very successful in furthering the Dhamma despite having produced several distinguished Buddhist scholars.
이렇게 보면, 우리는 아마라와티 사원(Amaravati;테라와다의 전통적인 숲)과 그 지도를 받으며 영국의 아들 딸들과 더불어 매우 잘 꾸려가고 있는 그 분원들을 볼 때 고무되어야 한다.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는, 몇몇 뛰어난 불교 학자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토인들이 법(法;Dhamma)에 나아가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In contrast, if I understand the situation correctly, the United Kingdom has been well ahead of other European countries in both academic field and monastic life. We owe a lot to the most venerable monks of true missionary spirit from Sri Lanka, Thailand, Burma and other countries that we have made our way far in this new land. I am speaking about this just to remind ourselves that the Sangha of 19th and 20th century also deserve to be called a devout and true follower of the Lord Buddha.
이와는 반대로, 만일 내가 상황을 옳게 이해한다면, 영국은 학문적인 분야와 사원 생활 둘 다에 있어 다른 유럽 나라들에 훨씬 앞서 있다. 우리가 이 새로운 땅에 불교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은 모두 스리랑카, 태국, 버마 그리고 그 새로운 땅에 우리가 이미 포교를 했던 다른 나라들 출신의 진실한 포교 정신을 지닌 존귀하신 승려들 덕분이다. 나는 또한 19세기와 20세기의 상가 역시 위대하신 붓다의 헌신적이고 진실된 불제자(佛弟子)들로 불려질 만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것을 말한다.
They ? like the late Venerable Narada of Vajirarama, Colombo and Venerable Dr. H. Saddhatissa ? should be credited for what we are here now. Venerable U Setthila (Thittila) of Burma who arrived here in England during World War II and Venerable Ajahn Chah, Thailand's best know meditation master of our time must not be forgotten for their great service rendered to the cause of Buddha Sasana in this United Kingdom.
콜롬보(Colombo; 스리랑카의 수도), 와지라라마(Vajirarama)의 고(故) 나라다(Narada) 존자(尊者)와 존경하는 에이취 삿다티싸(H. Saddhatissa) 박사와 같은 분들은 여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게된 공로를 받아야 할 분들이다. 세계 이차대전 동안에 영국에 온 버마의 우 세띨라(Setthila 혹은Thittila) 존자(尊者)와 우리 시대의 태국 최고의 명상 지도자인 아잔 차(Ajahn Chah) 존자(尊者)가 이 영국 땅에 붓다 사사나의 대의(大義)에 기여한 위대한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Together with ceaseless support on the part of the devotees, the successive Kathina ceremonies held every year in Sri Lanka, Burma, Thailand and other countries have enabled the monks to carry on their missionary work far and wide. The Kathina ceremony we are celebrating today will have the effect just as well like that.
또한, 헌신적인 불자(佛者)들의 끊임없는 후원으로, 스리랑카, 버마, 태국 그리고 여타 나라들에서 매년 행해지는 카띠나 의식은 승려들에게 그들의 포교 활동을 멀리 그리고 널리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가 오늘날 거행하는 카띠나 의식은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